소설리스트

출생흔적出生痕迹 I (13/66)

출생흔적出生痕迹 I

1

본격적인 대진이 끝났을 때, 광운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조속히 영욱성으로 귀환하라는 마용승의 전갈이었다.

그렇게 급히 돌아갔을 때, 마용승은 황당한 명을 내렸다. 궐주에 있는 황제에게 가는 사자를 호위하라는 것이었다.

광운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사자, 그것도 황제에게 가는 사자를 호위하는 것이라면 그에 관한 격식과 예절도 갖춰야 한다. 그 점이 도무지 자신 없었다.

일단 생각할 말미를 얻은 광운은 그길로 죽영루로 갔다.

죽영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한창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을 줄 알았던 광운이 불쑥 나타났으니 말이다.

“편월은 그사이 더 자란 것 같네.”

사무치는 반가움을, 죽영은 편월에 대한 인사로 표현했다. 광운에겐 당장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광운은 웃었다. 죽영이 편월을 보지 못한 건 불과 한 달 남짓이다. 그사이 몰라보게 자랐다는 건 과장된 얘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편월이 그 한 달 사이에 부쩍 성장한 건 사실이었다. 광운이야 늘 곁에서 지켜봤으니 잘 알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본 죽영의 눈엔 편월의 갑옷이 확 줄어든 게 보였다.

“배고파!”

이야기가 자신에 대한 것이었지만, 편월은 관심이 없었다. 전장에서 밤새 달려왔고, 마용승과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먹은 게 하나도 없었다. 골난 소리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맛있는 거 해 줄게.”

“맛있는 거 필요 없어. 아무거나 빨리 줘!”

편월이 조금 언성을 높였다. 이건 죽영보다는 광운을 향한 것이었다.

사실 편월은 효명성에 남아 있겠다고 했었다. 광운이 혼자 싸우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걸 광운이 묵과할 턱이 없었다. 비록 약속은 했다지만, 편월 혼자 효명성에 두고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광운은 거짓말을 했다. 마용승이 편월도 반드시 데려오라고 했다고 말이다.

그 거짓말은 마용승과 만나는 순간 탄로 나 버렸고, 그 후로 편월의 입술은 잔뜩 튀어나와 있는 상태였다.

당황해서 달래려는 죽영을 말려 주방으로 보낸 후, 광운은 편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끼리의 얘기야. 내게 화났다고 여자에게 화풀이하는 건 옳은 일이 못 돼!”

“거짓말쟁이랑은 말 안 해!”

“내가 거짓말을 했어? 난 기억에 없는데.”

“혼자 싸워도 된다고 했잖아!”

“그랬지. 단,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싸운다는 조건이 있었잖아. 그렇게 따지면 편월도 약속을 어긴 거짓말쟁이가 돼.”

편월은 대꾸할 말이 궁했다. 분명히 그렇게 약속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비긴 거야. 이제 그만 하도록 해.”

“아니야!”

달래려는 광운에게 편월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이치상으론 그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왠지 당했다는 억울함은 씻기지 않았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편월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미친 구름은 거짓말한 게 하나 더 있어. 성주는 나까지 부른 게 아냐! 그런데 뭐? 나랑 같이 오라고 했다고?”

이건 확실히 광운의 거짓말이었고, 그걸 꼬집은 편월은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그 점은 미안하다. 정식으로 사과한다.”

광운이 의외로 순순히 사과하자 편월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해야 물고 늘어질 텐데, 너무 싱거웠다.

“그런데 편월은 나와 일심동체가 아닌 모양이지?”

“일심동체가 무슨 말이야?”

광운의 질문에 편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그건 우리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뜻이야.”

광운의 설명에 편월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이건 광운으로서도 의외였다. 예전의 편월이었다면 곧바로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테니까.

“아, 역시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군. 편월은 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

“아니야!”

슬쩍 떠보는 광운의 말에 편월은 빼액 소리를 질러 부정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광운은, 광운은…….”

편월은 말을 맺지 못했다. 뭔가 그럴듯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아깐 대답하지 않았지?”

“그건 미, 미안해서…….”

“뭐가?”

광운은 짓궂게 캐물었다. 가끔은 이렇게 편월을 놀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전에 칼을 휘둘렀던 거…….”

편월의 대답에 광운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여태 그 생각을 지워 버리지 못했다는 게 사뭇 놀라웠다.

“그, 그땐 너무 이상했어. 무섭기도 하고. 사람을 죽인 게 처음도 아닌데, 그땐 너무 달랐어.”

그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편월의 어깨가 잔잔하게 떨렸다.

‘혹시…….’

광운은 저러다 편월이 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우는 걸 보지 못했기에, 안쓰러운 마음 한편에 야릇한 기대감이 감도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두 번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않을 거야!”

광운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편월은 여느 때보다 훨씬 강한 눈빛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편월이 만약 어른이었다면 저황을 죽였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겁을 먹고 다음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를, 광운은 드물지 않게 봐 왔다.

그에 비해 편월은 아직 어리다. 그만큼 두려움도, 죄의식도 어른보다는 훨씬 희박하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는 게 죄를 짓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후유증은 훨씬 짧게 끝내고 있다. 이걸 두고 폐인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도 천하의 어느 구석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당장 가까운 효명성만 해도 짙은 전운이 감돌고 있는 중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살인에 대한 죄의식 따위는 일찌감치 던져 버려야 한다.

하지만 편월에게도 그 이치를 적용할 수 있을까? 실수로 사람의 발을 밟아도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심성을 길러 주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가슴속에서 들끓는 이런 지독한 역설에 휘말려 광운은 불현듯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서른다섯…….’

왜 갑자기 나이를 의식하게 되었는지 광운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편월을 보면서 느낀 역설적 기분이 나이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많이 기다렸지? 어서 먹어.”

만약 죽영이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광운은 이 문제를 훨씬 더 길게 고민했을 터였다.

