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편월 2-영창원년永昌元年 (10/66)

편월 2

영창원년永昌元年

1

영창원년永昌元年!

그렇다. 그해는 분명 영창원년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떠돌이 황실이 모처럼 천하에 선포한 연호年號가 바로 영창이었다.

물론 황실의 대가 끊긴 건 아니니 그 전에도 황제가 바뀔 때마다 연호는 제정되어 선포되곤 했었다. 다만 그게 천하 만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황제의 막후에 가겸후라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있어, 율천국의 힘이 미치는 모든 곳에 이 연호는 알려졌던 것이다.

거기서 가겸후는 한발 더 나아갔다. 율천국의 본성인 창일성 내에 지은 황궁에 황제를 넣어 살게 함과 동시에, 그 자신은 정식으로 칙허를 얻은 율천국왕이 되어 구석九錫을 하사받았다.

구석이란 바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홉 가지 물건을 말한다. 비록 왕이지만, 가겸후는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의 한 자락을 꺼내 보인 셈이었다.

그 일은 당장 천하를 진동시켰다. 정식으로 통보를 받았든, 아니면 흐르는 소문을 통해 알았든 간에 가겸후의 힘을 바탕으로 황실이 제 목소리를 냈다는 건, 각지에서 각자 왕이라 칭하고 패주로 군림하고 있던 사람들에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올 삼월, 즉 영창원년 삼월 초삼일에 황제의 국혼國婚을 치른다는 발표도 뒤따랐다.

하긴 황제의 혼인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떠돌아다니면서도 황실의 대가 끊기지 않은 걸 보면 늘 장가는 들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 국혼 통고서에 첨부된 가겸후의 첨언添言이 문제였다. 황제의 국혼 때 천하의 성주 급 이상 신분을 지닌 자들은 빠짐없이 참석하여 축하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축하 인사다. 황제는 틀림없이 궐주 창일성에서 국혼을 거행할 것이고, 멋모르고 거기에 참가했다가는 언제 가겸후의 칼날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갈 바보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불참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있는 것조차도 몰랐지만, 어쨌든 황제는 황제다. 노골적으로 거역하면 반역이 되고, 천하의 공적公敵으로 전락할 소지도 없지 않다.

어쨌든 가겸후의 이 대담한 행위는 천하의 공기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 * *

파양주 영욱성!

지난 보름 동안 거리 곳곳을 장식했던, 원단의 신神을 영접하는 깃발도 모두 철거되었고, 밤이면 늘 현란한 불꽃과 함께 터졌던 폭죽의 잔해들도 이 아침엔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오늘부턴 좀 조용해지겠군요.”

광운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며, 죽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쪽 하늘로부터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올해도 전쟁이 끊이질 않겠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눈이 많이 온 겨울 다음엔 전쟁 또한 많았소.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는 말이오.”

전쟁이 많겠다는 말에 죽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적응되고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도무지 이 전쟁만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죽영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오늘은 기필코 얘기하리라던 말을 입에 올렸다.

“올해부터는 편월을 전장에 데리고 가지 마세요.”

“아니, 왜?”

“그 애도 이제 여섯 살이에요. 글공부도 해야죠. 올해부턴 유화와 같이 제가 키우겠어요.”

“하하, 편월은 벌써 글자를 알고 있소.”

“네?”

“아직 제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읽는 건 문제가 없소. 가르쳐 보니 제법 잘 따라 하더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소?”

“전에 그러셨잖아요. 편월이 활약할 때가 되면 전쟁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전쟁이 없어지면 싸움으로 먹고살 순 없잖아요.”

“허어!”

광운은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에 꿈을 걸며, 그에 대해 대비하려는 여자란 존재가 정말 불가사의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만약 지금 당장 전쟁이 없어진다면 과연 살아갈 방편이 있을까?

‘없다!’

무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성주에게 종사했었고, 그 성이 망하자 낭인이 되어 전장을 뒹굴었던 한평생이었다. 싸움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모아 둔 돈도 없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이었기에 축재蓄財의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었다.

확실히 이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도 없다. 어떤 형태로든 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편월은 어떨까?’

지독하게 패한 전투의 끝 자락에서 편월을 만났었다. 언제까지나 이 난세가 지속된다고 생각할 때였으니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만 가르쳤었다.

편월은 그 모든 걸 무서울 정도로 잘 받아들였다. 부모에게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벌써 전쟁을 알고, 병사 한 명의 몫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그게 잘못됐다고 광운은 생각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일을 약속받지 못하는 전란의 시대에선 오직 살아서 오늘을 넘기는 게 최선이고, 그 점이라면 편월을 너무 멋지게 가르쳤다.

“하하하!”

돌연 광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편월은 아직 어리다. 뭐든 배워서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신과 똑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왜 웃어요?”

“아니오. 너무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그보다 얼른 대답해 주세요.”

“뭘?”

“편월을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점은 편월의 뜻에 맡겨 둡시다. 강제로 떼 놨다간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아이요. 어쩌면 혼자서라도 전장으로 달려갈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당신이 말려 주셔야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오. 요즘 편월이 유화랑 노는 데 푹 빠져 있는 것 같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 봅시다.”

“편월이 유화의 말을 들을까요?”

“글쎄, 어떨 것 같소?”

“당신을 닮았다면 듣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 말도 듣지 않았으니까.”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아무튼 올해부터는 편월을 데리고 전쟁에 나갈 생각은 마세요!”

다짐을 두듯이 하는 죽영의 말에 광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나서면 몰라도, 그 전에는 자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편월이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언제 삼층에 갈 일이 있거든 고 성주에게 넌지시 말해 주시오. 아마 올해 중으로 식읍이 내려질 것 같다고.”

“그래요? 잘됐네요.”

죽영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심으로 고욱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자기를 위한 것도 없지 않았다. 전직 한 주州의 주인 일가가 삼층에 버티고 있으니 그동안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좋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기반을 다 빼앗기고, 고작 천 호 정도의 식읍으로 살아가게 됐는데…….”

“그래도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잖아요.”

“그게 그렇게 좋은 거요?”

