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주풍운建州風雲 (7/66)

건주풍운建州風雲

1

고욱권의 천막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온 건 바로 그날 오후였다.

“놈들은 고작 오천이오! 그래, 그거 하나 짓뭉개지 못해서 우리들이 이 고생을 해야겠소? 내 눈앞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거꾸러지는 걸 봐야겠소?”

비록 겉으로 철저히 숨기기는 했지만, 처음 건주를 출발할 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전 병력이랄 수 있는 삼만을 이끌고 왔던 고욱권이었다. 그런데 불과 열흘 남짓한 전투로 그 삼분지 일인 일만의 군사를 잃었다. 정신 멀쩡히 사람들을 대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러앉은 장수들은 하나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승리라고 해 봐야 처음 파양주의 잡가군을 상대했을 때뿐, 그 후론 연전연패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제 더 기다릴 수 없소! 오늘 밤 야습을 감행해서 저 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적들의 영채를 불살라 버리겠소. 내가 직접 진두에 서겠으니 그리 아시오!”

“불가하오. 대장군이 직접 야습에 나섰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소이다. 그 야습은 소장이 맡겠소!”

갑옷 입은 가슴께를 주먹으로 탁 치며 몸을 일으킨 건 바로 흑기군을 맡고 있는 저도底陶였다. 서른하나의 한창 나이인지라, 오늘 아침 광운군에게 부대가 짓밟혔다는 수치를 씻기 위해 내심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다.

“승낙할 수 없소. 오늘 밤 야습은 기필코 손수 지휘해야겠소!”

총지휘관이 이렇게 나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구겨진 인상의 저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어째서 아직 성주께서는 아무 연락이 없으신 게요? 벌써 궐주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도 지났는데…….”

슬쩍 화제를 돌린 사람은 적기군을 맡고 있는 염규廉圭였다. 그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며 웅성거렸다.

사실 고욱권도 그 점이 불만이었다. 건주보다 몇 배의 군사력을 갖춘 파양주를 칠 때는 의당 철저한 계획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고욱권의 형인 고욱교는 우선 파양주를 치라고만 했었다. 다음에 할 일은 전령을 통해 알리겠다면서, 은근히 궐주의 지원을 암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양주에 들어온 지 벌써 보름이 넘었고, 전투를 벌인지도 열흘이 지났건만 건주에서는 쪽지 한 장 날아오지 않았다. 고욱권으로선 형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튼 그 점은 당분간 접어 둡시다. 조만간 무슨 연락이 있을 것이오. 그보다 오늘 밤에 있을 야습은 총병력 일만을 거느리고 시도하겠소. 그리 알고 각 부대의 정예 이천 명씩 뽑아서 준비시키시오!”

“아뢰오!”

고욱권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병사가 다급하게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전 회의 중이다. 기다려라!”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들어가서 고하게 해 주십시오!”

어디나 마찬가지로, 군사 작전 회의에는 수뇌 급 인물 외엔 일절 출입을 금하는 게 상례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새어 나가면 전체에 차질을 빚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에서 고하는 병사의 음성이 너무나 절박하기에 고욱권은 그를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막 밭을 갈다 나온 듯한 촌부를 한 명 대동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또 저자는 누구고?”

“예, 후군의 영채 근처를 얼쩡거리기에 잡아들였더니, 도무지 수상한 소리만 하고 있어서 끌고 왔습니다. 처결을 바랍니다!”

그 순간 고욱권의 뇌리에 번쩍하고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알았다. 그자는 내가 처리할 터이니, 위병은 물러가도록 하라! 다른 장군들도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

“아니, 대장군! 이자를 아시오?”

“알 것도 같소이다.”

염규의 질문에 고욱권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제야 제장들도 뭔가를 눈치 채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오늘 밤 야습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만 한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고욱권은 촌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건주에서 온 사람이겠지?”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밀서가 있을 터, 우선 그것부터 보자.”

“있긴 하오나 그건 이 사람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갈 내용은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촌부는 한 손으론 자기의 머리를 가리키고, 다른 손으론 품속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고욱권은 그저 웃었다. 촌부가 건주에서 파견된 간인임을 한눈에 알아본 자신이 스스로 대견해서였다.

촌부가 내민 밀서를 고욱권은 그 자리에서 펼쳐 보았다. 확실히 거기엔 간인을 파견하니 그 얘기를 잘 듣고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과 함께 형인 고욱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래, 전달할 내용은?”

“촌각을 다퉈 퇴각해서 작미성雀尾城을 구원하라는 성주의 명이시오.”

“뭐라고? 작미성이 누구에게 공격을 받고 있단 말이냐?”

“예. 이틀 전 파양주의 군사 이만이 불시에 쳐들어와 지금 한창 격전 중이오.”

“허어!”

고욱권은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작미성이 어떤 곳인가? 이름 그대로 참새 꼬리처럼 작은 성이지만, 건주로 봤을 땐 서북쪽을 지키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거기가 무너지면 건주의 본성인 무융성까진 허허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황은 어떠냐? 작미성엔 대체 누가, 몇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지키고 있느냐?”

“예, 고촉高矗 장군께서 성병 오백을 이끌고 농성 중입니다.”

“촉이는 미덥지 못하다!”

돌연 고욱권은 고함을 질렀다. 고촉은 자기의 친조카로서 형인 고욱교의 둘째 아들이다. 평소 문무를 갈고닦기보다는 주색잡기를 더 즐겨 진즉부터 눈 밖으로 밀쳐 둔 인물이었다.

“그러니 성주께서도, 대장군께서 급히 귀환하시어 그 위급을 구하시라는 명이셨소이다.”

“알겠다. 일단 물러가라. 군명이다! 장수들을 소집하라!”

촌부로 가장한 밀사를 물러가게 한 고욱권은 바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방금 떠났던 장수들을 다시 소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다시 소집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곳에 남아 오천의 적을 상대로 야습을 펼치는 것보다 속히 돌아가서 작미성을 구원하는 게 급선무라는 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인 까닭에서다.

