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국풍경戰國風景 3 (5/66)

전국풍경戰國風景 3

1

궐주闕州 창일성昌日城.

삼면이 가파른 산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전면인 동쪽으론 끝도 보이지 않는 궐운평야闕雲平野가 펼쳐지고, 또 그 평야의 끝은 바다와 이어진 천혜의 요지다.

세 개의 큰 강줄기는 궐운평야를 살찌우고,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뿐인가. 북으로는 석주釋州, 남으론 운주雲州, 서로는 대륙의 중심부인 중주中州까지 지배하고 있는 전국 최강의 나라 율천국率天國의 수도다.

그 지배자는 패천왕覇天王이라고도 불리는 가겸후嘉兼侯. 일찍이 열여덟 나이로 주색에 빠져 허덕이던 선왕先王을 스스로 유폐시키고 율천국의 왕좌에 오른 인물로, 지금 나이 막 서른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 율천국왕 가겸후는 전쟁으로 연일 시끄러운 작금의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그 가겸후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져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거처이자, 율천국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진무각振武閣에서 말이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 아비처럼 어리석은 자식을 낳은 사람이라 하여, 조부의 기일에도 그 위패 앞에 절을 하지 않았던 가겸후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인 일로 저토록 공손한 태도로 서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 앳된 목소리가 가겸후의 숙인 뒤통수에 떨어져 내렸다.

“공公이 율천국왕이오?”

말투는 자못 당당하지만, 어딘지 위축되어 있는 듯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황송하옵니다, 황제 폐하! 신臣이 바로 가겸후이옵니다.”

태도만큼이나 극도의 예를 갖춘 가겸후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황제라니? 나라의 법도가 땅에 떨어져 전 대륙이 전국의 피 구덩이 속에 빠져 버린 지 이백여 년!

황실은 피폐해서 황제라는 존재는 유랑걸식流浪乞食하다시피 하며 오늘은 이 나라, 내일은 저 패주를 찾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유랑 황제가 오늘은 율천국에 들어온 것이다. 아무리 가겸후라도 저처럼 공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고개를 드시오. 바라지 않는 난리가 길어져 짐이 율천왕의 신세를 지게 되었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정중히 대답하면서 가겸후는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황제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만은, 자세나 말투만큼 공손한 건 아니었다.

‘저 어린놈이 황제란 말이지?’

황제가 나라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강제로 납치하다시피 해서 데려온 가겸후였다.

그게 벌써 사흘 전의 일로써 어리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실로 한심스러웠다.

황제에게 머물러 있던 가겸후의 시선이 그 옆에 시립해 있는, 소위 황실의 공경公卿들에게로 천천히 옮겨졌다.

노소 합쳐서 기껏 서른 명 안팎, 오랜 유랑 생활에 시달린 곤궁한 티가 얼굴에서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옷만은 번듯한 관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황제는 곤룡포, 다른 신하들은 직급에 맞는 새 옷들을 입고 제법 엄숙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물론 가겸후가 새로 지어 준 것들이었다.

“율천왕은 이 난리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소?”

다시 황제의 말이 들렸을 때, 가겸후는 내심 흠칫했다. 아무리 힘없고 거처할 곳 없는 자들이라도 자신이 빤히 쳐다보는 건 불경한 짓이란 걸 깨달은 탓이었다.

“황송하옵니다. 신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이 난리를 종식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를 쓰고 있으나, 각지에 웅거하고 있는 무장들의 저항이 워낙 심해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는 모두 신이 미거한 탓이오니 꾸짖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짐이 어찌 율천왕을 꾸짖을 수 있겠소. 이 모든 게 짐의 선조들이 못난 탓인데.”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입에서 자탄自嘆하는 말이 나오자마자 시립해 있는 공경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덩달아 허리를 숙이며 가겸후는 연방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러야 했다.

‘저런 허식虛飾에 빠져 있었으니 나라가 이 꼴이 됐지!’

허식은 곧 사치와 방탕으로 이어진다. 그런 친부를 자기 손으로 몰아내고 왕이 된 가겸후였기에 이런 꼴은 진심으로 경멸했다.

“전하! 납비부納秘部에서의 급한 전갈이옵니다.”

돌연 밖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가겸후를 불렀다.

동시에 진무각으로 사람 하나가 뛰다시피 해서 들어왔다. 관복이나 예복이 아닌, 날렵한 무복 차림이었다.

“무엄하다! 폐하께서 계시는 어전이다. 삼가라!”

나직하게, 그러나 아주 단호한 어투로 가겸후는 들어온 사람을 꾸짖었다. 아무리 초라해도 황제는 황제인지라 기본적인 예절은 갖춰야 한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평소 가겸후가 앉는 용상龍床에 자리한 황제가 보이지도 않는 듯 행동했다.

“전하, 화급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어서 납비부로 납시지오!”

“어허, 삼가라는데도!”

“괜찮소, 율천왕. 급한 일인 듯한데 가 보도록 하시오.”