“좋지 않고요! 이 성에 볼모로 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요. 가족들과 떨어져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게 사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광운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여자들은 이처럼 자그만 것에서 행복을 느끼나 보다.

“그런데 볼모로 온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성 특유의 모성 본능이 발동된 탓일까. 묻는 죽영의 얼굴에 진심 어린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처음의 약속만 잘 지킨다면 그들에겐 별일 없을 거요.”

“약속이라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적대하지 않겠다는 것!”

“그게 지켜질까요?”

“응?”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을 볼모로 보낸 건 힘이 약해서예요. 만약 우리 파양주보다 더 강한 곳에서 압력을 가하면 그때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자식 하나를 위해 멸망을 택하는 곳도 있겠지만, 자식을 죽이고서라도 다스리는 백성들의 안녕을 바라는 영주도 없지 않을 거예요.”

“흐음!”

확실히 죽영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인지라, 그 힘에 따라 내일의 운명이 결정되어 간다. 고작 종이에 혈인血印을 찍고, 목숨 하나를 맡긴 걸로 그게 철석같이 지켜진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볼모로 온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겠지요?”

“너무 염려 마시오. 마 성주는 그렇게 용렬한 사람이 아니오!”

“어마나!”

“왜 그러시오?”

“당신이 한 성의 성주를 칭찬하는 건 처음이에요. 우리 성주님이 그처럼 훌륭한 분인가요? 제가 듣기론 야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건 여기 손님으로 오는 낭인들의 얘기겠지. 그들은 마 성주의 진심을 모르고 있소. 그저 겉모습만 보고 하는 얘기들을 다 믿지는 마시오.”

“당신은 마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 해?”

두 사람이 대화에 열중해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편월과 유화가 방으로 들어왔다.

“대체 뭘 하고 놀았기에 옷이 그 모양이냐?”

광운의 핀잔을 들을 정도로 편월의 옷은 지저분했다. 원단이라고 죽영이 새로 사 준 옷이었다.

“뭐, 그냥…….”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며 편월은 광운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그의 등에 손을 쑥 넣었다가 빼냈다.

“어헉, 차가!”

갑자기 광운이 펄쩍 뛰듯이 일어났다. 편월이 그의 등에 눈 뭉치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우헤헤헤헤!”

자기의 장난이 성공하자 편월은 배를 잡고 웃었다. 광운이 이처럼 보기 좋게 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인상을 팍 구기며 유화를 쏘아보았다.

“넌 왜 안 해?”

“어, 어떻게 감히…….”

그러고 보니 유화의 손에서도 자그마한 눈 뭉치가 녹아들고 있었다. 둘이서 각자 한 명씩의 등에 넣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리 오너라, 유화야.”

여전히 쭈뼛거리고 있는 유화를 죽영이 부드럽게 불렀다.

“네, 주인마님.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유화는 사과부터 했다. 못된 장난을 하려던 자신을 죽영이 나무라는 줄로만 알았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유화는 내 등에 눈을 넣지 않았지?”

“어, 어떻게 주인마님께…….”

“그 주인마님이란 말은 하지 말라고 했지?”

“네, 네에…….”

“난 유화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유화도 날 언니라고 불러. 알았지?”

“네…….”

“그런데 왜 내가 사 준 옷은 입지 않았니? 그 옷은 어떻게 했어?”

그러고 보니 유화가 입고 있는 옷은 새것이 아니었다. 깨끗하긴 했지만, 거의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주인 마, 아니 어, 언니께서 사 주신 옷이 너무 좋아서…….”

호칭도 어색하고, 또 옷 때문에 미안해진 유화는 다 녹아 버린 눈이 남긴 물기를, 마주 잡은 손가락으로 짓이기고 있었다.

“옷은 얼마든지 새로 사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입어. 이건 여름옷이라 겨울엔 춥잖아.”

“괘, 괜찮아요.”

“안 돼. 그러다 감기 걸려. 어서 가서 갈아입고 와!”

그렇게 유화를 내보낸 후, 죽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나!”

죽영은 입을 딱 벌렸다. 창밖에 장막이라도 두른 것처럼 세찬 눈발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북쪽에 치우쳐 있기에 파양주는 예로부터 눈이 많은 고장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엄청나게 많이 내리는 건 죽영이 파양주에 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광운도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무슨 놈의 눈이 세찬 폭포수처럼 내리느냔 말이다. 그나마 바람이 없어 안으로 들이치지 않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창을 통해 들어온 눈이 벌써 실내에도 쌓였을 터였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이 걱정되는군요. 이렇게 많이 내리면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파양주에도 거의 해마다 이재민들이 발생했다. 여름엔 홍수로, 또 겨울엔 이와 같은 폭설이 그 원인이었다. 이처럼 많은 눈이 내리니 그 숫자는 더욱 불어날 터였다.

새삼스러운 눈길로 광운은 죽영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진솔하게 타인을 걱정할 수도 있을까.

그게 아군의 생명이라면 광운도 걱정을 한다. 날 죽이려는 적병을 대신 죽여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위해 쓸 마음이 자신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광운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배고프지, 편월?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와. 맛난 거 해 줄게.”

“알았어!”

뛰어노느라 배가 무척 고팠던가 보다. 편월은 곧바로 달려 나갔다.

“난 술 한잔 했으면 좋겠소. 이런 눈도 보기 힘드니, 좋은 추억이 될 거요.”

“당신에겐 추억일지 몰라도, 이 눈이 고통인 사람들도 있어요.”

“알고 있소, 알고 있어.”

광운은 손사래를 쳤다. 방금 이재민에 대해 걱정했던 그녀 앞에서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차례 곱게 눈을 흘긴 후, 죽영은 조용히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마 성주에게 운이 트이는 해가 될까, 반대로 불운한 한 해가 될까?’

혼자 있게 되자 광운은 생각에 잠겼다. 다름 아닌 마용승의 거취에 관한 문제였다.

작년에 마용승은 분명히 말했었다. 천하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피를 뿌리는 걸 망설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따지면 올해는 참으로 시기가 묘했다. 가겸후의 농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황제가 연호를 발표했다. 정식으로 황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의미다.