문제는 철수 방법이었다. 급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돌아가다간 그대로 적의 발굽에 짓밟히고 만다. 전투 이상으로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우선 오늘 밤의 야습은 계획대로 진행하겠소. 다만 보병이 주력이 아니라 기병이 주력이 되어, 한차례 치고 적들이 혼란에 빠지면 곧바로 철수하여 후미를 맡는 거요. 나머지 부대는 우리의 야습과 동시에, 영채와 기치는 그대로 두고 곧바로 작미성으로 향하시오. 야습하는 데 두세 시진 걸린다 해도, 기병이라면 금방 합류할 수 있을 거요.”

일단 돌아간다고 결정되자 고욱권은 자신이 생각해 뒀던 작전을 밀어붙였다.

“그나저나 마용승은 간교한 자로군. 어째 이곳으로 병력을 파견하지 않는 게 이상타 했더니, 뒤로 그런 꿍꿍이가 있었군!”

“그보다 우리 군에 기병이 몇이오?”

고욱권은 한마디 하고 나선 저도의 말을 눌러 버렸다. 그 역시 마용승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한 창피함 때문이었다.

무릇 일군을 거느린 장수라면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에 따라 병력을 운용해야 실패할 공산이 적다.

그런데 자신은 무려 열흘 넘게 파양주 영욱성의 정예병이 출병하지 않은 걸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오직 건주에서 올 형의 전갈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실책이라면 실책이고, 한심하다면 이처럼 한심한 노릇도 없는 일이었다.

“남은 건 일만 이천 정도요.”

“됐소. 그중 일만을 차출해 야습에 가담시키고, 나머지 이천의 군마는 물자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시오.”

따지고 보면 고욱권의 이 지시도 서글픈 것이었다. 싸움에나 쓰일 군마를 짐말과 같이 부려야 하는 철수전이니 말이다.

그래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 역시 고욱권이 범한 실책을 나눠 질 책임이 있었으니까.

결정이 나자 제장들은 다시 한 번 우르르 몰려 나갔다. 지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아까보다 더 촉급한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 * *

밤이 되었다. 각 막사를 도는 순라꾼이 해시亥時를 알리는 딱따기를 치며 돌고 있을 때, 광운이 이끄는 별동대는 전방 이 리 정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팽가군이 야습을 시작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영채와 천막 그리고 화톳불은 원래의 자리에 그냥 뒀다. 그래야 적들이 속아 넘어갈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편월은 야간 공격이 처음이지?”

“아냐! 지난번에도 광운과 해 봤잖아.”

“하하, 그건 싸운 게 아니라 탈출한 거야. 일종의 도망이지.”

가벼운 마음으로, 광운은 편월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낮 동안 정탐해 본 결과 적들은 아군의 팽가군이 빠져나간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유난히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전에 있었던 싸움의 뒤처리를 한 것일 터였다.

‘너무 일찍 나온 건가? 야습은 자시에 하기로 되어 있는데.’

지금이 해시니 야습이 시작되려면 한 시진은 족히 밤이슬을 견뎌야 한다. 그 점이 광운은 부하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좀 서둘 필요도 있었다. 만약 지금 영채에서 출발한다면 적에게 탐지당할 우려가 있다. 아무래도 심야엔 작은 소음도 크게 들리는 법이니까.

그래서 광운은 저녁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행동을 개시했다. 해가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백 명씩 짠 조를 하나씩 여기로 진출시켰던 것이다. 그 움직임이 적들의 눈에는 식사 후의 병영 정리로 보였으리라.

“그런데 편월은 이번 전투에서 얼마만한 전과를 올렸나?”

“스물일곱!”

광운의 말에 편월은 당차게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 전투에서 이처럼 많은 적을 죽인 일은 없는지라 자랑스러웠다.

“그건 맨 졸병들뿐이었잖아. 전공이란 적장을 죽여야 돼.”

“하지만 한 명도 못 죽인 것보다는 낫잖아.”

“그래도 졸병을 죽이는 건 별 전공이라 할 수 없어. 오늘 아침의 나 봤지? 세 명이나 되는 적장들의 목을 베었잖아. 그게 바로 전공이라는 거야.”

짐짓 어깨에 힘을 주며 말하는 광운이었지만, 표정만은 점점 침울해졌다.

‘이렇게 해서라도 편월이 살인을 덜하게 하려는 걸까?’

바로 그게 광운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스물일곱 명의 적을 죽였다고 자랑하는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 이렇게라도 하면 이 아이의 동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게 될까?

“아직 시간 안 됐어?”

“응. 야습은 자시부터야. 응?”

대답하던 광운은 돌연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부산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이 전방의 어둠 속에서 감지된 탓이었다.

‘적이다!’

전장에서 갈고닦인 광운의 본능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광운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군들은 아직 그 은밀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듯, 좌우와 후방의 어둠에 웅크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광운, 저기 죽영루…….”

“쉿!”

뭔가 말을 하려는 편월을, 광운은 재빨리 억눌렀다. 대장으로서 가장 선두에 나서 있는지라 조그마한 소리라도 내게 되면 접근하고 있는 적들이 들을지도 모른다.

광운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편월도 즉각 알아차렸다. 잔뜩 긴장한 자그만 근육의 움직임이 서로의 등을 통해 전달되었다.

“준비됐나?”

“응.”

그들의 대화는 이제 지극히 낮은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서로 등을 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건 다른 게 아니었다. 최전방에 나가 있는 광운이 팽가군의 야습과 동시에 아군에게 신호를 하기로 약속되었고, 그걸 편월에게 확인한 것이었다.

신호는 다름 아닌 향전. 편월이 아무리 어려도 활 하나는 잘 쏘는지라 그에게 맡겼었다.

“지금 쏴!”

“알았어!”

이미 광운의 태도에서 수상한 기미를 감지하고 있던 편월이었다.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일말의 지체도 없이 허공으로 향전을 쏘아 올렸다.

삐이이잇-!

고요하던 밤공기가 순식간에 찢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광운은 고함을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전군 공격!”

