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개전沙州開戰
1
영창원년 이월 삼일.
서북에서 불어오는 바람 끝에서 냉기가 조금 가셨다 싶자, 목철린은 막주의 칠만 대군을 삼로三路로 나누어 사주의 남쪽 경계를 일제히 무너뜨리고 짓쳐 들었다.
물론 당당히 앞세운 명분은 있었다. 황명을 받들어 파양주의 마용승을 치고자 하니 길을 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평소 전쟁 준비가 빈약했던 사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목철린이 침공한 지 이틀 만에 사주의 주인인 천세기天世基는 본성인 함월성含月城을 버리고 풍소성으로 급거 피신했고, 백성들의 피난 행렬이 그 뒤를 이었다.
천세기가 풍소성으로 입성한 후, 광운은 부쩍 바빠졌다. 그동안 베어 뒀던 나무들을 운반해 성 밖에 견고한 목책을 쌓고, 또 기존의 성병들과 효명성에서 온 잡가군의 손발도 맞춰 봐야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닷새 정도의 여유는 있다. 그 전에 이 성을 최대한 단단하게 만들어 둬야 한다.’
목철린의 성격이 어떤지는 광운도 알고 있었다. 그 밑에서 잡가군 생활을 한 건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목철린은 원래 변방을 떠돌며 비적질이나 일삼던 자였다. 그랬던 놈이 어떻게 때를 잘 만나 대륙의 남방을 떡하니 차지하고 패주가 되었다.
하지만 근본이 그런지라 목철린은 자기가 정복한 땅은 철저하게 약탈했다. 광운이 닷새의 여유가 있다고 한 것도 바로 거기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쯤 놈은 함월성에 있는 재보를 약탈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통상적인 것보다 배나 큼직한 거마창拒馬槍(통나무에 창을 붙여 적 기병의 돌격을 막는 무기) 하나를 땅에 단단히 고정시킨 광운은 시선을 돌려 성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보았다.
‘이 작은 성에 다 수용할 수는 없다. 효명성의 상 장군에게 도움을 청해야겠군.’
살겠다고 찾아온 백성들을 내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을 맞아 싸우기에도 협소한 성이고 보면 오는 대로 다 수용할 수도 없으니, 경계를 넘더라도 백성들을 효명성으로 피신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가자, 편월.”
곁에서 자기보다 더 큰 통나무와 씨름하고 있는 편월을 불러 광운은 질풍에 올라탔다. 수성 장수인 도인걸을 찾아가려 함이었다.
그러나 도인걸이 먼저 광운을 찾아왔다.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희색이 만면했다.
“들으셨소? 파양주에서 원군 십만이 출발했다고 하더이다!”
‘그 때문이군.’
도인걸의 말을 들은 광운의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건 바로 자신이 낸 소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풍소성으론 많은 수의 난민들이 밀려들고 있다. 그들 중엔 적의 간인들도 분명 섞여 있을 터, 광운은 그들을 역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있지도 않은 말을 퍼뜨렸던 것이다.
물론 도인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고 있는 기분을 깰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언제고 지원군은 올 터이고, 그 숫자가 미리 십만이라고 딱 정해진 것도 아니니 거짓말을 한 건 결코 아니다.
“그보다 십만이나 되는 원군이 오면 이 근처는 군사들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을 것이오. 그러니 피난민들은 우선 효명성으로 옮겨야겠소. 도 장군께서 상 장군에게 연락을 좀 해 주시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오. 그런데 원군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소? 거기에 맞춰 이것저것 준비도 해야 되는데.”
“사주의 위급은 벌써 마 성주께 보고되었을 거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다 보면 원군이 당도할 거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피난민부터 수습하는 게 우선일 거요.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는 원군이 와도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을 거요.”
“알겠소. 우선 전령을 보내고, 병사들로 하여금 난민들을 호송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말한 후 도인걸은 나는 듯이 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원군이 온다는 소문만으로도 저처럼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광운은 도인걸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이왕 탄 말이었으니 전장이 될 성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볼 생각이었다.
‘이 근처엔 오백 정도 매복시킬 수 있겠군.’
“나 여기 숨어 있을래!”
광운이 생각한 것과 동시에 편월이 작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말했다. 그의 눈에도 이 근처가 매복하기 딱 좋게 보인 것이었다.
‘이건 내가 지나치게 많이 가르쳤는지도 모르겠군.’
이제 여섯 살이 된 꼬마가 군사 작전에 대해 안다는 건 반가운 일만도 아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다른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견한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매복을 두면 좋겠다는 건 어지간히 용병술에 뛰어난 장수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다. 편월이 안다는 건 그만큼 뛰어난 장수가 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 숨어서 뭘 하려고?”
질문을 던져 놓고 광운은 내심 ‘아차’ 싶었다. 결코 이런 걸 물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숨어 있다가 적장이 나타나면 쏠 거야!”
“여기에 매복을 두는 건 다른 사람에게 시키도록 하자.”
말을 하면서 광운은 여기서 성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십 리 정도는 되겠군.’
그렇다면 그 사이에 영채 하나 정도는 세울 수 있을 터였다. 성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이면 적당할 것 같았다.
‘여긴 잡가군 중 삼백 정도만 매복시켜 두자.’
우선 나머지 칠백으로 성 밖의 영채에서 적의 선봉을 막고, 매복했던 삼백은 유군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며 광운은 말을 몰았다.
그 뒤를 편월이 묵묵히 따랐다. 자기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지만, 군사작전에 대한 것이라면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돌아가자, 편월!”
대충 한 바퀴 돌아본 광운은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영채를 세우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한다.
* * *
목철린의 막주군 선발대 일만이 모습을 보인 건 광운의 예상대로 오 일 뒤인 이월 십일이었다.
성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세운 영채에 있던 광운은 황급히 밖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적들이 적정 거리에 들어오면 매복해 있는 아군에게 알려 줘야만 한다.
