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세이면亂世裏面 (6/66)

난세이면亂世裏面

1

죽영은 찾아온 이 중년 부부 손님이 귀찮았다. 요기만 끝나면 다시 전장으로 가겠다는 광운을 접대하기도 바쁜 판에, 이렇게 뺏기는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어떻습니까, 주인마님? 우리 딸년을 받아 주실는지요?”

사내는 궁상맞았다. 평생을 난리에 시달려 온 피로와 초췌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고, 더 이상의 바닥이 없다 싶을 정도로 비굴한 어투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슬하에 이남 사녀를 두었다고 했다. 그중 아들들은 모두 잡가군에 지원을 해 지금쯤 어느 전장에서 죽었는지 모르고, 딸들은 차례로 기루에 팔려 가거나 토호土豪의 애첩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딸 하나가 지금 죽영의 눈앞에 있는 어린 계집애였다.

부부는 그 어린 딸마저 죽영에게 팔려고 온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이 영욱성도 곧 전쟁에 휘말릴 것 같으니 우리들은 멀리 피난을 갈 생각입니다. 그 여비 조로 조금만 생각해 주시면, 이 딸년은 주인마님 마음대로 부리셔도 좋습니다요. 네네.”

“대체 이 아이가 몇 살이죠?”

자신도 모르게 죽영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전쟁이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딸을 기루에 팔고 피난하려는 부부의 행태가 괘씸해서였다.

“예, 올해로 꼭 열 살입니다요. 네네.”

“열 살? 이제 겨우 예닐곱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말을 하던 죽영은 돌연 그 끝을 흐리고 말았다. 어쩌면 이 작은 소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이보다 훨씬 왜소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녀는 유난히 큰 눈망울로 죽영의 눈치를 살폈다. 겁먹은 게 분명한 그 얼굴에 오직 눈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요. 하지만 우리가 데리고 가 봤자 기다리는 건 굶주림뿐입지요. 그러다 산적이나 비적들을 만나면 능욕당하고 죽기가 십상인지라 차라리, 큭…….”

기어이 사내는 오열을 토하고 말았다. 그 부인은 진즉부터 저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훌쩍이고 있었고.

이제 죽영은 화도 나지 않았다. 전쟁은 남자들이 만들었고, 또 그들의 몫이지만, 그 피해는 언제나 여자들이 가장 크게 입는다. 이 소녀도, 그 어미도 그리고 이 소녀를 결국에는 맡게 될 자신도 결코 예외는 아니리라.

‘언제까지 이런 세상이 지속되는 걸까?’

남편은 가정을 위해 밖에서 일을 하고, 아낙은 남편을 위해 가사를 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보호 아래 맘껏 뛰어놀며 장차 스스로 살아가야만 될 세상에 대해 하나씩 배워 나간다.

바로 이게 조물주가 부여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이처럼 미쳐 돌아가는 시대는 세상 누구에게도 그 평범한 행복을 누리게 하지 않는다. 일국의 왕이나 패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불행과 고통이 따르고, 지금 눈앞에 있는 부부와 같은 평민 백성은 하루치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딸을 기루에 팔아야 한다. 도대체 누가 있어 이런 지옥을 이 지상에 그려 둔 걸까? 그런 게 있기만 한다면, 눈에 보이기만 한다면 손톱으로 와득와득 뜯어 죽이고픈 죽영이었다.

“주인마님, 제발 부탁입니다요. 네? 부디 이 딸년을 거두어 주십시오, 네?”

오열을 그친 사내가 다시 비굴한 어투로 죽영에게 빌었다.

“그들은 누구요? 아니 울고 있었소?”

“아!”

갑자기 들려온 광운의 말투에 죽영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뺨을 적신 눈물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대체 무슨 일이오?”

“아니에요. 이분들은 피난을 가시려는데 딸까지 책임지기가 힘드니 제게 맡기려는 거예요. 잠시 들어가 계세요. 곧 따라갈게요.”

“아니, 우리는 막 떠나려던 참이오. 그런데 이 소녀를 맡기려 왔다고? 허어, 참!”

광운은 한숨을 짓고 말았다. 그 역시 ‘맡는다’라는 말이 무얼 뜻하는지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이제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코만 훌쩍이고 있다. 무장 상태인 광운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비로서 딸을 팔러 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더 컸으리라.

“맡아 줘. 응? 맡아 줘!”

돌연 편월이 죽영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인지라 이 상황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턱이 없었고, 그저 또래 여자 아이에 대한 호기심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난 편월이야.”

죽영에게 보채던 편월은 그대로 여자 아이에게 걸어가 물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에 소녀의 검게 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묘한 색으로 물들었다.

“유, 유화柳花…….”

소녀는 간신히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또 한 번 죽영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나이보다 왜소한 유화와 태어나면서부터 전장을 굴러 나이보다 훨씬 발육이 좋은 편월의 대조가 그녀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것이다.

“좋아요. 이 애는 내가 맡을게요. 언제고 다시 찾아오도록 해요.”

“저, 정말입니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마님.”

“자, 이 정도면 어디 가서든 작은 장사 하나는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어이쿠! 이건 너무 많습니다요. 딸년을 맡기는 것도 송구한데, 반만 주셔도 충분합니다요. 네네.”

“괜찮아요.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유화야, 이제부터 주인마님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언제고 이 애비가 다시 찾으러 오마.”

그 말을 끝으로 부부는 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쫓기듯 죽영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얼굴 가죽 두께로는 더 이상 머물기 힘들었으리라.

“유화라고 했지?”

“네…….”

“오늘부터 날 언니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해. 응?”

“…….”

“왜 대답이 없지? 여기가 무서운 곳 같아?”

“아,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도 돼. 하지만 이건 알아 둬.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화처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어. 그중엔 아예 정신을 놔 버린 사람도 있어. 그러니 마음 굳게 먹어야 해. 알았지?”

“네…….”

그 짧은 유화의 대답도 울먹임으로 인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타인으로부터의 따뜻한 말이, 이 소녀의 작은 가슴을 세차게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근데 너 몇 살이야?”

“네. 여, 열 살이에요.”

“열 살? 우이 씨, 그럼 나보다 많잖아.”

