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합오주倂合五州
1
선봉의 영예를 안은, 별동대를 이끈 곽준방이 무융성 오 리 밖까지 달려왔을 때는 처음 예정보다 한 시진 이상이나 빠른, 사시巳時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서둘러라! 돌입대가 벌써 시작한 모양이다.”
곽준방의 눈에 비친 무융성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성의 사방에서 시커먼 연기가 연방 치솟고 있어, 그대로 둬도 금방 낙성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곽준방은 전쟁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용장이다. 지금 연기가 치솟고 있는 곳은 분명 성문일 게고, 밖에서 지원이 없다면 그 불길은 금방 잡히고 만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 정도 성이라면 한나절이면 떨어질 것 같군요!”
여상계가 말을 몰아 곽준방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확실히 무융성의 외관은 여상계가 큰소리칠 만큼 허술해 보였다. 그냥 방치했다가 작미성이 떨어진 이후로 급히 보수를 했는지 여장女墻(화살 같은 걸 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성루)이나 마면馬面, 단루團樓(마면과 같이 성벽에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네모나 둥글게 돌출시켜 쌓은 성벽)는 있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될 것처럼 어색하게 붙어 있었다.
게다가 성의 사대문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으니 무융성은 더욱 초라하게만 보였다.
“모르는 소리 마라. 저래 봬도 건주 땅에서 오대를 버틴 성이다. 우습게보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 꼴이 저래서야 어디…….”
“자고로 성을 공격하려면 성병의 세 배 이상의 병사로 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숫자가 적다. 그러니 너무 방심하지 말도록 하라. 충차衝車(성문을 부수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깍은 통나무 다발)와 운제雲梯(사다리)는 준비되었느냐?”
여상계에 대한 훈계에서 곽준방은 이내 무기의 점검으로 들어갔다.
“영채는 세우지 않으시렵니까?”
“그럴 시간이 없다. 저 안엔 지금 오백의 돌입대가 고전을 하고 있다. 속히 공격을 개시해야만 한다.”
“아뢰오! 충차와 운제가 준비되려면 아직 반 시진 정도가 필요하오!”
“뭣이? 도착하자마자 사용할 수 있도록 점검해 두라 그토록 일렀거늘! 안 되겠다. 공작대工作隊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성을 공격한다. 가서 활이라도 쏘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든 전쟁은 시기가 중요하다. 그걸 놓치게 되면 우세한 전력으로도 패전을 하는 경우를 왕왕 봐 왔던 곽준방이었다.
곽준방의 명에 따라 장수기가 높직이 솟구쳤다가 앞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공작반은 최대한 빨리 준비하여 뒤를 받치도록 하라! 이랴, 하아!”
다시 한 번 명을 내린 후, 곽준방도 성을 향해 달려가는 공격군 속에 가담했다.
“장군을 보호하라! 근위대는 장군의 곁으로!”
그건 정말이지 전격적으로 내려진 명이었다. 곽준방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그의 주변에 있는 병사는 근처에 있던 백여 기에 불과했다.
“장군이 출격하신다. 서둘러 뒤를 따르라!”
별동대 다섯 부장들의 당황함도 대단했다. 바로 곽준방 곁에 있었던 여상계까지, 명이 이처럼 급작스럽게 내려질지 몰라 급히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과연 선봉을 맡은 별동대의 사기는 대단했다. 곽준방이 움직이자마자 직속상관의 명이 없었음에도 일제히 말을 달려 성을 향해 짓쳐 들었다.
“방패!”
곽준방의 곁에서 달리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성병이 쏘는 화살의 사거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말에 따라 곽준방의 주변엔 하나의 방벽이 생겼다. 근위대가 그를 둘러싸고 일제히 방패를 세웠기 때문이다.
“활을 쏴라! 성벽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면서 각자 두 대씩의 화살을 쏘도록!”
이어진 곽준방의 명에 따라 기수가 재빨리 그 뜻을 전군에 전달했다.
별동대의 말들이 굽이치는 물결처럼 오른쪽으로 흐른다 싶었을 때였다.
쉬시시시시싯-!
요란한 파공성과 함께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졌다. 성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이나 노궁弩弓이 햇살을 차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이미 별동대가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꾼 뒤였다. 후미의 서너 기만 화살에 격중되어 낙마했을 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응사하라!”
다시 말 머리를 급격하게 왼쪽으로 돌리며 곽준방은 고함을 질렀다. 성문 앞을 스쳐 달리면서 활을 쏘라는 뜻이었다.
그 명은 즉각 시행되었다. 성에서 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오천의 병사가 일제히 쏘는 화살도 가히 한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에 필적할 만했다.
실제로 이 공격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성병들은 수비하는 입장이니 진즉부터 위축되어 있던 터였다.
뿐 아니라 오백의 돌입대가 새벽에 성벽을 넘어 들어와 네 개의 주요 성문에 모두 불을 질렀으니 기세가 상당히 꺾인 상태였다. 거기에 별동대가 화살을 쏴 댔으니, 성병들은 감히 성루 밖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한 발을 더 발사한 후, 곽준방은 곧장 물러 나왔다.
“충차와 운제는?”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다시 간다! 따르라!”
“출격! 출격이다!”
이번에 곽준방은 조금 전처럼 빠르게 달리지는 않았다. 충차를 앞세우고, 운제를 뒤에 배치한 후 전체가 대열을 정비해 보리밭을 짓밟듯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성벽에 가까워지면서 말들도 점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만捫(충차나 운제를 운용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대형 방패)을 펼쳐라!
거리가 활의 사거리 내로 좁혀 들자, 곽준방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가 충차와 운제의 전면에 드리워졌다.