편월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 안 가득히 넣은 음식을 두 번 삼킨 후에 입을 열었다.

“유화는?”

“그렇게 이름을 막 부르면 안 된다고 했지? 누나라고 해야지!”

호칭에 대해서 이미 가르쳐 줬던 죽영이었다. 그런데도 편월이 유화의 이름을 막 부르자 조금은 따끔한 어조로 타일렀다.

“유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월은 막무가내였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광운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고 있는 판이었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새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죽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기했다기보다는, 오늘은 그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뜻하지 않을 때 돌아온 광운으로 인해 좋아진 기분을 잡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유화는 지금 글공부 중이야. 끝나면 불러올게.”

“글공부?”

이 말은 광운과 편월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죽영을 쳐다보는 것도 짜 맞춘 듯 똑같았다.

“당신이 전쟁에 나가고 곧바로 독선생을 모셨어요. 보기보다 똑똑해서 배우는 게 무척 빨라요.”

“에이, 그런 걸 해서 뭘 해? 그냥 노는 게 더 좋은데!”

“편월은 공부가 싫어?”

“응, 심심해. 가웅이도 책만 읽느라 나랑 놀아 주지도 않았어.”

“가웅이?”

죽영으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효명성 수비 장수의 아들이오. 편월, 상 공자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선 안 돼.”

“피이, 유화도 이름을 불러선 안 된다, 가웅이도 안 된다, 그럼 난 누구 이름 불러야 돼?”

말하는 편월의 입술이 심하게 삐죽거렸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광운과 죽영은 할 말을 잃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편월에게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불러선 안 된다는 얘기만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웬일이에요? 한창 전쟁 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죽영이 화제를 돌렸다. 전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혹시 광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르고…….

“황제에게 가는 사자를 호위하라고 하더군.”

“황제에게? 그래, 받아들이셨나요?”

이름뿐이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일반 백성들에겐 경외의 대상이다. 눈을 크게 뜨며 죽영은 다그치듯 물었다.

“시간을 좀 달라고 했소.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건 따르기 어려울 거 같소.”

“아니, 왜요?”

“명색이 황제에게 가는 사자를 호위하는 거요.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하는데, 난 그런 걸 모르오. 또 귀찮기도 하고.”

“안 돼요! 이건 반드시 맡으셔야 해요!”

“뭐?”

너무 격렬한 죽영의 말에 이번엔 광운이 깜짝 놀랐다.

“이유나 들어 봅시다. 왜 그걸 해야 하오?”

“지금 당장 성주를 찾아뵙고 그 일을 맡겠다고 말씀드리세요. 단, 편월을 데리고 간다는 조건으로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죽영은 제 할 말부터 해치웠다.

“글쎄, 그 이유를 들어 보자고 하지 않소?”

“편월에게 좋은 기회예요. 이번에 황제에게 인사를 해 두면, 언제고 편월에게 좋은 일로 돌아올 거예요.”

“허허허!”

광운은 그저 웃고 말았다. 당금 황제는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이리저리 유리걸식하다시피 한다. 그런 사람에게 얼굴을 알려 좋을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웃지 마세요. 언젠가 편월은 자기 성을 갖겠다고 했어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지금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려 두는 게 좋아요.”

이어진 죽영의 말엔 광운도 가슴이 뜨끔했다. 늘 전장을 떠돌아다니는 몸인지라 내일을 잊고 살았다.

물론 편월이 성을 갖겠다는 말을 한 것도 알고, 도와주겠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막연히 ‘언젠가는…….’이라는 생각뿐이었지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죽영은 보다 구체적인 방법 하나를 제시했다. 성을 갖는다는 건 한 지방의 패주가 되는 걸 의미하고, 그때 황제의 덕을 보게 될 것이란 말은 여자다운 계산이었고, 얄미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네? 반드시 그렇게 해 주세요, 네?”

다시 보채는 죽영의 말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곱씹어 볼수록 편월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소록소록 그 맛을 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얘기하지 말아야겠군.’

사실 이번 사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국혼일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걸 알리는 한편, 가겸후를 비웃어 주기 위해 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만약 이런 얘기를 죽영에게 들려준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에도 이 명을 받아들여 편월과 함께 가라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광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설사 이번 임무가 위험하지 않다고 해도 여자인 죽영에게는 얘기를 하지 않았으리란 걸 깨달은 이유였다.

“어? 편월이 왔네? 아, 안녕하세요.”

그때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유화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한 달 남짓 못 본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밝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공부는 끝났니? 선생님께 차 한 잔 대접해 드리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여기로 오실 거예요.”

마치 유화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아니, 구양 선생?”

광운이 깜짝 놀라 일어서며 예를 갖췄다. 유화의 독선생이란 사람이 다름 아닌 구양파였던 것이다.

“안녕하시오. 이번에 어려운 일을 맡게 되셨다면서요.”

구양파 역시 정중한 답례를 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문득 광운은 구양파가 얄미워졌다. 이번에 자신이 사자 호위의 임무를 맡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리라. 시치미를 뚝 뗀 표정으로 인사하는 게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장군께서 여기 기거하신다기에 인사차 들렀다가 저 아이를 맡게 되었소이다.”

“아하, 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차를 끓여 올게요.”

“차보다는 술이 낫겠구려. 술 한잔 주시오.”

“아직 낮인데…….”

“영웅과 나누는 술인데 밤낮을 따져 뭐 하겠소? 오늘 이 늙은이가 한번 대취해 보리다. 술값 아깝다 여기지 마시고, 좋은 술로 주시오.”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를 떠는 구양파의 시선은 광운이 아니라 편월에게로 향해 있었다.

“가르치실 만은 하던가요?”

죽영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가는 유화의 등을 눈으로 가리키며 광운이 물었다. 구양파가 편월에게 갖는 관심이 거리껴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워낙 영특해서요. 이 늙은이 말년에 복을 하나 얻었다 싶소이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이 아이도 한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전장으로만 떠돌다 보니 가르친 게 없습니다.”

