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잠혈孤城潛血
1
눈알이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저황은 의외로 침착했다.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기로 했던 직속 부하들이 절반 넘게 죽어 버렸지만, 비로소 성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 같았다.
“시체로 해자를 메워라! 죽은 자들의 원혼은 나중에 따로 달래 주면 된다!”
그 자신도 부하들과 말의 시체가 만든 방벽 뒤에서 화살을 피하며, 저황은 다시 한 번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러고는 시체 한 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며 해자를 향해 달렸다.
“장군을 따르라! 진격이다, 진격!”
저황의 예하에 있는 아장亞將들도 연방 고함을 지르며 분투에 분투를 거듭했다.
“밧줄을 던져라!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밟고서라도 성벽을 넘어라!”
시체들로 메워진 해자를 건너며 지른 저황의 고함은 이미 그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목이 쉬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온 수하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나 보다. 저황의 명대로 성벽에 달라붙은 자들은 일제히 밧줄을 던져 성루에 걸었다.
“자, 올라가라! 가장 먼저 오르는 자에겐 상금으로 은자 천 냥을 주겠다!”
“와아!”
성벽에 달라붙은 이상 더 이상 화살에 당할 걱정은 없어졌다. 성병들이 활을 쏘려면 몸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그 역시 여지없이, 공격군이 쏜 화살에 희생될 테니 말이다.
“장군을 보호하라! 낭아박狼牙拍(통나무나 널찍한 판자에 날카로운 쇠침을 박은 수성용 무기)을 조심하라!”
아장들이 주변에 몰려들었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할 저황은 가장 먼저 밧줄에 매달린 사람 중 하나였다.
저황을 지원하기로 했던 다른 부장들도 그걸 똑똑히 봤다. 그들도 절반 정도는 화살을 쏘아 엄호를 하고, 나머지는 밧줄에 매달려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취리리릿-!
“조심해라! 낭아박이다!”
괴상한 소음과 누군가의 경고음이 동시에 들렸을 때, 저황은 한 손으로 옆구리에 찼던 창을 위로 힘껏 들어 올렸다. 밧줄에 매달린 채 떨어지는 낭아박을 막자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쿵!
들어 올린 팔 전체가 시큰하게 울리며, 저황은 서너 자 정도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장군! 자, 내 어깨를 디디시오!”
누군가 밑에서 저황의 발을 받쳤다. 뒤에 올라오던 부하 중 한 명이리라.
창을 갈무리한 저황은 재빨리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낭아박이 다시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충격이 적다.
게다가 적에게는 끓는 물도 있고 기름도 있다. 어중간한 지점에서 그걸 맞게 되면 설사 귀신이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밧줄이 끊어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개 공성용 밧줄은 처음부터 쇠심을 박아서 꼰다. 도끼로 내려친다고 해도 쉽게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하다.
다행일까. 저황이 걱정했던 뜨거운 기름이나 물은 쏟아지지 않았고, 대신 큼지막한 돌들이 위에서 마구 떨어져 내렸다.
“아아악!”
“으아아아아-!”
저황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오르고 있던 주변의 부하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투구를 썼다고 해도 저만한 돌에 머리를 정면으로 가격당하면 정신을 잃고 말 터였다.
성벽에 몸을 바짝 밀착시킨 저황은 보다 빠르게 손과 발을 놀렸다. 이제 네댓 자만 더 오르면 된다.
“어딜 기어오르느냐? 죽어라!”
“놈들이 올라왔다! 쳐라!”
거리가 좁혀지자 성병들도 당황했다. 활이나 돌 같은 건 던져 버리고 창으로 마구 찔러 대기 시작했다.
저황은 오르기를 멈췄다. 그 역시 갈무리해 둔 창을 꺼내 위를 향해 휘둘렀다.
성병들이 완강하게 막고는 있지만, 오르려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성루에 뛰어오를 수 있는 저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오르고 있는 아군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다. 혼자 올라가 봐야 별 소득도 없으니, 모름지기 한꺼번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말이 좋아 보조를 맞추는 것이지, 그건 실로 힘겨운 일이었다. 한 손으론 밧줄을 쥐고, 다른 손으로 창을 휘둘러 적을 쳐야만 하니 어지간한 체력이나 의지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저황 역시 몇 번이고 뛰어오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성을 함락시키자는 건 자신이 제시한 작전이었다. 조금 힘겹다고 작전 전체를 망친다면 자손 말대末代까지 그 수치가 미칠 것이다.
“장군!”
“장군, 어서 오르시오!”
주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저황은 힘껏 성벽을 박찼다.
“이야야아압!”
동시에 우렁찬 기합성을 토한 저황은 훌쩍 성루를 넘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놈들이 난입했다! 놈들이… 으악!”
어쩌면 그자가 오늘 전투에서 최초로 전사한 성병인지도 모른다. 저황은 성병을 꿰뚫은 창을 그대로 강하게 휘둘렀다.
퍼버버벅!
저황의 주변으로 몰려들던 성병 서너 명이 동료의 시신에 맞아 성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성루를 탈환했다! 용맹한 막주군은 서둘러 오르라!”
덤벼드는 성병들을 마구 찍어 넘기며, 저황은 연방 소리를 질렀다. 희한하게도 이번엔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
“막주 만세!”
몇몇 함성과 함께 저황 주변에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일차로 성루에 오른 막주군이었다.
“성루를 확보하라! 아군이 아직도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뒤에 대기하고 있는 장군께도 신호를 보내라!”
땅!
“앗!”
옆으로 모여든 부하들 십여 명에게 명을 내리던 저황은 돌연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입을 감쌌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가녀린 핏줄기가 보였다.
“앗, 장군!”
바로 곁에 있던 자가 놀라서 저황을 부축했다.
“괜찮다. 이놈의 화살!”
부하의 손길을 뿌리친 저황은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이게 자신의 가슴 갑옷에 맞고 튕겨 입술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화살이 묘했다. 일반적인 것들에 비해 절반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놈이… 컥!”