‘조금만 더 오너라!’
밀려드는 적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일만이나 되는 군사가 한데 뭉쳐, 앞에 있는 건 뭐든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이다, 편월!”
광운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월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 즉시 한 발의 향전이 대기를 찢으며 허공으로 쏘였다.
“와아앗!”
“매복이다!”
“당황하지 마라! 놈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대열을 흩트리지 말고 진군!”
고작 삼백에 불과한 인원이었지만, 기습 공격이란 건 언제나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거칠 것 없이 밀려들던 적들이 삽시간에 혼란에 빠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 활을 준비하라! 거마창도 세워라!”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광운은 명을 내렸다. 매복조들은 벌써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이제 이 영채에 있는 칠백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야만 한다.
와두두둑-!
광운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여 기가 일제히 달려 나갔다. 전방에 거마창을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발사 준비 완료!”
병사들의 보고가 있자 광운은 즉각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두 삼 대로 나눈다. 앞 열이 먼저 쏘고 나면 곧바로 뒤로 돌아가도록!”
잡가군에 소속된 자들은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다. 광운의 한마디에 벌써 그들은 세 개 조로 나누어 위치를 잡았다.
“매복조 철수!”
이어진 광운의 한마디에 편월이 재차 향전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거마창을 설치하러 갔던 백여 기가 돌아와 그들 역시 활을 들고 맨 뒤 열에 가담했다.
신호에 따라 매복해 있던 자들이 정연하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별 피해는 없는 것 같군.’
삼백 명을 매복시켜 뒀을 때, 광운은 그들 중 삼분지 일 정도는 잃을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물러가는 걸 보니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놈들은 매복조를 쫓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뒤에 소탕해도 될 터, 적들은 곧바로 성을 짓밟으려 들 게 분명하다.
“모두 말에 타라! 놈들이 곧 밀려올 것이다!”
적은 기마대를 앞세우고 들이칠 게 분명하다. 기동력에서 달린다면 아예 싸움이 되지 않는다. 활의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이게 더 중요하다.
명에 따라 잡가군은 일제히 말에 올랐다. 그들도 광운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아는지라, 승마한 뒤에도 대열을 흩트리지 않았다.
와두두두둑-!
광운의 예상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매복조에 걸려 잠시 혼란에 휩싸였던 적들이 재차 대오를 갖추며 성을 향해 밀려들어 왔다.
“명심해라! 각자 세 발의 화살을 쏜 뒤엔 성으로 철수한다! 낙오자를 기다릴 여유는 없다! 그러니 낙오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유군과 합류하라!”
광운은 재차 고함을 질렀다. 숱한 전장을 떠돌았지만, 늘 이때가 가장 긴장되곤 했다.
“편월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오늘 광운은 편월을 업지 않았다. 피아가 마구 뒤섞여 벌이는 난전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게 광운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예상이 다 맞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맞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전장에선 어떤 변수가 작용될지 알 수 없기에 모든 일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법이다. 편월에 대해선 너무 허술했던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새삼 편월을 업을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혼자 말을 타고 참가한 전쟁이라 싫다고 할 것이 뻔하다. 그 일로 옥신각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사이에도 적들은 꾸준히 거리를 좁혔다. 바로 앞에 거마창이 있다는 건 그들도 알지만, 한 번 기세를 탄 진군 속도를 늦추지는 않을 터였다.
전쟁엔 어디나 기세라는 게 있다. 저들이 만약 앞에 설치된 거마창에 주춤한다면, 그건 곧바로 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선두의 몇 기가 희생되더라도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드디어 적의 선두가 거마창에 부딪쳤다.
와두두둑-!
가장 앞서 달리던 오륙십 기의 말들이 거마창에 꿰어 뒹굴었고, 그 뒤를 따르던 수십 기 역시 그대로 무너지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의 오천에 달하는 적의 기마대에서 불과 백여 기의 피해는 표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선두가 무너지면서 적의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퓨퓨퓨퓨퓨퓨웅-!
명령은 필요 없었다. 전쟁에 닳고 닳은 잡가군은 바로 지금이 활을 쏠 때라고 판단했고, 그들은 미련 없이 화살을 날렸다.
정말이지 잡가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말을 탄 채 삼교대로 화살을 날리면서도 대열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자, 퇴각한다! 뒤처지지 마라!”
각기 세 대의 화살을 날렸을 때, 광운은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달렸다. 지금부터 성으로 철수해서 농성을 해야만 한다.
물론 철수한다고 해서 냅다 달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연방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잡가군은 뒤를 향해 활을 쏘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선 편월도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지지 않았다. 비록 활은 작고, 아직은 힘이 모자라 멀리 쏠 수 없어 적을 맞히는 건 힘들었지만, 꾸준히 전통箭筒을 전 통 비워 갔다.
그건 낭비인 게 분명했지만, 광운은 말리지 않았다. 지금 편월에게 필요한 건 당장 적을 한둘 죽이는 게 아니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
피퓨퓨퓨-!
성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성루에 있던 도인걸의 병사들도 활을 쏴 댔다.
거기에 맞춰 잔교도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달려라! 늦으면 입성할 수 없다!”
잔교는 짧은 시간 동안만 내려지리라. 설사 아군 중에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손 쳐도 오래 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광운 자신은 뒤로 처졌다. 아군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성에 넣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처지지 마라, 편월! 그대로 달려!”
자신을 따라 속도를 늦추는 편월에게 광운은 고함을 질렀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성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광운의 뜻을 알아챈 누군가가 편월이 탄 말의 갈기를 휘어잡고 같이 달렸다.
‘고맙군!’
광운은 그 사람에게 속으로 인사를 했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쉽게 들을 편월이 아니기에, 저런 수단도 필요한 것이다.
“활 공격은 성병들에게 맡긴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라! 달려!”