만약 황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가겸후는 체면상 달려온 자에게 죄를 물었을 터였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유랑과 천대에 길들여진 황제인지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오히려 숨 막히는 가겸후와의 면대를 끝낼 수 있게 되어 안도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황공하옵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모쪼록 편안히 쉬시길 바라옵니다.”

가겸후도 더 이상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납비부라면 율천국에서 부리는 간인들을 총괄하는 곳이다. 지급至急을 요하는 극비 사항이 아니면 이처럼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겸후는 부하들에게 황제를 잘 모시라는 분부를 남겨 두고 총총히 진무각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오, 육 장군?”

보고하러 달려온 자는 가겸후가 총애하고 있는 오기총감장五旗摠監將 육우맹陸愚猛이었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용맹’ 하나만을 지향하기 위해 스스로 이름을 고친 자였다.

게다가 육우맹은 가겸후가 선왕을 몰아낼 때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공로로 율천국의 전 군사력을 총괄하는 오기총감장에 올라 있는 것이기도 했고.

사실 그 자리에 황제만 없었다면 육우맹이 직접 보고하러 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렇게 따지면 그로선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셈이었다.

“대체 그 꼴이 뭡니까? 황제라고 해 봐야 쥐뿔도 없는 어린아이 놈에 불과한데, 그런 자에게 그토록 굽실거리기나 하시고.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소!”

대답 대신 육우맹의 입에서 나온 건 가겸후에 대한 질책과 황제에 대한 욕이었다.

가겸후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나이가 쉰이 넘었어도 그 이름대로 행동하는 육우맹을 결코 나무랄 수 없었다.

아니 이런 말투는 단지 육우맹만이 아니었다. 오직 무공 하나만을 추구하고, 또 전장에서 날이 새고 지는 전국시대 사나이들의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근데 무슨 일이오?”

“드디어 터졌소이다!”

“터지다니? 그렇다면 드디어 파양주에서 일을 시작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급보보다는 건주에서 밀사密使가 왔소이다.”

“밀사가? 그건 너무 어리석었군.”

말을 하면서 복도를 걸어가던 가겸후는 돌연 입고 있던 사조룡四爪龍(황제는 발톱 다섯 개인 용포를, 왕과 황세자는 발톱 네 개인 용포를 입었다)이 그려진 용포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거치적거렸다. 안에는 금색 무복을 받쳐 입고 있었다.

“지금도 사방에선 간인들의 눈이 번뜩이고 있는데 밀사라니, 만에 하나 파양주의 일에 우리가 개입된 게 알려지면 건주에서 꾸민 일도 모두 들통 날 거요. 그렇다면 우리는 천하의 손가락질을 받게 돼.”

“그럼 밀사는 만나지 않으시렵니까?”

“그래도 멀리서 왔는데 만나는 줘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나저나 황제는 어찌하시렵니까?”

“그건 굴러 온 복이오, 육 장군.”

“복이라고요? 아니 저런 천덕꾸러기를 데리고 뭘 하시겠다고 복이라는 거요?”

“그래도 명색이 황제요. 얼마 동안 융숭한 대접을 해 주고, 그 뒤에 조서詔書라도 한 장 쓰라고 해서, 그걸 들고 천하 정벌에 나서는 거요. 그렇게 되면 대의명분도 우리에게 있으니 열국列國은 감히 저항하지 못할 거요.”

“허어, 다른 나라 왕들은 그 생각을 못 해서 황제를 내쳤겠소? 이름뿐인 황제가 내리는 조서는 그야말로 휴지 조각에 불과하오.”

“다른 나라는 우리만큼의 힘이 없소. 조서만 받들고 천하 정벌에 나섰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감히 실행하지 못한 거요. 그러나 우리에겐 힘이 있지.”

“흐음!”

육우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겸후의 말도 납득되었지만, 드디어 이 시끌벅적한 천하에 손을 대려는 그의 의지가 가슴 뻐근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럼 난 납비부로는 가지 않겠소. 밀사를 개천루蓋天樓로 오라고 하시오.”

“알겠습니다.”

육우맹은 순순히 대답했다. 딱히 가겸후가 납비부로 갈 이유는 없었다. 그저 황제 앞에서 한심한 꼴을 하고 있는 게 보기 싫어 급보를 핑계로 불러냈을 뿐이다.

드넓다 못해 거대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창일성 한가운데 세워진 개천루에서 가겸후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성 전체는 물론 궐운평야 끝까지 조망할 수 있는 그 높은 누각에 오르기 무섭게 육우맹이 밀사를 데려왔던 것이다.

“하늘 같으신 대왕의 존안을 뵈오니 이 조 모는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사옵니다. 옥체 평안하시온지요?”

건주에서 온 밀사 조윤曺胤은 가겸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고개를 드시오.”

“황송하옵니다.”

“이번에 건주에서 과인의 뜻을 따라 준 점에 대해 깊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근데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소이까?”

“심려 마옵소서. 벌써 석 달 전부터 은밀히 파양주로 군사들을 넣기 시작하여 지난 오 일, 삼만의 정병이 괴룡산 산적들과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신이 달려왔습니다.”