“하아, 달려라!”
“화살을 쏴라!”
이제 별동대는 완전히 전장 심리의 지배하에 놓였다. 별 다른 명이 없었음에도 오랜 경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우우우-!”
“충차의 속도를 늦추지 마라! 성문이 불타고 있으니, 한 방이면 무너뜨릴 수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온 것과 동시에, 뾰족하게 깎인 충차의 앞부분이 번쩍 들렸다. 잔교가 없는 해자 너머에 있는 성문을 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성병들의 저항도 필사적이었다. 이미 성안엔 적이 들어와 있어 사대문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공격하는 자들까지 들어온다면 바로 낙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성병들이 쏘는 화살은 주로 충차와 운제에 집중되었고, 이번엔 제법 효과를 발휘했다. 두 개의 운제가 박살 나서 멈췄고, 충차 하나도 방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럴수록 공격군들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여기서 멈추면 피해는 훨씬 커진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콰르르르-!
두 개의 충차가 어느 게 먼저랄 것도 없이 무융성 외곽의 해자를 향해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이대로 부딪치면 불타는 성문만이 아니라, 급히 수리한 성벽까지도 꿰뚫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콰드드득!
충차에 설치된 바퀴가 마치 빠져 버릴 듯 심하게 삐걱거린다 싶더니, 홀연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아니 실제로는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해자에 도착한 충차는 더 이상 달리지 못했고, 애당초 높이 쳐들려 있던 뾰족한 앞부분이 서서히 떨어져 내리며 성문에 부딪쳐 갔다.
꽈앙, 콰자작!
이미 돌입대가 불을 질러 절반 이상이나 타 버린 성문이었다. 충차가 가한 거대한 충격을 버텨 낼 턱이 없었다.
“자, 훌륭한 잔교가 생겼다. 그대로 돌입하라!”
다섯 부장 중 우효금이 선두에 서서 연방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의 말대로 해자를 건너 성문을 친 충차가, 그대로 잔교 역할을 해도 좋을 정도로 걸쳐져 있었다.
말해 놓고 우효금은 자신이 먼저 충차로 만들어진 잔교를 건넜다. 성에 가장 먼저 돌입했다는, 소위 ‘일 번 돌입’ 의 영예를 놓치기 싫어서였다.
그다음부터는 오랜 전쟁을 통해 확증된 방법대로 진행되었다. 성문이 깨졌으니 필요 없어진 운제를 버린 별동대들은 저마다 기를 쓰고 성으로 달려들어 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입해야 나중에 있을 논공행상 때보다 유리해지니 말이다.
* * *
후두두둑-!
불타는 서문을 등지고 새벽부터 성병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던 광운의 눈에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화살의 비가 보였다.
‘왔다!’
솔직히 광운은 밖에 벌써 별동대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다른 곳엔 전혀 신경 쓸 여유를 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화살의 비를 본 순간 광운의 입은 저절로 벌어지며,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별동대가 왔다! 조금만 더 버텨라!”
이렇게 말했지만 벌써 이백의 잡가군 중에서 백 명 가까이 희생된 후였다. 다른 문으로 간 자들은 더 심할 터였다.
게다가 위험은 더욱 가중되었다. 별동대가 충차를 동원한 걸 본 성루의 병사들이 문을 지키기 위해 왈칵 몰려 내려왔던 것이다.
“한 발도 물러서지 마라! 이제 곧 별동대가 돌입한다! 버텨라!”
연방 고함을 지르던 광운은 문득 옆에서 자그마한 활을 쏘고 있는 편월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말투가 완전히 명령조로 바뀌어 버렸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편월이 한 말 때문일까?’
이런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광운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놈들을 치고 성문을 사수하라!”
“우와아-!”
성병들도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성문으로 돌입하는 적들을 하나씩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어떻게든 성문을 확보해야 된다.
“치고 나가라! 치고 나가!”
갑자기 광운이 잡가군의 등을 마구 떼밀며 앞으로 쳐 나갔다. 성병들이 싹 물러서며 저만치 활 부대가 도열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적중에 뛰어들어라! 적과 떨어지지 마!”
지금까지 이런 위기는 몇 번인가 닥쳤었다. 성병들로서야 몇 명 되지 않는 돌입대를 화살로 쏴 죽이는 게 가장 간단하고 편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걸 뻔히 아는 광운이 그대로 당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활 부대가 보인다 싶으면 그는 마구 치고 나가 적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가 뒤섞인 곳에 화살을 쏴 댈 정신 나간 놈은 없다는 판단이었고, 그건 번번이 적중했었다.
그 바람에 편월은 뒤에 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편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차례 경험이 있었고, 혼자 남았다고 두려움에 떨 정도로 싸움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편월은 적의 활 부대를 지휘하는 적장을 자신의 활로 겨냥하고 있었다.
‘백 보 정도. 이마를 향해 쏜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적장을 겨냥하고 있는 편월은 머릿속에 거기까지의 거리와 그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화살의 궤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팅!
마침내 편월은 화살을 발사했고, 보기 좋게 적장의 목 바로 아래 가슴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적장은 멀쩡했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은 편월의 작은 활로 꿰뚫기에는 너무도 단단했다.
편월은 다시 한 대의 화살을 재었다.
‘투구 끝 장식을 겨냥한다!’
이마를 겨냥해서 가슴을 맞혔다면, 투구 끝을 향해 발사하면 적장의 얼굴을 맞힐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팅!
다시 화살이 발사되었고, 편월은 그 궤적을 눈으로 좇아갔다. 왠지 이번엔 적중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장군 검을 휘두르며 부하들에게 명을 내리던 적장이 그대로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를 편월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죽여야 할 적들은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기뻐하며 자랑하는 건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건, 아직 어린 그조차도 익히 알고 있는 점이었다.