후미로 처진 광운은 마구 잡가군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정작 광운 자신은 뒤를 향해 연방 활을 쏘았다.
광운의 궁술은 독특했다. 전통에서 몇 개의 화살이 딸려 나오든 그대로 발사했다. 그게 두 개든 세 개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게 또 쏘는 족족 명중이었다. 비록 갑옷 때문에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에게 주는 위축감은 상당했다. 광운의 뒤로는 적들이 멀찍이 떨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잡가군의 선두는 벌써 잔교에 도착했다.
“서둘지 말고 건너라! 얽히면 더욱 늦어진다!”
성으로의 철수 때 가장 위험한 게 바로 이런 순간이다. 잔교 앞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 보면 의외의 불상사가 생긴다. 예를 들면 서로 부딪쳐 해자로 낙마하는 경우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잡가군은 이런 일에 경험이 많았다. 오히려 정규군보다 훨씬 질서 정연하게 잔교를 건너 성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통을!”
해자 근처에 다다른 광운은 성루에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쳐 전통을 달라고 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건 벌써 다 쏴 버린 뒤였다.
순식간에 주변에 떨어진 십여 개의 전통을 광운은 재빨리 낚아챘다.
동시에 질풍은 그 자리에서 맴을 돌게 하며, 광운은 다시 손에 잡히는 대로 화살을 마구 쏘아 댔다. 여기서 자신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줘야 아군이 보다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가한 광운의 화살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적들은 일제히 잔교가 내려진 풍소성의 남문으로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들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광운은 마주 활을 쏘았으니, 어지간한 갑옷은 그대로 뚫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성루에서 던져 줬던 전통의 화살들도 벌써 바닥이 나 버렸다.
그제야 광운은 질풍의 머리를 잔교 쪽으로 돌려세웠다. 아군들 대부분이 무사히 입성한 것 같았다.
“잔교를 올려라!”
잔교까지의 거리는 백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활을 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멀리까지 떨어지게 된 모양이었다.
“잔교를 올려라!”
재차 소리치는 것과 함께 광운은 질풍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부터야말로 최대한의 속도가 필요한 때다. 잔교가 완전히 올라가기 전에, 또 그 안의 성문이 닫히기 전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잔교는 빠르게 올라갔다. 애당초 대기하고 있던 수성 무사들과 방금 들어간 잡가군이 합세를 했을 테니, 평소보다 빠른 건 당연했다.
“달려라, 질풍! 저걸 건너지 못하면 오늘 밤은 찬 바람 속의 노숙이다!”
짐짓 여유 있는 얘기를 내뱉었지만, 이건 광운 자신을 위안하려는 데 불과하다. 과연 잔교가 올라갈 때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질풍은 더욱 속도를 냈다. 오랜 세월 동안 광운과 호흡을 맞춰 전장을 누빈 관록이, 짐승인 그에게서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광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광운은 재빨리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성루에 올라간 편월이 팔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위험해! 엎드려!”
광운은 오히려 편월이 걱정되었다. 뒤에서 추적해 오는 자들도 말만 달리는 게 아니었다. 그들도 화살을 쏘고 있으니, 저렇게 몸을 훤히 노출시킨다는 건 표적이 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그사이 질풍은 해자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아, 뛰어라! 질풍!”
벌써 일 장도 넘게 들린 잔교의 끝에 뛰어오르려고 광운은 질풍의 옆구리를 바짝 조였다.
파앗!
질풍의 뒷발이 지면을 강하게 박찼고, 말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따다닥!
질풍은 무사히 잔교에 내려섰다.
하지만 그건 앞발뿐이었다. 뒷발 중 하나가 미처 잔교에 닿지 못했고, 다른 한쪽 발도 미끄러져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광운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리며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질풍의 뒷발이 모두 허공에 뜨면 올라오기 힘들기에, 이렇게라도 도와야 한다.
힘겹게 버둥거리던 질풍은 간신히 올라섰고, 이번엔 광운과 더불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잔교가 벌써 절반 이상 올라갔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질풍도 늙었군.’
하긴, 질풍과 함께한 시간도 근 십 년에 이른다. 이번 풍소성 싸움만 끝나면 좀 쉬게 해 줘야겠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광우운-!”
이제 막 성으로 들어선 광운의 품에 편월이 폴싹 뛰어들었다.
“성문을 닫고 말뚝을 박아라!”
편월을 안아 든 채 광운은 수문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에 따라 급하게 철갑을 씌운 성문이 닫혔고, 쇠로 만들어진 빗장이 질렸다.
그 문 아래에는 직경이 한 자는 됨 직한 나무 말뚝들이 빼곡히 박히기 시작했다.
2
막주군의 선봉은 저우著宇였다. 이처럼 작은 풍소성을 치면서 싸움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일만 대군의 위용만 보여 주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리라 예상했다.
그걸로 함월성을 제대로 약탈하지 못한 아쉬움을 위안 삼으며 진군하던 차에 매복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거의 대비가 없다시피 해서 그 타격은 컸다.
게다가 풍소성 놈들은 성 밖으로 나와 진을 치고 자신들을 맞았다. 항복이 아니라 저항을 택했다는 의미였다. 중상자를 포함한 사상자가 천여 명에 이른다는 것보다 이게 훨씬 그의 자존심을 아프게 했다.
“쳐라! 해 지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라!”
악이 받친 저우의 목소리가 전군을 질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군,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일단 물러가서 영채를 세우는 게 시급한 일입니다!”
“닥쳐라! 이 코딱지만 한 성을 떨구는 데 무슨 영채가 필요하랴! 이대로 진군해서 성벽을 무너뜨려라!”
저우는 부하 장수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전군의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렸다.
“장군! 어찌 이러시오? 자고로 일군의 대장은 전군의 선두에 서서는 안 된다고 했소! 전체를 통솔하시오!”