“이 일은 내 잊지 않겠소. 또한 뒤를 충분히 받쳐 줄 테니 실패하지 말라고, 돌아가거든 잘 전해 주시오.”

“그 역시 심려치 마시옵소서. 마용승이 영욱성에서 나오기만 하면 대륙의 서북방은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일 것이옵니다. 그때 대왕께서 나서시면… 허허허!”

말끝을 흐리며, 조윤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겼다.

“웃을 일만은 아니오. 이 일로 영애를 잃고 상심하고 계실 귀 성주님을 생각하니 내 가슴도 아프오. 부디 내 조의도 함께 전해 주시오.”

“흐흐흐흐…….”

“삼가시오. 무엄하지 않소!”

너무도 방약무인한 조윤의 웃음에 곁에 있던 육우맹이 언성을 높였다.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대왕의 말씀에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뭐가 우습단 말이오?”

“어찌 우리 성주님께서 따님을 그 일에 희생시키겠습니까? 이번에 마용승과 혼인을 맺기로 하고 파양주로 간 건 가짜요!”

“뭐, 가짜?”

“그게 사실인가?”

놀라서 입을 벌리는 육우맹보다, 가겸후가 훨씬 큰 목소리로 물었다.

“대왕께서 놀라실 일이 아니옵니다. 이는 전국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 우리 성주님께서도 파양주의 마용승을 한껏 놀려 줄 속셈으로…….”

“고욱교高旭敎, 이 멍청한 놈!”

“대, 대왕…….”

이어진 가겸후의 노갈에 조윤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서렸다. 고욱교는 바로 자신이 모시는 성주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왕 전하라 하더라도 이는 너무 심한 언사이옵니다. 신 앞에서 그처럼…….”

“닥쳐라! 육 장군, 당장 저자를 끌어내 목을 베시오!”

가겸후는 여전히 언성을 높였고, 그 말을 들은 조윤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가셨다. 비로소 이 엄청난 힘을 가진 패자가 진정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러나 육우맹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가겸후의 평소 성품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명을 곧이곧대로 시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왕께서는 다시 한 번 하명해 주시옵소서. 이 밀사의 목을 베어야 할 이유를 소장에게 단단히 일러 주셔야 봉명奉命하는 데 차질이 없겠나이다!”

역시나 노련하게 가겸후를 유도하는 육우맹이었다. 조윤이 돌아가서 고욱교에게 뭐가 잘못된 건지 단단히 이르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세상의 눈이란 게 있다. 건주에는 마용승이 포섭한 향간鄕間(고정 간첩)도 있을 터, 그들의 입에 의해 벌써 고욱교의 알량한 속임수는 마용승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그 무슨 되지도 않은 술책이란 말이냐? 당장 저 밀사의 목을 베어 고욱교에게 교훈을 내리겠노라!”

“하오나 밀사에게 무슨 죄가 있으오리까? 살려 보내 고욱교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게 진정 왕다운 아량을 베푸시는 게 될 것이옵니다.”

간곡한 육우맹의 주청에 가겸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가겸후 역시 조윤의 목을 베어 봐야 하등 이득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다만 고욱교에게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다 절실히 알려 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자, 밀사는 그만 물러가시오. 이 몸이 대신 그대의 죄를 빌어 줄 터인즉, 돌아가시거든 부디 무융성주께 잘 말씀드리시오!”

이런 게 소위 ‘손발이 맞다’라는 것일 게다. 가겸후가 달리 말이 없었음에도 육우맹은 재빨리 조윤을 물러가게 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조윤이 물러가자마자 육우맹은 목소리를 낮춰 가겸후에게 말했다.

“고욱교, 그놈의 얕은 술책으로 인해 오히려 마용승에게 일어설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어! 이제 대륙의 서북방은 마용승의 손에 떨어지고 말리라!”

“그러니 조속히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대책? 대책이라면 있지. 당장 십만의 군사를 줄 테니 파양주를 쳐라!”

“전하!”

격렬한 가겸후의 말에 육우맹이 표정을 굳힌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군사 십만이면 파양주 정도는 쉽게 떨굴 수 있다. 문제는 십만의 군사를 먹여 살릴 병참이 원활하게 제공되느냐다.

율천국에서 서북쪽의 최전방은 중주와 석주다. 파양주는 거기서도 이천 리나 떨어진 곳이다. 그 사이엔 이쪽에 호의를 가진 곳도 있겠지만 적의를 가진 패주들이 더 많다. 십만의 군사가 동원된다면 병참 부대만도 그 배 이상의 인원이 소요될 게 뻔하다. 애당초 가겸후의 말은 이뤄지지도 않을 일이었다.

“지금 당장 중주와 석주에 알려 건주의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하시오!”

“그렇게 되면 건주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마용승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오.”

다시 육우맹의 어투가 거칠어졌다. 가겸후의 명에 반발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고욱교와 같은 멍청이는 이쪽에서도 필요가 없어! 당장 손 떼고, 우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처럼 하시오!”

육우맹은 가겸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파양주를 치려고 결심한 건 무엇보다 거기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수중에 넣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일을 꾸민 지 벌써 육 개월여, 이제 무르익어 곧 싸움이 시작되려는 판에 가겸후는 손을 떼라고 한다. 그게 진심인지 육우맹은 확인하고 싶었다.