이제나저제나 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별동대였다. 비록 적의 진지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명령이 내려진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우우-!”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별동대는 일제히 맡은 지역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와앗! 적의 매복이다!”

“위험하다!”

“좌익이 뚫렸다. 아니 전방이 더 급하다!”

사실 공격하는 별동대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팽가군이 야습한 것 같은 징후는 어디에도 없는데 공격 명령이 내려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혼란에 휩싸인 건 적들이었다. 벌써 보병은 철수를 시작했고, 일만의 기병으로 야습을 감행하려고 은밀히 접근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했으니 그 대오가 무너지는 건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적들은 말도 타지 않은 상태였다. 야습이라 보다 조용하게 감행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고 보니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말았다.

“횃불을 밝혀라. 적들은 야습 부대다!”

이 명령을 내릴 때까지만 해도 광운은 아직 적들이 기병인 걸 몰랐다. 통상 야습은 보병이 감행하는 것이고, 또 적들도 말을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치고 들어가 보니 적의 군마가 온 들판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습치고는 상당히 기이하고, 또 대규모였다.

‘뭔가 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고, 근육까지 형성된 광운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따르라! 적중 돌파를 감행한다!”

벌써 주변은 별동대가 밝힌 횃불로 인해 훤하게 밝아진 상태였다. 그 속에서 광운의 말 질풍은 적진을 짓밟으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광운을 따르는 천 명의 별동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잡가군 소속이라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대장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적들은 쉽게 무너졌다. 야습을 감행하려다 오히려 기습을 당했으니, 그들은 별동대가 매복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연방 물러서기에 바빴다.

물러서는 자들을 광운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본능이 속삭이는 ‘그 무엇’을 알아보기 위해 적의 영채로 뛰어들었다.

“와앗!”

이건 광운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그 뒤를 이어 적진에 뛰어든 별동대 천 명이 동시에 지른, 놀람에 찬 함성이었다.

이 사실이 말해 주는 건 분명 한 가지뿐이다.

“비었다! 적들이 퇴각하고 있다!”

누군가의 외침에 뒤이어 광운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추격전이다. 자, 돌격!”

야간에 철수를 한다는 건 적들에게 뭔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걸 쫓아 치지 못한다면 용병에 실패했다고 두고두고 창피를 당할 터였다.

그리고 이처럼 다급한 추격전을 전개하는 건 또 하나의 효과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바로 야습을 감행했다 실패한 적들을 보다 빨리 회군시키는 것이다. 본대가 추적당한다면, 다른 놈들의 마음도 조급해져서 자신들을 쫓아올 테니 말이다.

“하나, 둘, 셋…….”

뒤에서 숫자를 헤아리는 편월의 목소리를 들으며 광운은 미소를 떠올렸다. 자기의 의도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이건 재미있군!’

정말이지 광운은 크게 웃고 싶었다. 퇴각하는 적들을 자신이 쫓고, 다시 적들이 자신들을 쫓고 있다.

물론 그 뒤는 별동대가 쫓고 있을 게 분명하다. 물고 물린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테고, 이 물기 시합에선 자신들이 이긴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퇴각하는 적의 후미가 보일 때, 서편 하늘에선 작은 조각달도 얼굴을 내밀었다.

2

작미성 수비 장수인 고촉은 벌써 며칠째 밤잠을 설쳤다. 바로 북쪽 성문 밖 오 리 앞에 집결한 파양주의 이만 대군 때문이었다.

건주 무융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사치와 향락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눈앞에 운집한 적군들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 따른 당연한 반응으로, 처음 파양주군이 진격해 왔을 때 고촉은 항복을 생각했었다.

군사의 수가 비등했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인데, 농성하고 있는 성병城兵이 고작 오백에 불과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처럼 겁 많은 고촉이 오늘로써 벌써 농성 사흘째임에도 항복은커녕 성루에 올라 연방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활을 쏴라! 적들을 접근치 못하게 하라!”

가진 담량에 비해 목소리만은 우렁찬 고촉이었다. 그의 고함은 작미성 성병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을 독려하고 있는 고촉의 심정은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 항복하고 싶지만, 휘하 부장副將으로 있는 담개憺介의 눈초리가 무서워 그럴 수도 없었다.

담개는 벌써 예순이 넘은 노장이다.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병서에 밝아 각종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일에는 능한 인물이었다.

거기다 성격도 대쪽 같았다.

조금이라도 부당한 일이라면 아무리 높은 상관이라도 면전에서 따지고 들었기에, 그 나이에도 이 작미성의 부장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 늙은이는 내가 항복할 뜻을 내비치기만 하면 날 벨지도 모른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며 병사들을 독려한 담개가 돌아오는 걸 보며, 고촉은 속으로 짓씹었다.

“잘하고 계시오, 성주! 병사들의 사기도 충천하니 놈들을 물리치는 것도 시간문제요. 허허허허!”

고촉을 격려하며 담개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 역시 자신들을 보고 있을 병사들의 사기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런데 담 장군, 어째서 아버님은 응원군을 보내 주시지 않는 거요?”

“응원군을 불러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십니까? 이 작미성은 성 자체가 천군만마도 넘보지 못할 철옹성이고, 주변 지형이 모두 응원군보다 더욱 든든한데!”

확실히 작미성은 담개가 큰소리 땅땅 칠 만했다. 오른쪽으론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계두산鷄頭山을 거느리고, 왼쪽으론 수심이 오 장이 넘는다는 청계하淸溪河를 끼고 있어 가히 나는 새도 넘어 들어오기 힘든 요지 중의 요지였다.

“그래도 적군은 이만이오. 오백의 성병으로는 도저히 막아내지 못할 것이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나가서 싸운다면 모를까, 농성을 한다면 이만 아니라 그 열 배의 적병도 막아 낼 수 있는 곳이오. 마음 약한 소릴랑 다시는 하지 마시오!”

“하지만 놈들은 지금도 지원군을 보내고 있소. 저길 보시오. 저 먼지가 뭘 의미하는 것 같소?”

말과 함께 고촉은 지휘봉으로 파양주군의 후미 먼 곳을 가리켰다.