“누가……?”

“응, 나보다! 나는 다섯 살이니까.”

“네, 네에…….”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말을 높이나? 어쨌든 우리 저쪽으로 가자. 저기 맛난 거 무지하게 많아.”

“어머!”

유화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편월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소?”

편월이 유화를 데리고 주방 쪽으로 가 버리자, 광운이 물었다. 조금 전에 죽영이 얘기했었던, 정신을 놨다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여자를 이 죽영루로 데려온 사람은 바로 광운이었다. 도적의 습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떤 군기 빠진 군세에게 약탈을 당했는지 그녀의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까지 도륙당한 상태였다.

그 속에서 광운은 그녀를 발견했다. 이미 실성한 상태로, 무장한 군인들만 보면 비명을 지르며 땅속으로 파고들려던 그녀는 벌써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피부와 근육의 숱한 자상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능욕을 당했는지 아랫도리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광운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남자들의 만행에 대해, 같은 남자로서 책임감을 느낀 것이었다. 아니, 그건 어쩌면 광운의 자위인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전장에서 숱한 적들을 죽였다. 그들에게도 부모와 처자식은 있었을 터,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그 가족들에게 작은 보상이라도 했다는 위안을 얻으려 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광운은 그녀를 죽영루로 데려갔고, 그 뒤로 아주 가끔씩 그녀는 단편적이나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자신의 이름은 끝까지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오십여 호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 친척들보다 더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고도 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또 그렇게 의지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대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처음엔 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하며 식수와 음식 그리고 자기들의 집까지 기꺼이 그들의 숙소로 제공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민들의 친절에 감사하던 군인들이 돌연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도륙당하고, 여자들은 능욕당하고 죽었으며, 아이들은 꼬치처럼 창에 꿰어 들고 다녔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의 눈앞에서 남편이 두 동강 나고, 아이는 어느 병사의 창에 꿰이고…….

그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인들에게 윤간輪姦을 당했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었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챈 그녀는 필사적으로 식량을 저장하는 땅굴로 기어 들어갔다. 다음 차례의 병사가 왔고, 그녀가 없는 걸 발견한 그 병사는 홧김에 불을 질렀고, 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마을을 깡그리 태우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기억을 떠올려 말한 전부였다.

그 얘기에서 광운은 두 가지를 유추했다. 하나는 그 마을을 궤멸시킨 건 패잔병 무리라는 것이었다. 승전군이라면 그처럼 잔인하지 않고, 도적이라면 다음의 약탈을 위해서도 마을 전체를 없애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는, 그녀는 자신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란 점이었다. 겪은 일이 창피해서, 눈앞에서 죽은 남편과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으리라.

“사람의 목숨은, 특히 여자의 생명력은 놀랍도록 질겨요.”

“그렇구려. 괜한 부담을 준 것 같아 늘 미안했소.”

“그런 말씀 말아요. 우리 모두는 이 미친 시대의 피해자예요. 피해자끼리 서로 도와야죠. 그보다 가시려면 지금 바로 가세요. 편월이 돌아오기 전에.”

“아, 그게 좋겠구려.”

편월을 두고 가라는 죽영의 말에 광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 혼자 간 걸 알면 편월이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소. 잘 부탁하겠소.”

“염려 말아요. 아무래도 편월은 유화란 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까 둘이 친하게 잘 지낼 거예요.”

“그래도 그 애가 누나요. 편월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시오. 그럼 다녀오…….”

“안에 광운이라는 잡가군 소속의 병사가 계시오?”

광운의 말을 끊은 건 밖에서 들려온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흔히 군인들이 다른 병사들에게 상부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광운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로써 편월 몰래 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 있소. 들어오시오!”

“무슨 일이야?”

“실례하오. 당장 등성登城하시라는 성주님의 명이오. 자, 같이 가십시다!”

광운의 대꾸에 편월과 이름 모를 병사가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들은 대로다. 편월, 같이 갈 거야?”

광운의 말에 편월은 잠깐 주춤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싸우러 가자면 늘 활개를 치며 설쳤었는데, 아무래도 유화가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좋아, 그럼 가자. 다녀오리다.”

“다녀오리다!”

광운이 죽영에게 한 손을 들며 인사하자, 편월도 저만치 떨어져 있는 유화에게 똑같이 해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송 대인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미행을 시켰군.’

병사의 대답에 광운은 즉각 사태를 알아차렸다. 꼼꼼한 송용조의 행동에 감탄도 했었지만, 마음을 턱 놓고 미행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신의 부주의도 한심스러웠다.

그 생각을 떨치며, 광운은 바로 옆에서 말을 모는 편월에게 물었다.

“유화랑 놀고 싶지 않았나?”

“놀고 싶었어.”

“그럼 왜 따라왔어? 그 애랑 놀고 있지.”

“광운도 죽영과 놀고 싶지만 이렇게 가고 있잖아.”

“뭐?”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은근히 걱정도 되는 광운이었다. 자신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는 편월이기에, 혹시라도 자신이 죽으면 그 역시 죽을 때까지 싸우려 들지도 모른다.

‘편월이 보는 곳에선 쉽게 죽지도 못하겠군.’

실제로 광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편월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전국난세의 사나이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다. 딱히 따라 하는 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눈앞에서 죽는다면 목숨 따위는 도외시할 게 틀림없다.

그사이 말은 본성의 정문 앞에 이르렀다.

둥둥둥둥둥-!

돌연 외성의 망루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들려왔다. 성안에 있는 병사들을 소집하는 신호였다.

“서둘러야겠소. 당신을 성주님께 안내하고, 나도 소속으로 가 봐야 하니까!”

“안내하실 것까진 없소. 늦지 않게 얼른 가 보시오.”

“그래도 난 성주님의 명을 받은 몸이오. 복명하지 않으면 안 되오.”

광운은 그 말을 수긍했다. 명령 체계가 선명하지 못하면 군대란 조직은 그대로 무너지고 만다.

뛰다시피 해서 들어선 적금각엔 벌써 마용승뿐 아니라 소부대의 지휘관 급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대에게 곽가군 소속의 별동대別動隊 오천을 주겠다. 가서 곽준방을 구출하고, 명이 있을 때까지 적들을 그 자리에 묶어 두도록!”