‘하긴 지금은 싸울 시기가 아니다.’

가겸후를 쳐다보던 시선을 떨구며, 육우맹은 속으로 수긍했다. 건주부의 얄팍한 계략이 천하에 폭로된다면, 손가락질받는 건 그들이다. 그 뒤를 봐주는 게 알려지면 율천국의 체면까지 땅에 떨어지고 말리라.

“존명! 즉각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잠깐, 육 장군!”

“뭔가 더 하명하실 일이라도?”

“오늘 당장 황제가 거처할 궁궐 공사를 시작하시오. 저대로 두면 내가 가 있을 곳이 없으니…….”

“궁궐이라니, 당치도 않소이다! 그저 비어 있는 전각 하나만 줘도 감지덕지할 텐데.”

“아니오. 건주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황제와 그가 내린 조서는 더욱 필요하게 됐소. 되도록 화려한 궁궐을 짓도록 하시오. 이참에 아주 황후까지 맞도록 해야겠소.”

“황후까지? 대체 누구를?”

“막내 동생이라면 황제의 나이와 비슷하니 어느 정도 어울릴 거요.”

“막내 공주님을?”

육우맹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내 공주라면 지금 왕으로 있는 가겸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사실 선왕을 몰아낸다는 건 일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줄을 댄 대소 신료는 물론이고, 형제들까지 모두 내치는 걸 의미한다.

그 와중에 가겸후는 그 당시 갓난아이에 불과했던 배다른 여동생 하나만 남기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를 황제에게 시집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야 격렬히 반대하는 육우맹이었지만, 이성적으론 이 역시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황후다. 그 정도 신분의 여성이 아니라면 성사되기 힘들 터였다.

“알겠사옵니다. 당장 중주와 석주에 왕명을 하달하고, 나라 안의 목수들을 불러 모으겠사옵니다!”

일단 수긍을 하자 육우맹의 말투는 신하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고욱교의 통하지 않을 술책으로 인해 서북방 대여섯 개 주는 마용승의 손에 떨어지리라. 그렇게 되면 당장에 자체적으로 손쓸 방도는 없어질 테고. 역시 황제를 업고 움직여야 해.’

육우맹이 물러가자 가겸후는 생각에 잠겼다. 율천국의 국력을 총동원한다면 길어도 일 년 안에 파양주 정도는 병탄倂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겸후가 염려하는 건 그 뒤의 일이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파양주를 치고 있는 사이에 다른 패주나 왕들이 들고일어난다면 손쓸 도리가 없다. 당장 남쪽만 해도 회주를 평정한 강국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그 세력권을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황제는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걸 이용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만 남으리라.’

악다문 어금니와 꽉 쥔 두 주먹에 동시에 힘을 가하며, 가겸후는 개천루를 내려갔다. 천하 평정을 위한 계획의 일 단계가 그의 가슴속에서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2

광운은 기가 막혔다. 적들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벌인 전투가 벌써 이틀째인데도, 본성인 영욱성에선 구원병 한 명 보내 주지 않았다.

이제 이쪽의 전투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신히 뒤를 따르던 보병과 합류는 했지만, 애당초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아군의 이탈자도 눈에 띄게 불어났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걸 알자 낭인들은 미련 없이 떠나 버렸던 것이다.

‘기병 백에, 보병이 삼백여 명.’

이게 지금 남은 아군의 숫자였다.

이럴 때 광운은 한 가지 방법을 선호한다. 바로 유군을 형성해 적의 수뇌부를 치는 것!

적은 본진을, 밭으로 가꾼 야트막한 구릉 위에 두고 있다. 그래도 이 근처에선 가장 높은 곳이니 적장이 누구든 탁월한 선택을 한 셈이다.

‘본대가 오천 정도일까?’

다시 하루가 저물어 가는 석양 속에서 광운은 적들의 숫자를 헤아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적은 근 삼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본대와 선봉에 각기 오천씩 두고, 나머지 이만으로 하여금 아군을 포위하게끔 배치해 두고 있었다.

‘적의 선봉도 틀림없이 잡가군일 텐데.’

이건 어느 군세나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종의 철칙이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는 언제나 잡가군을 앞세운다는 것 말이다.

거기에 아군의 한 가닥 활로가 있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바로 뒤에 포진하고 있는 본대가 어지러워지면, 선봉으로 나선 잡가군도 반드시 혼란에 빠지리라. 충성으로 뭉친 자들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과감한 작전을 시행하자고 하면, 분명 아군의 이탈자도 나온다.’

적의 선봉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잡가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오늘 하루 이탈자가 생기지 않은 건 적들이 포위망을 완성했기 때문이지, 사기가 고무되어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유군을 결성해 적의 본대를 치자고 하면 반드시 투항자가 생길 것이다. 이쪽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진즉에 이탈한 자들보다 더 후한 대우를 받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이건 단독으로 해야 될 일이군.’