“흐음!”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담개도 그제야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거기에서는 짙은 먼지가 일고 있었다. 숱한 인마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저건 고작해야 일만이나 일만 오천의 인마가 움직이는 거요. 설사 그보다 더 많은 수가 밀려온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시오. 이 담개가 있는 한 적병은 한 놈도 건주 땅에 들여놓지 않겠소!”

‘말이야 쉽지.’

아무리 담개가 호방한 기개로 용기를 북돋워 줘도 이미 허물어져 버린 고촉의 가슴이었다.

다시 적들의 지원군이 피워 올리는 먼지구름을 보니 그저 아득한 현기증만 일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먼지구름은 빠르게 접근해 왔다. 적진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대로 성벽까지 돌진할 기세였다.

“어라? 저건 이상하군!”

담개도 먼지구름의 이동이 신경에 거슬렸다. 다시 한 번 이마에 손을 얹어 그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주둔하고 있던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밀려오는 응원군을 영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산하게 영채를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저건 길을 열어 주는… 앗, 저들은 아군이오. 성주의 숙부이신 고욱권 장군이시오!”

“뭐? 숙부께서?”

담개의 말에 고촉도 그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건주부 군사라는 기치는 없었지만, 앞장서서 달리고 있는 장수는 숙부가 확실했다.

“성문을 열어라! 아군의 지원병이 도착했다!”

고촉으로서는 정신을 차릴 경황이 없었다. 그저 숙부가 일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살았다’ 싶었다.

“잠깐만, 성주! 그런데 왜 고 장군께서 저쪽에서 오시는 걸까?”

의문을 제기한 건 노련한 담개였다. 그로선 고욱권이 후방이 아닌 전방에서 나타나는 게 미심쩍기만 했다.

“아마 적의 배후를 치려고 길을 돌았겠지요.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렇다면 왜 길을 비켜 주는 적은 치지 않고 곧장 성으로 오는 거요? 적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인데.”

담개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욱권이 이끄는 선두는 벌써 성문 아래 해자垓字가에 도착해서 고함을 질렀다.

“성주는 들으시오! 우리는 건주군이오! 어서 성문을 열고 잔교棧橋를 내려 우리를 맞으시오!”

“그대들은 어째서 적의 땅에서 나타났는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설사 아군이라고 해도 성문을 열 수 없다! 수문 위사는 절대로 성문을 열지 말라!”

“무슨 소리요, 담 장군? 저기엔 숙부께서 계시오!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저들 뒤를 따르는 적들이 보이지 않소이까? 이대로 성문을 열면 적들도 곧장 뛰어들 것이 분명하오!”

그제야 고촉도 아군의 뒤를 따르는 파양주 별동대를 봤고, 비로소 그들이 지원군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전령은 듣거라! 그대들의 사정은 딱하나 이대로 성문을 열 수는 없다. 그러니 성의 오른편 계두산을 의지해 진을 치도록 하라! 활 부대와 쇠뇌 부대는 즉각 대기하라! 아군이 진을 칠 동안 접근하는 적들을 막아라!”

“와아-!”

확실히 성병들은 고촉보다 담개를 더 잘 따랐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나같이 손에 활과 쇠뇌를 들고 성루에 쭉 도열해 늘어섰다.

그 뜻을 알아차린 전령은 즉각 말 머리를 돌렸고, 고욱권이 이끄는 건주군은 그 뒤를 따라 계두산 쪽으로 향했다.

“쏴라! 아군을 추적하는 적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라!”

때를 같이해 담개는 재차 명을 내렸고, 진즉부터 대기하고 있던 성병들은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아 댔다.

‘고 장군의 부대가 파양주에서 작전을 하다가 패해서 쫓겨 온 것 같은데…….’

담개의 판단은 빨랐다. 고욱권 부대의 행색을 봤을 때 그들은 패잔병이 분명했다.

하지만 담개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비록 패잔병이지만 그 숫자가 일만이 넘는다. 성벽과 계두산에 걸쳐 진을 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에게 위압을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만 쏴라! 화살이 아깝다!”

아직도 연방 활과 쇠뇌를 쏴 대고 있는 병사들에게 담개는 명을 내렸다.

고욱권 부대를 추적해 왔던 적장도 지략이 있는지, 성에서 화살을 퍼붓자 이내 추적을 멈추고 적진으로 말 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그날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작미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건주군은, 경위야 어떻든 같은 편 일만 이상이 성 밖에 진을 치고 있으니 마음 든든하게 밤을 지새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고촉만은 숙부가 패잔병이란 걸 알게 되자 다시 속이 끓었다.

그는 그날 밤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해 기어이 화주 한 병을 마시고야 말았다.

* * *

파양주군의 진막.

이만의 군사를 이끌고 작미성 공격에 나선 파양주군의 총대장은 당연히 호윤천이었고, 지금 그의 막사에서는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다.

특이한 것은 광운도 거기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호윤천이 쫓아내려 했지만, 곽준방이 부득부득 우겼다.

자기를 대신한 별동대장이니 충분히 자격이 있다면서 말이다.

거기엔 별동대의 다섯 부장도 가세했다.

지난 열흘 남짓 함께 싸우면서 광운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작 광운 본인은 작전 회의 내용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게 귀찮기만 했다.

“어쨌든 성주께선 작미성을 최대한 빨리 함락시키라고 하셨소.”

“작미성은 천혜의 요지요. 하루 이틀 사이엔 뽑을 수 없소이다.”

“그러나 벌써 군명은 내려졌소. 내일 총공세를 감행해 해 지기 전에 성을 함락시키도록 합시다.”

“그렇게 서둘다가는 일을 망치게 되오. 지금 적들에겐, 비록 우리 별동대에 쫓겨 왔다지만 일만이 넘는 군세가 가세해 있소. 그 점을 경시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곽 장군은 어떻게 하잔 말이오? 좋은 지략이 있다면 알려 주시오.”

그 말에 곽준방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기실 그만이 아니라 여기에 모인 장수들 중 그 누구도 작미성을 함락시킬 좋은 계책은 없을 게 뻔했다.