“자, 잠깐!”

광운은 당혹스럽게 손을 휘둘렀다. 설마 이런 명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 난 잡가군의 일개 졸병일 뿐이오. 그 정도 군사를 지휘해 본 적도, 지휘할 생각도 없소이다.”

“무엄한 말투는 삼가라!”

호윤천의 호통을 들은 뒤에야 광운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마용승은 영욱성의 성주다. 말을 가려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왕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광운은 강한 눈길로 마용승을 쏘아보았다.

“이 일은 그대가 해 줘야만 하겠다. 군명이다. 한 치의 어김이 없도록 하라!”

더 이상 광운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영욱성 잡가군 소속이다. 마용승이 군명까지 들먹인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쯤 외성 남문에 곽가군의 별동대가 집결하고 있을 것이다. 곧바로 출발하도록!”

이어진 호윤천의 말을 들은 광운은 정중한 군례를 갖춘 후 적금각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편월이 광운의 허리춤을 잡아끌며 물었다.

“그럼 광운이 대장이 된 거야?”

“이번 한 번뿐이야. 곽 장군만 구하면 당장 집어치울 테니까.”

“왜? 대장이 되면 좋은 거 아냐? 부하들도 마구 부리고.”

“편월은 대장이 되는 게 좋나?”

“응. 난 대장이 좋아. 언젠간 이보다 훨씬 큰 성에서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살 거야.”

광운은 그냥 웃고 말았다. 아직은 일군의 대장이 갖는 중압감을 편월이 알 턱이 없다. 그 두 어깨에 부하들의 목숨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걸 모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말을 타고 달려가 본 외성의 남문엔 벌써 곽가군의 별동대 오천이 집결을 끝내고 광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만 대 오천이라…….’

계산상으로 분명 싸움이 되지도 않을 수적 열세다.

그러나 이들은 별동대다. 맞붙어 싸우는 난전이라면 패하겠지만, 유격전을 감행하면 승산은 충분하다. 마용승 역시 그 점을 간파하고 별동대를 붙여 주며 적들을 그 자리에 묶어 두라고 했을 것이다.

광운은 자루를 꺼내 들었고, 편월은 그대로 말 위에서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좋다. 모두 이대로 진군이다. 각 소부대의 대장들은 달리면서 내게 오도록!”

지금쯤 어쩌면 남겨진 잡가군과 곽준방은 모두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만 한다.

뚜우우-! 뿌우-!

둥둥둥둥-!

와두두두두-!

삽시간에 남문 주변은 커다란 소음으로 뒤덮였다. 소라고둥과 북소리, 오천 기의 준마가 내는 말발굽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영욱성의 다른 부대들 또한 남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2

광운이 이끄는 별동대가 도착했을 때, 아직은 간헐적인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격렬하진 않고, 그저 잔당을 소탕하는 정도였다.

“알아들었나? 전군 적의 본대로 곧장 치고 들어간다. 그 후엔 일러 둔 대로 천 명 단위로 흩어져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괴룡산에서 신시申時에 합류한다!”

“존명!”

각기 천 명 단위의 부대 지휘를 맡은 다섯 명은 깍듯이 광운에게 예를 갖췄다.

이건 곽가군의 사기가 높다는 걸 의미한다. 신분에 상관없이 일단 명에 의해 광운이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곧바로 절대복종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점이었다.

“자, 돌격!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마라. 곧바로 적의 본대를 치고 빠져라!”

마침내 광운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러 명을 내렸다. 동시에 기수가 높이 쳐들었던 장수기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우우우-!”

“우우우-!”

곽가군 별동대의 함성은 기묘했다. 다른 곳처럼 악이 받친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니라, 중후하면서 힘 있는 소리를 외치며 진군했다.

그게 전장에서 마지막 잔당 소탕을 하고 있는 적들에겐 기묘한 위축감을 주었다. 얼핏 들으면 늑대 떼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고쳐 들어 보면 지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귀곡성鬼哭聲 같기도 해서 저절로 동작을 멈추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망설임이 적들에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가장 먼저 부딪친, 검은 기치의 적 부대는 그대로 뚫리고 말았고, 그다음에 위치한 붉은 기치의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당했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다음이 적의 본대로서, 여전히 밭으로 개간한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대를 짓밟아라! 적장을 찾아 헤매지 말고, 단숨에 짓밟고 지나가라!”

“우우우-!”

“우우우-!”

광운의 명에 답이라도 하는 듯 별동대는 예의 특이한 함성을 올렸다.

고욱권에게 있어 별동대의 등장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제 막 적장인 곽준방을 사로잡거나 죽이려는 판에 방해를 받았으니, 심리적 타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대기하고 있는 기수에게 명을 내렸다.

“당황하지 마라! 놈들은 고작 오천이다. 흑기군을 수습하고, 황기군으로 하여금 적의 배후를 치라고 해라! 본대도 곧바로 적을 맞도록!”

“와아아!”

확실히 고욱권은 삼만이라는 대군을 거느릴 자격이 충분했다. 본대가 위치한 곳은 지대가 높고, 밭이라 땅이 부드럽다. 광운이 이끄는 별동대가 아무리 빨라도 말의 발목이 빠져 단숨에 본대를 치지 못한다고 판단, 각 군에 명을 내린 것이다.

“막아라!”

“창을 세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라! 대도병은 적의 말 앞다리를 잘라라!”

본대에서도 각 소부대별로 명이 마구 날았고, 그 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길어야 이각이다! 이각만 버티면 흑기군과 황기군이 합류한다. 그때까지만 버텨라!”

바로 이게 고욱권의 판단이었다. 적병은 오천, 이쪽도 같은 숫자라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그사이 다른 부대가 합류하면, 쳐들어온 적병들을 깰 수 있을 터였다.

사실 고욱권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 대처에도 빈틈이 없었다. 다만 그가 몰랐던 건 쳐들어온 부대의 성격이었다. 그들은 모두 파양주 곽가군 소속의 별동대였고, 이 싸움은 그들의 대장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다들 목숨 따위는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운다. 게다가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광운이라는 것도 고욱권은 몰랐다. 하긴 일군의 지휘자가 일개 낭인을 어떻게 알랴마는, 전쟁이 삶 그 자체인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와장창!