“난 공부 같은 거 안 해!”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칠 뜻을 비치는 광운의 말에 편월은 날카롭게 반발했다.

“이렇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구양 선생께서 따끔하게 지도해 주십시오.”

“허허허!”

난처해하는 광운에 비해 구양파는 그저 자애롭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릇 나름이외다. 이 늙은이에 의해 빚어질 그릇이 있고, 오히려 망쳐질 그릇이 있소이다. 이 아이는 내가 손댈 그릇이 아니오.”

“그 말씀은…….”

광운은 구양파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결코 나쁜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닌 것 같지만, 편월의 일이고 보면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이 왜 용이겠소? 세상의 이치나 사람들의 상식에서 벗어나 구만 리 장천에서 노닐며 온갖 조화를 부리니 바로 용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소! 만약 이 아이에게 지금 세상의 이치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소? 잘되어야 이름난 무장이 되어 한 성의 주인이나 한 지방의 패주가 되는 게 고작일 게요. 이 아이는 다른 걸 공부해야 되오. 세상 밖의 세상을 알고, 인간 이상의 이념을 가져야 하오. 그래야 이 어지러운 난세로 굳어진 이치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수 있을 게요.”

“그, 그럼…….”

“난 이 아이에게서 몇백 년을 이어 온 이 전국난세의 종식을 보고 싶은 거요!”

광운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구양파가 편월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처럼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디 잘 키워 주시오. 그리고 이 늙은이가 했던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거외다. 내일의 적을 알 수 없는 오늘의 난세이고 보니…….”

그 말을 광운은 충분히 공감했다. 이 난세를 종식시킨다는 말은 온 천하에 산재해 있는 뭍 왕이나 패주들을 모두 발아래 꿇린다는 말과 같다. 만약 편월이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다면 당장 마용승이라도 그냥 있지는 않을 터였다.

“갑자기 준비한 거라 변변치 못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 안주가 무슨 상관 있겠소. 바로 이 자리에 천하의 진미가 있는데!”

너무나 호들갑스럽게 맞는 구양파의 태도에 죽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운을 쳐다보았다. ‘왜 이러냐?’라고 묻는 시선이었다.

그저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 한 후, 광운은 술병을 들어 구양파의 잔을 채웠다.

“아까 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번에 아무래도 황제에게 가는 사자를 호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는 게 전혀 없으니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광운으로서는 정말 절실한 문제였다. 이왕 맡을 것이면 제대로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준비는 송 공께서 다 하실 거고, 정사正使로는 이 늙은이의 못난 제자가 갈 거외다. 광운 장군은 그저 그들을 호송만 하면 될 거요.”

“사실 그 호송이 어렵습니다. 가겸후도 바보가 아닐진대 그런 목적으로 가는 사자를 곱게 돌려보내려 하겠습니까? 이 한 몸 죽는 건 아까울 것도 없지만, 맡은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장부로 태어난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가르침을 아끼지 마십시오!”

“염려 마시오. 가겸후는 이번 사자들에겐 절대 손 하나 대지 못할 것이오.”

“어인 연유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생각해 보시오. 가겸후가 이런 일을 꾸민 건 황제의 이름을 등에 업고 천하의 패주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오. 그런데 한 사람이 비위를 거슬렀다고 죽여 버린다면 누가 가겸후를 따르겠소? 광운 장군의 말처럼 가겸후는 바보가 아니니, 뒤가 시끄러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안심하고 유람이나 다녀온다고 여기시오.”

“흐음!”

자신만만한 구양파의 말이었지만, 광운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변변한 준비나 확실한 보장도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따진다면 겁을 먹었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니, 광운은 조용히 구양파의 잔을 채웠다.

그 후로 흥겨운 술자리가 이어지는 바람에 누구도 죽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져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토록 위험한 일인 줄도 모르고 광운에게 사자 호위의 임무를 맡으라고 했던 자신에게, 그녀는 심한 질책을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2

사자의 출발은 삼월 초하룻날이었다. 정사는 구양파의 말대로 그의 제자인 서수徐秀가 맡았고, 부사는 따로 인선하지 않고 광운이 호위 총관과 겸하기로 했다.

인원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광운과 서수가 그나마 공적인 신분을 띠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 짐을 옮기는 하인들뿐이었다.

특이한 것은 송용조의 상단商團이 일행에 가담한 점이었다. 가는 길에 장사도 하면서, 들르는 지역마다 특산품을 구입해 황제에게 진상할 물건을 조달하는 게 그 임무였다.

게다가 편월도 진상사進上使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받고 일행과 함께 길에 올랐다. 물론 광운이 우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어차피 바쁠 것도 없는 길이었다. 마용승의 전송을 받은 일행은 오시가 지나서야 영욱성의 동문을 나섰다.

“작미성엔 내일쯤에야 도착할 수 있겠구려.”

마차 안에 앉은 서수가 밖을 내다보며 약간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글만 대하던 서생이다 보니 아무래도 노숙할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광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서수의 말투가 그 스승인 구양파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이 몸이 잘 아는 집이 있으니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될 듯하오.”

광운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던 송용조가 서수의 불안을 가라앉혔다. 이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한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룻밤 유할 곳은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송 대인께선 어떤 경로로 궐주로 가실 생각이오?”

“그거야 이 장사치보다 광운 장군께서 더 잘 아실 게 아니오. 우리 상단은 그저 뒤만 따르리다.”

“싸우러 가는 길이라면 이 몸이 잘 알지 모르나, 이건 사자의 행렬이오. 보다 안전하고 번화한 곳을 지나는 게 좋겠소. 또 성주께서도 그렇게 지시를 하셨고.”

“허허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길잡이가 되어야겠구려.”

송용조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주고받았지만, 벌써 그의 가슴속엔 일행이 지나야 될 길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계획이 환하게 서 있었다.

“우선 건주를 지나 윤주 땅으로 들어갈 것이오. 거기서부터는 광운 장군께서 많은 힘을 쓰셔야 할 듯하오.”