오 년 전 평사릉 전투에서도 광운은 강왕 증선회의 목을 혼자서 벤 적이 있었다. 비록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이라고 다시 못 할 이유도 없다.

“무슨 생각 해? 이거 먹어.”

광운의 복잡한 생각을 깬 건 편월이었다. 예의 간편하기 짝이 없는 식량을 내미는 그 어린 눈동자는 선홍색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편월은 이번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우리가 이길 것 같나?”

“응. 우리가 이겨!”

뜬금없는 광운의 질문에 편월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왜 그렇게 자신하지? 적들이 우리보다 전력이 월등히 센데?”

“우리 편엔 광운이 있잖아. 광운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이겨.”

“허허허!”

광운은 그만 실소를 토하고 말았다. 이처럼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이 기분 좋기도 했지만, 그 대상이 편월이고 보면 애잔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그 어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어때, 편월? 놈들이 오늘 밤 야습을 해 올 것 같나?”

“나라면 안 해.”

“왜 그렇지? 우리 편은 낮 동안의 전투로 녹초가 되어 있는데.”

“기습이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나 하는 거라고 광운이 그랬잖아. 특히 야간 기습은 당하는 쪽도 위험하지만, 하는 쪽도 부담이 있다고도 했고. 그래서 안 해!”

어린아이의 사고는 언제나 명쾌하다. 특히 광운의 말이라면 신앙처럼 생각하는 편월인지라 그 대답은 가슴 시원할 정도로 명료했다.

“그런가? 그럼 야습은 우리 쪽에서 해야 되겠군.”

“할 거야?”

“한다고 해도 편월은 같이 갈 수 없어.”

“에이 씨이!”

“말했듯이 야습이란 감행하는 쪽도 어느 정도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돼. 낮에 하는 전투처럼 내가 널 업고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누가 보호해 달랬어? 나도 이젠 혼자서 싸울 수 있어!”

“여기 있었군.”

자신의 기대에 반하는 광운의 답변에 편월이 언성을 높였을 때, 누군가 노을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곽준방이었다.

밥을 먹던 광운은 몸을 일으켜 가벼운 군례를 취했다. 아무리 잡가군이라도 진중에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

“으응?”

광운과 똑같이 군례를 갖추는 편월을 본 곽준방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살벌한 전장에서 보게 된 어린아이의 앙증맞은 행동이 새삼 신선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애가 편월이로군. 자네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들었네.”

지난 이틀간 편월에 대한 소문은 아군 측에 하나의 신화처럼 떠돌았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전쟁에 찌든 사나이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잘 오셨소, 장군. 오늘 밤 이 몸이 단신으로 적의 본대를 쳐서 적장을 베겠소.”

다소 성급하게 광운이 계획을 밝혔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곽준방과 자연스레, 또 단독으로 얘기할 수도 없을 터였다. 야습은 기밀이 생명이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오늘 밤 일을 상의하러 왔네. 적의 본대를 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본성에 전령으로 가 줘야겠네.”

“전령은 이미 보낼 만큼 보냈소. 그래도 아직 본성에서 움직이지 않는 건 우리들을 버리겠다는 뜻이니, 아무 말 마시고 오늘 밤 날 적의 본대로 보내 주시오!”

“성주께서 움직이시지 않는 건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일 걸세. 그러니 아무 말 말고 전령으로 가 주게.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사람은 자네뿐일세.”

광운은 곽준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그 어조가 너무 절박하고 간절했다.

그 점이 광운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전할 말씀은?”

“구구하게 구원병 따위는 청하지 말게. 다만 우리들은 여기서 죽는다는 말만 전해 주게.”

“흐음!”

자신도 모르게 광운은 침음성을 토했다. 곽준방은 마용승이 아끼는 용장이다. 그가 죽음을 결심했다고 하니, 다음에 있을 싸움이 얼마나 처절할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이탈자나 투항자가 속출할 것이오.”

“그 정도는 처음 잡가군을 이끌고 나왔을 때부터 각오했던 바일세. 다만 적들에게 파양주 무장의 기개만 보여 주면 난 만족일세!”

“훌륭하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소. 바로 그게 무장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니까.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날 어떻게 믿고 전령으로 뽑으셨소?”

“난 믿지 않는다네. 자네가 이탈을 하든 투항을 하든 난 무장으로서의 내 고집만 적들에게 보여 주면 그만일세.”

“좋소. 그 일은 이 광운이 틀림없이 이행하겠소. 내게 전령기를 주시오.”

“누구도 모르게 해야 될 일일세. 아군도 속여야 되지. 그러니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은밀히 날 찾아오게.”

그 말을 끝으로 곽준방은 몸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편월을 돌아보며 한마디 던졌다.

“오늘은 자네만이 광운의 지원군일세. 잘 도와주게.”

“예?”

편월은 어리둥절해졌다.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전투에 참가했었지만, 여태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지휘관은 없었다. 어둑해진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가는 곽준방의 뒷등을 망연히 쳐다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잘 부탁한다, 편월! 우선 배부터 든든히 채워 둬라.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 것이다.”

“응!”

편월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린 가슴에도 뿌듯한 성취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바빴다.