그건 단순한 게 아니다. 이제부턴 군사를 움직이려면 일일이 황제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반군叛軍으로 몰리게 된다.

‘아마 성주는 반군이라는 오명을 듣더라도 가겸후에겐 머리를 숙이지 않을 거다.’

거기까지는 광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요는 그다음이었다.

만약 마용승이 가겸후의 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가겸후도 체면상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율천국의 우세한 군세를 동원하는 건 물론, 온 천하에 반군을 치자는 격문을 돌릴 게 뻔하다.

그때 마용승은 과연 어떤 길을 택할까? 천하를 적으로 돌려 일전을 불사한다는 건, 말만 그럴듯할 뿐 너무도 책략이 없는 무모한 짓이다.

‘어떻게든 황제와 끈이 닿아야 할 텐데…….’

이게 마용승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게 광운의 생각이었다.

“눈 구경 재미있어?”

어느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편월이 쪼르르 달려와 창턱에 매달렸다.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광운이 눈 구경을 하고 있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광운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깨고 보니 푸짐한 음식 쟁반을 들고 오는 죽영과 유화의 모습이 보였다.

“히야, 이쁘다. 그 봐. 내가 그 옷 입고 있으랬잖아!”

편월이 유화를 보며 환성을 토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옷을 갈아입은 유화는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여전히 피부는 까무잡잡했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미모가 지금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화 본인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들고 온 음식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기 무섭게 죽영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이리 오너라, 유화야. 어서 먹어야지.”

죽영이 유화를 당겨 의자에 앉혔다. 그사이 편월은 벌써 접시 하나를 끌어 그 안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었다.

“편월은 유화가 좋아?”

“웅.”

입에 음식이 가득 담겨 있어 편월의 대답은 어눌했다.

“그럼 만약에 유화가 전쟁터에 나가지 말고 같이 놀자고 하면 편월은 어떻게 할 거야?”

“웅?”

먹는 데만 열중하던 편월의 동작이 뚝 멈췄다. 제 딴에도 고민이 되는지 눈동자는 연방 광운과 유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 대답이 유화도 궁금했나 보다. 온통 붉어진 얼굴로 흘낏흘낏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꿀꺽!

편월은 제대로 씹지도 않은 음식을 그대로 삼켰다. 그러고는 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도 난 전쟁에 나갈 거야!”

“왜?”

편월이 이렇게 대답하리란 건 죽영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고 그 이유를 물었다.

“광운이 가니까!”

“만약 광운도 안 간다면?”

거기서 편월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태 단 한 번도 광운과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한 터였다. 대답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럴 일은 없어! 광운은 언제나 나와 함께 전쟁터에 갈 거야! 그렇게 약속했단 말이야!”

“약속?”

“응! 내가 커서 큰 성을 하나 가질 때까지 내 편이 되어 주기로 했어. 그렇지, 미친 구름?”

이번엔 광운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건주 무융성을 공략했을 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편월은 어길 수 없는 약속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점이 켕긴 광운은 얼른 죽영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그녀도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죽영이 놀란 건 광운의 약속 때문이 아니었다. 어린 편월의 입에서 성을 하나 갖겠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전에 광운을 통해 들었을 때보다 조금 더 충격적이었다.

“술이나 한 잔 주구려.”

갑작스레 찾아든 정적을 깨려고 광운은 술잔을 내밀었다.

“그런 얘기를 했던 건 사실이오. 그렇다고 너무 화내지는 마시오. 하도 열성적으로 얘기해서 그만…….”

“아니에요. 자, 한 잔 드세요.”

광운의 말에 죽영도 충격에서 벗어났다.

‘대체 내가 왜 놀랐을까?’

아직 어린애인 편월인지라 무슨 말인들 할 수 없을까? 그저 아이들의 세상 물정 모르는 얘기로 치부해 버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술병을 내려놓은 죽영은 편월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분명히 본 것 같았다. 그 자그마한 몸뚱이 뒤로 크고 시커먼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걸!

‘전마戰魔!’

죽영은 확신했다. 지금 보고 있는 그림자는 전쟁의 귀신, 편월의 저 작은 몸뚱이 속에 도사린 엄청난 피의 그림자를 본 것만 같았다.

2

담장 밑이나 햇살이 들지 않는 곳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그저께 내렸던 눈은 대부분 녹아 바닥이 질퍽거렸다.

그렇게 걷기 힘든 길을 광운은 달리다시피 걷고 있었다. 옆에 선 편월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성주 마용승의 긴급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가겸후와 관련된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처럼 긴급하게 자신을 호출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전에 만났던 집무창이 아닌 성주가 거처하고 있는 내성인 포세각抱世閣으로 오라고 했다. 여간 중대한 사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발길을 재촉하면서도, 광운은 문득 우스워졌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마용승의 수족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마용승의 포부가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게 아니라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여겼다. 바로 그게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고 싶다던 죽영의 뜻과도 어느 정도 통할 터였다.

내성의 경계는 다른 어떤 곳보다 엄중했지만, 미리 통보가 되었는지 무장 한 명이 벌써 광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광운을 더욱 긴장시켰다. 평소와 다른 응대는, 평소와는 다른 일이 발생했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이다.

즉각 안내되어 들어간 포세각에는, 아직 돌운성 공사를 끝내지 못한 호윤천은 물론 곽준방과 처음 보는 노인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곽준방은 광운을 반가이 맞았지만, 호윤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잡가군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게 여전히 그에겐 불만인 것 같았다.

광운은 개의치 않았다. 성주를 만나러 왔지, 호윤천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자, 이분과도 인사를 나누게. 독천옹讀天翁 구양파歐陽擺 어르신일세.”

“독천옹이란 건 주위의 사람들이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해서 이르는 말일 뿐, 그저 헛되이 나이만 먹은 늙은이외다. 잘 부탁드리겠소.”

“광운입니다.”

가볍게 예를 갖추며 광운은 구양파를 세밀히 살폈다. 곽준방이 일부러 소개를 시킬 정도라면 중요한 인물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구양파는 평범하게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적어도 광운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일군을 지휘할 장수 같지는 않고, 눈빛은 지독하게 맑군.’

구양파를 특징지을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맑은 눈빛일 거라고 광운은 생각했다.