정말 그건, 거대한 단지나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공격군의 선두와 수비군의 최초 방어선의 첫 접전은 그처럼 격렬했다.

“적의 장수기를 찾아라! 적장을 찾아 공격하라!”

두 부대가 부딪치자마자 고욱권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적장만 거꾸러뜨리면 이 싸움은 그대로 끝날 공산이 컸다.

그리고 적장은 쉽게 눈에 띄었다. 적의 선두에서 괴상한 병기로 부하들을 마구 찔러 쓰러뜨리며 곧바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자가 고욱권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저자다! 저자를 쳐라!”

손가락으로 적장인 광운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고욱권 자신도 대기시켜 둔 말에 올랐다. 직접 상대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직속 부하들이 그대로 보고 있을 턱이 없다. 그들은 고욱권의 말고삐에 매달려 그를 제지했다.

“대장군! 전체를 살피소서! 직접 싸움에 가담하시는 건 말도 안 되는 졸자들의 행동이오!”

“놔라! 적장은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놓지 못할까!”

“대장은 싸우는 게 아니라 지휘하는 게 그 임무요! 에이익!”

고욱권의 말고삐를 쥔 부하는 그 자리에서 말을 한차례 회전시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달리려는 말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과연 그사이 고욱권은 냉정을 회복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전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본대는 무너졌다. 그러나 흑기군과 황기군이 움직인다.’

그건 확실했다. 너무나 저돌적인 공격군의 공세에, 고욱권의 본대는 제대로 수비하지도 못한 채 벌써 여기저기서 밀리는 추세였다.

하지만 흩어졌던 흑기군이 부대를 수습해 공격군의 후미에 따라붙었고, 그건 황기군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버텨라! 잔당을 진압 중인 부대들도 모두 본대로 합류해 적을 포위하… 억!”

재차 명을 내리던 고욱권이 돌연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말 위에서 그대로 벌렁 뒤로 자빠져 땅에 떨어져 버렸다. 어느새 치고 들어온 광운의 기병奇兵에 어깨가 꿰뚫려 버린 탓이었다.

“장군이 쓰러지셨다. 어서 방어 막을!”

“막아라! 막아!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라!”

일단 지휘관인 고욱권이 쓰러지자 그들의 부하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렇더라도 고욱권을 보호하려는 그들의 움직임 또한 필사적이어서 쓰러진 그 주변에 인간 방패를 형성했다.

“적을 쳐라! 난 괜찮으니 적들을 쳐!”

그 인간 방패 속에서 고욱권은 사력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가 쉬었고 그 끝이 깔깔하게 갈라지는 게, 아무래도 부상당했다는 심리적 위축감이 작용한 탓이리라.

‘빗나갔다!’

적장인 고욱권을 향해 창과 비슷한 기병을 찔러 넣은 광운의 첫 생각이었다. 원래는 목젖에 구멍을 낼 생각이었지만, 어깨를 찌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로 좋았다. 이미 적의 본대는 무너졌고, 이제부턴 계획대로 움직이면서 적들을 더 큰 혼란으로 밀어 넣으면 되는 것이다.

“모두 산개하라! 산개해!”

이만하면 적의 본대를 치는 건 성공했고, 그건 또한 그대로 적 전체에 영향을 끼칠 터, 광운은 미련 없이 다음 명을 내렸다. 옆에선 기수가 어지럽게 장수기를 휘둘렀다.

“우우우-!”

“우우우-!”

예의 사람을 위축시키는 별동대의 함성이 뒤를 이었다.

광운은 곧장 직선으로 달렸다. 다른 네 부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그중 한 부대는 기존의 전장으로 말 머리를 돌려 곽준방을 구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광운이 직선으로 달리는 건 적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적들에게도 눈이 있을 테니 장수기를 보고 쫓아올 게 뻔하다. 되도록 많은 적들이 뒤따르게 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끌고 다녀야 한다.

“화살 공격이오!”

뒤따르던 천 명 중 누군가가 큰 소리로 광운에게 보고했다.

“당황하지 마라. 뒤에서 쏘는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한다. 그대로 전력 질주! 기수는 선두를 달리도록!”

그렇게 말해 놓고 광운은 천천히 뒤로 처졌다. 어떤 경우든 후퇴전은 힘들고 위험하다. 자신이 맨 뒤를 달리며 싸움 전체를 조율할 생각이었다.

“활 부대! 대장과 행동을 함께하라!”

뒤로 처지는 광운을 본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원래 이 부대의 지휘관인 여상계呂相啓였다.

‘확실히 쓸 만한 장수로군.’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후퇴전의 후미는 가장 큰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적의 추적이 가까워지면 맞서 싸워야 하고, 지금과 같은 경우는 적을 너무 떨궈서도 안 되니 아군의 전진 속도도 조절해야만 한다. 그러니 활 부대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된다.

“활 부대 이백, 집결!”

“일자 진을 형성해 전진한다!”

활 부대의 지휘관이 보고를 하자마자 광운은 재빨리 명을 내렸다.

“우우우-!”

활 부대 역시 같은 함성을 올리며 옆으로 쭉 퍼지기 시작했다.

옆으로 일렬로 길게 늘어서는 일자 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효과가 크다. 사수射手 각자의 시야 확보가 용이하고, 보다 너른 면적에 먼지를 날림으로써 적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

“전군 중속中速!”

“전군 중속!”

“전군 중속!”

뒤에서 내린 광운의 명은 빠르게 앞의 기수에게 전달되어 장수기가 움직였다. 그에 따라 부대의 전진 속도가 점점 늦춰졌다. 적이 쏘는 화살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졌기에, 조금 당길 필요가 있어 내린 명이었다.

“활 부대 준비! 명을 내리면 일제히 쏴라! 그 후엔 다시 전속 전진이다!”

그 명에 따라 활 부대 사수 이백은 일제히 화살을 재고 뒤로 몸을 돌렸다. 말을 탄 채 활을 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광운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뒤에는 자신의 눈만큼이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편월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과의 거리는?”