저황의 부하가 활을 쏜 자를 찾기 위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의 양미간에는 예의 그 작은 화살이 깊숙이 꽂혀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애써 성벽에 올라온 저황의 부하들이, 다시 두 명이나 한꺼번에 쓰러졌다.
“어떤 놈이냐?”
수중의 창을 곧추세우며 저황은 활을 쏜 자를 찾았다.
“어!”
이게 활을 쏜 자를 발견한 저황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아주 어린 꼬맹이, 즉 편월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주에 사람이 없기로서니 저런 꼬마 놈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다. 네 이놈!”
저황으로선 이렇게 한차례 위협하는 걸로 충분하리라 여겼다. 어떻게 활은 숨어서 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마주 서 있으면 어린아이답게 겁을 먹고 달아나리라.
하지만 저황은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 위협을 하는 사이에도 편월은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촌각도 아까운 판에 한 때나마 이 작은 꼬맹이에게 발이 묶였다는 게 너무 창피해서 소리를 지르며 창을 내질렀다.
“네 이노옴!”
그 결과에 대해서 저황은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꼬마 놈이 창끝에 꿰인 꼬치처럼 되리란 걸 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저황의 바람에 불과했다. 창에 맞서는 편월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앞으로 던졌다.
변화는 바로 그다음에 일어났다. 창끝에 곧장 꽂힐 것 같던 편월의 몸이 동그랗게 말린다 싶더니, 그대로 바닥을 굴러 저황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싸각!
저황이 허벅지 안쪽, 갑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에서 화끈한 통증을 느낀 건 거의 동시였다. 편월이 다리 사이를 지나가며 어느새 빼 든 칼로 그어 버린 것이었다.
‘당했다!’
순간적으로 저황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벅지 안쪽은 동맥이 흐르는 곳으로, 갑옷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신체의 몇 부분 중 한 군데다.
“요 쥐새끼 같은 놈!”
저황의 상태를 모르는 부하들이 그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온 편월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편월은 정말 쥐 새끼나 다람쥐처럼 움직였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적들의 무기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여태 굳은 듯 서 있는 저황의 등에 달라붙었다.
“앗, 장군!”
“저놈을 쳐라! 장군께서 위험… 앗!”
막주군이 당황해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을 때, 편월은 벌써 제 할 일을 끝낸 뒤였다. 저황의 목을 베는 일 말이다.
아직은 힘이 약해 저황의 목을 완전히 베어 내진 못했지만, 편월은 확실히 적장을 벤 공훈을 세운 것이었다.
그 자리에 무너진 저황의 시신 앞에 서서 편월은 마음껏 고함을 질렀다.
“적장의 목을 편월이 베었다! 편월이 적장의 목을 벴다!”
사실 편월의 목소리는 그리 큰 게 아니었다. 싸움터의 소음 속에 그대로 묻혀 버리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편월이 고함을 지르자 주변엔 갑작스러운 정적이 왈칵 밀려들었다. 풍소성 내에 떠돌던 온갖 소음들을 물로 싹 씻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건 하나의 경이였다. 이제 겨우 여섯 살에 불과한 편월이 적장의 목을 벴다는 건, 아무리 이변이 많은 전장이라고 해도 보는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정적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와아아-!”
“남은 적들을 쳐라!”
벌써 이긴 듯 승리의 함성을 올리며, 성병들은 새삼 힘을 낸 모습으로 막주군을 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위기를 맞고 있는 건 편월이었다. 눈 빤히 뜨고 장군을 잃은 저황의 부하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던 것이다.
편월로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어린아이라 방심하고 있던 적병들이 저황의 죽음으로 인해 본격적인 살기를 띠고 무기를 휘둘러 왔다.
“광……!”
반사적으로 광운을 부르려던 편월은 급히 입을 닫았다. 혼자서 싸우겠다고 했을 때 그가 보여 줬던 반응을 떠올린 탓이었다.
구르던 몸을 일으켜 세운 편월은 수중의 칼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적장인 저황을 베어 버린 칼이었지만, 어른들에겐 겨우 중도에나 미칠 크기였다.
그 기세가 너무 맹렬했기 때문일까. 막주군은 선뜻 편월에게 덤비지 못했다.
그 틈을 이용해 편월은 가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용암처럼 들끓던 가슴속의 적의와 투지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편월의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이까지 따다닥 부딪치며 떨리는 통에 자칫 손에 쥔 칼을 놓칠 것만 같았다. 방금 자신이 목을 베어 버렸던 저황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편월은 전장에서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활을 이용한 것이었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었다. 화살이 날아간 거리만큼이나 그 죽음은 자신과는 그리 상관없이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 저황은 달랐다. 그 몸에 달라붙어, 자신의 손과 칼로 직접 베어 버렸던 것이다.
적장을 벴다는 승리감과 자랑스러움도 잠깐뿐이었다. 목전의 위기를 넘기고 그때를 생각하자, 편월은 견딜 수 없는 역겨움과 공포 비슷한 감정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꼬마 장군을 구하라!”
“성루에 올라선 적들을 쓸어버려라!”
그제야 성병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의 선두엔 광운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나, 편월?”
광운은 심하게 떨고 있는 편월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놔!”
치칭!
강한 거부의 외침을 발하며 편월은 칼을 휘둘러 광운의 가슴을 베었다. 갑옷이 아니었다면 중상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편월…….”
광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첫 살인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라 편월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처럼 격렬하게 반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음 순간 편월은 수중의 칼을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이자가 바로 적의 선봉대장인 저우의 동생 저황이오. 꼬마 장군이 그를 베었으니, 오늘의 일등 공훈은 당연히 꼬마 장군이오!”
“와아!”
광운과 편월의 기분이야 어떻든, 성병들은 승리의 함성을 높이 올렸다.
그걸 분수령으로, 그날 전투는 거의 종결되었다. 저황의 시신을 찾기 위해 막주군이 몇 차례 더 싸움을 걸었지만, 사기가 오른 성병들을 어떻게 할 순 없었다.