“꼬마 장군도 왔구나. 하지만 오늘은 성주님과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나가서 놀아야겠구나.”

곽준방은 편월에게도 알은체를 했다. 그게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말투만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이분들께 인사드리고 나가서 기다려라.”

광운의 말에 편월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혼자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었다.

하지만 편월도 군문의 법칙이 어떤지는 잘 안다. 어깨에 잔뜩 힘을 넣은 채 군례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다.

“자, 앉지. 앉으시지요, 구양 선생.”

곽준방이 앉기를 청한 후에야, 구양파는 흠칫 어깨를 떨며 급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때까지 그는 방 밖으로 나가는 편월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급하게 모이라고 하신 걸 보면 필시 가겸후가 또 묘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일 거요. 곽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이야 성주께서 나오시면 알게 될 터, 미리 앞질러 가지는 맙시다.”

“성주께서 어떤 하문을 하시든 막히지 않고 대답을 드리려면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각자 예상하고 있는 바를 얘기해 봅시다.”

무거운 어조로 호윤천은 좌중을 압박했다. 성주가 없는 곳에선 자신이 최상관이라는 걸 은근히 부각시키는 행동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예상을 하는 건 헛일이외다. 그걸 알면서도 한다는 건 심력의 소비일 뿐이니, 즐겨 취할 바가 못 되지요.”

조용한 어조로 구양파가 말했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감정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약간 놀란 눈빛으로 광운은 구양파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자신과 얘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조였고, 듣기에 따라선 호윤천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걸 알아챘는지 호윤천이 갑자기 탁자를 내려쳤다.

탕!

“구양 선생! 이것도 주공에 대한 이 사람의 충정이라는 걸 모르시겠소?”

“충정과 아부의 경계는 늘 모호하지요.”

“뭐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호윤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면전에서 이런 지독한 얘기를 듣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어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대단한 사람이로군. 선생이라고 불리는 걸 보면 글이나 읽는 서생인 것 같은데, 기백은 여느 장수 못지않군.’

호윤천을 응대하는 구양파의 태도에서 광운은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하고픈 말은 서슴지 않고 해 버리는 그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광운은 호윤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대로 마씨 문중에 충성을 다해 온 가문으로 파양주에선 명문이지만, 그는 그걸 늘 코에다 걸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호윤천은 전공도 혁혁하다. 실력 제일인 이런 시대에서 그만한 무장도 드물지만, 겸손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듯한 그를, 광운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우리 꼬마 장군을 밖으로 내쫓았나?”

좌중의 삭막한 분위기를 깬 건 성주 마용승의 목소리였다. 그는 편월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주공을 뵈오!”

“성주님을 뵙습니다.”

각기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서며 예를 갖췄다. 그러나 구양파만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히려 마용승이 그 앞에서 정중한 예를 갖췄다.

“구양 선생, 잘 오셨습니다. 이로써 이 마 모는 두 발 뻗고 자게 되었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광운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구양파를 맞는 마용승의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것 같군.’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마용승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구양 선생? 구양 선생!”

마용승의 인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구양파를, 곽준방이 몇 차례 불렀다. 그는 다시 들어온 편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거 실례했소이다. 성주께서 이처럼 환대해 주시니, 이 촌로는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별말씀을! 자, 앉으시지요. 꼬마 장군에게도 의자를 내줘라.”

마련해 놓은 상석은 버려두고, 마용승은 일부러 구양파와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주공께선 어인 일로 소관들을 이처럼 급하게 호출하셨소이까?”

구양파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관심을 돌리려는 듯 호윤천이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황제에게서 이런 게 왔소. 가겸후가 보낸 것이겠지만.”

호윤천의 질문에, 마용승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대수롭지 않게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아니, 이건?”

가장 먼저 펼쳐 본 호윤천의 눈이 커다랗게 불거졌다. 그건 다름 아닌 마용승을 진남후鎭南侯에 임명한다는 서찰과 인수印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언제 도착했소이까? 특별한 사자가 온 것 같지도 않은데…….”

호윤천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가 내린 임명장이다. 정식 사자들이 호화로운 행렬로 들이닥쳐야 정상일 터였다.

그런데 최근 파양주엔 황제는커녕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던 인근 세 개 주에서도 사자는 오지 않았다. 마용승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이걸 받았을까?

“어제 돌아온 송용조가 가지고 왔더이다. 정식 사자들은 내게 목이 달아날까 봐 겁을 먹고 있다지 아마? 하하하!”

그제야 호윤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어제 영욱성으로 들어온 송용조를 통해서 받은 것이라면 자신이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설마 주공께서는 이걸 고맙다고 덥석 받으실 건 아니겠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한 거요. 호 장군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당장 이걸 찢어 버리고, 가겸후의 음모를 만천하에 밝히는 격문을 띄워야지요!”

“하하하! 아마 호 장군은 이걸 보면 당장 군사를 몰고 궐주로 쳐들어갈 기세로군.”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마용승은 또 한 통의 서찰을 꺼내 탁자에 던졌다. 황제의 옥새로 봉인된 것이었다.

호윤천은 성급한 손길로 그 서찰을 펼쳐 들었다.

“진남후의 자격으로 막주莫州의 반역도 목철린을 당장 치라고? 웃기지도 않는 얘기로군!”

호윤천의 혼잣말에서 광운은 서찰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는, 아니 가겸후는 진남후라는 이름뿐인 관직을 이용해 마용승과 목철린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려는 의도이리라.

“소장에게 군사 오만만 딸려 주시오. 당장 중주를 쳐서 가겸후의 콧대를 꺾어 놓겠소이다!”

“그랬다가는 그 즉시 이 땅을 목철린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외다!”

지금까지 대화에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앉아 있던 구양파가 문득 입을 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호 장군은 이러한 서찰이 여기 마 성주께만 보내졌다고 생각하시오? 아마 목철린도 똑같은 걸 받았을 거요.”

“뭐라고?”

호윤천이야 깜짝 놀란 듯했지만, 광운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황제를 끼고 천하를 넘보는 가겸후가 무슨 짓을 못하겠느냔 말이다.