또 다른 부하 장수 한 명이 저우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졌다. 이 작은 성을 떨구려다 자칫 총대장인 그가 전사라도 해 버리면 그야말로 이기고도 낭패를 보는 경우에 처하고 만다.
“급하게 출발하느라 우리에겐 변변한 공성 무기조차 없소이다. 하다못해 운제라도 만들어야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넘을 것 아니겠소!”
“우와아앗!”
저우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부르짖었다. 그저 북 한 번 울리면 문을 열리리라 여겼던 작은 성 하나에 발이 묶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차례 소리를 지른 저우는 차차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도 칠만에 달하는 막주군에서 고르고 골라 선봉의 중임을 맡은 역전의 장수다. 아무리 작은 성이라도 이대로 무모하게 쳐들어가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좋다! 일단 군사들을 오 리 밖으로 물러나게 하라. 영채를 세우는 즉시 장수들은 장군막으로 집결하도록!”
“존명!”
저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 장수들은 각자의 부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목木 자가 크게 쓰인 장군기가 움직이고, 그때까지 풍소성을 공격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모레면 본대가 도착한다. 그 전에는 반드시 낙성시켜야 한다!’
부하들이 철수하는 걸 보며 저우는 이를 갈아붙였다. 이 작은 성 하나를 본대가 도착한 뒤에야 무너뜨린다면 장수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된다.
“장군, 진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서 드시기를!”
“당장 군수장軍需將을 오라 하여라!”
“존명!”
선봉대의 군수 담당 장수를 부르도록 해 놓고서야 저우는 말 머리를 돌려 이제 막 설치된 장군막으로 향했다.
저우의 장군막을 막 빠져나온 군수장 곡규曲珪의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늘 중으로 충차 스무 대와 운제 오십 개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으니, 그저 아득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군문에서, 특히 전장에서 내려진 군명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곡규는 서둘러 병참 부대로 돌아가 부하 장졸 오백을 뽑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충차와 운제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작 곡규 자신은 백여 기를 이끌고 함월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번 공격에 병사 개개인이 준비하지 못한 방패를 가져오려는 것이었다.
지금 곡규는 당황하고 있었다. 풍소성의 저항이 이만큼 격렬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군수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면서도, 공성 무기는 물론 병사들의 개인 무기인 방패까지도 무겁다며 챙기지 않았다.
이게 곡규의 커다란 과오였다. 설사 저우가 속도만을 문제 삼아 며칠 치 식량만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더라도, 군수장으로선 필요한 것들은 모두 챙겼어야만 했다.
이 일로 인해 목이 달아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직은 주공께서 함월성 약탈의 뒷맛을 즐기고 계실 게다. 이때가 아니면 필요한 물자를 몰래 가져올 수 없다.’
바로 이게 곡규가 서두는 이유였다. 이 일이 알려지면 주공인 목철린은 물론 풍소성을 단번에 함락시키지 못한 저우까지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 빼도 박도 못하고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처럼 여유가 없는 곡규였기에, 주변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길이 험한 언덕을 끼고 크게 휘어질 때, 언덕의 정상에서 세차게 휘날리는 깃발을 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쨍, 씨이옷!
한 대의 화살이 투구를 맞히고 튕긴 뒤에야 곡규는 날카로운 파공성을 들었다.
“기습이다!”
이렇게 소리친 건 순전히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곡규가 이끈 부하들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어디에서 날아온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벌써 절반인 오십여 기가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물러서라! 적의 매복이다! 물러서!”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때는 물러서는 게 상책이다. 지나왔던 길에는 위험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 명에 따라 곡규의 부하들은 재빨리 이삼 리 정도 물러났다. 예상대로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생각을 하던 곡규는 비로소 적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최초로 선봉대에게 매복 공격을 감행했던 적들이 분명할 터였다.
그들은 풍소성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적의 숫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준비하고 기습을 감행했을 테니 다들 충분히 조심하도록!”
곡규는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안심시켰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불안감에 떨고 있는 건 곡규 자신이었다.
우선 적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고, 또 시간도 촉박하다. 매복에 걸려 허둥거릴 여유가 없었다.
곡규는 재빨리 부하 한 명을 불렀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남아 있는 병참 부대원을 모두 데리고 오너라. 저 장군은 물론 다른 장군들에게도 비밀로 하여라!”
“존명!”
부하는 즉각 복명하고 말을 몰아, 왔던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됐다. 모두 말에서 내려 사방을 경계… 엇!”
부하들에게 방어진을 구축하라는 명을 내리려던 곡규의 말이 중간에서 끊겨 버리고 말았다. 방금 나머지 병참 부대원을 모두 데려오라고 심부름 보냈던 수하가 저만치 달려가다 그대로 낙마해 버린 걸 본 탓이었다. 적의 화살에 꿰뚫린 게 분명했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매복해 있던 적들이 일제히 언덕 위에서 쳐 내려오고 있었다.
“후퇴하라! 후퇴!”
곡규는 망설이지 않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군령에 의해 목이 달아나는 건 나중의 일이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지금 당장 죽고 만다. 이미 죽거나 부상당한 부하들을 거둘 사이도 없이 그들은 이제 막 모습을 갖춰 가는 영채로 돌아갔다.
* * *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성 밖의 잡가군에게서, 적 백여 기를 쳤다는 보고는 그날 저녁 광운에게 화살로 날아들었다.
그 보고를 광운은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일만에 달하는 적병들 중 고작 백여 기를 쳤다고 해서 크게 표가 나는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지금 광운이 집중하고 있는 건 성 밖에서 전장 정리를 하고 돌아온 병사들을 살피는 일이었다.
크든 작든 하나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쌍방에서 사상자가 발생한다.