적들이 영채로 돌아가고, 승리에 들떴던 성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광운은 서둘러 전장 정리를 명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간인들을 자연스레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서도 광운의 뇌리엔 늘 편월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떨쳐 버리려 해도, 자신의 가슴에 날렸던 한칼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 * *
동생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접한 저우는 의외로 침착했다. 오히려 죽은 저황에게 욕을 퍼부었다.
“병신 같은 놈! 한낱 꼬맹이에게 당했단 말이지! 잘 뒈졌다, 잘 뒈졌어!”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병사도 아닌 어린아이에게 당했다는 게 저우에겐 더 못 견딜 노릇이었다.
“당장 준비하라. 오늘 밤 내가 직접 공격을 지휘하겠다!”
“불가하오!”
노기에 몸을 떠는 저우를 제지하고 나선 건 유개였다. 아침부터 그는 정면공격에 대해선 반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적들은 낮의 승리로 한껏 기세가 올라 있소이다! 그에 비해 아군은 어떠하오? 달리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요. 거기다 만약 보급까지 끊기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오! 그러니 우선은…….”
“유 장군은 어찌 그리 나약한 말씀만 하시오! 만약 오늘 저황 장군의 말처럼 전군이 몰려갔다면 우리는 지금쯤 풍소성을 점령했을 것이오. 그런데 또다시 공격은 안 된다는 말씀이오?”
이번에 나선 건 군도옥群禱玉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저우의 막하에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될 만치 무용이 뛰어난 자였다.
“그럼 군 장군은 낮의 전철을 다시 되풀이하자는 말인가?”
“저황 장군은 분명 성루에 오르셨소! 그때 우리들이 일제히 밀어붙였다면 틀림없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을 거요. 그 점을 잘 생각해 보시오!”
“장군, 보고드립니다!”
두 사람의 언쟁은 전령이 진막 안으로 황급히 뛰어든 후에야 진정되었다.
“무슨 일이냐?”
“예, 풍소성에 잠입했던 간인들이 돌아왔습니다!”
“오, 그래? 몇 명이나 귀환했느냐?”
“다섯입니다!”
“다섯이라면 나쁘지 않구나. 어서 데리고 오너라!”
“존명!”
전령이 달려 나간 뒤에도 뭍 장수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이제 곧 적의 동정을 보다 세세히 알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전령은 곧바로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살아 귀환한 다섯 간인들의 대표 격인 것 같았다.
“무사히 귀환했기에 보고…….”
“인사는 됐다. 그보다 네가 탐지한 적의 동정부터 보고하라!”
예를 갖추려는 간인을 제지하며, 저우가 성급하게 물었다. 당장 오늘 밤 야간 공격을 감행하려는 참이다. 무엇보다 정보가 급했다.
간인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예. 적병의 수는 삼천을 약간 웃도는 것 같습니다. 무기나 성벽은 최근에야 급조한 것 같았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광운이란 자가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
“광운? 그자가 대체 누군가?”
간인의 말을 끊으며, 저우는 장수들에게 물었다. 직접 싸워 봐서 적장이 우수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다.
다른 장수들도 고개만 갸웃거렸다. 삼천으로 일만을 보기 좋게 상대할 정도의 장수라면 벌써 이름이 났을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파양주의 잡가군 소속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풍소성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게 됐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
일개 잡가군의 병사가 한 성의 병력을 지휘한 데 대해 술렁거리던 진막 안이 전령의 말에 의해 조용해졌다.
“파양주의 영욱성에서 원군 십만이 출발했다 하옵니다. 이들의 행로에 대해선 엇갈리지만, 출발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원군 십만이 출발했다고? 그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예, 곧바로 풍소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다고도 하고, 또 길을 돌아 막주의 침사성을 치러 간다고도 합니다.”
“뭐라고?”
저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십만의 원군이 온다는 것도 큰일이지만, 그들이 막주로 직행한다면 그야말로 간이 오그라들 일이다.
“그래서야 어찌 대군의 거취를 결정하겠느냐? 보다 상세히 보고하라! 그들이 이 풍소성으로 오겠는가, 아니면 막주로 가겠는가?”
유개가 전령을 다그쳤다.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아야 이쪽의 움직임을 결정지을 수 있다. 이처럼 애매해서는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다.
“시간이 촉박하여 더 이상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입성하자마자 나머지 동료들은 모두 잡혀 참수당하고, 우리 다섯만 겨우…….”
“수고했다. 돌아가 쉬고 있으면 상을 내릴 것이다!”
억울하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는 간인을, 저우는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오늘 밤 공격은 취소해야 할 것 같군!”
저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섣불리 공격도 철수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또 어인 말씀이오? 적들의 원군이 온다면 우리가 최일선에서 막아야 하는 건 마땅한 일이오! 그때를 대비해서 우선 오늘 밤에 풍소성을 쳐서 떨궈야 하오!”
군도옥은 여전히 일전불사를 주장했다.
“그랬다가 파양주의 원군이 막주로 쳐들어가면 우리는 양면에서 적을 맞게 되네! 여기선 좀 더 상황을 주시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렇다면 당장 군량의 보급이 시급하오! 소장이 곡 장군과 같이 그 수송을 책임지겠소.”
저우에게 당장 싸움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자 유개가 다시 나섰다.
“우선은 그게 급선무겠군. 그럼 유 장군과 곡 장군에게 다시 한 번 보급을 명하겠소!”
저우의 어투가 단호해졌다. 더 이상 제장들의 이의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막주군은 밤새 부산하게 움직였다. 영채를 더욱 견고하게 손보는 한편, 일대의 부대로 하여금 불화살로 성을 공격하게도 했다.
그사이 유개와 곡규는 일천의 병사를 인솔하여 은밀히 함월성으로 향했다.
2
아침, 아니 정확하게는 새벽부터 광운은 편월을 찾아다녔다. 어제 전투가 끝나 갈 즈음에 사라진 이후로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당장 찾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전투의 뒤처리가 바빴어도,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었다.
광운이 편월을 찾지 않은 건 그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처음 창으로 적을 찔러 죽였을 때의 기분을 알기에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 싶었다.