대대로 우호적으로 지냈던 터라 낙성의 책략 따위는 미리 세워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하시오. 내일 전군은 공격을 개시해 우선 고욱권이 이끄는 성 밖의 적들부터 두들기고, 일제히 성 공격에 착수하시오. 이건 대장군으로서의 명령이오! 만약 불응하는 자가 있다면 군령으로 다스…….”

“잠깐!”

최후의 명을 내려 작전 회의를 마치려는 호윤천을 곽준방이 다급하게 제지했다.

“여기서 한 사람의 의견을 더 들어 보도록 하십시다. 광운,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예? 뭐요?”

갑자기 자기의 이름이 불리자 광운은 움찔 놀라며 곽준방을 쳐다보았다.

“여태 모두 듣지 않았나? 이제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듣고 봐선 안 될 것엔 눈도 귀도 없애는 놈인지라…….”

“쯧쯧쯧!”

광운의 태도에 호윤천은 혀를 찼지만, 곽준방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단시간에 작미성을 떨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정면공격은 언어도단!”

“뭐라고?”

너무나 방자한 광운의 말에 호윤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이제 막 최후의 명을 내리려던 자신의 말을 언어도단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으니, 화가 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그 방법을 묻고 있는 걸세. 조속히 작미성을 뽑아 버릴 수단은 없겠나?”

“가장 빠른 방법은 내부에서 무너지게 만드는 법입니다. 밖에서 하는 공격으로 낙성시키려면 적어도 육 개월은 걸릴 겁니다.”

“내부에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 있는가?”

“그야 알 턱이 없죠. 다만 공성전攻城戰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은 성병들의 분열을 꾀해야 된다는 것, 그걸 말씀드리는 거요.”

“더 들어 볼 것도 없소. 언제 저들을 이간시켜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단 말이오? 그러니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전 병력을 이끌고…….”

“아룁니다!”

“뭐냐!”

자신의 말이 번번이 막히자 호윤천은 밖에서 고한 자에게 버럭 언성을 높였다.

“송용조라는 자가 대장군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송 대인이?”

잔뜩 의아해진 표정으로 호윤천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장사치인 송용조가 전쟁터 한복판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기에 궁금증은 더하기만 했다.

“어서 모셔 오너라.”

호윤천은 서둘러 명을 내렸다.

궁금증만이 아니라, 성주인 마용승이 총애하는 송용조를 가볍게 대할 수 없어서였다.

“군무에 바쁘신 줄 알지만, 소인이 반드시 한 말씀 드릴 게 있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부디 해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송용조는 정중한 예를 갖췄다. 마용승의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역력히 보였다.

“무슨 말씀이시기에 이처럼 밤늦은 시각에 험한 군막을 찾으셨소?”

“예, 성주께서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이 있기에, 그냥 흘려들을 수 없어서 대장군께 전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성주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소이까?”

“예, 이건 어디까지나 성주께서 지나가는 말로 하신 거니 듣고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성주께서는 호 대장군께서 이 작미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힘만 앞세워 공격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반년이 넘어도 떨구지 못할 거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커다란 고함으로 호윤천은 송용조의 말을 끊었다.

방금 광운에게서도 들었던 비슷한 얘기를 다시 듣자니 마치 자신의 무능함을 꼬집히고 있는 것 같아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성주님의 지나가는 말씀, 즉 농담이실 겁니다. 호 대장군의 용맹이라면 이따위 작은 성이 며칠이나 버티겠습니까? 되도록 희생을 줄이려고 총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계시다는 건 성주께서 익히 아실 겁니다.”

호윤천의 노기에도 불구하고 송용조는 침착하게 제 할 말을 다 했다.

거기엔 되도록 희생을 적게 하면서 성을 함락시키라는 은근한 권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앙!

호윤천인들 그걸 모를까. 노기를 참지 못한 그는 주먹으로 지도가 펼쳐진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소인에게 한 가지 작은 계책이 있사온데, 들어 보시고 써 주실 만하면 술이나 한잔 주시지요.”

“계책? 말해 보시오.”

“지금 작미성의 성주는 고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자는 소인이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건주의 군사들이 파양주 땅으로 총출동하지 않았다면, 절대 성주 따위를 맡기지 않을 인물이지요.”

“송 대인이 고촉을 잘 아신단 말이오?”

“예.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지만, 그는 자기 애비인 고욱교의 이름에 먹칠을 한 용렬한 자입니다. 겁은 많은 자가 재물은 또 얼마나 밝히는지, 그자를 만날 때마다 소인의 전낭錢囊이 비어 버리곤 했지요.”

“그것과 작미성을 함락시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마침 소인이 장사차 윤주崙州로 가게 되었습니다. 실은 지금 행렬이 십 리 후방에서 소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주로 가려면 건주는 필히 지나가야 할 길, 내일 소인이 작미성으로 가서 고촉을 만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광운은 하마터면 자신의 무릎을 칠 뻔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송용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훤히 알 것 같았다.

한창 전쟁 중인 성에 장사치 행렬이 어떻게 통과하느냐고 묻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한다.

게다가 군수품으로 많은 물자들을 징발당하니 일반 백성들의 생필품은 더욱 쪼들리게 된다.

그래서 간혹 적의 사자使者는 쫓아내는 성이 있을지라도, 장사꾼들만은 통과하게 해 주는 게 전국의 상례인 것이다.

“그럼 송 대인이 그자를 만나서 뇌물을 듬뿍 안겨 주고 성문을 열도록 하겠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거기다 호 대장군의 친필 편지를 한 장 써 주십시오. 고촉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 주는 건 물론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고 한다면, 그자는 틀림없이 호응해 올 것입니다.”

“흐음!”

“그게 상책일 것 같소이다, 대장군. 설사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소? 고촉이 거절한다면 그때 전군을 동원해 공격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침음성을 토하는 호윤천에게 곽준방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호윤천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만약 송용조가 성공한다면 자신은 한낱 상인보다도 못한 무장이라는 평을 들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군문軍門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그만한 수치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전쟁은 어디까지나 냉엄한 현실이다. 병사 한 명 상하지 않고 성을 탈취할 수 있다면 그걸 선택해야만 한다.