“아니, 내가? 내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윤주에서부터 중주에 이르기까지 광운 장군은 최대한 많은 수의 잡가군을 모아야 하오.”

“잡가군을?”

“설마 이 인원으로 궐주에 버티고 있는 가겸후의 서슬 퍼런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실 생각이오?”

“흐음!”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가겸후를 놀려 주는 게 주목적이라지만, 명색이 황제에게 가는 사자다. 출발할 때부터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던 참이었다.

“몇 명이나 모아야겠소?”

“최소한 오백은 되어야 하오. 윤주 다음에 허주虛州를 지날 거니 그 정도 인원은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게요. 그 후로 허주의 공하珙河를 건너 연천강連天崗을 넘으면 곧바로 중주요. 거기서부터는 적지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게요.”

“그런 경로라면 빠르면 보름, 이 속도로 간다고 해도 한 달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서두를 것 없는 길이오. 만전에 만전을 기하면서 가십시다.”

광운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국혼을 축하하러 가는 길은 아니다. 일행의 안전을 위해 보다 더 많은 대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송용조의 말이 맞았다.

“잡가군과는 별도로 악사들과 곡예꾼들도 좀 모으는 게 좋겠소.”

“그들은 또 어디에 쓰려고요?”

“성주께서 진남후에 봉해진 데 대한 감사 인사차 황제에게 가는 사자요. 곳곳에서 축하연을 베푼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겠소?”

“아하!”

말 위에 앉은 채 광운은 허벅지를 철썩 내려쳤다. 그제야 처음 국혼일의 통보를 받았을 때 마용승과 구양파가 나눴던 얘기가 새로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들은 사자의 행렬이 되도록 요란해야 한다고 했었고, 그건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켜 가겸후가 이 사자들에게 쉽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게 틀림없었다.

‘이왕 맡은 일이다. 가겸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군.’

따지고 보면 광운의 이런 생각도 우스운 것이다. 딱히 가겸후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용승에게 갚기 힘든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다. 둘 중 누구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에게 손해를 끼칠 일이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용승을 위해 하는 이 일이 광운은 못내 즐거웠다.

“광운 장군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여전히 잡가군으로 떠도실 생각이오?”

“예? 뭐라고 하셨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송용조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광운이 재우쳐 물었다.

“광운 장군께선 여전히 잡가군으로 떠도실 생각이냐고 여쭸소.”

“글쎄요…….”

광운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 본 적이 없었기에 말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시오? 이 기회에 파양주에 정착을 하시는 게. 좋은 연을 맺은 분도 거기 사신다고 들었소. 게다가 광운 장군이 세운 공적도 혁혁하니, 주공께서 서운케 대접하시진 않을 게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소이다. 그저 저 아이가 탈 없이 커 줬으면 하는 게 내 소망이오.”

“바로 그거요!”

저만치 말을 타고 달리는 편월을 가리키며 한 광운의 말에, 송용조가 돌연 언성을 높였다.

“이대로 전국난세가 계속된다면 어찌 편월이 무사히 자란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누가 나서든 이 난세를 종식시켜야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는 거 아니겠소?”

“그야 그렇지만…….”

“광운 장군은 우리 주공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걸 어찌 내가 입에 담아 말할 수 있겠소.”

광운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명실 공히 대륙의 서북방 다섯 개 주를 지배하고, 사연이야 어찌 됐든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진남후에 봉해진 마용승이다. 일개 잡가군의 신분으로 그 인물평을 한다는 건 바람직한 게 아니다.

“이 미천한 장사치의 눈으로 본 우리 주공은 인물이었소. 그래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충성을 바친 것이지만. 그런데 주공의 주변엔 인물이 없소이다. 책략을 세워 이 난세의 처신을 그르치지 않게 한다는 면에선 구양 선생이면 족할 거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진두에서 싸울 무장들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이 몸의 생각이오.”

“하지만 마 성주의 휘하엔 호 대장군을 비롯해 뛰어난 장수들이 많소이다.”

“허허허!”

송용조는 가볍게 웃었다. 광운의 대답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표현이었다.

“호 대장군은 과연 용장이라 할 만하오. 게다가 세운 전공도 많으니 가히 파양주로선 보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게요. 하지만 호 대장군은 그 용맹과 공적으로 인해 몸을 망칠 사람이오.”

“응?”

이건 의외의 말이었다. 누가 뭐래도 호윤천은 파양주의 명문가 출신이고, 전공 또한 혁혁해서 마용승의 오른팔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광운은 송용조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귀담아듣진 마시오. 그냥 내 느낌을 이야기한 것뿐이니까.”

송용조가 말을 얼버무리고 있을 때 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소질풍에 올라탄 편월이 접근해 왔다.

“아무래도 이 안장이 너무 불편해.”

곁에 붙어 서자마자 편월은 투정을 부렸다. 안장을 사용한 말 타기엔 익숙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혼자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그런데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거야?”

“그건 왜 물어?”

“말을 좀 더 타다가 가려고.”

“안 돼!”

약간 매섭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광운은 편월의 말을 받았다.

“주위를 돌아봐라, 편월! 뭐가 보이지?”

“보리밭뿐이네, 뭐.”

편월의 말처럼 주변은 온통 보리밭이었다. 봄이 늦는 북방이었지만, 지금 한창 성장하는 철을 맞아 쑥쑥 푸른빛이 영글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이 보리들은 이삭을 피운다. 겨우내 농민들은 이걸 기다리며 그 추위를 견뎌 낸 거야. 그런데 네가 말을 달리다 실수로 짓밟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들은 올봄에 굶주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을 탈 거야?”

“내 실력을 그렇게 못 믿어?”

훈계조로 이르는 광운의 말에 편월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광운의 말을 충분히 납득한 얼굴이었다. 자신 역시 전장에서 며칠간 먹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는지라, 굶주림의 고통도 여실히 잘 알았다.