‘너무 어긋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전장에 나와 처음으로 한 살인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폐인이 되어 버린 사람을 광운은 종종 봤었다. 비록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편월은 너무 어리다. 그 충격을 이겨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 계셨구려. 한참 찾았소이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광운의 어깨를 도인걸이 가볍게 치며 말을 걸었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자, 갑시다. 주공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있다 찾아뵈면 안 되겠소? 급히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
“꼭 가셔야만 되겠소이다. 적을 맞아 훌륭하게 싸웠다고 큰 상을 내리실 모양이니.”
“그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될 것이오. 적당한 사람을 골라 데려가시오.”
“광운 장군!”
한사코 사양하는 광운에게 도인걸은 언성을 높였다. 어쨌든 사주의 주인인 천세기의 말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이다.
그 점을 모르는 광운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상이라도 편월을 찾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 상은 도 장군께서 대신 받아 장병들에게 나눠 주시오!”
다소 불손하게 들린다 싶을 정도로 내뱉은 후, 광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무 불손한 게 아닌가? 비록 장군이라지만, 그대의 신분은 잡가군! 어찌 주명主命을 어기려 드는가?”
좋은 소식에 반가운 얼굴로 맞을 줄 알았던 광운이 너무 차갑게 대하자 도인걸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고 말았다.
평소의 광운이었다면 그냥 흘려듣고 말았을 터였다. ‘잡가군 따위가…….’라는 말은 지겹게 많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도인걸은 불운하게도 편월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진 광운을 건드리고 말았다.
게다가 광운은 도인걸의 말을 자기 개인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풍소성을 지키기 위해 효명성에서 온 일천에 달하는 잡가군 전체를 경시한 걸로 들렸다.
“그 잡가군 덕에 그나마 이 성이 버티고 있는 거요!”
광운의 언성도 높아졌다. 어쩌다 파양주에 발이 묶여 이 풍소성까지 오게 됐지만, 이건 애당초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든 편월을 찾아 죽영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뭐라고? 그럼 우리 주공께서 이끌고 온 사주의 이천 군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도인걸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후회는 있을지언정 주공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엔 사주군 이천의 명예도 포함된다.
그 속내가 빤히 보이는 것 같아 광운은 더욱 불쾌해졌다. 처음 이 성에 왔을 때는 물론, 며칠 전 천세기가 허겁지겁 도망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저들은 자신과 파양주의 잡가군을 그야말로 구명줄처럼 의지했었다.
그런데 두어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벌써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싸움이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상을 내리겠다는 천세기나, 또 그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할 말, 못 할 말 마구 지껄이는 도인걸이 한심스러웠다.
그건 바로 광운 자신을 향한 자괴감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심스러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이번에도 듣지 않는다면 병권을 회수하는 건 물론 그대를 포박해서라도 끌고 가겠다!”
“병권 따위는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소. 그러니 언제든 가져가시오. 하지만 날 포박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뭐라고?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얘들아! 저자를 끌고 주공께 가자!”
도인걸은 거느리고 왔던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사실 이러는 도인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그라고 해서 어찌 광운과 파양주에서 온 잡가군 천 명의 공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럴수록 주공인 천세기의 위신을 세워 줘야만 한다. 자칫했다가는 지원군이 풍소성은 물론 사주까지 좌지우지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명이 내려졌음에도 병사들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던 사람은 바로 광운이었던 것이다.
“괜한 일로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마시오. 난 편월만 찾으면 그길로 이 성에서 물러나겠소! 그러니 더 이상 날 방해하지 마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저자를 끌고 가렷다!”
“잠깐! 무슨 일이오?”
“왜 그러십니까, 광운 장군!”
도인걸의 고함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잡가군이 슬슬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심상찮은 눈빛을 번뜩이는 자들도 보였다.
“별일 아니오. 그러니 각자 할 일들 하시오!”
광운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잡가군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잡가군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대부분 경험이 많은 자들이라 광운과 도인걸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단박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지들 마시오.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오. 그러니 어서 돌아가 대비를 하시오!”
광운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이란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자칫하다가는 한편 싸움으로 번져 성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경우도 더러 봐 왔었다.
“우리도 다 들었소! 대체 광운 장군이 뭘 잘못했기에 끌고 가겠다는 거요?”
광운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잡가군 중 몇몇이 도인걸에게 곧바로 따지고 들었다. 그들은 이미 광운에게 심복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가 당한다면 참지 않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왜, 왜들 이러느냐? 감히 반기를 들겠다는 거냐?”
잡가군의 반응은 도인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썩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여봐라! 이놈들을 내쳐라!”
‘어리석은 자…….’
연방 고함을 지르는 도인걸을 보며 광운은 낭패감을 금치 못했다. 저런 행동은 불타오르기 시작한 잡가군의 반감에 기름을 끼얹을 뿐이다.
“우리를 내치라니? 목숨 걸고 성을 지켜 줬건만, 이제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가 뭐 있는가? 당장 효명성으로 돌아가자!”
잡가군이 술렁거렸다. 평소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되면서도, 정규군이 아니란 이유로 차별을 받던 그들이었다.
게다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효명성에 소속된 잡가군이었다. 녹봉도 거기에서 지급된다는 얘기다. 비록 명에 의해 풍소성에 와 있지만, 그들로선 일말의 미련도 없는 곳이다.
“뭣들 하느냐? 저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두 잡아 꿇려라!”
도인걸로선 이런 상황을 접한 게 아마 처음이리라. 그래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너무 지나친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그건 천세기가 데려온 막주군 이천에 대한 믿음이 깔린 행동이기도 했다.
“우리가 반군이라고? 막주군으로부터 풍소성을 지킨 게 누군데?”
“잠깐만 기다리시오! 여러분, 잠시만 진정하시오!”
더 두고 봤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광운이 나서며 잡가군을 말렸다.
“만약 여러분들이 한순간의 분기를 참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반군이 되고 마오! 그렇다면 오늘까지 목숨 걸고 이 풍소성을 지켜 온 의미가 사라져 버리오. 그래도 좋겠소? 비록 잡가군에 몸담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들은 단 한 번도 소속된 군에 위해를 끼치는 행동은 하지 않았소! 그 명예가 더럽혀져도 좋겠소?”