편월은 다시 활을 들었다. 이번엔 광운의 배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가 표적이었다.
팅!
그 화살이 발사되었을 때, 편월의 등 뒤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땅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별동대가 끌고 온 충차가 성문을 깨뜨린 것이었다.
편월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충차가 문을 깨뜨린 그다음 순서, 즉 별동대가 그대로 돌입하리란 걸 익히 알고 한 행동이었다.
“오, 꼬마 대장. 자, 타라!”
가장 먼저 성으로 돌입한 우효금이 한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편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채였다.
편월도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고, 그대로 훌쩍 들려 안장 앞에 앉게 되었다.
“광운 대장도 저기 있군! 광운 대장, 수고 많으셨소. 이제부턴 우리가 맡겠소!”
제 딴에는 막아 보겠다고 앞에서 얼쩡거리는 적병 둘을 창으로 찍어 넘기며, 우효금은 광운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다음에 지른 우효금의 고함은 더욱 컸다.
“파양주 별동대의 부장 우효금이 왔노라! 죽기 싫은 자들은 길을 비켜라!”
운집해 있던 적병들 한가운데로 뛰어든 우효금은 그야말로 양 떼 속에 뛰어든 한 마리 늑대처럼 설쳤다.
비록 성중에서의 싸움이 시가전의 양상을 띤다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성벽 안쪽이 바로 연무장과 연결되어 마음껏 말을 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벌써 싸움이 되지 않는다. 일기에 불과하지만, 그 위력은 보병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거기에 다시 다른 부장들이 뛰어들었다. ‘일 번 돌입’을 우효금에게 뺏긴 터라 그들은 모두 악이 받친 모습들이었다.
자연 그들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일 번의 영예는 이왕 날아가 버린 것, 지금부터는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이느냐의 경쟁이었다. 거기에 적장이라도 걸리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터였다.
“편월!”
별동대의 돌입으로 한결 여유를 찾은 광운이 편월을 불렀다. 이제 돌입대는 물러가야 할 때였다. 새벽부터 지금까지의 분전으로 그들 모두가 지쳐 있기 때문이다.
“자, 받으시오! 광운 장군!”
다른 부장들에 비해 비교적 여유가 있는 우효금은 일부러 말을 몰아 광운의 품에 편월을 안겨 주었다.
“적들이 달아난다! 쫓아라!”
“우우우-!”
“말을 버려라! 말을 버려! 돌입대는 말을 챙겨라! 시가전이다! 말을 버려라!”
어느새 성병들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고, 이 연무장만 벗어나면 거기부터는 상가나 성내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 병사들이 거주하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말을 타는 게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었다.
또한 별동대들은 쫓기는 성병들이 갈 곳을 뻔히 알고 있었다. 이 거주 지역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을 내성일 게 분명했다.
확실히 성병들은 내성으로 집결했다. 그들로선 최후의 보루로 들어간 셈이었다.
“불을 꺼라! 민가에 불을 지르는 자는 군율軍律로 다스리겠다!”
싸움이 일단락되었을 때 성으로 들어온 곽준방이 내린 최초의 명이었다.
실제로 몇 군데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농성하는 병사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별동대의 누군가가 지른 것일 터였다.
“고생 많았네. 돌입대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성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축 처져 있는 광운에게 곽준방이 물었다. 광운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아직까지 돌입대는 집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잘 싸웠나, 꼬마 장군?”
곽준방은 광운에게 기대앉은 편월에게도 물었다.
“응, 아니 옛!”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던 편월이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급하게 군례를 갖췄다.
“하하하! 꼬마 장군 덕분에 우리가 이긴 것 같군!”
곽준방은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이런 승리도 드물었다.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무융성은 건주의 본성이다. 한 시진 조금 넘는 공격으로 낙성시켰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내성으로 들어간 성병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고전이 될지도 모른다.
“좀 쉬다가 돌입대의 피해를 보고해 주게!”
한마디 남긴 후, 곽준방은 말을 몰아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별동대의 뒤를 따랐다.
“다친 곳은 없지?”
그제야 광운은 편월의 상태를 물었다. 그만큼 지쳤다는 증거였다.
“응.”
“그럼 됐어. 이제 슬슬 돌입대를 불러 모을까?”
느릿하게 말하며, 그보다 더 천천히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뼈마디가 한꺼번에 위치를 이탈한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통증을 휘몰고 왔다.
그래도 이겼다는 성취감이 있어 견딜 수 있는 광운이었다.
2
돌입대를 해체한 광운이 다시 잡가군에 편입되어 내성 공략에 나선 건 사흘 뒤였다.
그렇다고 전투에 직접 참가한 건 아니었다. 지난번 돌입대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곽준방은 그들 전원을 병참 부대에 배속시켰다. 좀 더 많은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였다.
사실 돌입대의 피해는 엄청났다. 오백 명이 참가해서 고작 백칠십여 명이 생존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죽어 간 자들은 벌써 산 사람들의 뇌리에선 잊혔다. 전장에서의 죽음이란 그처럼 값어치가 없는 것이었다.
“심심해. 정말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 거야?”
시원한 성벽의 그늘 아래 길게 누워 있는 광운에게 편월이 투덜거렸다. 병참 부대에 배속되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지겹기만 했다.
“쉬어 둬. 휴식이 중요하다고 내가 늘 말했잖아.”
“그래도 바로 저기에선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놀고 있잖아!”
“노는 게 아냐. 아군이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우리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거야.”
“피이, 이건 우리가 아니라도 할 수 있잖아.”