* * *

건주의 전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삼만의 정병을 이끌고 나온 대장군은 고욱권高旭權이었다. 바로 무융성주 고욱교의 친동생으로 그 역시 무장으로서는 이름 높은 자였다.

그런데 그 고욱권이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지난 이틀간의 전투 때문이었다.

물론 전투는 고욱권이 이끄는 건주군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일 새벽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하면 대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파양주군은 분명 괴멸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영욱성에서 지원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이번 군사행동의 목적은 마용승을 끌어내는 데 있었다. 그를 끌어낸 뒤에 미리 준비된 유군으로 하여금 본성인 영욱성을 친다는 계획이었다. 소위 양동작전이란 얘기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마용승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들에 나타난 호랑이는 무섭지 않지만, 풀숲에 도사리고 있는 늑대는 무서운 법. 고욱권이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체 마용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건주의 주력인 자신들을 몇 안 되는 잡가군으로 여기에 묶어 두고, 정작 마용승 자신은 건주로 곧장 쳐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을 일거에 섬멸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각에도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는 마용승의 본거지인 파양주니까 말이다.

적이 누구든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는 고욱권이었다. 삼만에 달하는 병사들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운용하기에 따라선 십만의 적병이 몰려와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보이지 않는 데야 고욱권의 지략도 용맹도 발휘해 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곧장 영욱성까지 치고 들어갈까?’

이런 생각도 해 보는 고욱권이었다.

물론 그 경우의 승산이란 만에 하나도 없다. 영욱성은 성민들이 거주하는 바깥 성 둘레만 해도 근 백여 리에 육박하는, 이 대륙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다. 열 배의 병력으로 공격해도 낙성落成시키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모될 터였다.

‘그런데 형님은 왜 다음 지시를 내려 주시지 않는 걸까?’

이 점도 고욱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곳의 상황이야 벌써 서너 차례 건주에 있는 고욱교에게 알려 두었다. 지금쯤이면 마용승이 움직이지 않는 걸 알았을 테니, 다음 행동에 대한 지시를 내려 줘야만 했다.

‘다시 한 번 전령을 보내야겠군.’이라고 고욱권이 생각했을 때였다.

“야습이다. 적의 기습이다!”

불침번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절박하게 소리친 건 아니었다. 적들이 야습을 감행해 왔다고 해도 앞에 있는 선봉에게 가한 것이지, 여기 본대는 아닐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고욱권은 나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 유효적절하게 수하들을 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 고욱권은 한숨을 짓고 말았다. 선봉대에 가하고 있는 야습이라고 해 봐야 고작 야전용 천막 몇 개가 불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이건 공격이라기보다는 낮에 전투에서 패퇴한 적들이 약이 올라 한번 건드려 본 것에 불과하다.

“선봉대에 명해 적당히 쳐서 돌려보내라고 해라. 추적은 안 된다. 내일 새벽이면 일거에 짓밟아 버릴 테니, 괜한 야간 행동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존명!”

복명 소리도 우렁차게, 전령 중 한 명이 횃불을 든 채 선봉대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거기까지 해 두고 고욱권은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적을 추적하지 말라고 해 뒀으니, 만에 하나 어둠 속에서 아군끼리 싸울 우려도 없다. 내일 새벽을 위해서라도 좀 자 둬야만 한다.

곽준방이 거짓 야습을 감행했을 때, 광운과 편월은 말 재갈과 발굽에 천을 감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린 편월도 익숙한 탓인지 그 일을 제법 당차게 해내고 있었다. 키가 작아 말 재갈엔 손을 대지 못했지만, 발굽에 천을 감는 솜씨는 꽤 노련해 보였다.

그 일을 마친 뒤 광운은 적의 선봉대로 눈길을 보냈다. 불화살 몇 대를 쏘는 게 고작이었지만, 바야흐로 야습은 절정에 이르렀다.

“가자!”

거기까지 확인한 광운은 다시 편월을 자루에 담아 등에 업었다.

“화살은 충분해?”

“응.”

“배도 든든히 채웠지?”

“응.”

“그럼 간다!”

“응.”

무슨 말을 해도 짧게 대답하는 편월이, 광운은 우스웠다. 싸움은 몇 번 해 봤다지만, 이런 야간 적중 돌파는 처음인 그가 긴장해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처음 싸움터에 데려갔을 때에도 편월은 이랬다.

‘네 살 때였지.’

앙다문 입매와 잔뜩 힘이 들어간 눈을 했지만, 편월은 애처로울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땐 적을 향해 활을 쏘지도 못했다. 활 자체를 다룰 줄 몰랐다는 게 아니라 겁에 질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랬는데 지난 이틀간의 전투에서 편월은 벌써 열 명 이상의 적을 거꾸러뜨렸다. 발전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살인에 무감각해져 간다고 보면 그것도 슬픈 일임에는 틀림없다.

‘견뎌 내라. 어차피 시대가 이처럼 미쳐 돌아가고 있으니 바른 정신으론 살기가 어렵다.’

속으로 기원을 하며, 광운은 말을 몰았다. 세 필 모두 끌고 가는 것이었다. 번거롭긴 하지만, 나머지 두 필이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른다.