“술을 가져오너라!”

“소인의 작은 계책을 사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송용조는 또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자신의 책략이 채택되었다는 우쭐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제는 송 대인이 입성할 때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건주군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것이오. 혹시라도 물건을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 점이라면 염려 마시오. 우리 별동대가 무사히 성문까지 호위해 드리겠소.”

“곽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은 마음 든든합니다. 그럼 호 대장군께서 고촉에게 보내는 편지만 한 통 써 주시면 소인도 곧바로 돌아가 내일 일을 준비하겠습니다.”

‘결정됐군!’

호윤천의 마지막 우려를 불식시키는 곽준방의 말을 들었을 때, 광운은 이미 몸을 일으켰다.

내일은 별동대에게 고달픈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충분히 쉬어 둬야만 한다.

3

엉뚱하게도 광운은 송용조의 장사 행렬에 끼게 되었다. 일이 성사되더라도 송용조가 다시 나와서 연락을 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성을 빠져나와 그 결과를 알리는 게 임무였다.

군에서는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실행해야 되기에 광운도 어쩔 수 없이 갑옷을 벗고 장사치로 변장을 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편월도 따라붙었다. 데리고 가지 않으면 혼자 고욱권이 이끄는 건주군에 덤비겠다고 하니, 광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의 행로는 순탄했다.

예상대로 작미성은 장사꾼 행렬에게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다.

그렇다고 전장의 살벌함이 가신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파양주군이 장사꾼 행렬의 뒤를 물고 성으로 뛰어들까 싶어, 고욱권은 금방이라도 출격할 것처럼 보였고, 또 그걸 견제하느라 곽준방의 별동대도 그들과의 거리를 바짝 좁히고 있는 상태에서의 입성이었다.

물론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엄격한 수색은 받았다. 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또 송용조는 널리 알려진 큰상인이었기에 그들은 별 탈 없이 입성을 마쳤다.

성에 들어온 이상 그다음 할 일은 정해진 것이었다. 객잔에 일행을 머물게 한 송용조는 그길로 패물을 한 보따리 챙겨 들고 고촉을 만나러 나섰다.

광운으로선 지루한 기다림의 시작 같았지만, 의외로 송용조는 불과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떻게 됐소?”

“성공이오. 고촉은 내일 밤 자시를 기해 성문을 열기로 했소이다.”

“너무 촉급하지 않소! 우리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소. 언제 밖에 있는 건주군이 성으로 들어올지 모르니, 그 전에 해치울 수밖에 없소이다.”

성 밖 주둔군의 지휘관은 고욱권으로, 성주인 고촉의 숙부가 된다.

그러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입성하기 전에 일을 해결해야만 수월케 진행될 것이다.

“알겠소. 그럼 송 대인께선 지금 곧 출발해 주시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이오? 들어온 성문으로 나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텐데.”

“다 생각이 있으니 염려 마시고, 서둘러 출발이나 해 주시오.”

그 말에 따라 송용조는 부지런히 종자들을 독려해, 성문이 닫히기 훨씬 전인 신시경에 작미성의 남문을 빠져나가 윤주로 향했다.

광운도 그 속에 섞여 작미성을 빠져나왔지만, 일단 나오자마자 곧바로 말 한 필을 빌려 타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떤 방법으로 돌아갈 거야?”

지금까진 걸었지만, 말을 타면서부터 다시 광운의 등에 업히게 된 편월이 물었다.

“맡겨 둬.”

“얘기 좀 해 줘. 나도 준비하게.”

“네가 준비할 건 없어.”

“심심해서 그래. 그러니까 얘기해 줘. 응?”

“편월은 오늘 긴장되지 않았나?”

“긴장? 아니! 그런데 긴장해야 되는 거였어?”

“아니야. 긴장하지 않았으면 됐어.”

“난 광운만 있으면 뭘 해도 무섭지 않아!”

“후후후…….”

웃음을 토하면서 광운은 말에 마구 채찍을 가했다. 평소에는 이처럼 말을 험하게 다루지 않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빨리 돌아가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내일 밤까지 준비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테니까.

광운이 목표로 삼은 건 작미성의 왼편을 끼고 흐르는 청계하였다.

그 물길을 타고 흘러가면 아군의 진지까지 갈 수 있으니 간단하고도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그 강을 지키는 건주군이 없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청계하에 도착할 때까지 광운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성에서 가까우니만치 더러 병사들이 검문을 할 만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일반 백성들은 이따금 눈에 띄었다. 작미성이 공격을 받고 있지만, 그 견고함을 믿는 것인지 들판 군데군데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또 광운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내일 밤이 지나면 작미성은 떨어질 것이고, 이 너른 건주평야엔 파양주군이 진주할 것이다.

저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파괴될 게 분명하고, 자신이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작미성이 떨어지면 호윤천은 곧바로 무융성으로 진격할 테지.’

별동대까지 합쳐 이만 오천에 달하는 파양주군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면 이 기름진 건주평야는 단번에 황폐해지리라.

그건 말려야 한다. 작미성이 떨어지면 무융성으로선 갑옷이 벗겨진 것과 마찬가지, 굳이 힘으로 들이칠 필요는 없다.

그러다 문득 광운은 미소를 지었다.

내일 밤에 있을 일도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앞의 일까지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말은 이내 청계하가에 다다랐고, 거기서 광운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저 아래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맞아.”

“그런데 왜 반대로 가?”

“찾을 게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

“좀 있으면 알게 돼.”

이상하게 여기는 편월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고 있는 사이 광운은 말을 멈췄다.

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이었다.

대개 이런 곳엔 상류에서 떠 내려온 물건들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광운은 그중에서 몸을 싣고 숨길 수 있는 통나무를 찾고 있었다.

그건 곧 발견되었다. 청계하가 워낙 큰 강인지라 통나무를 비롯한 각종 부유물들이 엄청나게 밀려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넌 네 갈 길을 가거라!”