“하지만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광운 장군을 죄인 취급하려고 했소.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소이다!”
“그건 나의 문제요. 나 하나만 한발 물러서면 되는 일에 여러분까지 이러실 필요는 없소. 그러니 돌아가 전투준비를 하시오!”
“그게 어째서 광운 장군 혼자의 일이오? 이는 우리 효명성 잡가군 전체를 우롱하는 처사요. 이대로 묵과할 수 없소이다!”
광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잡가군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령이오! 파양주에서 전령이 왔소!”
그때 병사 한 명이 다급하게 말을 달려 오며 소리를 질렀다. 북문의 수문 장수였다.
“파양주에서?”
도인걸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로선 파양주의 원군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대번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저러면서 효명성의 잡가군을 도발하다니.’
“오, 무슨 전갈이더냐? 얼른 안으로 모시지 않고.”
광운이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사이에 도인걸이 수문 장수를 맞았다.
“그게, 광운 장군에게만 긴밀히 전달할 사항이라 합니다. 그러니 광운 장군께서는 속히 북문으로 가시길!”
“크흠!”
도인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누가 뭐래도 이 성의 수비 장수는 자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좀 전까지 껄끄러운 신경전을 벌였던 광운에게만 볼일이 있다는 전령은 썩 달갑지가 않았다.
광운의 입장에서야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이걸로 이 살벌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 같이 가 봅시다, 도 장군.”
광운은 도인걸을 잡아끌었다. 눈치 없이 여기 남아서 잡가군을 계속 자극할 것 같아서였다.
도인걸도 눈치가 아주 맹물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잡가군의 과격한 반응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던 터라 제꺽 광운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광운의 의도는 엉뚱한 곳에서 빗나가고 말았다.
“이건 풍소성 군사들이 속이는 걸지도 모르오. 난 광운 장군의 뒤를 따르겠소!”
“맞다. 저렇게 속여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는 수작이다!”
한 번 뒤틀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렇다. 의심의 귀신에 씌어 누가 뭐래도 믿지를 못한다.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가면 성은 누가 지키겠소? 그러니 몇 분만 따라오도록 하시오!”
실은 모두 다 남겨 두고 싶은 광운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반발할지도 모른다 싶어 약간의 양보책을 내놓았다.
“흥! 우리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소. 그러니 이 성은 사주군이 지키겠지!”
“옳소! 우리 없이도 성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니, 우리는 광운 장군을 지킵시다!”
“다들 조용히 해!”
다시 들썩거리며 한마디씩 하는 잡가군의 목소리를 갑작스레 들려온 뾰족한 외침이 억눌러 버렸다. 편월이었다.
“뭐 하자는 거야? 전쟁은 안 할 거야? 오늘 아침 적이 뭘 하는지 살펴본 놈 있어?”
“아, 꼬마 장군!”
“와, 어제의 일등 공훈자다!”
어제 저황을 죽인 이후로 다른 사람들도 편월을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잡가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어디 갔었더냐, 편월?”
“상관 말아!”
부드러운 광운의 태도에 비해 편월의 목소리엔 아직도 날이 서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나서긴 했지만, 지금 편월의 감정은 뒤죽박죽이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잡가군이 광운을 편드는 게 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일은 광운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관심이 편월에게 쏠렸기 때문이다. 내일의 기약이 없는 전장에서의 삶은 오늘의 영웅을 필요로 하고, 여섯 살 먹은 일등 공신 전사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충분했다.
“자, 꼬마 장군의 명이시다. 다들 전투준비를 하러 가자!”
“하지만 몇몇은 광운 장군을 따라가자. 나머지는 각자 위치에서 기다리고!”
“좋다. 오늘도 적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편월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가 확 달라져 버렸다. 몇몇 소규모 지휘자들만 남고, 나머지는 편월을 무등 태운 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어색해진 건 광운이었다. 편월의 차가운 태도도 그렇고, 자기에게만 긴밀히 전할 것이 있다는 전령을 도인걸과 같이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때도 도인걸의 눈치는 원활하게 작용했다.
“난 주공께 보고를 드려야겠소. 전령이 왔다는 것과…….”
자못 부드러워진 도인걸의 말투였지만, 그 끝이 흐려졌다. 차마 잡가군이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걸 천세기에게 보고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광운으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가볍게 예를 갖춘 후, 뒤따르는 몇몇 잡가군을 거느리고 북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령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효명성에서 본 게 아니라, 영욱성의 마용승 측근에 있던 자였다.
“성주님의 전갈이오!”
전령은 품속에서 곱게 접은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봉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성주가 주는 봉서는 예를 갖추고 받아야만 한다. 다만 광운이 잡가군 소속이기에 그걸 생략했을 따름이었다. 정규군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이런 사소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자세한 사항은 전령의 입을 통해 들으라는 짧은 글귀가 전부였다.
이 또한 전장의 상례 중 하나다. 만약 전령이 적에게 사로잡혔을 때 편지에 용건을 적어 두면 기밀이 누설된다. 사람의 머릿속에 넣어 둔다면, 최악의 경우 자결하면 그만이니 극비 사항일수록 이런 방법을 택한다.
물론 거기엔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를 전령으로 삼는다는 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광운이 궁금하다는 시선을 들자, 전령은 그를 한쪽으로 불렀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주께서는 이 성에 주둔하고 있는 효명성 잡가군이 철수하길 바라시오!”
“뭐라고?”
광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풍소성에 온 지 대체 며칠이나 되었는가? 그런데 벌써 철수하라니?
그러다 광운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이건 결코 파양주의 싸움이 될 수 없다!’
마용승이 자신에게 내렸던 명은 목철린과의 싸움을 길게 끌라는 것이었다. 곧 궐주에서 거행될 국혼에 빠지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싸움이 지금 파양주나 막주가 아닌 사주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래서는 ‘전쟁 때문에…….’라는 핑계는 먹혀들 여지가 없다.
‘이건 분명 독천옹 구양 선생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리라.’