“싸움도 꼭 우리만 하라는 법은 없어.”
“피이-!”
편월은 입을 삐죽였다. 오늘의 광운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이 좋아 병참 부대지 실제로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 한 번 작미성에서 오는 식량과 물자를 호송하는 게 주 임무였는데, 그사이엔 온통 들판인지라 기습을 당할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임무니까 말 타고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게다가 광운은 그 일도 하지 않았다. 돌입대에 편입됐었던 잡가군이 대장이 할 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말렸었다.
그런 형편이니 지난 사흘간 한 일이라곤 주는 밥 먹고, 아무 데나 널브러져 쉬는 게 전부였다. 편월이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가 될 법했다.
“우리, 몰래 가서 싸우자. 응?”
“그랬다간 위치를 이탈했다고 목이 달아날걸.”
“쳇! 이럴 바엔 차라리 잡가군을 해체해 버리지. 그럼 유화랑 실컷 뛰어놀 수 있을 텐데.”
그건 광운도 궁금한 점이었다. 이쯤 되면 벌써 이긴 싸움이다. 다른 곳이었다면 진즉에 잡가군은 해체됐을 터였다.
그런데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해체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막대한 경비를 잡아먹는 잡가군이고 보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기로 하고 광운은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마음껏 쉬어 둬. 언제 전투에 투입될지 모르니까.”
“빨리 투입됐으면 좋겠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편월도 돌아누운 광운의 등에 비스듬히 기대 누웠다. 저만치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사람을 찾고 있소! 잡가군에 소속된 광운은 어서 나와서 곽 장군의 명을 받으시오!”
“아, 왔다!”
편월이 반색을 띠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외친 사람은 분명 전령기를 등에 꽂고 있었고, 또 곽준방의 명을 받으라는 말까지 했다.
“귀찮군.”
반면 광운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여기, 여기! 여기 광운이 있어요!”
편월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전령을 불렀다.
“광운이오?”
“뭐요?”
“즉시 내성으로 오라는 곽 장군의 명이오!”
“알았소.”
귀찮았지만,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잡가군에 소속된 몸이었고, 그건 내려진 명에는 절대복종해야 된다는 의미였다.
“가자, 편월.”
광운이 불렀을 때, 벌써 편월은 저만치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광운도 내성을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외성이 함락되자마자 곧바로 병참 부대로 배속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탓이다.
겉모양만으로는 오히려 내성이 외성보다 훨씬 견고하게 보였다. 해자는 없었지만, 대신 조경을 위해 만들어 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연못이 그 역할을 훌륭히 대신하고 있었다.
성벽도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새로 수축한 듯 퇴락된 곳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성주 일족이 사는 곳인지라 각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어서 오게!”
“어서 오시오!”
광운과 편월이 임시 진막으로 사용하는 민가에 들어가자 곽준방과 다섯 부장들이 반가이 맞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주공의 명이 내려왔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적을 섬멸하라고 하시는군.”
“그럼 공격을 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적들이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을 해서 그리 쉽지가 않네.”
“하긴…….”
지금 여기 와 있는 군사라고 해 봐야 파양주의 선봉으로 나선 별동대 오천이 고작이다. 내성으로 들어간 적병의 수가 그 삼분지 일에만 달한다고 해도 낙성이 쉽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네. 조금 전에 성에서 항복의 사자가 왔었네. 성주의 목숨만 살려 주고, 대를 잇게만 해 준다면 항복하겠다고 하더군.”
“그럼 이 싸움은 끝난 것 아닙니까? 항복한 성주 일족은 영욱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 휘하의 병사들은 아군에 통합하면…….”
“얘기를 제대로 듣긴 한 건가? 주공께서는 적들을 모두 섬멸하라고 하셨네. 그래서 본대도 예정보다 일찍 출발할 것 같네.”
광운은 일시지간 말문이 막혔다. 항복을 생각하고 있는 자를 굳이 섬멸하라는 성주의 의중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자고로 항자불살降者不殺이라고 했다. 설사 끝까지 저항하다 사로잡혀도 승자 측에서 한두 번 정도는 항복할 것을 권유해서, 그게 통하면 살려 주는 게 전장의 관례이자 예의이기도 하다.
“성주께서는 적들이 항복할 의향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광운은 그렇게 물을 수 있었다.
“항복의 사자가 돌아가자마자 전령을 보냈네.”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항복의 뜻을 비친 자를 죽인다면, 돌아올 것은 천하의 비웃음뿐이니까요.”
“전령이 갔다 오는 것보다, 호 대장군이 이끄는 본대가 먼저 도착할까 싶어 그게 걱정일세.”
“흐음!”
광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파양주군의 총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윤천은 이미 선봉을 곽준방에게 뺏겼다. 대장군의 체면 때문이라도 지금 내성에 들어가 농성하고 있는 적들에게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을 것이고, 그게 마용승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면 어떤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광운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건 제가 개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광운은 어디까지나 잡가군이다. 이런 일에 의견을 제시하는 건 물론, 들은 것도 잊어야 하는 신분인 것이다.
‘몇 번 대장 노릇을 했다고 나도 모르게 말려들고 말았군.’
이래서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 동안, 그것도 고작 두 번 정도 대장 노릇 했다고 잠시 자신의 신분까지 망각했으니 말이다.
“기다리게.”
나가려는 광운을, 곽준방이 무거운 어조로 제지했다.
“비밀을 지키라는 말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과 귀를 없애는 데도 능하지만, 때때로 입도 지워 버리길 잘하는 놈이니까.”
“그게 아니라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부탁……?”