광운은 말 잔등을 후려쳐 놓아 보냈다. 가난한 농부가 거둬 농사일에나 썼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실었다.

“편월도 수영할 줄 알지?”

“응!”

“그래도 물에 들어갈 땐 이렇게 뜨는 걸 이용하는 게 좋아. 그래야 힘을 아낄 수 있거든.”

“알았어.”

“자, 가자!”

“좋아!”

편월을 업은 채 광운은 물에 띄운 통나무에 몸을 실었고, 거센 물살은 빠르게 하류로 그들을 떠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광운은 되도록 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강폭이 넓고 물살이 센 곳에선 자칫 아주 멀리 떠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작미성 옆을 지날 땐 어쩔 수 없이 잠수를 해야만 했다. 강변엔 감시병이 없었지만, 혹시라도 성루의 병사가 발견하고 활을 쏠 염려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거기도 무사통과였다. 성병들은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파양주군의 동태에 신경 쓰느라 강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로써, 광운은 무사히 진지에 도착했고, 그길로 곧바로 호윤천에게 달려갔다.

* * *

밤이다. 오후 늦게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지금은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가려 제 코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만약 미리 이 주변의 지형을 익혀 두지 않았다면 이런 어둠을 뚫고 전진하는 데 상당한 곤란을 겪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어둠이 방해만 된 건 아니었다.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건주군들에게 아군의 움직임이 노출될 염려가 적으니 그 점은 좋았다.

광운은 다시 한 번 입에 물고 있는 나무토막을 질근 씹었다. 밤에 이동할 때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문 것이었다.

말도 타지 않았다. 성으로 돌입하면 그때부턴 시가전市街戰 형태가 될 터, 기마병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제 광운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짠 작전에서 그는 별동대 오천과 더불어 성에 돌입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만에 달하는 파양주군은 성 밖에 진 치고 있는 건주군을 맡기로 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성문이 열리고, 잔교가 내려져 성으로 진입하더라도 건주군이 덤벼들면 어쩔 수 없이 백병전이 된다.

피아를 불문하고 그 피해가 엄청날 테니 모처럼 성사시킨 송용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습관적으로 광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측정하려는 것이었지만, 먹구름으로 덮인 하늘에선 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어둠이었다. 비가 내릴 것이라 예상했기에 각 진영에서도 불을 별로 피워 두지 않아, 보이는 거라곤 화톳불 몇 개와 성루에 밝힌 횃불 몇 개가 고작이었다.

‘남의 성을 훔치는 밤으로는 제격인데…….’

생각을 하던 광운은 하마터면 입에 물고 있던 나무토막을 놓칠 뻔했다.

성을 훔친다는 자신의 생각이 스스로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성루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횃불 하나가 디밀어져 마구 흔들린다 싶더니, 뭔가 시커먼 물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첨벙!

해자에 떨어진 물체는 물소리를 요란스레 냈고, 그건 곧바로 밤의 정적을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필시 성루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성병의 시체이리라.

‘시작됐다!’

광운은 다시금 나무토막을 힘주어 깨물었다.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촤르르르-!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두터운 성벽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린다 싶더니, 잔교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타앙-!

그 잔교가 해자를 건너 땅에 떨어졌을 때, 광운은 나무토막을 뱉어 내며 명을 내렸다.

“돌입!”

잔교가 내려졌다는 건 이미 성문도 열려 있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우우우-!”

광운을 선두로 별동대 오천은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저항은 거의 없었다.

대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죽여 버린 듯한 이십여 명의 군사들이 광운을 맞아들였다.

“성주는 어디 있소?”

“내가 고촉이오. 그보다 빨리 담개를 제압하시오. 안 그러면 그자가 병사들을 수습해 저항해 올 우려가 있소!”

“그자는 어디에 있소?”

“안에서 쉬고 있소.”

“안내하시오. 여 장군, 따라가시오!”

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광운은 몇 번이나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삼켜야 했다.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일족을 배반하고, 나아가 백만이 넘는 건주 백성들의 생명까지 적에게 넘겨준 고촉이라는 인간이 너무 더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군사작전이다. 개인의 감정은 철저히 말살하고, 어떻게든 성공을 시켜야만 한다.

“일대와 이대는 성루를 공격한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마라! 다시 한 번 얘기한다. 쓸데없는 살생은 피해라!”

아마 성병들 대부분은 지금 노곤한 잠에 취해 있을 것이다.

오늘 밤의 거사를 감추기 위해 낮에 어느 때보다 격렬한 공격을 퍼부은 탓이었다.

“우우우-!”

“우우우-!”

그렇다고 완벽하게 적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당장 이 별동대의 함성만으로도 작미성은 들썩거렸고, 그건 성 밖에 주둔한 건주군에게도 알려졌다.

하긴 이쯤 이르면 그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미 성안에 돌입한 이상, 이 성은 낙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은 건 피아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다.

예상대로 성루에 있는 병사들의 저항은 미미했다. 자다가 벼락을 맞은 꼴이었으니 정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밖의 상황은 달랐다.

호윤천이 이끄는 파양주의 주력은 건주군을 제대로 봉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주군은 하나같이 필사적이었다. 이미 파양주에서 한차례 패했던 그들에게 있어 작미성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이 떨어질 위기에 처했으니, 아귀처럼 덤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주군을 봉쇄한 우측의 방어선이 뚫린다 싶더니, 그 일대가 우르르 성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주 장군, 적을 밀어내고 잔교를 거두시오! 우 장군, 성의 다른 문들을 신속히 장악하시오!”

혼전 중에서도 광운은 상황에 맞는 명을 내렸고, 전령들은 즉각 달려 나갔다.

“편월, 괜찮아?”

“응.”

“조심해라.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걱정 마!”

씩씩한 대답이었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광운이었다. 말한 대로 성중에서 벌이는 시가전은 적이 은신할 곳이 많다.

탁 트인 전장에서 말달리며 싸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와아! 적들을 무찔러라! 물러서지 마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돌연 성중에서 왁자한 함성과 비명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여 장군이 실패했군!’