“구양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어, 고견이랄 것까지는… 우선 이걸 고맙게 받아들이십시오. 그 후에 정식 사자를 파견하여 감사의 인사를 황제에게 올리고, 명에 따라 목철린을 치겠다고 하십시오.”

“구양 선생! 이게 가겸후의 음모란 걸 알고서 하는 말씀이오?”

자신의 의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구양파의 말에 호윤천은 또 한 번 언성을 높였다.

“아니까 하는 말이외다. 과연 오만의 병력으로 호 장군은 중주를 칠 수 있겠소이까? 아니 언젠가는 중주를 점령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적어도 오륙 년 후가 될 것이오.”

“뭣이? 구양 선생은 이 몸을 욕보일 작정이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호윤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호 장군, 우리는 아직 구양 선생의 말씀을 다 듣지 못했소. 우선 얘기부터 들어 봅시다.”

호윤천을 제지하는 마용승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조용했다. 충성을 바치는 장군과 초대한 손님을 다 함께 배려하는 목소리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구양 선생. 이걸 순순히 받는다면 천하 사람들이 내가 가겸후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얘기하지 않겠습니까?”

“천하가 어떻게 얘기하든 이건 어디까지나 황제의 명이올시다. 그러니 성주께서도 가겸후 따위는 상대하지 말고 곧바로 황제에게 사자를 보내야겠지요.”

“가겸후가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황제를 만날 수조차 없을 겁니다.”

“허수아비에 불과한 황제를 만나서 뭘 하겠소이까? 다만 천하를 향해 이쪽의 뜻만 보여 줄 수 있으면 되는 거지요. 나 마용승은 가겸후에게 머리를 숙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걸 말이오.”

“흐음, 그렇다면 그 사자로 가는 자는 여간 배짱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되겠군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자라면 더 좋겠고…….”

“허허허! 역시 성주와는 말이 통하는 것 같소이다.”

“이거 아무래도 아주 거창한 사자의 행렬을 마련해야겠소이다.”

“황제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가는 사자니, 얼마든지 요란해도 좋을 거외다.”

“하지만 그건 실익이 전혀 없는 명분 싸움일 뿐이오. 설마 구양 선생께서는 그 작은 명분만을 살리자고 궁리한 건 아니시겠지요?”

“과연!”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듯 구양파는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자를 파견하는 것과 동시에 성주께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목철린을 치십시오.”

“아니, 그건 가겸후의 농간에 그대로 넘어가는 게 아닙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론 그렇지도 않소이다. 목철린을 치는 데엔 세 가지 실익이 있소이다. 그 첫째는 목철린은 언젠가 성주께서 치셔야 될 자이니 미리 힘을 빼 놓을 수 있어 좋고, 그 둘째는 이 파양주에 새로 충원된 군사들에 대한 훈련이오. 십만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중 절반이 잡가군에서 들어왔거나, 새로 입대한 자들이오. 기존에 있던 병사들과 손발이 맞지 않을 테니, 목철린을 치면서 그들을 함께 훈련시킨다면 보기 드문 강병이 될 것이외다.”

“호오!”

이번엔 마용승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구양파가 서찰의 내용을 알게 된 건 채 이각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에 여기까지 생각을 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올 삼월에 있을 국혼에 당당히 불참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는 거외다. 목철린이 의외로 완강히 저항해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다고 하면, 황제든 가겸후든 달리 할 말이 없을 게요.”

“아!”

이건 구양파와 편월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발해진 것이었다.

사실 마용승도 이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다른 일도 아닌 황제의 혼인에 공공연히 불참하는 건 가겸후에게 조종되어 내리는 칙명을 거스르는 것과는 또 다르다.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목철린을 전력을 다해 쳐서도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렇소이다. 적당하게 상대하면서 시간을 끄는 게지요. 또 목철린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자는 아니외다.”

“그 일은 소장에게 하명해 주십시오!”

호윤천이 그 자리에서 자임하고 나섰다. 작년 무융성 공격 때 곽준방에게 선봉을 빼앗긴 적이 있었던 터라, 이처럼 성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돌운성의 개축 공사도 끝나지 않았소. 호 장군은 당분간 그 일에만 매진해 주시오.”

“그럼 목철린을 상대하는 선봉은 누구로 하실 작정이오?”

호윤천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곧 전쟁이 일어날 판에 성 공사나 책임지라니, 그 성미에 납득할 턱이 없었다.

마용승은 잠깐 망설였다. 호윤천의 생각을 익히 알고 있기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씀해 주시오. 대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목철린을 상대하게 하실 생각이시오?”

“나는… 여기 있는 광운을 생각했소이다.”

“뭐?”

“예?”

호윤천과 광운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경악성이 토해졌다.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다 싶을 정도로 정상에서 벗어난 인선이었기 때문이다.

“스, 승복할 수 없소이다! 곽 장군이라면 또 모를…….”

말을 하던 호윤천이 갑자기 말꼬리를 씹어 삼켰다. 흥분에 들떠 자신의 입으로 곽준방에게 선봉을 맡기라고 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좀 전에 구양 선생께서도 말씀하셨소. 이 기회에 새로 들어온 병사들을 훈련시키자고… 그들 대부분이 잡가군에서 편입된 자들이니, 잡가군에 소속된 광운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소. 어떻습니까, 구양 선생?”

“인선은 어디까지나 성주께서 하실 일이오. 이 늙은이는 그저 이 썩은 머리에 떠오른 생각만 말씀드릴 뿐이지요.”

“불가, 불가하오! 소장은 승복할 수 없소이다!”

호윤천은 펄펄 뛰었다. 평소에도 잡가군이라고 은근히 광운을 무시하고 있던 터였다. 그에게 이처럼 막중한 일을 맡긴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알겠소. 알겠으니까 진정하시오.”

마용승은 우선 호윤천을 달랬다. 그대로 뒀다가는 호윤천이 당장 광운을 베어 버리겠다고 설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하루 이틀 사이에 결정될 일이 아니오. 나도 좀 더 생각해 보겠으니, 호 장군도 마음을 크게 먹고 계시오.”

“그럼 그 일에 대한 건 재고해 주시는 거요?”