“내가 알기론 지금 내성에 들어간 무융성주에겐 두 명의 처와 아들 한 명이 있다고 알고 있네. 고촉이란 자는 작미성 싸움 이후 행방불명이니, 그들만 몰래 빼내 자네가 숨겨 주게.”
“말도 안 됩니다. 전 잡가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무융성주 일가를 빼내면 멀리 달아나야 할 거고, 그럼 탈영인데…….”
“그 문제는 내 직권으로 해결하겠네. 자네를 잡가군에서 풀어 주겠네.”
“그래도 그건 어렵겠소. 당분간 영욱성에 머무르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그럼 무융성주 일족이 모조리 도륙당하는 걸 두고 보겠다는 말인가?”
“엄밀히 얘기하면, 이 문제는 저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일개 잡가군이 어떻게…….”
“명령이라고 하는데도 거부하겠나?”
목청을 높인 곽준방의 말에 광운은 문득 우스워졌다. 방금 그의 입으로 자신을 잡가군에서 놔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면 그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이해해 주시오, 광운 장군! 주공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뒤에라도 파양주에 인정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남기고 싶소. 이는 나중에 주공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것이오.”
“무리한 부탁인 줄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나중에 주공이 아시게 되더라도 잡가군 소속인 광운 장군을 탓할 일은 없을 것이오. 우리야 당장 목이 달아나겠지만.”
여상계와 팽요도 거들었다. 이 역시 성주인 마용승에 대한 충정의 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일세. 부디 맡아 주게!”
곽준방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간절한 부탁의 말이 나왔을 때, 광운은 자신이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그 한마디가 크게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광운은 조용히 대꾸했다.
“고맙네.”
“감사하오, 광운 장군!”
광운의 승낙에 사람들이 일제히 사의를 표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단독으로 처리한 걸로 해야 될 겁니다. 혹시라도 뒤에 성주께서 아시게 되더라도, 여러분들은 전혀 모르는 일로 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네. 어찌 자네 혼자 모든 책임을…….”
“그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성주는 여러분들을 처벌해야만 되고, 그건 바로 수족과 같은 충신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주로선 어떻게 돼도 손해라는 말이지요.”
“으음!”
“오늘 밤 은밀히 내성으로 잠입하겠습니다. 적들도 안심시켜야 될 테니, 밀서나 한 장 써 주십시오.”
“은밀히 할 필요가 뭐 있겠나? 저쪽에서도 사자가 왔으니, 자네도 사자의 신분으로 당당히 들어가도 될 걸세.”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나중에 저 혼자 한 일이라고 얘기하려면 우리 편도 속여야 됩니다.”
“미안하네.”
“그런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 내일 아침에 제가 부상을 당해 요양하라고 보냈다고 해 주십시오. 그게 혼자 잡가군에서 풀려나는 것보다 자연스럽습니다.”
곽준방은 깊숙이 가라앉은 눈길로 광운을 주시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결정된 이상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광운은 가벼운 예를 갖춘 후 민가를 빠져나왔다.
“역시 나는 성을 하나 가져야겠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편월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왜 또 그런 얘길 해?”
편월이 성을 갖는다는 얘기는 벌써 몇 차례나 했던 것이다. 새삼 화젯거리가 될 이유도 없었다.
“성을 하나 가지고 있으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뭐?”
광운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이건 어린 편월의 유치한 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만도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힌 것일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선명한 이유인가!
정규군이든 잡가군이든 대부분의 장졸들은 명령을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게 싫다고 편월은 분명히 얘기했던 것이다.
“그래? 성이 있으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나?”
“응.”
너무도 간단하게 대꾸하는 편월을 보며 광운의 표정은 조금 무거워졌다. 며칠 전 건성으로, 성을 가질 때 같은 편이 돼 주겠다고 했던 걸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자. 오늘 밤에 일을 하려면 좀 쉬어 둬야지.”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심하다고 쉬지도 않으려 했던 편월이었다. 그러나 할 일이 생기자 누구보다 휴식의 중요성을 더 잘 인식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들은 조금 전의 자리로 돌아가 길게 몸을 뉘었다.
* * *
내성으로 스며드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군의 작전이라면 이처럼 쉽지는 않았으리라.
문제는 성에 스며든 다음부터였다. 어디까지나 은밀히 무융성주인 고욱교를 만나야 했고,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고욱교가 어디 있는지는 광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성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오 층으로 된 구안루求安樓에 있을 게 틀림없다.
요는 어떻게 고욱교를 은밀히 만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와 단독으로 만나거나, 아니면 그가 가장 믿는 최측근 한둘만이 배석한 자리가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아군을 속였듯, 적병들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함이었다.
모르긴 해도 지금쯤 이 성에 남아 있는 잡가군은 거의 없을 터였다. 패전이 확실하다고 인식되었을 때,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났을 것이다. 설사 대세에 밀려 처음엔 이 성에 들어왔더라도, 그 후에 달아났을 게 분명하고…….
그러면 이 성에 남아 있는 자들은 정규군으로, 대부분 고욱교에게 충성을 바치는 무리들일 게다.
그런 자들의 눈에 고욱교의 피붙이들만 살겠다고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킨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이 일이 마용승에게 알려질 수도 있다.
고민을 거듭하던 광운의 눈에 편월이 메고 있는 자그만 활이 보였다.
‘저거라면…….’
생각이 미친 순간, 광운은 자신의 옷자락을 조금 찢어 냈다. 그리고 소도로 손가락 끝을 찔러 피로 몇 글자를 급히 적었다.
“편월, 활을 다오.”