그러면 서로가 합의하에 일정한 수의 병사들을 투입하여 전사자는 매장하고, 부상자는 거둬들인다. 바로 이게 전장 정리라고 해서, 어느 전쟁터에서나 지키는 기본적인 일 중 하나였다.
이 일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크게 패해 모두 도주해 버렸을 때도 지킨다.
승리한 쪽이 적들의 전사자를 매장해 주고, 부상자들은 간단히 치료해 자기들 군에 배속시키거나,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
“적의 간인이 숨어든 것 같소.”
망루에 올라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을 지켜보는 광운에게 도인걸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런 얘기가 병사들 귀에 들어가면 사기에 영향을 미치기에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이나 들어온 것 같소?”
이번에 전장 정리를 하러 나갔던 병사들은 오늘 전투엔 직접 참가하지 않았던 도인걸 휘하의 정규군이었다. 그의 부하니만큼 낯선 자들은 정확하게 가려냈을 터였다.
“서른 명 정도 될 것 같았소.”
“흐음!”
서른 명 정도면 유사시에 성내에서 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적절하게 잡아내는 게 좋을 듯했다.
“다섯만 남기고 모두 잡아들이시오.”
“뭐요? 다 잡아들이지 않고 다섯을 남기라니?”
도인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간인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색출해야 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전장에선 적의 간인도 유용하게 쓰일 데가 있는 법이오. 서른은 너무 많으니, 다섯만 남기고 모두 추포하시오.”
“만약 밖에서 적의 공격이 한창일 때 간인들이 안에서 불이라도 지른다면…….”
“그러니까 다섯으로 줄이라고 하지 않소. 그 다섯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거요.”
“대체 어떤 방법으로 놈들을 이용하겠다는 거요?”
“그건 내게 맡기시오!”
광운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그로선 간인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또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 알겠소.”
그 서슬에 질린 도인걸이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물러갔다.
‘간인은 그대로 됐고,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겠군.’
광운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건 이 풍소성이 너무 좁다는 점이었다. 고작 삼백의 병사와 그 배가 넘는 백성들을 수용했던 성에, 사주의 주인인 천세기가 이끌고 온 병사 이천까지 합쳐 도합 삼천이 넘는 군사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전쟁을 할 때 군사들의 수가 많은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농성할 때도 그렇다는 건 결코 아니다. 당장 식량과 식수의 부족 문제가 대두되고, 이 풍소성의 경우엔 병사들이 밤에 잠을 잘 숙소도 부족했다. 민가를 다 활용한다고 해도 겨우 절반 정도의 장졸들만 수용할 수 있었다.
이건 곧바로 성병들의 사기와 직결되는 문제다. 적들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것만도 엄청난 압박인데,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자는 것까지 만족하지 못하면 투지 자체가 꺾이고 만다.
‘유군을 늘리면 되겠지만, 섣불리 병사들을 성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으니…….’
풍소성은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유군을 늘리자고 병사들을 내보냈다가는 자칫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적은 지금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이 전부가 아니다.
목철린이 직접 이끄는 본대 육만이 더 가세하면 이 근처는 그야말로 사람의 물결로 가득 찰 게다. 그때를 생각하면 성병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다.
‘이 성이 떨어지기 전까진 마 성주는 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효명성의 상림호는 이 근처까지 군사를 이끌고 출동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파양주에 적군을 들이지 않으려는 것이지, 직접 목철린과 싸우려는 건 아니다. 칠만 대군에 포위된 풍소성에 보급이나 제대로 해 줄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성 안에서 싸우는 거야?”
생각에 잠겨 있는 광운에게 편월이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응. 농성할 거야.”
“에이, 심심하겠군.”
“하하하! 왜 심심할 거라 생각하지?”
“한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적을 기다려야 하잖아.”
“걱정하지 마라. 편월이 생각하는 것보다 농성이란 게 훨씬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
“피이-! 물 마시려고 해도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뭐가 재미있어?”
“뭐라고?”
광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 성에 있는 우물은 모두 다섯 군데다.
몇몇 유지 급 백성들의 집에도 우물이 있긴 하지만, 그건 병사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만한 게 못 된다.
‘벌써 물 부족을 느껴야 하다니.’
광운은 씁쓸한 침을 삼켰다. 이런 일은 미리 예상했지만, 우물을 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겨울이라 땅이 얼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보다는 성벽 보수와 수성 무기를 제작하는 게 더 급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편월은 얼마나 기다렸지?”
“이각 정도!”
“그렇게 기다렸다 마셨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나? 편월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마셨어?”
“응. 물맛이 아주 좋았어.”
‘물과 식량을 철저히 관리해야겠군.’
아직은 병사들이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지만, 적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면 상황은 달라질 게 뻔하다. 이각을 기다리지 못해 우물에 뛰어드는 자도 속출할 것이다.
돌연 광운은 저쪽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잡가군 몇 명을 불렀다.
“지금부터 백 명을 이끌고 가서, 각 민가에 있는 우물을 모두 단단히 메워 버리시오. 또한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 다섯 곳은 철저히 감시하시오.”
“민가의 우물을 덮어 버리라니요? 가뜩이나 우물이 모자라는데?”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소.”
“알겠소!”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 사람은 한 떼의 잡가군을 이끌고 총총히 사라졌다.
“왜 우물을 메워? 더 파야 되는 거 아냐?”
편월의 질문을, 광운은 씁쓸한 미소로 흘려버렸다. 적의 간인을 다섯 명 남겨 두라고 했으니, 그들이 우물에 독을 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야 감시를 철저히 하면 되지만, 민가에 있는 것에까지 병사들을 배치할 수는 없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메워 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오늘 밤에 놈들이 공격해 올까? 나라면 공격할 것 같은데.”
편월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오른쪽으로 삼십여 리 떨어진 산중에서 불길이 확 이는 게 보였다. 지난 며칠 동안 풍소성 병사들이 벌목 작업을 했던 곳이었다.