“저기요. 저기가 바로 이 부근 향장鄕長의 집이니, 하루 쉬어 갑시다.”

송용조가 가리킨 집은 마치 커다란 요새 같았다. 향장의 집이라지만, 성내에 들어가 살지 않는 농민들이 한꺼번에 모여 사는 곳이니, 하나의 향리鄕里라고 해도 무방했다.

말을 끝낸 송용조는 재빨리 말을 몰아 달려갔다. 먼저 가서 향장을 만나 일행의 숙박을 부탁하려는 것일 터였다.

당연한 일로써, 일행은 환영을 받았다. 송용조처럼 큰 상인이 농촌의 향장 집에 머무는 것도 드문 경우였으니, 거기 사는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왔다.

그곳에서 송용조는 듬뿍 인심을 베풀었다. 아직은 파양주 땅이라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들로선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을 나눠 줬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광운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분명 어디선가 봤던 사람인데…….’

지금 광운은 한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평생 농사만 지은 것처럼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였지만, 그 얼굴만은 확실히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차라리 속 시원히 기억이 났다면 광운이 이처럼 저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날 듯 날 듯 하면서 나지 않으니, 정말이지 소리라도 지르며 펄쩍 뛰고픈 심정이었다.

그때 편월이 쪼르르 달려와 광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뭐 해? 빨리 안 가고.”

“평사릉!”

동시에 광운의 입에서 하나의 지명이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나 편월과 더불어 늘 기억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육 년 전 어느 전장이 떠올랐던 것이다.

‘여항? 아니 여형이라고 했던가?’

두 번 다시 맛보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패전을 하고 돌아갔던 고응성엔 바로 그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가 어인 일로 파양주에?’

“먼저 가 있거라.”

궁금증에 밤새 잠 못 이루는 것보다는 당장 그걸 해소하기로 작정한 광운은 편월을 먼저 일행에게 보내려 했다.

물론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들을 편월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내리는 명령조의 말이라면 몰라도, 요즘 부쩍 광운의 지시에 반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어딜 가려고?”

“응, 뭐 좀 알아볼 게 있어.”

“그럼 같이 가도 되겠네, 뭐.”

그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 광운이었다. 비밀로 할 건 더더욱 아니었고.

“좋아. 가자.”

승낙과 동시에 광운은 곧바로 여형에게 따라붙었다.

“이보시오! 잠깐만 서 보시오!”

“뉘시오?”

“나요. 모르시겠소? 육 년 전 평사릉 전투에서 사문기 공을 모셨던 사람이오. 잡가군에 소속되어 있던 광운이오!”

광운이 자기소개를 마치기도 전에, 벌써 여형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알아보고 있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여형은 이내 몸을 돌려 버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알 수가 없구려.”

“왜 이러시오? 해치려는 게 아니오. 그 뒤로 사문기 공은 어떻게 되셨소? 양원, 영림 땅이 강회군에 떨어졌다는 얘기는 들었소만…….”

“글쎄, 나 같은 촌로가 어떻게 그런 일을 알겠소? 이만 가 보리다.”

한사코 거부하는 여형의 심정을 광운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지금도 어떻게든 옛 땅을 수복하려 노력하고 있을 테니 그 경우 승자들은 결코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다. 패장이 항복하여 승자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간다면, 그 땅의 백성들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따른다.

하지만 패전한 옛 주인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린다면 백성들도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잘 따르지 않는다. 이럴 땐 승자도 패장을 끝까지 추적해 죽일 수밖에 없다. 화근을 미리 제거해 버리면 의지할 곳을 잃은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르니까 말이다.

그걸 잘 알기에 광운의 어조는 더욱 애절해졌다.

“경우에 따라선 사문기 공을 이 파양주의 주인에게 소개해 드릴 수도 있소이다. 마 성주는 자기에게 간계를 부렸던 건주성의 고욱교 성주에게도 식읍 천 호를 주어 살게 하신 분이오. 그러니 더는 의심치 마시고, 사문기 공을 뵙도록 해 주시오.”

여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평생 동안 우직한 무장으로만 살아왔던 그의 가슴에, 역시 한 줄기로 사문기를 걱정하는 광운의 말이 커다랗게 울려 왔던 것이다.

“좋다. 너를 주공께 안내하겠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땐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겠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여형의 말투는 달라졌다. 외모도 촌로에서 일군을 질타하던 장수의 모습으로 바뀐 듯 보였다.

“알겠소이다.”

말과 함께 광운은 차고 있던 칼을 여형에게 건네주었다. 결코 해칠 뜻이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 준 셈이었다.

“따라오게!”

여형은 광운과 편월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묘한 구조였다. 가운데 커다란 공터가 있고, 그걸 둘러싼 것처럼 집들이 쭉 붙어 있었다. 이러니 밖에서는 요새처럼 보이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난세가 그려 낸 슬픈 그림 중 하나다. 무력을 갖지 못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책으로 이런 집단생활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여형은 그런 집들 중 한 곳으로 광운과 편월을 인도했다.

“이제 오십니까? 그런데 이분들은…….”

아마 예전 부하 중 한 명일 터였다. 광운과 편월을 보더니 긴장의 빛을 얼굴 가득 떠올렸다.

“염려 말게. 예전에 알던 사람일세.”

부하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지만, 여형은 광운의 바로 곁에 붙어 섰다. 여차하면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뜻이었다.

“돌아왔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들어오시오.”

육 년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광운은 확연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사문기도 같았다.

“그댄 내가 아는 자인 것 같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사문기는 광운을 알아본다는 얼굴이었다.

“평사릉 전투 때 잡가군으로 참가했었소.”

“아, 그 시건방졌던 작자로군. 그럼 이 아이가 그때 주운 아이인가?”

“그렇소. 제법 그럴듯하게 자란 것 같지 않소?”

“말투를 고쳐라! 영원과 양림 땅의 주인이시다!”