이유도 묻지 않고 편월은 활을 건네주었다. 아무리 어려도 병기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선뜻 건네주는 건 그만큼 광운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화살에, 글을 쓴 천 조각과 곽준방이 준 밀서를 한데 묶은 광운은 잠시 망설였다. 어디에 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예리한 시선으로 광운은 구안루를 살펴보았다.
‘나라면 어디에 있었을까?’
맨 위층엔 아마 처자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고욱교도 거기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광운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성이 위급한 상태인데 처자식과 더불어 자고 있을 성주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사층이나 삼층인데…….’
거기서 고욱교는 심복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상의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광운은 삼층을 향해 활을 쏘기로 했다. 사층엔 가족들에게, 이층은 부하들에게 그들의 논의가 새어 나갈 우려가 있다. 자신이라면 은밀한 얘기는 삼층에서 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퓽!
화살은 가볍게 날아 삼층의 창살을 꿰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광운은 편월을 안고 정원의 나무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제 곧 고함 소리가 나리란 예상 탓이었다.
그러나 구안루는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화살 따위는 날아들지 않았던 듯했다.
‘좋은 징조로군!’
그 현상이 광운은 반가웠다. 저들 사이에 적대감이 팽배해 있다면 당장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찾으러 나왔을 테니 말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한 사람이 구안루 입구에 모습을 보였다. 그는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광운이 은신해 있는 근처까지 접근했다.
“어디 계시오? 나는 고욱권이라는, 성주의 친동생이오. 화살을 날린 분은 어서 나오시오!”
“이쪽이오!”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광운은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적진에 있다는, 버릴 수 없는 경계심이 작동한 탓이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소. 이쪽의 준비는 모두 끝났소. 인원은 모두 다섯 명으로, 다들 남장을 시켜 잡가군으로 위장해 놓았소.”
고욱권의 말에 광운은 이들이 오늘과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잠깐! 다섯이라고 하셨소? 내가 알기론 네 명이오.”
“성주의 부인이 모두 세 명이오.”
“흐음, 모두 일곱이라…….”
광운은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자신들을 포함해서 일곱 정도라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좋소!”
광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욱권은 그대로 몸을 돌려 구안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광운이 급히 따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 창을 맞대고 싸웠던 상대라는 적대감은 어디에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내성을 빠져나오는 건 비밀 통로를 이용했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건 밖에 진 치고 있는 파양주군을 통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의 음어를 알고 있었고, 또 광운과 편월은 파양주군 사이에선 전설 비슷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광운의 얼굴은 작미성에서도 통했다. 게다가 부상 치료차 간다는 곽준방의 증서까지 있었으니, 아무 일 없이 영욱성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지.’
광운은 고욱교 일가를 죽영루에 숨길 작정이었다. 영원히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적어도 쉽게는 발각되지 않을 터였다.
3
호윤천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해 무융성의 내성을 짓밟아 버린 건 팔월 이십오 일의 일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짓밟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성문을 깨고 성벽을 넘어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석공石工들을 이용해 아예 성벽을 무너뜨리고 진입했으니 말이다.
근 이천에 달하는 성병들의 저항도 필사적이었다.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파양주군과 싸웠다.
최후의 장식은 고욱권이 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모든 장졸들을 이끌고 구안루로 올라가 저항을 계속하던 중, 파양주군이 지른 불길 속에서 그 생을 마감했다.
호윤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융성의 내성은 물론 외성까지 모두 허물고 불태워 버려, 아예 평지를 만들어 버렸다. 이는 성주인 마용승의 명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호윤천은 건주와 이웃하고 있는 황주荒州로 가는 관문인 돌운성突雲城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 크기는 실로 방대해서 건주의 무융성은 물론, 파양주의 본성인 영욱성의 크기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건 마용승의 생각 한 부분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평소 건주와 친밀하게 지냈던 황주를 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러자 파양주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인근 세 개 주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언제 마용승의 칼날이 자신들의 목덜미에 떨어질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움직임을, 죽영루에 앉아 있는 광운은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자고로 술과 여자에 취한 남자들의 입은 가벼워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차라리 고욱교의 처지가 나았다고 할 수도 있겠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해 보면 고욱교는 매를 먼저 맞은 경우에 해당된다. 비록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기반은 모두 잃었지만, 적어도 망하기 전에 마음을 썩일 일은 적었다.
그에 비해 파양주와 경계를 나누고 있는 인근 세 개 주의 주인들은 전전긍긍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을 게 분명하다. 코앞에서 대규모로 돌운성이 개축되고 있는 걸 보는 황주는 말할 것도 없었고.
‘마용승이 천하를 넘보기 시작했다!’
작금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는 광운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게 보면 마용승이 왜 그렇게 건주를 철저하게 짓밟았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천하를 향한 첫발로 그는 주변에 공포감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주효했다. 황주를 제외한 세 개 주에서 영욱성으로 뻔질나게 사자를 파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입맛이 없나요? 식사를 통 안 드셨네요.”
죽영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으며, 탁자에 놓인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편월은 어디 갔소?”
“유화와 놀고 있어요. 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호호호!”
제법 유화의 보호자처럼 행동하는 편월을 떠올리며, 죽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삼층은 좀 어떻소?”
“여전하세요. 부하와 형제들을 다 죽이고 자신들만 살아남았으니…….”
삼층은 고욱교 일가가 머물고 있는 곳이다. 죽영루에서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곳이라 그들에게 제공한 것이었다.
“또 한차례 큰 전쟁이 있을 모양이죠?”
“아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갑작스러운 죽영의 말에 광운은 의외인 듯 가볍게 되물었다.
전쟁에 대한 원망은 많이 하는 그녀였지만, 일어나지 않은 싸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흔치 않았다.