“하하하!”
그걸 본 광운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편월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광운의 행동이 자신의 질문을 비웃는 것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오늘 밤 놈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아니 앞으로 며칠 동안 공격은 없을지도 모르지.”
“아니 왜?”
“오늘 낮에 적들의 모습을 봤나?”
“응.”
“이상하지 않았어?”
계속된 광운의 질문에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적들을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다. 평소라면 광운의 등에 업혀 자세히 봤겠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성에 들어오는 데 급급했다.
“오늘 적들은 공성 무기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저 불길은 아마 우리 유군이 적들을 공격하는 것이겠지. 적들은 충차나 운제를 만들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가 당한 것이 분명하다.”
“히야, 언제 그런 걸 다 봤어?”
“누누이 강조하지만, 전장에선 온몸이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 아군 모두가 볼 수 있는 건, 적군도 모두 볼 수 있겠지. 그 누구도 보고 들을 수 없는 걸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제대로 부하들을 지휘할 수 있고, 나중에 성을 하나 차지해도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말해 놓고 광운은 흠칫했다. 너무 비약적인 얘기를 했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편월은 심각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방금 들었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생각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많은 경험을 쌓아야…….”
문득 광운은 입을 닫았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죽영의 얼굴 때문이었다.
‘이대로 계속 편월을 전장에 데리고 다니는 게 옳을까?’
전쟁이 여자들에겐 형벌이라고 죽영은 말했었다. 그건 분명 자신에 대한 것일 터, 거기다 편월까지 떠안게 되면 그녀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그럼 난 앞으로 전쟁터에 더 많이 나갈 거야!”
편월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바로 저런 반응이 두려워 입을 닫았던 광운이었다. 이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선 편월에게 누구보다 철저하게 전쟁을 가르쳐야 하지만, 한편으론 죽영의 바람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갈등의 골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남겼다.
“왜 그래?”
광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편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다. 오늘은 별일 없을 것 같으니, 이제 쉬도록 하자.”
“알았어.”
제꺽 대답하며 편월은 그 자리에 몸을 뉘었다. 여기서 그대로 자려는 것이었다. 그 옆에 누운 광운은 편월을 안았다. 어떤 잠자리든 이들에겐 하등 불편하지 않았다. 아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말이다.
톡!
잔뜩 드리워져 있던 별들 중 하나가 떨어져, 서편 하늘로 긴 꼬리를 남기며 흘러갔다.
3
광운이 걱정했던 만큼 풍소성에 있는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적의 선봉을 보기 좋게 물리쳤고, 또 파양주에서 원군 십만이 곧 당도할 것이란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광운에게 반갑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십만 원군이란 말은 자신이 퍼뜨린 것인지라 사실과 다르다는 게 알려지면, 실망한 병사들의 사기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남은 간인들이 잘해 줘야 할 텐데…….’
성내에 침투했던 적의 간인 서른 명 중 스물다섯을 잡아 그 즉시 목을 베어 성루에 효수梟首해 버렸다. 나머지 다섯 명에 대해선 엄중한 감시를 붙여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광운은 그들이 파양주에서 십만 원군이 온다는 걸 적진에 알리길 바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위해 그들을 남겨 뒀던 것이다.
거기에 광운은 오늘 아침 한 가지 소문을 더 보탰다. 바로 파양주의 원군이 길을 돌아 목철린의 본거지인 막주 침사성沈沙城을 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이것만 제대로 전달되면 목철린도 쉽게 움직일 수 없으리라!’
원정 나온 군사들의 가장 큰 취약점이 바로 비워 두다시피 한 본거지에 대한 걱정이다.
전쟁의 승패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만에 하나 패했을 때 돌아갈 곳조차 없다는 건 원정군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지시한 일은 어젯밤에 완료했소. 곧장 보고하려 했으나 주무시기에…….”
“수고했소.”
민가의 우물을 모두 메워 버리라고 지시했던 자에게 광운은 가볍게 치하해 주었다.
“안 그래도 북새통을 이뤘던 우물 주변이, 이젠 아예 터져 나갈 지경이오. 작미성에서 온 우리들은 늘 물통을 채워 두고 있지만.”
그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난밤부터 성내에 있는 우물을 모두 돌아보면서 식수 문제의 심각함을 절실히 느끼고 한 말이었다.
“우물을 메우는 데 반대하는 자는 없었소?”
“없을 턱이 없지. 하지만 생각했던 거보다 격렬하지는 않았소.”
“오늘 전투도 그리 격렬하진 않을 거요. 병사들도 삼교대로 성루에 배치시키도록 하시오. 활을 준비하는 걸 잊지 말고!”
“알겠소. 그럼 이만!”
짤막하게 예를 갖춘 후 그자는 가 버렸다. 도인걸이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놈들이 왜 이리 조용한지 모르겠소.”
아침부터 적의 맹렬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도인걸이 의아한 듯 광운에게 말을 던졌다. 약간 불안해하는 눈빛이었다.
“적이 공격해 왔으면 좋겠소?”
“아니, 그게 아니라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 같아서…….”
“적어도 오늘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적의 동태에 대한 정보라도 있소?”
광운은 어제 있었던 유군의 활동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해 줬다.
“그럼 당분간 풍소성은 안전하겠구려. 그런데 파양주의 원군이 막주를 곧장 친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주공께서 꽤나 궁금해하시더이다.”
도인걸은 화제를 돌렸다. 사주의 주인인 천세기보다 자신이 더 궁금해 던진 질문이었다.
“거기에 관해선 정식으로 들어온 얘기가 없었소. 하지만 소문이 났다면 난 원인이 있을 것이오.”
광운은 슬쩍 말의 의미를 흐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최악의 경우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도인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로선 보다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파양주의 원군이 벌써 출발을 했다거나, 혹은 이 아침의 소문처럼 길을 돌아 막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광운 역시 여태 들은 얘기가 없다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 원군이다. 원군이 온다!”