말들은 소리 없이 달렸다. 천을 묶어 둔 발굽 덕분이기도 했지만, 광운의 기마술이 워낙 출중했다. 바로 지척까지 접근하기 전에는 적의 불침번도 눈치 채지 못하리라.

그래도 광운은 최대한 불빛을 피해 달렸다. 귀로 들리지는 않아도, 야간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조심에 조심을 더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적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간다는 건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말까지 타고 있으니 들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누구냐? 건창建昌!”

적의 불침번이 화톳불가에서 날카롭게 수하를 해 왔다. 오늘 밤 적들의 음어인 것 같았다.

그건 광운이나 불침번 둘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이 발견한 놈을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쉬잇!

광운의 독특한 병기가 그대로 불침번의 목젖을 통과하는가 싶더니 다시 빠져나왔다. 창보다 훨씬 가늘고 뾰족한 그 끝에 묻은 피가 화톳불에 번쩍이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탈주병이다. 막아라!”

“아니, 적이다. 적의 전령이다!”

깨어 있는 자들은 삽시간에 혼란에 사로잡혔다. 아직 광운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건 광운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적들이 혼란에 휩싸여 있을수록 자신에 대한 추적이 늦춰질 테니 말이다.

“탈주병이든 적의 전령이든 상관없다. 쏴라! 죽여라!”

아마도 야간 지휘장령指揮將領이리라. 마구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 말을 들은 광운은 웃었다. 여기는 적진의 한복판이다. 자신을 향해 쏜 화살은 고스란히 적들에게 날아갈 터, 쉽게 쏘지는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섰다.

과연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몇 발의 화살이 빗나가자 적들도 활은 포기하고 말을 타고 추적을 시작했다. 앞에 있는 자들이 광운을 막아선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적들은 광운을 막을 수 없었다. 깨어 있는 자라고 해 봐야 몇 명 안 되는 불침번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자다가 뛰어나온 터라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풀을 베듯 찍어 넘기며 달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식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추적을 어떻게 따돌리느냐의 문제였다.

“부탁한다, 편월!”

“응.”

뒤에서 추적하는 자들은 편월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 살인을 시키는 것 같아 께름칙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장에서든 아니든 한 번 사람을 죽여 보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 주체가 다섯 살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기에, 편월은 좀 더 살인에 길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나 쫓아오나?”

“대략 오백 정도!”

“거리는?”

“일 리!”

그 답을 듣고서야 광운은 어느 정도 안심했다. 적의 추적대와 거리가 일 리라면, 어쩌면 별다른 충돌 없이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속도와의 싸움이다.

“가자, 질풍! 뭐 빠지게 달려 봐!”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질풍은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3

광운의 예상대로 추적을 따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당초 포위망을 정면으로 돌파한 게 적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고, 거기에 더해 질풍을 비롯한 세 필의 말들이 워낙 준마였다.

물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여기가 파양주이기에 다른 곳에서 온 군사들로선 처음부터 긴 추격전은 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영욱성의 남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곡식을 실은 엄청난 짐바리들이 그 앞을 가득 메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다른 문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 봤지만, 영욱성은 둘레만도 백 리가 훌쩍 넘는다. 그만큼 시간이 걸릴 테니 우선 수문 병사들에게 사정부터 해 보기로 작정했다.

“전령이오! 전장에서의 급보요!”

광운은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전령기를 휘둘렀다.

“기다려라! 성주님의 명으로 우선 이 식량들부터 들여야 한다!”

문을 지키는 군사들 중 장수로 보이는 자가 성루에서 오히려 광운보다 더 큰 고함으로 대꾸했다.

“성주에게 전해 주시오. 정체불명의 적들 약 삼만이 이 파양주로 쳐들어왔소이다.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냥 밀고 들어가!”

실랑이를 벌이는 광운에게 편월이 한마디 했다. 어린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인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분의 용무가 더 급하신 것 같소. 우리는 좀 더 기다려도 되니, 전령부터 먼저 입성시키는 게 좋겠소.”

누군가 짐바리 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내며 수문 장수에게 말을 건넸다. 오십 줄에 접어든 것 같은, 한눈에도 상인임을 알아보게 하는 인물이었다.

“자, 모두 우마차를 조금씩 옆으로 밀도록 해라. 급한 전령께 길을 터 드려!”

상인은 장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인부들에게 명을 내렸다.

“고맙소. 이 몸의 이름은 광운! 오늘의 신세는 잊지 않겠소.”

“소인은 송용조宋龍操라는 미천한 상인이오. 기억해 주시기 바라오!”

“용무가 급해서 이만 실례!”

상인치고는 태도나 말투가 너무 당당한 송용조란 자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광운은 그대로 좁게 터진 길을 달려 안으로 들어갔다.

“앗, 섰거라! 우선 네놈의 정체를 밝혀…….”

“잡가군 소속이오. 이름은 이미 밝혔소이다!”

자신을 막으려는 병사들은 전혀 상대하지 않고 광운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흐음, 재미있는 사람이로군. 물건이 될 거 같아.”