“약 칠백 보!”

“숫자는?”

“오천에서 칠천.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워!”

“속도는?”

“빨라. 벌써 오십 보 정도 거리를 줄였어!”

“좋아. 사수들 일제히 발사!”

지금까지 착착 수행되던 광운의 명이 이번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선뜻 활을 쏘는 사수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통상 활의 유효 사정거리는 삼백 보 내외다. 최대한으로 쳐서 오륙백 보 정도다. 그 정도라면 살상 범위를 벗어나지만 말이다.

“거리는?”

“오백 보. 아, 사백오십 보!”

“바보들아, 활을 쏴! 놈들이 달려오는 속도까지 계산하란 말이다. 발사!”

한 번 더 거리를 확인한 광운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딱딱한 계산밖에 할 줄 모르는 사수들이 답답하기만 했다.

퓨퓨퓨피핑-!

그제야 사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적들을 곧장 겨냥한 것이 아니라, 적들의 바로 앞인 빈 공간을 향해 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김없이 적중했다. 화살이 날아가는 시간 동안에 적들은 그만큼 전진하여, 그들은 이백 대의 화살비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발사! 그리고 전속 전진!”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광운의 명이 잇달았다. 그건 그대로 앞으로 전달되었고, 장수기가 다시 한 번 앞으로 기울어졌다.

“적의 피해는?”

“사망 백여 명 정도, 부상자는 그 서너 배!”

“거리는?”

“반 리!”

“아직도 추적을 하고 있겠지?”

“응!”

후미로 처진 이후 광운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편월이 해 준 보고로, 보지 않아도 상황을 훤히 알 수 있어서였다.

‘사망이 백여 명이라…….’

그들은 아마 화살에 곧바로 노출된 자들일 게다. 선두인 게 분명하고, 그들이 쓰러지면서 뒤에서 따라오던 자들의 말 다리도 거기에 걸려 한꺼번에 오륙백 정도가 무너졌으리라.

편월은 적의 숫자를 오천에서 칠천 정도로 가늠했다. 자욱한 먼지 속이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을 테니 중간쯤인 육천 정도로 보고, 적들은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병력의 일 할 정도를 잃은 셈이었다.

“전방에 쌍수[雙水津]!”

선두의 보고가 들렸을 때, 광운은 재빨리 미리 봐 뒀던 지도를 떠올렸다. 쌍수진은 괴룡산에서 흘러내리는 규하圭河와 진파평盡破平을 휘돌아 흐르는 연수燕水가 만나는, 파양진에서 가장 큰 나루터 중 하나다.

“규하를 따라 상류로!”

어차피 집결지인 괴룡산으로 가려면 규하를 건너야 한다. 강폭이 좁은 상류로 이동하는 게 도강渡江하기 편하다.

명은 즉각 선두로 전달되었고, 부대는 꿈틀거리는 뱀처럼 왼쪽으로 크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부대 중속! 적들을 너무 처지게 해서도 안 된다!”

명을 내린 후, 광운은 재차 편월에게 물었다.

“적들과의 거리는?”

“팔백 보쯤!”

“속도는?”

“일정해.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두 번의 화살 공격으로 부대의 일 할을 잃었으니 적들도 조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달리면서 광운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쌍수진 나루터를 벗어나자마자 강 양쪽은 온통 우거진 갈대밭이었다.

‘화공火攻!’

즉각적으로 광운의 뇌리를 때린 생각이었다.

“전원 정지! 창 부대는 후미로! 활 부대는 백 보 후퇴!”

“불로 공격할 거야?”

아직 어리지만 편월은 확실히 전쟁에 대한 감각이 예리했다. 광운이 부대를 멈추자마자 곧바로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렸다.

“활 부대는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각자 세 발씩 쏘고 퇴각한다! 창 부대는 그 뒤를 따르는 적의 말을 쓰러뜨리고, 나머지는 모두 갈대밭에 매복한다!”

“화공을 하실 작정이오?”

어느새 다가온 여상계가 편월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기름을 가진 병사들이 있소?”

“우리는 별동대요. 뭔들 없겠소!”

“그럼 준비해 주시오. 갈대밭 한가운데까지 충분히 끌어들일 테니, 불을 지르는 건 여 장군의 몫이오.”

“아군의 피해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겠구려.”

“지금은 갈대가 잘 타지 않을 때니, 기름만 잘 뿌려 두면 아군의 퇴각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거요.”

“존명!”

군례와 더불어 여상계가 빠르게 달려갔다.

지금이 음력 사월, 갈대뿐 아니라 모든 수목에 물이 한창 올라 있을 때다. 불이 잘 붙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아군이 피할 통로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적 출현! 사수 발사!”

그사이 활 부대는 적에게 화살을 퍼붓고 벌써 퇴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활 부대 퇴각! 창 부대는 준비하라! 기수는 내 옆으로!”

적을 유인하려면 미끼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미끼로는 대장만큼이나 좋은 게 없기에, 광운은 장수기를 든 자를 옆으로 불렀다.

“와아아-!”

“놈들을 짓밟아라!”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적들이 함성을 올리며 짓쳐 들었다. 벌써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에 그들의 이성은 반 이상이나 상실된 상태였다.

“생존한 창 부대는 퇴각하라! 난전에 휘말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퇴각하라!”

창 부대 삼백은 아마 거의 전멸했으리라. 물론 그만큼 적에게도 타격을 입혔을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적의 장수기다! 저놈을 쳐라!”

“하나!”

적들 중 누군가의 고함이 들린다 싶은 순간 뒤에서 편월의 목소리도 들렸다. 적들 중 한 명을 거꾸러뜨렸다는 말이고, 이 싸움에서 첫 전과를 올린 순간이었다.

광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대밭으로 뛰어들었다. 대장기만큼은 높이 쳐들게 해서 적과 아군에게 똑똑히 보이게 만들었다.

“둘, 셋!”

아마 적의 추적이 바짝 뒤를 물었나 보다. 숫자를 헤아리는 편월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피피피융!

적들도 화살을 쏴 댔다. 바로 근처를 스치며 내는 소리가 예리하게 광운의 귓전을 때렸다.