“어제 황주를 지나온 낭인들이 손님으로 왔었어요. 그들 말로는 황주에서는 전쟁 준비가 한창이라더군요. 물론 그 상대는 파양주고.”
광운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주루를 운영하면서 많은 얘기를 들으니, 죽영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세상 돌아가는 일에 밝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까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전쟁 냄새를 맡았다는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광운의 예상보다 훨씬 크게 전개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건주를 쳐서 이겼음에도 잡가군은 여전히 모집하고 있어요. 예전엔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이어진 죽영의 말에 광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용승은 잡가군을 모집할 뿐 아니라 그들을 꾸준히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오만이던 파양주군이 어느새 칠만을 넘어서 십만을 바라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주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광운이 계속 말이 없자 죽영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난들 알겠소.”
“호호호!”
“아니, 왜 웃소?”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이 막강한 성주가 되어,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일삼는 자들을 모두 쳐 없애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어요. 우습죠? 호호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워서 죽영은 더욱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광운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편월과 죽영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죽영의 말은 너무 황당했다. 전쟁을 일삼는 사람을 모두 없애라니…….
그건 죽영의 가슴 깊은 곳을 도려낸 상처이기도 하고, 현재도 곪아 가고 있는 아픔이기도 할 터였다.
“그렇게 전쟁이 싫소?”
“전쟁이란 남자에겐 죄악이지만, 여자에겐 형벌이죠. 남자들이 지은 죄의 대가를 여자들이 치러야 하는…….”
“그래도 그 전쟁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소. 당장 잡가군을 보시오. 그들이 버는 돈으로 그 가족들은 이 난리 통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지 않소.”
“아뇨. 그건 사는 게 아니에요. 여자들은 그저 집에 앉아 기다리는 것 같지만, 매 순간마다 제 생명을 깎아 전장에 나가 있는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더해 주지요. 어느 산하에 시신으로 눕더라도 초라하게 보이지 말라고 최선을 다해 꾸며서 내보내지만, 정작 여자들의 옷고름은 늘 눈물에 젖어 누추하지요.”
“흐음.”
광운은 문득 목이 메는 걸 느꼈다. 여자들이라고 했지만, 이건 바로 죽영 그녀 자신의 얘기일 게다.
‘아니다. 이건 그녀 말대로 세상 모든 여자들의 얘기다!’
어느 아내, 어느 어머니가 남편을, 또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편할 수 있을까?
치열한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은 자는, 어쩌면 그들의 뒤에서 흘린 여자들의 눈물 때문에 그 목숨을 부지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보이지 않는 속곳 자락을 적신 죽영의 눈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미안해요. 또 이상한 말을 하고 말았네요.”
“아니오. 나도 깨달은 바가 많소.”
“예?”
“앞으로는 나도 잡가군에 지원할 땐 좀 더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소.”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앞으로는 전쟁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지원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오. 그게 뭘 위한 전쟁인가를 신중하게 살펴보겠소. 한 개인의 욕심을 위한 전쟁엔 지원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아!”
광운의 말에 뭔가를 느낀 듯 죽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눈에선 금세 물방울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힘들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편월이 활약할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선 전쟁이 사라질지도 모르겠소.”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입 밖으로 내놓고 보니 왠지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광운의 뇌리를 스쳤다. 거기엔 언젠간 커다란 성의 주인이 되겠다고 장담하던 편월의 얼굴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편월이 활약할 때…….”
꿈에 잠긴 듯 몽롱한 눈빛으로 나직이 내뱉는 죽영에게 광운은 편월의 꿈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 얘기는 죽영을 달뜨게 만들었다. 설사 이루어지지 않는 공허한 말뿐일지라도, 전쟁이 없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문제는 그런 죽영의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걸 깨뜨린 건 죽영루 입구에 버티고 선 전령의 고함 소리였다.
“잡가군 소속 광운은 당장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오!”
“응?”
광운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아직 잡가군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자신에겐 분명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휴식이 주어졌을 뿐 잡가군 자체가 해체된 건 아니었다.
“가 봐야겠소. 이 기회에 성주의 의중이 뭔지도 알아보고 오겠소.”
광운을 따라 죽영도 몸을 일으켰다.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그녀의 두 눈에 가득했다.
광운이 불려 간 곳은 집무창 안에 있는 호윤천의 거처, 즉 대장군막大將軍幕이었다. 드물게도 거기엔 성주인 마용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의외의 일이었다. 성주가 대장군막에 왔다는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이었고, 게다가 호윤천은 지금 돌운성을 개축하느라 부재중이다. 마용승이 올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또한 성주의 신분으로 일개 잡가군을 불러서 만난다는 것도 엄청난 파격이었다.
“고욱교 일가를 보호하고 있다지?”
광운을 본 마용승의 첫마디였다. 문책을 한다기보다는 확인하려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도 광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최고 명령권자인 성주의 명을 어겼다는 건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기 힘들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한 번은 부딪칠 일이고, 또 처음부터 이건 자신 혼자 책임지기로 했었다.
“그렇습니다.”
“잘했네!”
“예?”
생각지도 않았던 마용승의 말에 광운은 차라리 멍청해져 버렸다.
어떤 처벌도 받겠다고 단단히 각오했던 게 오히려 우스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당분간은 비밀로 해 두게.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 성사되면, 그땐 고욱교에게 식읍 천 호쯤 줘서 살아가도록 해 줄 생각일세.”
계속되는 마용승의 말에 광운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살려 주는 것만도 고마울 판에, 식읍을 줘서 생활까지 보장해 준다니, 고욱교가 알면 뛸 듯이 기뻐할 게 분명했다.