광운에게 있어 구양파란 존재는 사뭇 기이했다. 무가에서 태어나 오직 무장으로서의 길만 걸었기에, 무武가 아닌 다른 걸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을 보면 사뭇 신기할 뿐이었다.
바로 그 점이 광운은 두려웠다. 한 전투에서 무용을 앞세운 자신이 죽일 수 있는 적군은 많아 봐야 오륙십 명 정도, 한껏 무리를 한다손 쳐도 백 명이 고작이다. 더 이상은 체력이 달려서라도 어렵다.
그런데 구양파는 그 작은 두뇌와 세 치에 불과한 혀로 자신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다. 방금 들은 몇 마디의 말로 당장 풍소성에 있는 사주군 이천여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지 않은가 말이다.
‘이로써 사주는 멸망할 것이다!’
지난 며칠간 겪어 본 도인걸은 전쟁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장수가 그런 지경이니 병사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막주의 강병이 한차례 밀기만 해도 풍소성은 썩은 기둥처럼 무너질 게 뻔하다.
“풍소성에서 철수할 핑계는 뭐든 상관없다고 하셨소. 다만 사주군이 기분 상하지 않게끔 하라고…….”
‘그게 그리 쉽나?’
광운의 귀에는 이제 더 이상 전령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철수한 뒤에 거의 죽게 될 이천여 사주군의 얼굴들만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도 장군은 억세게 운이 없다.’
이 아침 도인걸은 자신과 효명성에서 온 잡가군과 마찰을 빚었다. 일부러 시기를 그렇게 맞추려 해도 힘들 터였다.
광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풍소성을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생겼지만, 선뜻 발길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그리 흔치 않았다. 잡가군으로 살아오면서, 패한 전쟁에선 재빨리 물러나는 습성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풍소성은 묘한 애착이 갔다. 이름 그대로 바람 많고 먼지만 잔뜩 쌓이는 곳이지만, 마치 오랫동안 살아왔던 곳처럼 느껴졌다.
‘전군을 통째로 지휘하며 싸웠던 곳이라 그런 걸까?’
전에 파양주의 별동대 오천을 지휘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지휘라기보다는 같이 싸웠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그땐 부상을 당했지만 곽준방이라는 총대장도 있었다.
그런데 이 풍소성은 그야말로 광운의 한마디에 좌우됐었다. 삼천이 넘는 군병을 말 한마디, 신호 하나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아마 광운이 이 풍소성에 색다른 애착을 느낀다면, 바로 그게 이유일 게다.
‘우선 성 밖에 있는 유군부터 불러들여야겠군.’
자신이 파양주의 잡가군에 소속된 이상 마용승의 말은 어길 수 없는 군명이다. 이천여 명의 풍소성 군병들의 목숨이 안타깝지만, 이 역시 전국이라는 시대가 그려 내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겠소.”
짤막한 대답으로 광운은 전령을 돌려보냈다.
“대체 무슨 전갈이오?”
전령이 왔다는 걸 알려 줬던 수문 장수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광운은 무시해 버렸다. 어떻게 파양주의 잡가군이 철수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광운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편월을 찾는 것이었다.
3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계속 이 성에 남아 싸운다는 건 배알 없는 병신이나 할 짓이다!
마용승의 전갈을 받은 광운이 파양주의 잡가군 사이에 은밀히 퍼뜨린 말이었다.
비록 짤막한 말이었지만, 파양주 잡가군이 보여 준 반응은 광운 자신도 놀랄 정도로 격렬했다. 그들은 곧바로 진중반란에 착수했던 것이다.
말을 퍼뜨린 광운이 그 사실을 안 건 이미 계획이 수립되고, 그걸 막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였다.
“광운 장군, 말리지 마시오! 우리들은 애당초 이 성과는 연관이 없었소. 그런데도 목숨 걸고 지켜 줬건만,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를 좀 들어 보시오! 그래도 참으시겠소?”
파양주 잡가군의 소규모 부대의 지휘자 중 한 명인 두건득杜根得이라는 자로, 진중반란의 주모자였다. 평소에도 광운을 잘 따랐던지라 그가 아침부터 도인걸에게 수모를 당한 것도 참을 수 없었는데, 저런 말까지 나돌자 앞장서서 사람들을 선동했다.
광운으로선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리란 건 예상치도 못했고, 그저 잡가군 철수의 명분만 찾으려 했을 따름이었다.
“이러지들 마시오. 우리는 그냥 떠나면 그만이잖소! 만약 우리들이 여기서 일을 벌인다면, 뒷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이오. 풍소성에 투입됐던 파양주 잡가군은 한때의 분기를 참지 못해 대세를 그르친 용렬한 자들이라고 말이오!”
광운은 흥분한 잡가군을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말을 했다.
사실 잡가군은 어떤 위험한 작전도 감수하고, 정규병의 수모도 악착같이 참아 낸다. 그건 바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지켜야 하는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게 아니다. 비록 오늘은 이편에서 싸우고 내일은 저편에 몸담는 삶일지라도, 결코 고용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긍지였다. 그래서 잡가군엔 간인이 없다.
비록 패한 전쟁이라는 판단이 서면 미련 없이 몸을 빼기는 하지만, 그게 고용주에 대한 배반은 아니다. 그들이 머물러 있어도 어차피 고용주는 멸망할 테니 말이다.
하긴 엄밀히 따지자면 이들이 진중반란을 일으켜도 고용주를 배반하는 건 아니다. 이들은 엄연히 파양주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풍소성을 도우라는 명을 상림호로부터 받았다. 그건 곧 마용승이 내린 명과 같다. 광운은 이 점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광운의 말은 확실히 먹혀들었다. 명령에 불복하게 되면 이들은 당장 통행증을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파양주의 마용승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면 맘 놓고 다니지도 못한다는 얘기다.
잡가군이 술렁거렸다. 따지고 보면 광운은 그들과 같은 잡가군이다. 누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미래의 위험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는 각성이 그들의 뇌리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운은 계속 조여들어 갔다.