“일곱!”

편월이 재차 숫자를 추가했을 때, 갈대밭 한편에서 한 대의 불화살이 허공 높이 솟구쳐 올랐다. 본격적인 화공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여상계가 다시 돌아왔다.

“날 따르시오. 이제 장수기는 접고!”

이렇게 돌아온 건 여상계만이 아닐 것이다. 각기 흩어져 있는 아군을 안내하러, 숱한 사람들이 이 갈대밭에 뛰어들었으리라.

화르르륵-!

드디어 불길이 올랐다. 기름과 생갈대가 타면서 내는 매운 냄새와 연기는 후각과 시력을 방해했지만, 그 속에서도 여상계는 잘도 달렸다.

콜록, 콜록!

“뒤에 처진 적들의 숫자는?”

“거의 대부분의 적들이 갈대밭으로 들어왔소!”

“아군의 대피는?”

“지금쯤 무사히 철수하고 있을 거요. 아이는 괜찮소?”

연방 기침을 해 대는 편월이 안쓰러워진 여상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괜찮아.”

콜록, 콜록!”

대답은 편월이 대신 했다. 잇따라 매캐한 기침을 토하면서도, 그 말투는 또렷했다. 경미한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시작된 불은 쌍수진의 그 큰 나루터까지 태우고 나서야 간신히 꺼졌다.

하지만 나루터를 태운 건 그날 광운의 부대 일천 명이 세운 전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추적해 왔던 적병 육천을 완전히 전멸시켜, 돌아간 자는 최초의 화살 공격 때 부상을 입은 오륙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3

쌍수진의 화공이 있은 지 사흘, 전장은 괴룡산으로 옮겨졌고, 그사이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다. 아니 별동대에 있어서 전혀 전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애당초 잡가군이 출병했던 목적인 괴룡산 산적들을 완전히 소탕해 버렸던 것이다.

아마 다른 전투였다면 광운은 이쯤에서 손을 떼고 다시 잡가군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그러나 곽준방이 엄중한 부상을 입었다. 별동대를 지휘할 상태가 아니니 계속해서 광운에게 장수기를 맡겨 두고 있었다.

그날 광운은 별동대의 점고點考를 마치자마자 곽준방의 천막으로 병문안을 갔다.

“어서 오게. 연일 수고가 많구먼.”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쇠붙이에 입은 상처야 무장에겐 흔한 일, 며칠 더 쉬면 거뜬해질 걸세.”

“곽 장군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대로 대치 상태가 길어지면 불리한 건 우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지금쯤이면 성주께서도 건주로 출병을 하셨을 터, 조만간 변화가 있을 걸세. 그보다 군량은 얼마나 남았나? 갑작스러운 출병이라 많이 준비하지는 못했을 테지?”

“산적들의 산채에 의외로 식량이 많아 보름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이군. 그나저나 놈들의 정체는 확실히 건주군이 맞는가?”

그 질문엔 광운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성주인 마용승과 송용조는 지금 대치하고 있는 적들이 건주군이라고 간주하고 출병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건주는 주공의 가문인 마씨가 파양주에 기반을 닦을 때부터 친교를 맺고 있던 곳일세. 그런데 어쩌다 가겸후와 같은 속이 시커먼 자와 손을 잡았을꼬?”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어투로 곽준방은 말을 맺었다. 상처가 다시 쑤시는지 미간도 잔뜩 일그러졌다.

그 기색을 눈치 챈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거북한 문답을 주고받는 것보다는, 적정을 한 번 더 살피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부터 적들을 조금씩 건드려 보도록 하게.”

“예?”

“정면으로 치지는 말고, 여기 괴룡산의 산세를 이용해 유격전을 벌이란 말일세.”

“하지만 그래서는 장군께서도 움직이셔야 되는데, 그 몸으로 괜찮겠습니까?”

“커다란 널빤지랑 병사 서너 명만 있으면 문제없네.”

“그런데 왜 갑자기 전투를 하라시는 겁니까?”

“만약 자네가 들었던 대로 성주께서 행동하신다면, 오늘내일 중으로 우리 군사가 건주로 치고 들어갈 걸세. 눈앞에 있는 적들이 건주군이라면 우리가 여기에 못 박아 둬야 하지 않겠나.”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점을 생각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비록 별동대를 지휘하고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직일 뿐이다. 섣불리 군사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마용승에게서 어떤 지시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곽준방이 적들을 건드려 이곳에 붙잡아 두라고 했다. 원래 자기 부대에 속한 별동대인지라 어떻게 운용을 하든 그건 그의 마음이다. 출전한 장수는 때때로 황제나 왕의 명령도 듣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광운은 타고난 전사다. 요 며칠 동안의 교착 상태가 갑갑하던 참이었던지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널빤지를 준비하겠소.”

명에 따르겠다는 말을 광운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별동대의 지휘관은 자신이니까 말이다.

“병사들을 소집하라! 적을 친다!”

천막을 나서자마자 광운은 명을 내렸다. 병사들은 모두 아침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 출동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을 터였다.

둥둥둥-!

갑작스러운 북소리가 괴룡산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예의 천 명 단위의 대장들이 광운에게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오?”

쌍수진의 화공 이후 부쩍 친해진 여상계가 급하게 무장을 갖추며 물었다.

“적들을 집적거려 보라는 곽 장군의 명이오.”

“적들을? 아니 왜 갑자기 그런 명을 내리셨소? 혹시 성에서 다른 지시라도?”

“그게 아니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적들을 이 자리에 묶어 둘 생각이신 것 같소. 그렇게 알고 준비하시오!”

“말이 좋아 집적거리는 거지, 아직은 병력의 차이가 많소.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게 패할 수도 있소.”

여상계는 신중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날고뛰는 별동대라도 병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숫자가 많은 적들에게 포위라도 당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여기는 산중이다. 별동대가 장기로 삼는 기동력을 맘껏 펼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 불안을 잘 알기에 광운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작전을 세워 봅시다. 이건 전면전을 하자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적들을 집적거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 그 점에 유의해서 얘기해 봅시다.”

그때는 벌써 다른 부대장들도 모두 집결해서 광운의 얘기를 들은 뒤였다.