바로 그때 성의 북문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올랐다.
광운과 도인걸의 시선이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과연 뽀얀 먼지가 아스라이 먼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오옷, 왔구나! 왔어! 당장 주공께 보고를 드려야겠소. 자, 그럼!”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채 도인걸은 달려갔지만, 광운은 저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상 장군이 잘해 주고 있긴 한데…….’
한마디로 저건 위장술이다. 아마 상림호는 지금쯤 효명성에 있는 전 기병은 물론, 백성들의 소나 양까지 동원해 먼지만 잔뜩 일으키고 있을 터였다.
그게 지금의 풍소성엔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저 먼지구름은 적들의 눈에도 분명 보일 게고, 오늘 아침에 낸 소문까지 더해진다면 적들은 틀림없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대로 적들이 물러나 주면 좋으련만…….’
물론 목철린이 완전히 철수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지금 성 밖에서 진 치고 있는 선발대가 사주의 주성인 함월성까지만이라도 돌아가 준다면 얼마간 여유가 생긴다. 그 틈을 이용해 보다 충실한 전쟁 준비를 갖출 수 있다는 게 광운의 계산이었다.
아니 적의 선발대가 굳이 물러가지 않아도 좋다. 일만이라면 그럭저럭 싸워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정말 원군이 오는 거야?”
원군이 온다는 북문 쪽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달려갔다가 돌아온 편월이 먼지구름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원군이 오지 않으면 편월은 싸울 수 없나?”
“아니!”
편월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원군은 싸우다 싸우다 안 되면 그때 청하는 거라고 광운이 그랬었잖아.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싸우기나 했나, 뭐!”
“하하하!”
광운은 웃었다. 이 풍소성에 있는 성병들이 모두 편월과 같은 마음이라면, 목철린의 칠만 대군과도 한 싸움 벌여 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뭐 하고 보내지?”
좁은 미간을 더 좁게 찡그리며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일이 없나?”
“적들도 며칠간은 공격해 오지 않을 거라며?”
“그건 내 예상이지. 적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여태 광운의 예상은 틀린 적이 없었잖아!”
“나라고 해서 다 맞히진 못해. 그러니 심심하다고 그냥 있지 말고, 가서 활을 쏘든가 칼을 휘두르든가 해.”
“아니, 말 타기 할래!”
“말 타기를?”
“응. 앞으론 혼자서 싸울 거니까 말을 더 잘 다룰 줄 알아야지!”
“혼자서 싸운다고? 너 설마…….”
“어제 혼자 말 타고 싸웠잖아. 이제부터 혼자 싸울래!”
“안 돼!”
자신도 모르게 광운은 언성을 높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돌아볼 정도였다.
편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광운이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적과 마주할 때보다 훨씬 더 질린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 말에 승복할 뜻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강압적인 광운의 태도에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잠시 광운을 노려보던 편월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성루에서 내려가 버렸다.
“편월…….”
서너 발짝 그 뒤를 따라가던 광운은 문득 발길을 세웠다. 편월의 자그만 등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완강한 거부감이 선명히 눈에 보이는 듯해서였다.
광운이 자신을 잡지 않는다는 게 편월은 더욱 화가 났다. 말리면 그의 말을 들어 줄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니 뭐라고 해도 앞으론 혼자서 싸울 작정이었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달려간 편월은 자신의 애마인 소질풍의 등에 올랐다. 한바탕 달리면 속이 좀 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마구간을 벗어난 편월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작은 풍소성이다. 그 안에 수용 인원의 몇 배에 해당하는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으니, 말을 달리기는커녕 그냥 걷기도 힘들 것 같았다.
‘뭐, 전쟁터에는 사람이 없었나!’
이런 생각이 스치자 편월은 곧장 말의 배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야, 이놈아! 다른 곳에 가서 타라!”
욕설과 허둥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편월은 질풍같이 말을 달렸다.
이처럼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다 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기마술을 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 * *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는 게 지금 저우의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현재 그의 수중에 들려 있는 두 개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본대의 출발이 지연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좋았다. 풍소성을 칠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까.
그러나 곡규에게 명했던 일이 적의 유군에게 걸려 실패한 건 물론, 오늘 새벽 본대에서 오던 보급대까지 당해 식량을 비롯한 모든 군수품이 홀랑 불타 버렸다는 건 분노를 넘어 차라리 슬퍼지는 소식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애당초 선봉을 명받았을 때, 풍소성 정도는 그냥 지나가는 길에 뽑아 버린다고 생각했던 저우다. 그래서 병사들의 기동력만 중시해 최대한 가벼운 무장에, 또 식량도 각자 사흘 치만 준비하라고 명해 뒀던 터였다.
바로 그게 저우의 목젖에 디밀어진 칼날과 같았다. 일만의 병사들이 당장 내일부터 굶게 생겼으니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대체 적의 유군은 얼마나 되던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여든 장수들 중 저우는 곡규에게 물었다.
“그게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적들은 화살만 퍼붓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이다.”
“쯧쯧쯧, 도대체!”
질책을 하려던 저우는 급하게 말을 끊었다. 여기서 언성을 높여 봐야 사기만 떨굴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들은 대로요. 각자 의견을 내 보시오!”
“오늘 중으로 성을 쳐서 떨구는 게 상책이라 생각되오! 비록 공성 무기가 없다고 해도, 밧줄을 이용하면 성벽을 넘지 못할 것도 없소. 뭐하다면 이 몸이 그 일을 해 보겠소!”
가장 먼저 나선 자는 부장 중 한 명인 저황著晃으로, 선봉대장 저우의 친동생이었다.
“기다려라. 다른 장군들의 의견도 들어 보자.”
저우로선 동생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임해 준 게 고마웠다.