“우리가 필요 없다는 곳에서 목숨 바쳐 싸울 이유는 없을 것이오. 나는 돌아가겠소! 이 일로 인해 문책이 있다면, 나는 당당히 따지겠소. 과연 어느 쪽에 과실이 있는지 만천하에 밝히겠소!”
“와아!”
“그렇다. 광운 장군을 따르자!”
연방 함성을 지르는 잡가군을 보며, 광운은 차라리 서글퍼졌다. 이 얼마나 순박한 인간들이란 말인가. 우직하게 무용 하나만을 자랑으로 걸고 살아왔기에, 이처럼 얕은 말 몇 마디에 선동되어 움직인다.
그에 비해 도인걸의 작태를 보면 한심스럽다 못해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일이 이처럼 악화되었는데도 그는 방관만 하고 있다.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사주군의 절반 이상을 동원해서 포위를 한 상태로 말이다.
‘사주는 저 작자 때문에 망한 거다!’
이쯤 되면 도인걸은 만사 제쳐 놓고 잡가군에 사과를 하고 그들을 잡아야 한다. 주인인 천세기가 직접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이겠지만, 그로선 체면이 있으니 쉽게 허리를 숙이지 못하리라.
하지만 도인걸은 천세기의 신하이자 부하 장수다. 주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잡가군의 발이라도 씻어 줘야 될 입장이란 얘기다. 그게 약한 자가 전국난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책이다.
그런데 도인걸은 자신의 신분만 내세우고 있다. 저래서는 자신의 몸은 물론 주인 가문의 제사까지 끊기게 할 게 뻔하다.
“정말 가는 거야?”
곁에 있던 편월이 여전히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부턴 혼자 싸우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나마 이 정도 풀린 것이었다.
“그래, 돌아간다!”
“영욱성으로?”
“아니, 효명성으로!”
“심심하겠군.”
편월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싸우지 않을 바엔 효명성보다는 유화가 있는 영욱성으로 가고 싶었다.
“효명성이 왜 심심하지? 상 공자와 친해지지 않았나?”
상 공자란 바로 상림호의 아들인 상가웅을 가리킨 말이었다.
“그 애는 너무 약해. 놀지도 않고 책만 읽고.”
“뭐?”
다소 엉뚱하다 싶은 편월의 대답에 광운은 얼핏 상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들이 너무 유약하다며 걱정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가웅의 나이는 올해 여덟 살이라고 했다. 편월보다 두 살이 더 많았지만, 덩치는 오히려 조금 더 작아 보였다.
“그런데 상 공자는 어떤 책을 읽고 계시더냐?”
“몰라!”
편월이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을 때, 두건득이 재빨리 걸어오며 말했다.
“철수 준비가 끝났소이다!”
두건득의 목소리는 컸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도인걸이 들으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도인걸은 잡가군이 반란을 일으킬까 감시하고 있을 뿐 아직 그 뻣뻣한 허리를 숙일 각오는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소. 삼백만 남기고 나머지는 두 형이 인솔해서 은밀하게 북문을 빠져나가시오!”
“약속대로 무한천無限川에서 기다리겠소.”
무한천이란 파양주와 사주의 경계를 형성하는, 아주 작은 개울이다. 거기에 이처럼 거창한 이름을 붙인 건, 물이 귀한 지방이라 그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해 질 때까지도 우리가 도착하지 않거든 망설이지 말고 효명성으로 들어가시오!”
낮지만 단호한 어투로 광운은 강조했다.
다른 일이 아니다. 너무 갑작스레 내려진 철수 명령이라 미처 밖에서 움직이고 있는 유군을 귀환시키지 못했다. 광운은 삼백 명을 이끌고 그들과 합세해서 철수할 작정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두건득은 정중한 군례를 갖춘 후, 대오를 정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잡가군에게로 달려갔다.
광운은 도인걸을 슬쩍 쳐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었지만, 그래도 만류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자존심을 세웠다는 자기만족을 위해 제 몸을 죽이고, 그 주인과 백성을 죽일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광운은 일부러 냉정하게 도인걸 앞을 지나쳐 갔다. 그의 바보스러움 때문에 죽어 갈 이천여 성병의 생때같은 목숨을 생각하면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일 터였다.
“서두릅시다. 이따위 성에선 촌각도 지체하기 싫소이다!”
“명령만 내려 주시오. 타는 불 속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다!”
유군와 합류하기로 한 삼백 명은 일제히 한마디씩 하며 광운을 맞았다.
광운은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워낙 위험한 일이니만치 이들은 모두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풍소성에 남아 있었던 파양주의 잡가군 칠백이 모두 자원했었다. 그들은 광운과 함께라면 목숨을 버려도 좋다고 했었다.
그러나 광운의 생각은 달랐다. 적은 숫자의 병력을 둘로 가르는 게 얼핏 봐서는 자살 행위 같지만, 차라리 그편이 더 낫다. 적도 이편에 어느 정도의 군병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을 터, 소규모 인원만 출동한다면 유인하는 걸로 비칠 수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건 뒤를 기약할 수 없는 도박이다. 적들이 속지 않고 그대로 짓밟고 들어온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일부러 소수를 고집했고, 자원자들 중에서도 다시 골라 삼백을 채웠던 것이다.
“자, 출발합시다!”
질풍에 오른 광운은 가장 먼저 북문을 빠져나갔다. 옆에 편월을 단단히 붙여 둔 건 물론이었다.
그 뒤를, 두건득이 이끄는 사백 남짓한 잡가군이 따랐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큼직한 짚단 뭉치를 말꼬리에 매달고 있었다.
성을 나온 그들은 곧바로 북쪽을 바라고 빠르게 말을 달렸다. 가뜩이나 먼지 많은 사주 땅에, 꼬리에 짚단 뭉치를 매단 말들이 질주하니 그야말로 온 하늘에 먼지구름을 자욱하게 피워 올렸다.
그렇게 십 리 정도 달리자 야트막한 구릉이 나왔고, 그걸 넘자마자 광운은 말 머리를 왼쪽으로 틀었다.
두건득은 그대로 달렸다. 삼백여 기가 빠졌음에도 먼지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저만하면 최소한 오천 이상의 병력이 움직이는 걸로 보이겠군!”