“자네는 작금의 천하 정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아! 그, 그건 다른 장수들에게 하문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용승의 질문도 광운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낭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장수들의 보고는 너무 딱딱해서 말이야. 그들은 오직 나에게만 충성을 하는 자들이거든.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난 보다 큰 걸 보고 있다네.”
“보다 큰 것?”
“지금도 이 천하의 어디에선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걸세. 나는 그 전쟁을 없애고 싶네. 그러니 나나 내 땅의 번성만을 위한 충성이 아니라, 천하를 위한 보다 더 큰 충성을 원하고 있네.”
마용승의 얼굴에 고정된 광운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자기보다 어린 그의 모습이 갑자기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주께서는…….”
“난 이미 결심을 굳혔네. 이번에 건주를 필요 이상으로 깨트린 것도, 그들이 간사한 계책을 세워 전쟁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네. 아마 황주도 마찬가지가 될 걸세. 난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 있다면 반드시 달려가서 짓밟아 줄 걸세. 대신 누구든 평화를 원한다면, 천하의 안정을 바라는 자가 있다면 내 날개 밑에서 쉴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자신도 모르게 광운은 허리를 숙였다.
마용승에게 이처럼 원대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고 건주를 그처럼 철저히 짓밟은 것에 대해 은근히 원망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자네에게 묻는 걸세. 자네의 눈에 비친 천하는 어떤가? 또 어떻게 해야 내가 내 꿈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황주를 치십시오. 지금 황주의 주인은 모용기慕容基입니다. 모용씨는 대대로 소란 피우기를 좋아하는 가문이니, 마땅히 쳐 없애는 게 좋을 겁니다. 그 후엔 기다리십시오.”
일단 마용승의 뜻을 알게 되자 광운은 망설이지 않고 평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기다리다니? 뭘 기다려야 하나?”
“성주님의 위력은 건주와 황주를 치는 걸로 천하에 알려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이 주변에 있는 세 개 주가 들썩거릴 겁니다. 그들이 스스로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광운의 말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삼경이 넘도록 계속 이어졌다.
* * *
그날 아침 드넓은 궐운평야는 그해 들어 처음으로 내린 서리로 뽀얗게 뒤덮이고 말았다.
서리가 내린 곳은 비단 평야만이 아니었다. 이제 준공을 앞둔 창일성 내의 황궁 공사장도 그날은 뽀얀 회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작, 바작!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서리의 감촉을 음미하며, 가겸후는 황궁을 둘러보았다.
이런 속도라면 무사히 내년 초하루엔 황제가 들어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이미 가겸후의 눈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황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년부터 시작될, 웅지가 활짝 펼쳐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천하는 좁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이게 가겸후의 포부였다. 힘으로만 따지자면 벌써 천하를 석권하고도 남았겠지만, 명분이 없어 여태 웅크리고만 있던 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 발로 걸어온 황제는 보배였다. 그를 앞세우면 천하의 열왕패주列王覇主들 위에 당당히 군림할 수 있는 명분도 확실히 서게 될 터였다.
“전하, 여기 계셨사옵니까? 날씨가 찬데 안으로 드시지요.”
“또 어떤 일로 예까지 왔소이까?”
육우맹을 맞는 가겸후의 어투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근자에 이르러 부쩍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까닭에서였다. 그걸 모를 육우맹이 아니었다. 그저 이게 충성이라고 믿고 있기에 가겸후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마용승이 어금니를 드러냈사옵니다.”
“허허, 또 그 소리요?”
“마용승은 올해 건주를 친 데 이어, 황주까지 병탄해 버렸사옵니다. 그 인근에 있던 세 개 주도 그 서슬에 질려 스스로 볼모까지 바쳐 화평을 이루었나이다. 다음에 마용승이 할 짓이 뭐라고 생각하시옵니까? 내년엔 틀림없이 왕에 오를 것이옵니다.”
“그게 바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이란 걸 육 장군은 모르겠소?”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보셔야 하옵니다. 인근 다섯 개 주를 통합한 마용승의 식읍은 이제 백만 호가 넘사옵니다. 더 이상 버려뒀다가는 감당하기 힘들 줄 아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이 겨울에 군사라도 동원하자는 거요?”
“그게 최상의 방법이라고 사료되오나, 아무래도 겨울의 군사행동은 불리한 점이 많기에…….”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이오?”
“지금 당장 목철린에게 사신을 파견하시옵소서.”
“목철린에게?”
“마용승을 치고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면 욕심 많은 목철린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사신은 내년에 황제의 이름으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소!”
“그때까지 마용승의 세력은 꾸준히 늘어날 것이옵니다. 또한 황제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서는 대왕의 위신이 서지를 않사옵니다.”
“육 장군.”
지금까지와 달리 가겸후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그렇게 짐을 믿을 수 없소이까?”
“화, 황공하옵니다.”
육우맹은 서리가 내린 땅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왕인 자기를 불신하느냐는 가겸후의 질문은 신하로서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모든 건 내년부터 시작될 테니!”
“명심하겠사옵니다.”
육우맹도 더 이상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말을 계속한다는 건 바로 왕을 믿지 못한다는 것과 통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황비皇妃가 될 인물은 물색해 보셨소?”
“서너 명 정도 뽑아 뒀사옵니다.”
“철저하게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야 하오!”
“만전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하하하! 그만 일어서시오. 내년에 황제를 장가보내고 나서, 나도 슬슬 마누라를 얻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하, 진심이시옵니까?”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요. 자, 들어갑시다. 바람이 몹시 차군.”
가겸후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서로가 유쾌하지 못한 대화는 이걸로 충분했다.
많은 서리와, 그보다 더 많은 눈을 내리면서 그해도 서서히 세모歲暮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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