곁에서 듣고 있던 여형이 광운의 말투를 나무랐다. 자기 상전에게 이처럼 불손하게 굴면 누구라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광운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사문기의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이 파양주에 연고라도 계시오? 아무리 위급을 피해 왔다고 해도, 영원에서 여기까진 너무 먼 길인데…….”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아 떠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럼 이 파양주의 마 공에게 가 보시오. 정 뭣하면 내가 편지라도 한 장 쓸 테니.”

“그만두게!”

광운의 말을 사문기가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같이 가 주는 것도 아니고, 편지를 쓴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던 탓이다.

“지금은 내가 마 공의 심부름으로 어디 가는 길이오. 그러니 우선 내 편지를 가져가시오. 돌아온 뒤에 마 공에게 말해 자세한 거취는 그때 결정합시다.”

“그만두라고 했다! 아무리 아쉬운 처지로서니, 감히 누구에게…….”

사문기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본격적으로 화를 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땐 벌써 여형이 광운을 끌고 밖으로 나오며 눈을 끔뻑거렸다. 다른 기회에 자신이 사문기를 설득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광운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이 더 길어진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건가? 상단과 같이 움직이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상단의 호위를 맡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소. 다녀와서 얘기해 드리겠소.”

“다녀와서라…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난 다음이란 걸 잘 믿지 않는다네. 언젠간 반드시 옛 땅을 수복하시겠다지만, 그건 너무 요원한 얘기일세. 천수를 누리다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일세.”

과거 장군답지 않은 여형의 말이었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광운은 생각했다. 상대를 치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 난세에서, 누가 사문기를 도와주겠는가? 오히려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힘드실 게요. 그 와중에 여기 파양주까지 오신 건 잘한 일이오. 오늘 중으로 마 성주에게 편지를 쓰겠소. 내가 돌아온 뒤에도 물론 다시 부탁을 해 보겠소.”

“알겠네. 몸조심하게. 그런데 저 아이의 출신 내력은 알아냈나?”

“아니, 아직이오. 그런데 그건 왜 묻소?”

“자네가 떠나고 강회군과 한창 전쟁 중일 때 주공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더군. 그 아이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고 말일세. 목걸이에 새겨진 문양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그만!”

광운은 여형의 말을 막았다. 편월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다시 그의 신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아무튼 잘 키우게. 나야 처음 보는 아이지만, 왠지 애착이 가는군.”

여형의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광운은 그저 걸음만 옮겼다. 이 일로 인해 편월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3

일행이 중주에 들어선 것은 삼월 스무이레였다. 그때부터 그들을 본 모든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 오죽했으면 가겸후로부터 중주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소우기蘇宇基까지 적군이 쳐들어온 줄 알고 부랴부랴 병력을 동원했을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중주까지 오는 동안 곳곳에서 모은 잡가군의 수효만 해도 칠백이었다.

게다가 송용조의 돈으로 그들을 한껏 화려하게 치장하고, 또 무기까지 새로운 것들로 장만해 줬다. 사람들이 어딘가의 정예병들이 적지로 쳐들어가는 걸로 볼 만도 했다.

사실 그 정도라면 이 난세에 익숙한 사람들이 기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처럼 잘 무장된 잡가군 앞에 백여 명은 충분히 넘을 듯한 기예단의 모습이 또 가관이었다. 북을 선두로 한 각종 악기를 다루는 악사들은 중후한 음악을 연주했고, 그에 맞춰 각기 무서운 괴물로 분장한 곡예꾼들이 저마다의 재주를 선보이며 움직였으니, 처음 그들을 본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괴물의 행렬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물론 그 모든 건 서수가 제안한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 전에도 가는 곳마다 파양주에서 황제에게로 가는 사자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이런 일을 했었다.

그렇게 중주를 지나간 일행이 궐주에 들어선 건 이틀 뒤인 스무아흐레였다.

소우기는 일행을 곧바로 창일성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갈 수 없소. 정사와 부사 그리고 진상사만 따라오시오! 율천왕 전하께 안내하겠소.”

말하고 난 소우기는 곧바로 가겸후가 왕이 되어 군림하고 있을 진무각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깐!”

앞서 안내를 하고 있는 소우기를 광운이 약간은 딱딱한 어투로 제지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오?”

질문을 하는 광운의 어조가 더욱 준엄해졌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우기가 다른 사람들을 떼어 놓고 가겸후에게 안내하듯이, 마용승의 사자인 자신들이 황제를 먼저 찾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무엄하오! 여긴 바로 율천국이오. 당연히 국왕 전하께 먼저 인사드리는 게 예의요.”

“그대야말로 억지소리 마시오! 율천국왕도 엄연히 황제 폐하의 신하요. 어찌 신하가 황제 폐하보다 먼저 인사를 받는단 말이오!”

“뭐, 뭐라고?”

소우기는 말문이 막혔다. 방금 광운이 했던 말 한마디로 가겸후와 마용승은 모두 황제의 신하, 즉 같은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광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니 반박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광운으로선 첫 승부를 제대로 낸 셈이었다. 싸움으로 친다면 기선 제압을 했다는 얘기다.

광운이 처음 사자의 임무를 맡았을 때부터 이런 행동들을 숙지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서수를 통해 부사로서 어떤 언행을 해야 하는지 배웠을 따름이다. 바로 그게 적중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름 아닌 가겸후가 살고 있는 창일성 안이다. 광운으로선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온 입장이니만치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우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 역시 이곳에서 자신이 위축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누구든 이 율천국으로 들어오면 국왕께 인사를 드린다는 게 우리의 법도요. 따르기 싫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할 수밖에 없소!”

적나라한 협박을 하는 소우기였다. 여차하면 실력 행사라도 불사하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소우기로선 상대를 잘못 골랐다. 싸움이라면 광운 또한 양보할 뜻이 조금도 없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접이란 어떤 것이오? 멀리까지 왔으면서 그냥 간다면 서운하니, 그 대접을 기대하고 있겠소.”