“좀 더 생각해 본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고 돌운성은 언제쯤 공사가 끝날 것 같소?”

마용승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래야 호윤천이 조금이라도 빨리 이 문제를 떨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앞으로 석 달이면 충분하오.”

“알겠소. 그럼 구양 선생만 잠시 남으시고 다들 물러가시오.”

성주가 가라는데 남아 있을 사람은 없다. 아직도 불만에 찬 호윤천을 필두로 사람들은 포세각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광운은 자신이 어떻게 포세각을 나왔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구양파의 그 빠른 머리에 놀랐고, 목철린을 치기 위해 자기를 파견하겠다는 마용승의 말도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 자리의 대화에서 황제는 남의 집 개처럼 불렸다. 최소한의 예의인 ‘폐하’라는 존칭은 붙이지도 않았고, 부를 때마다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황제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광운은 돌아보았다.

“성주께서 급히 돌아오라는 분부시오!”

부르는데 안 가겠다고 버틸 수 있는 광운이 아니었다. 그는 급하게 다시 포세각으로 돌아갔다.

“내일 중으로 효명성梟鳴城으로 가 주게. 그쪽 성주에겐 미리 통보해 뒀으니 달리 불편한 점은 없을 걸세.”

“효명성?”

고개를 갸웃거리며 광운은 조용히 되뇌었다. 효명성은 남쪽으로 이웃한 사주沙州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성이다. 갑자기 거기 가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서찰은 아마 목철린도 받았을 게 분명하네. 그럼 목철린은 나를 치기 위해 사주부터 공략하겠지. 그렇게 되면 사주는 우리에게 구원을 청할 게고, 그 구원군과 함께 가서 목철린을 상대하게. 쳐 없애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간만 끌면 되네.”

“그렇다면…….”

“호 장군의 반대가 심해 어쩔 수 없었네. 일단 그가 돌운성으로 돌아가면 당분간은 조용할 걸세. 부탁하겠네. 우리 꼬마 장군에게도 잘 부탁한다.”

“조, 존명!”

복명을 하면서 광운은 또다시 얼떨떨해졌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부하인 호윤천을 속인 마용승이 새삼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명은 이미 떨어졌으니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돌아서 나오는 광운의 뇌리에 죽영의 얼굴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광운에게 있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영상이었다.

3

효명성이란 이름은 예로부터 이 성 주변에 올빼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도 밤이면 그놈들은 시끄럽게 울어 대고, 그게 하나의 상징처럼 성민들에게 각인되어 버렸다.

그 성을 지키는 수성 장수는 상림호常林虎로서, 스스로 광호狂虎라는 별호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게 하는 자였다. 전장에 나서면 미친 호랑이처럼 용맹해진다는 뜻이란다.

그 상림호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광운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미친 구름이 미친 호랑이의 성에 오셨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소? 오시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으셨소?”

“장군의 지나친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이 몸은 일개 잡가군의…….”

“잡가군이면 어떻고 정규군이면 어떻소? 나는 용감한 전사라면 누구든 환영이오. 자, 들어갑시다.”

“편월, 인사드려라. 이 성을 지키는 상 장군이시다.”

그 말에 따라 편월은 상림호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보는 사람은 귀엽고 우스웠지만, 그로선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오오, 소문난 꼬마 장군이로군! 아주 용맹하다지? 잘 왔다, 잘 왔어!”

광운과 편월에 대한 소문은 벌써 여기까지 울린 모양이었다. 상림호는 편월을 번쩍 안아 올려 볼을 마구 비볐다.

“아앗, 놔! 놓으라고!”

편월은 발버둥을 쳤다. 상대가 어떤 신분이라는 것도 잊고 격렬한 저항을 보였다.

마침내 상림호는 편월을 내려놓았다. 발버둥 치는 발길에 몇 차례 차이기는 했지만,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림호는 편월을 칭찬했다.

“과연 튼튼하구나, 편월! 넌 장래에 정말 훌륭한 장군이 될 것이다.”

안겨 있을 땐 그토록 저항을 했지만, 막상 상림호의 칭찬을 받으니 편월의 얼굴은 붉어졌다. 특히 장군이 될 거라는 그 말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자, 들어갑시다. 주공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삼 년 묵은 술독을 꺼내 놨소. 설마 술을 못 드시는 건 아니겠지?”

마치 광운의 어깨를 끌어안듯이 하며 상림호는 두 사람을 내성으로 안내했다.

사실 효명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고, 위치 또한 군사적 요충지도 아니다. 대대로 파양주와 사주는 우호적이었기에, 그저 두 주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에 불과했다. 내성이라고 해 봐야 전각 두 채가 달랑 서 있는 게 전부였다.

대신 내성과 외성 사이는 넓었다. 파양주나 사주의 사람들이 모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거기에 형성된 시장이나 상가도 엄청나게 컸다.

“자, 올라갑시다. 여기를 나름대로 관계헌觀界軒이라 이름 지었소.”

내성에서 가장 높은 삼 층 누각으로 안내하는 상림호의 입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여기에 오르면 파양주와 사주의 경계가 훤하게 보이지요. 외성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고.”

실제로 관계헌에 올라 보니 사방이 탁 트인 게, 뭐 하나 걸리는 것이 없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여기 앉아서 충분히 지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명색이 변방이라 여자는 없소이다. 거친 사내의 손길로 따르는 잔이지만 거절치 마시오.”

미리 술상을 차려 둔 탁자에 앉자마자 상림호는 술병을 들어 광운의 잔을 채웠다.

이것도 일종의 파격이다. 정규군의 장수와 잡가군이 같이 술을 마시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분의 차이는 엄연하다. 광운이 먼저 한 잔 따라 올리는 게 예의란 말이다.

그러나 상림호든 광운이든 자잘한 예의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친 구름과 미친 범이 만나 정답게 회포를 푼다는 식이었다.

“작년은 그럭저럭 풍작이었소. 그러니 곡식 창고마다 양곡이 가득 차 있소이다. 여차하면 오만의 병사가 육 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요.”

다소 뜬금없다 싶은 상림호의 말은 곧이어 밀어닥칠 지원병에 대한 얘기였다. 마용승은 그에게도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귀띔을 해 둔 모양이었다.