하지만 군의 작전이란 건 일방적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자칫 동생에게 공을 세우게 한다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모두가 성벽에 달라붙어 있을 때 배후를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지금도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을 적의 유군도 염두에 둬야 하오!”
이번엔 유개劉价가 나섰다. 저우가 거느린 부장들 중 가장 뛰어난 무용을 지닌 자였다.
“그럼 유 장군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오?”
“군을 두 개로 나눠서 그 일대는 성 공격을 하고, 나머지는 그 뒤를 받치면서 적의 유군에 대비하는 게 좋겠소.”
“지금 풍소성엔 우리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적들이 있소. 아군을 둘로 나눈다면 성 공격은 그만큼 힘들어지오!”
“전군이 달라붙어 공격하다가 후미를 당하게 되면 차라리 힘들었던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 게요!”
“뭐라고?”
“그만!”
저황과 유개 사이에 벌어진 언쟁을 저우가 재빨리 제지했다. 장수들끼리 작전 회의상에서 칼부림이 벌어지는 일은 왕왕 있어 왔다. 더 격렬해지기 전에 말리는 게 상책이었다.
“유 장군의 말이 지당하다고 생각되오. 눈앞의 작은 성에만 집착하다가 배후를 당한다면, 책략 없는 싸움을 했다는 뒷말을 들을 것이오!”
부장 중 한 명이 동조하는 걸로 작전은 결정되었다. 저황이 군사 일천을 이끌고 성벽을 넘고, 다른 부장 셋이서 그걸 지원하기로 했다.
유군에 대한 건 저우 자신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기로 하고, 그들은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공격이 시작된 건 점심을 먹은 직후인 오시 말경이었다. 포향砲響과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적들은 거친 파도 같은 기세로 밀려들었다.
광운은 망루에 버티고 선 채 그 광경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건 분명 예상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천이 채 되지 않겠군.’
적의 숫자를 가늠하던 광운은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삼백의 유군이 삼천 이상의 역할을 해 주고 있군.’
이건 사실이다.
일만의 적병들 중 그 절반만 성 공격에 참가했다는 건 뒤에 남은 유군을 염려해 나머지를 남겨 뒀다는 의미다. 그만큼 농성에 대한 부담을 덜었으니 실로 든든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린 광운은 성루에 빼곡히 들어앉아 명령만 기다리는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사기가 충만한 얼굴들이었다.
‘적장이 누군지 몰라도 큰 실수를 했군. 이 싸움은 반드시 우리가 이긴다!’
만약 일만의 대군이 다시 한 번 밀려와 죽기 살기로 공격했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밖에 있는 유군 삼백이 아무리 설쳐 봐야 정식 싸움에선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적은 병력을 반으로 갈랐다. 삼천 대 오천의 싸움이라면 성을 지키는 건 물론, 경우에 따라선 이쪽에서 쳐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더 기다릴 거요?”
초조한 기색으로 도인걸이 달려와 물었다. 이런 전국난세에 드물게도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무장인지라 마음의 동요를 누르기 어려웠다.
“잘 보시오, 도 장군! 선두에서 달려오는 적병들이 어깨에 뭘 두르고 있소?”
“저건 밧줄이 아니오!”
“그렇소. 놈들에겐 변변한 공성 무기가 없으니 저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는 걸 거요. 그러니 충분히 끌어당긴 후에 활을 쏘는 게 좋겠소!”
“그러다 놈들 중에 한 놈이라도 이 성벽을 넘게 되면…….”
“비록 작다고 해도 한두 명의 적군이 들어왔다고 해서 어떻게 될 성이 아니오. 그러니 안심하시오. 미력하지만 이 광운이 적들을 물리쳐 보이겠소!”
평소와 달리 광운은 약간의 큰소리를 쳤다. 여전히 화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편월을 의식한 탓이었다.
“이 일은 우리 사주의 사직社稷이 걸렸소. 모쪼록 광운 장군만 믿겠소이다.”
“최선을 다하겠소!”
대답과 함께 광운은 장수기를 번쩍 쳐들었다. 이미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세기가 이끌고 온 사주군 이천에 대한 병권도 넘겨받은 상태다. 이 깃발이 한 번 펄럭이면 삼천의 성병이 한 사람처럼 움직일 터였다.
피피피피피유웅-!
어느 순간 온 하늘 가득 날카로운 파공성과 더불어 화살의 비가 성중으로 쏟아져 내렸다. 물론 적들이 쏜 것이었다.
그중에는 상당수의 불화살도 섞여 있었지만, 광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미리 불이 붙을 만한 곳엔 젖은 진흙을 잔뜩 발라 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적들의 다른 화살들도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벽 뒤에 웅크리고 있는 성병들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왔다!”
어느 순간 편월이 나직하면서도 힘찬 어조로 내뱉었다. 드디어 적들의 선두가 해자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젠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발사!”
미리부터 화살을 재어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아래를 향해 활을 쏘았다.
왈칵!
선두의 공격군 중 한 떼가 그대로 무너지며 해자에 처박혔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맞은 화살이라 피할 수도 없었고, 갑옷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광운이 노렸던 점이다. 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쇄도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사상자만 늘 뿐이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유군이 나서면 안 되는데.’
광운의 걱정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지금 유군이 성의 위기를 구한답시고 싸움에 뛰어들면 그들은 틀림없이 전멸할 터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적들에게 훨씬 무거운 중압감을 준다.
“광운!”
돌연 편월이 큰 소리로 광운을 부르며 성 아래쪽을 가리켰다.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광운은 재빨리 성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왜 편월이 소리를 쳤는지 알게 되었다.
‘지독한 놈들이군!’
성 아래에서는 적군들이 죽은 자들의 시체로 해자를 메우고 있었다.
그 시체들 중 일부는 그대로 바닥에 쌓여 성에서 쏘는 화살을 막는 방벽의 역할까지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