“뭐라고? 진심인가?”

“간혹 내 입이 너무 가벼워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헛된 말을 입 밖으로 낼 턱이 없지!”

“그런가? 후회는 없겠지!”

“당연히!”

광운의 입장에서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가겸후를 놀려 주기 위해 온 길이다. 자기 본거지 안에서의 싸움이라면 그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을 게 틀림없다.

특히 이런 싸움은 숨길 수도 없다는 게 광운으로선 더욱 큰 이점이었다. 시작은 자신과 소우기가 했지만, 곧 전쟁과 흡사한 큰 싸움으로 번질 것이다. 잡가군 칠백이면 이 창일성 한 부분을 점거하고 성중 싸움을 벌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재미있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자기의 본성에서 외지인이 싸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났을 때 가겸후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상황은 급격하게 광운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송용조야 곡예꾼들과 성 밖에 남아 자신들이 황제에게 사자로 왔다면서 한창 떠들고 있겠지만, 나머지 잡가군은 진즉부터 갖추고 있던 무장을 새삼 고쳤다.

물론 소우기도 그냥 있지만은 않았다.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 성중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동원하라는 명을 거듭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정말 싸우려면 선제공격을 해야 하잖아.”

점차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편월이 광운의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싸움이 시작될 듯하니 신바람을 내며 설쳤다.

새로 모은 잡가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보다 후한 보수에, 새로이 무장까지 갖춰 준 사람을 위해 공을 세우고 싶어 술렁거렸다.

그래도 광운은 선뜻 명을 내리지 않았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황제에게 보내진 마용승의 사자들이다.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잡가군이 스스로 움직여 방어진을 구축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편에서 행동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 장군은 잠시 멈추시오!”

아마 이 고함 소리가 때 맞춰 들리지 않았다면 광운의 생각대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소동을 벌여 어쩌겠다는 말이오? 당장 그만두시오. 너희들도 모두 원위치로 돌아가라!”

“총감장님을 뵈오!”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율천국 오기총감장인 육우맹이었다. 성의 정문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보고를 받고 급하게 달려오는 길이었다.

육우맹은 모여든 창일성의 장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며, 인사하는 소우기는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파양주의 정사가 어느 분이오?”

“정사께 하실 말씀은 내게 하시오!”

“그대는…….”

“부사 광운이라 하오.”

“진상사 편월!”

자기소개를 하는 광운에게 질세라 편월도 한 다리 끼고 나섰다. 싸우기 직전에서 그게 무산되자 괜한 심술이 났던 것이다.

“어린놈은 빠져라. 나설 자리가 아니다!”

“뭐야? 이 주름투성이 늙은이가!”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하고, 또 그때만은 나이를 훌쩍 넘어서는 편월이다. 빠지라는 육우맹의 말에 전장에서 맞선 적에게나 퍼부을 만한 욕을 해 댔다.

“허어-!”

같잖다는 듯 육우맹은 혀를 찼다. 하지만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광운에게 말을 넘겼다.

“파양주의 사자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 알아 오라는 국왕 전하의 명이시오! 대체 뭘 바라고 이런 소동을 벌이는 거요?”

“달리 바라는 건 없소. 다만 법도에 따르려는 것뿐이오.”

“법도라니?”

“비록 정식 왕으로 봉해졌다고는 하나 율천국왕도 황제 폐하의 신하요. 같은 신하로서 다른 신하가 황제 폐하께 가는 길을 막는다는 건 언어도단! 우리는 곧바로 황제 폐하를 알현하겠소이다.”

“끄으음!”

육우맹도 불편한 침음성을 토했다. 반박하고 싶어도 이치에 맞는 말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육우맹은 자신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왕인 가겸후의 명으로 어떻게든 조용하게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여기 온 참이다. 자기마저 소우기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왕의 체면을 깎아 가면서까지 양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이들을 황제보다 왕에게 먼저 인사를 시켜야 한다.

고심하던 육우맹의 뇌리에 번쩍하며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대들이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황제에게 가는 길이니 왕께서 먼저 만나 안전을 확인하고…….”

“무엄하오! 보아하니 일개 무반인 것 같은데 감히 황제 폐하를 함부로 부르다니! 이게 하늘 아래 있을 수 있는 일이오?”

호통으로 육우맹의 말을 자른 광운이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마용승이나 구양파 등이 황제를 마구 부르던 자리에 함께 있었던 기억 탓이었다.

육우맹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나름대로는 황제의 안전을 위해 왕인 가겸후가 직접 조사를 한다는, 제법 그럴듯한 핑계로 이들을 끌고 가려 했다.

그런데 단순히 말 한마디의 실수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고, 더하여 한 가지 흠까지 잡히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율천국은 천하의 불충한 무리들만 산다는 얘기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황제의 호칭에 대한 건 사과를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은 관철시켜야만 한다.

“마음이 급해 그만 말이 헛나간 거 같소. 그 점은 사죄드리리다. 내 말은 황제 폐하의 안전을 위해 그대들을 국왕 전하께서 먼저 만나시겠다는 거요. 혹시라도 불측한 자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이쯤 되면 육우맹으로서도 크게 양보한 셈이다. 생전 입에 담지도 않던 ‘폐하’라는 칭호를 썼는가 하면, 광운 일행을 모두 가겸후 앞에 데려갈 뜻을 비쳤으니 말이다. 물론 사열이라는 명분은 충분히 세울 작정이리라.

그 같은 의도를 잘 알고 있고, 일부러 시비를 걸 작정인 광운은 더더욱 목소리를 올렸다.

“우리 중에 불측한 무리가 있다는 의심을 받고서는 더더욱 율천왕 앞엔 가지 못하겠소! 우리를 황제 폐하께 정중히 안내를 하든가, 아니면 율천왕을 직접 이 자리에 모셔 오시오. 그럼 의도대로 우리를 조사할 수 있을 게요.”

“감히!”