“그래도 군량은 많이 확보해 둬야 할 거요. 애당초 장기전을 각오하고 시작하는 싸움이니까.”

“우리야 장기전을 바라지만, 목철린은 성난 멧돼지처럼 덤빌 것이오. 아무래도 사주는 큰 곤욕을 치르겠구려.”

지금까지는 농담 비슷한 얘기들만 주고받았지만, 화제가 군사 문제에 이르자 두 사람은 심각해졌다. 그 와중에도 편월은 여전히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자, 한 잔 더 드시오. 내가 이 성을 지킨 지 벌써 오 년이오. 그동안 매일 여기를 드나드는 사주의 백성들을 봐 온 탓인지 그들이 전혀 남 같지 않구려. 목철린의 아귀 같은 발굽에 짓밟힐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오.”

상림호의 말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파양주와는 우호적이었던 사주의 백성들이었으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상 장군의 의도와는 다를지 몰라도, 여기 오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소.”

“그게 뭐요?”

“이 효명성은 작은 곳이오. 아마 병사들도 삼천을 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내가 사주의 풍소성風簫城으로 갈까 하오. 그쪽의 전쟁 준비는 얼마나 된 것 같소?”

“내가 알기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소. 특히 우리 주공께 볼모를 보낸 뒤로는 완전히 우리를 믿고 있는 눈치요.”

“하긴 지금까지는 사주를 탐내서 쳐들어갈 골빈 놈들은 없었으니…….”

사주는 이름 그대로 땅의 절반 이상이 사막이거나 황무지다. 전쟁이 인간 욕심의 산물이라면 그런 땅을 탐낼 사람은 없으니, 지금까지는 비교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서 어쩌려는 거요?”

“군사 오백만 주시면 풍소성으로 가서 그 땅의 난민들을 거두겠소. 영욱성에서 지원군이 온다고 해도, 하루 이틀 사이엔 어려울 거요.”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오. 일단 전쟁이다 싶으면 목철린은 무서운 기세로 사주를 휩쓸 것이오. 차라리 이 성을 단단히 지키는 게 낫소.”

“이 땅에까지 전쟁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소. 사주의 백성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목철린과의 전쟁은 사주에서 치를 것이오. 게다가 이 성은 적을 맞아 싸우기엔 너무 협소하오.”

“흐음!”

광운의 말이 상림호에게 납득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생각에 잠겼다.

“군사 일천을 주겠소. 만약 목철린이 밀고 온다면 여기서도 출격을 할 테니, 그쪽에서도 유격전을 전개해 주시오.”

“알겠소. 그럼 지금 당장 풍소성의 수성 장수에게 편지를 써 주시오. 내가 한차례 다녀오리다.”

“그리 급할 게 뭐 있소? 당장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 오늘은 느긋하게 한잔합시다.”

“하하, 이거 내가 너무 서둘렀던 것 같구려. 그런데 군사를 천 명씩이나 움직이면 당장 탐지가 될 것이오. 여기라고 해서 간인들이 없는 건 아닐 테니.”

“그 점이라면 염려 마시오. 성병 삼천 외에 따로 잡가군 이천을 모집해 두었소. 원래는 주공께서 정규군을 크게 늘리실 때 거기에 충당할까 하고 모았던 거요. 그러니 이들을 평민으로 가장해서 풍소성에 집결하라고 하면 될 거요.”

“허어, 참 묘한 일이군!”

마용승이 파양주의 정규군을 십만으로 크게 늘렸다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상림호 역시 거기에 대비해서 잡가군을 모았다가, 시기를 놓쳐 그냥 묵혀 둔 모양이었다.

세상일이란 것이 이래서 재미있다. 시작하기 전엔 막막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것들도, 막상 시작해 보면 나름대로 방법이 다 있는 것이다. 결국 일이란 건 어떻게든 벌려 놓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오, 그러고 보니 우리 꼬마 장군이 무척 심심하겠군. 잠시만 기다려라. 여봐라! 가서 가웅家雄이를 불러오너라!”

먹기를 마친 편월이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걸 본 상림호가 고함을 질렀다. 관계헌 아래에 있는 부하들에게 내린 명이었다.

“이제 아들놈이 올 것이다. 꼬마 장군은 그놈이랑 놀도록 해라.”

“옛!”

“하하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무장을 한 것도 아니고, 전시도 아니지 않느냐.”

그 말에 편월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오, 가웅이냐? 어서 와서 인사드려라. 요즘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치고 계시는 광운 장군이시다.”

“장군이라니 너무 송구스럽소. 공자를 뵈오.”

광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가웅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신분의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아직은 어린아이요. 그저 편월을 대하듯 편하게 대해 주시오. 자, 가웅아, 편월을 데리고 가서 같이 놀아라.”

“예, 아버님.”

상가웅은 공손하게 대답한 후, 편월의 손을 잡고 관계헌에서 내려갔다.

“쯧쯧쯧, 대대로 우리 집안은 무가였는데 어쩌다 저리 연약한 아이가 생겼는지 모르겠소.”

상림호의 말 속에는 약간의 한탄이 서려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광운이 본 상가웅은 상당히 유약해 보였다. 나이는 편월과 같거나 한두 살 더 많은 것 같았지만, 골격 자체가 가늘고 안색 또한 파리했다.

“무예라도 단련하면 신체가 좀 더 강건해질 것도 같은데 도무지 무예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책만 읽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오.”

말끝에 상림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장으로서, 문약한 자식을 보는 심정은 답답하기 짝이 없을 터였다.

“자, 한 잔 드시오.”

광운이 상림호의 빈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사람은 저마다 다 쓸 곳이 있으니, 자제 분도 후일 큰일을 할 것이오.”

“요즘 세상에 글을 읽어 대체 뭘 하겠소? 만에 하나 이 성이 적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저놈은 제 한 몸 간수하지도 못할 것이오.”

“이 성이 적에게 포위될 일은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내가 풍소성으로 가려는 것이고.”

“어쨌든 난 광운 장군이 부럽소. 편월같이 튼튼한 아들을 두셨으니.”