“내가 유군을 맡겠소. 낮 싸움은 나머지 분들이 해 주시오. 그때 난 적들 몰래 길을 돌아 밤이 되면 야습을 감행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나선 사람은 부대장 중 한 명인 팽요彭耀였다. 광운 또래의 나이로 비교적 젊지만, 그만큼 겁이 없고 지략도 남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겠소?”

“하지만 고작 오천도 안 되는 병력 중에서 일천이나 몰래 빼내기는 어려울 것이오.”

광운의 질문에 답한 사람은 구문생邱文生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십 대의 장수였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소. 나머지 사천이 적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싸움이 한창일 때 팽 장군이 슬쩍 빠진다면 적들도 쉽게 눈치 채지 못할 거요.”

“여 장군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난 싸움을 걸라는 명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소. 이건 어떻게 해도 우리가 유리한 대진이오. 만약 적들의 발을 묶어 두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적들이 움직이길 기다렸다가 배후를 치는 게 병법에도 맞을 것이오.”

여상계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 사람은 우효금于曉錦이었다. 얼굴 절반을 덮어 버린 수염이 일품인 서른 후반의 사내였다.

“아니, 우 장군의 말씀에 난 찬성하지 못하겠소. 자고로 싸움이란 건 내 땅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게 아니라, 적을 향해 쳐들어가라고 했소. 이 땅에 쳐들어온 적들을 물리치지는 못할망정 여기 묶어 두라는 말도 소장은 납득하기 어렵소. 하물며 적들이 움직이길 기다려 우리의 행동을 정하자니? 일단 적들이 움직여 보시오. 당장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소. 지금도 저들은 우리 백성들이 피땀 흘려 경작한 논밭을 짓밟고 있지 않소!”

이처럼 장황한 변설을 늘어놓은 사람은 사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주립건周立建이었다. 말이 많고 또한 빠르지만, 싸움에 임했을 때의 손놀림도 빨라 크고 작은 전투 때마다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 사람이었다.

만약 광운이 대장군이었다면, 아마 주립건의 의견을 채택했을 터였다. 아무래도 수비보다는 공격이 성향에 맞는 탓이리라.

하지만 곽준방의 명은 명료했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합시다. 우선 내가 나서서 적장 한둘을 베어 넘기겠소. 그러면 놈들의 사기가 꺾일 터, 그때를 기해 별동대 사천이 일거에 적들에게 덮쳐 가는 거요.”

“사천? 왜 사천이오?”

“나머지 천은 이곳을 지켜야 하오. 곽 장군의 말씀대로 놈들을 이 자리에 못 박아 두려면, 식수 확보가 용이한 이 산에 진을 치는 게 좋소. 하여튼 사천이 한데 뭉쳐 적들 중 약한 곳을 치고 지난번처럼 산개하는 거요. 그 후에 각기 추적하는 놈들을 따돌리고 이 자리로 귀대하는 거요. 물론 팽 장군은 슬쩍 빠졌다가 밤에 야습을 감행하시오. 그때 우리도 일제히 쳐 나가겠소! 어떻소?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마음속에 세워 둔 작전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광운은 제장諸將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 한마디 하고 나선 사람은 여상계였다.

“다 좋소. 좋은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소.”

“그게 뭐요? 말씀해 보시오.”

“저간의 경위야 어떻든 당신은 지금 우리 별동대의 대장이오. 대장이 가장 먼저 싸움에 나선다는 건 언어도단言語道斷, 아무래도 적장을 끌어내어 베는 건 이 몸이 맡아야겠소.”

“아니, 내가 가겠소!”

“젊은 사람들은 양보심을 좀 키울 줄 알라! 이 일은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우리 군의 사기에도 보탬이 될 거요!”

장수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고 나섰을 때, 광운의 미간엔 굵은 주름이 세워졌다. 장수들끼리의 선봉 다툼은 이제 아주 지긋지긋했다.

이럴 때 말로 해결을 보려면 하루해가 짧을지도 모른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최선이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광운은 곧바로 질풍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전에 장수기를 든 기수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헤헤헤, 우리가 이렇게 먼저 가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그치? 알고 나면 무척 화를 낼걸!”

광운의 등에 업힌 편월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그 역시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무장에게 선봉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임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웃지 마라, 편월! 이건 저분들께 모욕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이다. 어떤 경우든 무장에게 모욕을 준다는 건 목숨을 각오해야 될 일이다!”

엄한 말투로 광운은 편월을 꾸짖었다. 그의 말대로 무장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칼부림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리부터 그 점을 가르쳐 둬야 뒤탈이 적을 터였다.

곧장 질풍과 무기가 실린 말을 몰아간 광운은 적의 영채營寨 오백 보 앞에서 말을 세웠다.

“나는 파양주에서 그 무용으로 이름 높은 곽가군의 별동대장 광운이노라! 어디 소속인지도 밝히길 꺼리는 쥐새끼 같은 군세 속에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 몸의 창을 받을 자가 있거든 썩 나서라! 그 목을 베어 이 싸움에서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리라!”

광운의 목소리는 등 뒤에 있는 괴룡산까지 쩡쩡 울리며 대기 중에 퍼져 나갔다.

그러자 적의 영채 속에서도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 명의 장수가 말을 타고 나섰다. 왼손엔 방패, 오른손엔 도끼를 들고 있었다.

“광운이라고? 네놈들에게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구나. 첫 싸움에 대장을 내보내다니, 그 용기는 가상하나 오늘 이 도끼의 제물로 사라져 줘야겠다!”

“예의를 모르는 놈은 상대하지 않겠다. 먼저 이름을 밝혀라!”

사실 광운이 정말 궁금해 물은 건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온 흥분으로 혹 자기 소속을 밝히면 적들의 정체를 확연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은근히 떠본 것에 불과했다.

“까닭이 있어 이름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도끼 아래 목숨이 스러지면 이름 따위는 필요도 없을 터, 간다!”

‘간다’라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적장의 도끼는 벌써 광운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광운은 말고삐를 슬쩍 옆으로 채서 그 도끼를 흘려 버렸다.

휘잉-!