이게 바로 광운이 노린 점이다. 후방에 저처럼 자욱한 먼지를 피워 두고 유군과 합류해 후퇴한다면, 적들은 ‘혹시?’ 라는 마음에 쉽게 추적을 하지 못하리라.
“자, 우리도 서두릅시다. 유군이 저 먼지를 보고 당황할 수도 있으니 말이오!”
성에서 유군에게 합류하자는 깃발 신호는 보냈지만, 자세한 건 알릴 수 없었다. 물러가는 아군들을 보고 당황해할지도 모르니 조속히 합류해야만 한다.
광운은 마구 말을 달렸다. 어차피 적에게 보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구태여 은밀히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저기!”
돌연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던 편월이 우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광운도 진즉부터 보고 있던 광경이었다. 오른쪽으로 길게 누워 있는 산속에서 희끗희끗 사람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인가, 아군인가?”
마치 이제 막 본 것처럼 광운은 물었다. 편월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적의 기치야. 하지만 저 속엔 우리 편이 있는 게 분명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적의 기치가 움직이는 게 너무 어지러워! 저건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거야.”
“잘 봤다!”
광운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치의 움직임만으로 그 군의 상황을 파악하는 편월을 누가 여섯 살짜리 꼬마라고 할까. 이럴 땐 그저 대견스럽기만 했다.
“이럴 때 편월이라면 어떻게 할까?”
광운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몇 마디 말보다는 이런 군사적인 문답을 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
“우선 화살로 저 기치가 있는 곳을 공격할 거야!”
“왜?”
“거기 적이 있으니까!”
별 싱거운 질문도 다 받아 본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고는, 편월은 자그만 활을 꺼내 들었다. 두 손을 놓은 승마도 벌써 상당히 익숙한 솜씨를 보였다.
“정지! 모두 활을 준비하시오!”
저 자신도 활을 꺼내 살을 먹이며, 광운은 고함을 질렀다.
“어딜 쏴야 할지는 잘 아실 게요. 다른 명이 있을 때까지 계속 쏘며, 한껏 고함을 지르시오!”
명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광운은 자신이 가장 먼저 활을 쐈다. 편월의 말대로 기치를 향해 쐈다.
실제 싸움은 그보다 훨씬 전방에서 벌어지고 있을 테지만, 이런 땐 기치가 있는 곳을 노리는 게 정석이다. 거기엔 적의 지휘관이 있을 게 분명하고, 또 싸움판의 너무 가까운 곳을 쏘다 보면 아군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우와아아-!”
“이거나 먹어라. 막주의 촌놈들아!”
삼백의 잡가군도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광운의 명대로 고함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개가 욕설이었다.
전쟁터의 욕이란 게 그렇다. 너무 거칠고 험해서 그대로 듣기 민망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저 함성을 올리길 바랐던 광운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편이 그냥 함성을 지르는 것보다는 효과가 좋다. 인간이 하는 전쟁인지라 듣기 거북한 욕을 들으면 발칵 성미가 치미는 게 정상이니까 말이다.
적의 기치가 보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계속 발사! 전통이 빌 때까지 쏘시오!”
다시금 독려하며 광운은 특유의 궁술을 발휘했다. 숫자에 상관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화살을 날렸다는 말이다.
맞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이건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아군과 합류해 후퇴하고자 하는 작전이다.
게다가 지금 표적은 산에 있다. 나무들에 가려, 제대로 겨냥해 쏜다고 해도 맞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리고 곧바로 효과가 눈에 보였다. 한층 더 혼란스럽게 흔들리던 적의 기치가 이쪽을 향해 정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요! 있는 대로 화살을 모두 쏟아 부으시오!”
재차 명을 내리며, 광운은 질풍을 서서히 움직였다. 적에게 쫓기고 있던 아군들이 산에서 내려올 만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기치를 정렬한 채 적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이쪽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탓이리라.
적의 이런 망설임을 그대로 흘려 버릴 광운이 아니었다.
“자, 전력 질주!”
한편으론 활을 쏴 대면서, 광운은 질풍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일부러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는 틈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유군과 합류해야 한다.
화살보다 더 맹렬한 건 잡가군의 욕설이었다. 적으로 하여금 유인전으로 믿게 해야 되기에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처럼 거친 욕설은 유군도 들은 게 분명했다. 광운이 예상했던 곳보다 훨씬 우측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아군의 모습이 보였다.
“와아-!”
재차 잡가군이 함성을 올렸다. 이번엔 욕설이 아니라 반가움에 지른 소리였다.
유군과 합류한 광운은 퇴각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너무 빠르면 적들은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고 즉각 추적을 개시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무사히 무한천에서 기다리던 두건득과 합류했고, 곧바로 효명성으로 들어갔다.
* * *
풍소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광운이 효명성으로 철수한 후 사흘 뒤에 들려왔다.
성을 차지한 막주군의 만행은 귀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항복한 병사들까지 모두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가 하면, 천세기는 물론 그 식솔들까지 모두 목이 효수되었다.
명색이 무장이라고 도인걸은 끝까지 저항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그는 사로잡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역시 꼬챙이에 꿰여 죽었다.
그래도 그건 여자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만 했다. 풍소성에 있는 여자라고 해 봐야 천세기의 가족이나 시비들이 고작이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을 때까지 막주군에 의해 윤간을 당했고, 그 시신들 역시 병사들과 마찬가지 취급을 당했다.
당연히 상림호는 영욱성에 있는 마용승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 전령과 엇갈리듯 곽준방이 오만에 이르는 파양주군을 이끌고 와 효명성 십 리 밖에 진을 쳤다. 마치 풍소성이 떨어지길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막주군도 그냥 있지 않았다. 풍소성을 철저히 유린한 저우의 선봉대는 무한천까지 진격해 영채를 세웠고, 그 뒤를 받치듯 목철린의 본대가 가세한 것은 이월도 저물어 가는 이십오 일의 일이었다.
사주를 희생물로 삼은 파양주와 막주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전쟁이 무려 칠 년간 계속되리란 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