“편월은 내 아들이 아니오.”

광운은 재빨리 손사래를 하며 부정했다. 아직도 파양주군 사이에선 자신과 편월을 부자 관계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편월은 오륙 년 전에 강회 땅에서 전투를 치른 후…….”

광운은 편월과 만났던 얘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지만, 오늘 상림호를 만나 같이 취하니 입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호오! 그것참, 기묘한 인연이구려. 혹시 편월이 고귀한 신분의 후예가 아닐까?”

죽은 여인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건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그처럼 드문 얘기를 들은 상림호의 상상은 마구 비약을 거듭했다. 그 역시 술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운은 그 말을 예사로 듣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구양파를 처음 만났을 때 일부러 그가 따라와서 해 줬던 말 때문이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이 아이는 장래 천하를 크게 흔들어 놓을 상이오. 그렇게 흔들린 천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이 아이에게 답이 있을 것이오. 부디 소중히 키우시기 바라오!

그때 광운은 까닭 없이 가슴이 설레고, 또 한편으론 약간의 두려움도 느꼈었다. 아마도 편월의 신분을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일 터였다.

그런데 지금 상림호는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때 시신으로 발견됐던 여인의 옷차림이나 목걸이 등으로 봤을 때 그의 말처럼 편월의 신분은 일반 평민은 결코 아닐 것 같았다.

‘편월이 떠나는 게 두려운가?’

광운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 보아도, 어느새 자신의 삶 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편월이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소. 자, 한 잔 더 듭시다. 여봐라! 술이 떨어졌다! 얼른 가서 가져오너라!”

굳어진 광운의 표정을 눈치 챈 상림호가 얼른 술을 권했다.

광운은 그날 모처럼 크게 취했다. 신분을 따지지 않는 상림호의 시원스러운 태도에 취했고, 최근에 갑자기 부각된 편월의 신분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에 취했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전쟁에 대한 부담을 잊을 수 있다는 데서 취했다.

결국 광운은 상림호의 부하들에게 부축을 받고서야 숙소에 들 수 있었다.

* * *

풍소성에 들어섰을 때, 광운의 얼굴은 마치 코 푼 휴지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숙취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렸으니,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아예 깨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광운보다 한발 앞서 달려간 상림호의 전령 덕에 풍소성의 수성 장수인 도인걸導仁桀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는 점이었다.

“잘 오셨소이다. 미리 상 장군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소.”

“광운이라고 합니다.”

“대명은 익히 들었소. 잡가군에서 썩기엔 아까운 무용이라고 파양주의 마 공께서 안타까워하신다지요.”

“미천한 재주를 너무 높게 사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시오? 상 장군께서 이렇게 급히 사람을 보내신 건 처음인데.”

도인걸로선 광운이 온다는 통보만 받았을 뿐 구체적인 일은 알지 못했다.

광운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용승의 뜻이나 지금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것 모두가 군사기밀에 해당된다. 사전에 새어 나가 목철린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이쪽에서 일부러 도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도인걸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 노릇, 광운은 얘기를 해 주기로 했다.

“우선 주위를 물리쳐 주시오. 도 장군께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여봐라! 손님께서 중한 말씀이 계신 모양이다. 다들 물러가 있도록!”

광운의 요청에 도인걸은 대기하고 있던 부하 장졸들을 물리쳤다.

“이 성을 수비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효가 얼마요?”

사람들이 물러가자마자 광운이 재빨리 물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파악해야 될 문제였다.

이번엔 도인걸이 약간 망설였다. 아무리 우호적으로 지낸다 해도 다른 주의 병사에게 자신들 성병의 숫자를 말해 준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결코 이 풍소성이나 사주에 해를 끼치려고 여쭌 건 아니오. 그러니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삼백이오.”

광운이 채근하자 도인걸은 큰맘을 먹은 듯 대답했다.

“삼백으로 만일의 경우 이 성을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소?”

이어진 광운의 질문에 도인걸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부터 효명성에서 천 명의 잡가군이 은밀히 이 성으로 들어올 것이오. 그들과 합심해서 이 성을 보수해야겠소. 물론 이건 은밀히 진행해야 될 일이오.”

“처, 천 명?”

도인걸은 해연했다. 혹시 ‘이게 이 풍소성을 날로 삼키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표정도 역력했다.

하지만 도인걸은 이내 그 의심을 지워 버렸다. 효명성이 이 풍소성을 차지하자면 굳이 그처럼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도 없다. 그저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화살 한 대만 쏴도 충분할 터였다.

“거기엔 이유가 있을 터, 그걸 듣고 싶소.”

“이건 마 성주의 생각이오만, 실은 이번에 가겸후로부터…….”

광운은 도인걸에게 이 일의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던 도인걸의 표정이 마침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무장치고는 간담이 작은 모양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려. 우리 주공은 아직 전쟁 준비를 조금도 하지 못했는데.”

“설사 준비를 했다고 해도 사주가 목철린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요. 그보다는 내일부터 들어오는 효명성의 잡가군과 더불어 이 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오. 여차하면 사주의 주공도 이 성으로 모시고. 무엇보다 이 일은 비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오. 미리 새어 나가면 사주도 파양주도 큰 상처를 입을 것이오.”

도인걸은 더 이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얘기는 그걸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부터 풍소성을 나선 일단의 사람들이 인근의 산으로 흩어져 들어가 벌목 작업을 시작했다.

이건 광운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으로, 벤 나무는 성 밖에서 목책木柵을 짓거나 영채를 설치하는 데 쓸 요량이었다.

또한 나무를 베어 낸 빈 터를, 그대로 효명성에서 온 잡가군의 주둔지로도 활용할 수 있을 터였다.

또 어떤 자들은 낡은 성벽 안쪽에 새로 축대를 쌓거나, 혹은 모래주머니를 갖다 쌓았다. 성벽이 너무 퇴락해 해동기에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작업들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유명무실한 해자를 다시 손보는 일이었다. 겨울이라 그 안에 든 물이 꽁꽁 언 것도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풍소성은 점차 견고해져 갔다. 그 안에 설치한 수성용守成用 무기도 광운의 지시하에 착실하게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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