도끼가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을 들으며, 광운은 다른 말에서 한 자루 대도를 꺼내 들었다. 이 싸움은 다분히 적과 아군에게 보이기 위한 시위용이기에 비실용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곧바로 이어질 것 같던 적의 공격은 그러나 뚝 그쳐 버렸다.

“그 아이는…….”

“말한다고 알까!”

이미 문답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등에 업힌 편월을 궁금해하는 적장을 향해 광운은 곧바로 대도를 휘둘렀다.

“건방진 놈!”

적도 콧방귀를 뀌며 왼손의 방패로 광운의 대도를 막으며, 동시에 도끼를 번쩍 쳐들었다. 수비할 수 있는 무구를 갖추면 이래서 편리하다.

그러나 그건 적장 혼자만의 달콤한 상상일 뿐이었다.

써걱! 퍼억!

적장의 방패를 그대로 베어 버린 광운의 대도는 곧장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패가 없었다면 상반신 절반이 족히 날아갔을 터였다.

“어억!”

다급한 신음성을 토하며, 적장은 말 위에서 심하게 휘청거렸다. 낙마만은 면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것도 적장에겐 불리하게 작용했다. 차라리 떨어져 버렸으면 다음에 휘두른 광운의 대도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대로 버티다 투구 쓴 그의 목이 허망하게 허공으로 솟구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말이다.

“우우우-!”

“우우우-!”

그 순간 별동대에선 예의 그 기괴한 함성이 올랐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니 그들의 사기는 누가 억눌러도 한껏 고무되었다.

그렇다고 적들이 당장 위축된 건 아니었다. 재차 북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또 다른 장수가 빠르게 말을 달려 나왔다. 온통 새빨간 갑옷이 인상적인 무장이었다.

광운도 마주 말을 달렸다. 대도는 오른쪽으로 축 늘어뜨려 그 끝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로 마주 달리는 두 마리 말의 콧잔등이 서로 부딪칠 듯한 거리까지 좁혀졌다 싶을 때…….

싸악-!

공기보다 더 투명한 한 줄기 예광이 이제 막 오시로 접어든 강한 햇살을 잘랐다.

후두두둑-!

그다음엔 적장이 입고 나왔던 갑옷보다 더 붉은 피의 비가 뿌려졌다. 아래로 처졌던 광운의 대도가 위로 올려 베이며, 말과 적장을 한꺼번에 두 토막 내 버린 결과였다.

“우우우-!”

다시 별동대의 함성이 들려왔을 때, 적의 영채도 거의 동시에 열리며, 이번엔 세 명의 적장이 한꺼번에 달려 나와 광운에게 돌진했다.

이쯤 되면 별동대에서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여상계와 주립건이 달려 나왔고, 그걸 본 적들이 영채를 열고 일제히 쳐 나왔다.

그걸 멀건이 보고만 있을 별동대원들인가. 그들 역시 말발굽 소리도 우렁차게 적을 맞으려고 연방 박차를 가했다.

이건 누가 봐도 별동대의 우세였다. 사기가 진작된 건 물론, 그들은 말을 타고 있는지라 보병이 주력인 적들보다 훨씬 빨리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적들을 너무 멀리 몰아치지 마라! 적들에게 바짝 붙어 공격하라!”

좀 전에 뛰어나왔던 적장 중 한 명을 상대하며, 광운은 연방 주변에 고함을 질렀다. 적들과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적의 화살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건 곧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병은 언제나 보병 한가운데 뛰어들어 짓밟기 마련이다. 날랜 병사들은 벌써 적의 영채를 넘어 선봉대의 한가운데를 휘젓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오! 각 부대의 대장들은 각자의 병력을 이끌고 산개하시오!”

더 이상 적과 난전을 벌이는 건 실익도 없고, 자칫 적들이 대오를 정비해 역습을 가해 오면 숫자상 불리한 아군의 피해도 만만찮을 것이다.

게다가 괴룡산엔 일천의 호위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상당한 곽준방이 있다. 최대한 신속하게 작전을 마무리 짓고, 귀대해야만 한다.

그 점에 있어선 공격에 가담했던 다른 네 개 부대 대장들도 결코 방심치 않고 있었다. 광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각자 대장기를 휘둘러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광운은 슬쩍 자신의 진영을 돌아보았다. 적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던 우효금의 부대가 남아 곽준방을 호위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적들 중에도 전략에 밝은 자가 있다면 아군의 본대에 천 명밖에 없다는 걸 파악할 터이고, 그렇다면 일군을 이끌고 그쪽을 공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운은 애당초 이 싸움터에서 멀리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적의 선봉대가 무너지자마자 그는 곧 말 머리를 우측으로 돌려 적의 우익인 흑기군에 그대로 부딪쳐 갔다.

그때까지 적들은 우왕좌왕이었다. 같은 편의 내로라하는 장수 둘이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도 충격이었는데, 거기다 선봉대가 지리멸렬되어 쫓기기 시작하니 적군 전체가 동요되고 말았다.

물론 적의 흑기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운이 이끄는 일천의 기병이 부딪쳐 가자마자, 그들은 메뚜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싸움이란 건, 특히 집단 간의 전투나 전쟁이란 건 늘 이렇다. 비록 숫자는 적을지라도, 한 번 사기가 오른 군사들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일당백이니, 일당천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적의 흑기군까지 와해시킨 광운은 다시 말고삐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이제 아군의 진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팽 장군이 잘 빠져나갔을까?’

시작한 지 불과 한 시진도 되지 않은 이 싸움의 목적은 팽가군을 은밀히 빼내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걸 확인해야 했으니, 광운이 말 등에 올라서 전장을 훑어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공한 것 같군!’

싸움터 어디에서도 별동대 팽가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광운은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오늘 오전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우우우-!”

“우우우-!”

복귀하는 광운과 그 부대, 또 이어서 들어오는 아군들을, 우효금의 우가군이 특유의 함성으로 반겼다.

사망 이 명, 중상 오 명, 경상자 이십칠 명.

이게 그날 별동대가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 실은 피해라고 할 것도 없는 경미한 것이었다.

거기까지 보고를 받은 뒤에야, 광운은 병사들의 취사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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