이 함성으로 보아 분명 담개가 일단의 병사들을 지휘해 여상계군과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조용히 담개를 제압해 적의 저항을 무력화시켜 피아간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광운은 그대로 성루에서 뛰어 내려갔다. 그가 이끄는 일천의 별동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광운은 마음이 급했다.

만에 하나라도 여상계가 패할 일은 없으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다만 담개만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라면 마지막 숨결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를 테니, 그 전에 도착해서 그를 살려야만 한다.

“하나!”

뒤에서 편월이 숫자를 헤아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성병 한 명을 죽인 모양이었다.

“되도록 죽이지 마라, 편월! 시간이 지나면 모두 항복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항복하기 전까지는 적이야!”

다부진 편월의 대답에 광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 꼬마는 전투에만 임하면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이 염려스럽기도 했고,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와아! 쳐라!”

“우우우-!”

여상계군과 담개군이 격돌하고 있는 곳은 성벽 바로 아래 위치한 드넓은 연무장이었다.

그쪽으로 달리면서 광운은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온통 포위되어 있는 통에 담개가 이끄는 병사들의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백 명은 넘지 않을 게다.

“잠시만, 잠시만 멈추시오. 여 장군!”

여상계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광운은 고함부터 질렀다. 별동대가 막 공격하기 직전이었다.

“웬 놈이야! 막아라!”

여상계군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군임이 확실해질 때까지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게 시가전의 기본이다. 그래서 더러 같은 편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요. 광운이오!”

“아, 여긴 웬일이오? 성루는?”

“완전히 점령했소. 저자가 담개요?”

“그렇소. 병사는 몇 명 되지 않는데 저항이 만만찮소!”

“내게 맡기시오!”

광운은 포위한 별동대를 뚫고 담개 앞으로 쓱 나섰다. 예상대로 오륙십 명 정도의 병사들이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소관은 파양주군 별동대를 이끌고 있는 광운이라 하오. 담개 장군이 계시면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소?”

광운은 깍듯한 군례를 갖췄다.

“내가 담개다만, 적과는 입으로 할 말이 없다. 있다면 오직 이걸로 말할 뿐이다!”

수중의 장검을 치켜들며, 담개도 앞으로 서너 걸음 나섰다. 말로는 거절한 셈이지만,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도 나름대로의 예의는 있다. 적장이 얘기하자면 피하지 않는 것도 그중 하나다.

“담 장군의 높으신 용맹은 익히 들어 평소에도 흠모하고 있던 참이오. 오늘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성이 떨어져, 그 무용에 흠집이 가서 속이 뒤집혔을 거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 저항은 더더욱 무의미한 것이오. 고촉이라는 쥐새끼 한 마리에게 바치기엔 장군의 목숨은 너무도 값진 것이오!”

“닥쳐라! 패장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간교한 혓바닥으로 이 몸을 우롱하지 말라!”

“어찌 감히 장군을 우롱하겠소! 장군과 농성한 성병들이 모두 죽어도, 성문을 열고 적과 내통한 쥐새끼는 그걸 비웃으며 잘 살 것이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부하들과 더불어 죽어 가시겠소? 저들도 모두 고향엔 처자식이 있을 것이오.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저들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시오!”

광운의 목소리엔 점점 열기가 더해졌다.

담개가 무장다운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건 여상계도 마찬가지인 듯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소이다, 담 장군. 우리는 결코 장군을 패장으로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오. 지금 투항을 하신다고 해도 그건 무장의 수치가 아니오. 오히려 부하들의 목숨을 가련케 여긴 처사라고 모두가 칭송을 할 것이오. 수치를 당할 자는 바로 고촉 그 작자요!”

“끄아아-!”

돌연 담개가 커다랗게 부르짖으며 수중의 장검을 한차례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음색으로 광운에게 입을 열었다.

“부하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느냐?”

“장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들은 죽을 각오로 장군을 모시고 싸우겠습니다!”

“말씀을 거두소서, 장군!”

담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부하들이 일제히 그의 갑옷 자락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라! 이건 적장과의 담판이다.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는 자는 군령으로 처단하겠다!”

다시 한 번 담개가 소리를 친 후에야 그 부하들은 정연하게 사방을 경계하는 태세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다시 한 번 광운의 가슴을 울렸다.

아무리 전국난세라지만 이만한 기개를 가진 장수도 드물었고, 이만한 군기를 가진 병사도 보기 힘들다.

상하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어떤가? 부하들을 돌려보내 주겠나?”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긴 힘드오. 하지만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대장군께 아뢰어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소.”

“들었느냐?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하찮은 인간 망종 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릴 것까지는 없다.”

말을 끝내자마자 담개가 가장 먼저 검을 버렸다.

만약 광운이 이 자리에서 모두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이처럼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단독 처리는 어렵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노력하겠다는 그 말이 더욱 신빙성 있게 와 닿았던 것이다.

털썩!

별안간 담개가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이러시오, 장군? 어서 일어서십시오!”

“목을 치시오! 패장다운 최후를 맞고 싶소.”

“이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온 무장들의 귀감이 될 만한 담 장군의 목을 치다니, 그랬다간 이 광운은 전국 무장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오. 자, 일어서시오!”

“술상을 준비해 관련청觀練廳으로 가져오너라!”

거의 끌다시피 해서 담개를 일으키는 광운을 보며, 여상계도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전쟁 통에 무슨 술상이냐고 하겠지만, 이 역시 투항한 적장에 대한 예우다.

승자의 입장에선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승자의 아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우우-!”

“우우우-!”

광운과 여상계, 담개가 각기 관련청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성안과 성 밖에서 거의 동시에 함성이 올랐다. 이 소리는 별동대만의 것이 아니라 파양주군 전체가 지르는 승리의 외침이었다.

어느새 새벽이 짙은 먹구름 속에서도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 밖의 상황도 정리가 되어 대부분의 건주군은 투항했고, 몸을 빼서 달아난 사람은 고욱권을 비롯한 백여 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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