육우맹의 음성도 높게 튀었다. 황제와 왕이 비록 신분은 차이가 나지만,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에선 광운도 마찬가지로 불손했다.

또한 왕을 불러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럴 작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번거로운 수작은 필요 없었다.

“권하는 술잔을 마다한다면, 그다음은 한 가지뿐! 네놈들 사자의 목을 베어 국왕 전하의 술자리 연희로 삼으리라!”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영감의 그 쭈그러진 목이나 잘 간수해!”

기어코 육우맹은 부아를 참지 못했고, 광운과 편월은 거의 동시에 눈에 불을 켜고 한 발짝씩 나섰다.

육우맹으로선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원위치로 돌려보냈던 장졸들에게 신호를 보내 광운 일행을 포위하게끔 했다.

기실 육우맹의 신호는 필요가 없었다. 벌써 장졸들이 분위기를 알아채고 포위를 끝낸 뒤였기 때문이다.

“쳐라!”

육우맹은 망설이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빨리 끝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번엔 잡가군이 먼저 행동을 일으켰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가 예까지 온 보람이 없다! 목숨 하나 버려 남달리 우리를 우대해 준 은혜를 갚자!”

“와아-!”

“우리의 피로 창일성의 대지를 물들이자!”

“멈추시오, 멈춰!”

너무 갑작스러운 잡가군의 반응에 광운이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비록 포위는 당했다고 하지만, 이래서는 황제가 있는 성에서 먼저 무기를 들고 공격을 시작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벌써 기세를 탄 잡가군이었다. 두 번씩이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으니 그들로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해서 잡가군은 대개 전쟁을 업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들이다. 창일성의 장졸들이 다 모이기 전인 지금, 선제공격하는 게 가장 낫다는 판단은 제각기 하고 있으니, 말린다고 들을 턱이 없었다.

창일성 장졸들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소우기가 육우맹을 끌어 뒤로 빠지는 것과 동시에, 기왕에 형성해 두었던 포위망을 바짝 줄여 왔다.

“어딜 가? 거기 서! 쭈그렁 모가지!”

육우맹이 빠지는 걸 본 편월이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입고 있던 옷을 찢다시피 벗기 시작했다. 안에 갑옷을 받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냥 보고 있을 광운이 아니었다.

“기다려!”

엄한 어투로 나무라며, 설치는 편월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억눌렀다.

“놔!”

강한 반발을 보이며 편월은 광운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잔뜩 드리워져 있는 낭패감을 본 탓이었다.

광운의 시선은 사방으로 돌며 번뜩번뜩 빛을 발했다. 벌써 어디나 할 것 없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건 광운이 바라던 일 중 하나였다. 이쪽이 먼저 공격을 가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망설이고 있을 광운이 아니었다.

“정사를 보호하라! 알겠나? 이게 이 싸움에서의 네 임무다!”

편월에게 단단히 일러 둔 후, 광운은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나를 따르라!”

“와아-!”

광운의 명은 즉각적으로 먹혀들었다. 제각기 전쟁의 달인이라지만 지휘자가 없으면 그 힘의 절반도 내지 못한다. 거기에 떨어진 명이니 잡가군은 한층 분발하며 그 뒤를 따랐다.

“와아! 막는 놈은 모두 죽인다. 길을 비켜라!”

“불을 질러라, 불을!”

“불은 안 돼! 민간인을 해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 절대로 민폐는 끼치는 마라!”

명을 내리는 광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바로 이런 점을 우려해 잡가군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어느 곳이든 성문은 사람들이 벅적거리기 마련이다. 난전을 비롯하여 더러 상가도 있고, 백성들 거주지에선 버젓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움집도 많다.

당연히 이들은 움직임에 방해가 되고, 완전히 전장 심리에 젖은 잡가군은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또한 방화를 하게 되면 지른 쪽은 묘한 승리감에 젖어 들지만, 그걸 당하는 쪽은 공포와 심리적 위축감을 느끼게 된다. 전쟁에 이골이 난 잡가군이 그걸 모르고 놓칠 턱이 없었다.

하지만 광운의 입장은 달랐다.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도 부담인데, 여기서 백성들까지 해친다면 가겸후에게 창피를 주려는 의도는 날아가 버리고, 거꾸로 파양주군의 난폭성만 부각시키게 된다. 그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

다행히 잡가군은 광운의 말을 잘 따랐다. 상황이 좀 더 악화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상태라면 백성들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피해를 아주 없앨 수는 없었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백성들이 우왕좌왕하면서 간혹 잡가군 앞에 뛰어들어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잡가군도 이따금씩 쓰러졌다. 물론 뒤에서 추적하는 율천국의 장졸들에 의해서지만, 그 피해 역시 미미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게 광운이 이끄는 잡가군이 성문에서 점차 멀어져 갈 때, 갑자기 뒤쪽에서 웅장한 풍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살벌한 싸움판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함이 아닌, 너무 고아한 풍취를 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이리저리 싸움을 피하기 바쁘던 백성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생명의 위기 따위는 도외시한 행동이었다.

자연스레 광운을 비롯한 잡가군의 시선은 뒤로 돌아갔다. 자신들을 추적하던 율천국의 병사들 역시 군례를 갖추느라 싸울 생각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편월이 성급하게 물었다. 짧은 삶에 비해 전쟁 경험이 많았던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광운도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있었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

그게 아니라면 율천국의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이처럼 공손한 예를 갖출 이유가 없었다.

돌연 웅장하게 울려 퍼지던 풍악 소리가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광운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주변을 진동시켰다.

“국왕 전하께서 각 성문을 순시하신다! 국왕 전하께서 납셨다!”

이어 다시 풍악이 울렸고, 거대한 깃발과 일산日傘까지 드리운 화려한 수레 한 채가 광운의 시야에 잡혔다.

“가겸후…….”

그 이름이 광운의 입에서 나직이 뱉어졌을 때, 숱한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수레가 잡가군의 전방 백여 장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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