성안으로 질주하는 광운의 뒷모습을 보며, 송용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소개한 것처럼 송용조는 상인이다. 그것도 파양주에서 나는 쇠와 금에 대한 독점 거래권을 마용승으로부터 획득한 거상이었다.

송용조의 장사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듯 잘 풀려 나갔다. 전국난세에 질 좋은 쇠와 금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는 물건이었다. 전자는 좋은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후자는 군비의 비축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다 판 쇠와 금으로 송용조는 파양주에서 부족한 식량을 비롯한 여타 물건들을 싼값으로 사들이곤 했다. 당연히 물건, 특히 기화奇貨를 보는 눈이 밝았고, 사람 중에서도 기화의 재목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 눈에 광운이 뜨였다.

게다가 송용조는 마용승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간인이기도 했다.

상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각 나라나 패주의 상황을 파악해서 이렇게 돌아올 때마다 보고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군.’

다시 짐바리들을 지휘하는 송용조의 뇌리엔 아직도 광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흥청거렸지만, 광운은 말의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그대로 곧장 마용승 일족이 살고 있는 내성의 정문까지 치달렸다.

“전령이오! 전장에서의 급보요!”

미리부터 광운은 전령기를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도 틀림없이 수하를 하느라고 시간을 잡아먹을 게 뻔해서였다.

이래서 잡가군은 전령의 일을 잘 맡으려 하지 않는다.

역시 이번에도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창을 쭉 내밀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길을 열어 줘라. 저건 바로 곽 장군의 전령기다. 길을 열어라!”

내성의 수문 장수는 외성인 남문 수문 장수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것 같았다.

깃발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을 내려 광운이 그대로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본성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운을 맞은 건 하마비下馬碑였다. 그러나 광운은 그걸 무시하고 곧바로 지나쳤다. 전장의 급보를 알리는 데 있어서 저런 하마비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말은 그대로 마용승의 거처이자 집무처인 적금각積金閣까지 곧장 달려가서야 멈췄다.

“전령이오!”

이번에 소리친 건 광운이 아니었다.

적금각을 지키던 병사 중 한 명이 안에 대고 지른 것이었다. 물론 마용승에게 미리 전령이 도착했음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그 덕에 광운은 곧바로 적금각 안으로 안내되었다.

“전령은 전달 사항을 곧바로 보고하라!”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말소리에 광운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색 전포를 입은 오십 대 초반의 사내였다.

‘마용승은 아니군.’

광운은 마용승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며칠 전에 혼인을 하려던 사람이었다면 저보다는 젊을 게 틀림없다.

“보고는 성주께만 드리라는 곽 장군의 분부였소!”

“성주는 바쁘셔서 지금 당장 여기에 오실 수 없다. 내가 대신 듣고 틀림없이 전달하겠다.”

“그렇게는 못 하겠소. 반드시 성주께만 보고드리겠소!”

“어허, 나는 수령대장군守領大將軍 호윤천胡閏天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는가?”

수령대장군이라면 파양주의 전 군사를 다스리는 막중한 자리였다.

스스로 직책과 이름을 밝힌 호윤천의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담겨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운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곽준방은 분명 죽을 결심을 밝혔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걸 마용승에게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허, 그래도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성주에게 안내해 주시오!”

“보아하니 잡가군의 이름 없는 졸개인 것 같은데, 네가 그러고도 살아남길 바라느냐?”

“내가 죽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전장이오! 다른 곳에서 내 목숨을 노리다가는 각오를 해야 할 거요. 그게 누구든!”

“허어…….”

호윤천은 기가 막혔다. 정규군이든 잡가군이든 지금껏 이처럼 방자한 병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보지 못했다.

“안 되겠다. 이 무엄한 놈을 당장 투옥하고, 명을 기다려라!”

호윤천은 주변에 시립해 있는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노기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장군, 잠시 그 명을 거둬 주십시오!”

호윤천의 명을 제지하고 나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광운이 남문 밖에서 봤었던 송용조였다. 그 역시 서둘러 달려왔는지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소생이 성주께 말씀을 드려 지금 여기로 오시는 중입니다. 무엄한 병사에 대한 처벌은 그 후에 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뭣이? 성주께서 오신다고?”

“예. 소생이 오늘 반입한 식량에 대한 점검은 그리 급하지 않지만, 이 파양주가 다른 곳의 침입을 받았다면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침입을 받다니? 사흘 전에 출발한 잡가군은 괴룡산의 산적들을 토벌하러 간 거요! 그런데 침입이라니?”

“그러니 성주님이 오시길 기다려 전령의 말을 자세히 듣는 게 어떻겠습니까?”

흥분한 호윤천에 비해 송용조는 지극히 침착했다. 냉정한 계산이 전제되어야 하는 상인 특유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알겠소. 송 대인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겠지.”

여전히 노기 띤 어조였지만, 호윤천으로선 송용조에게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성주인 마용승의 신뢰와 총애가 얼마나 큰지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성주님 듭시오!”

약간은 어색해진 적금각 안의 분위기를 깬 것은 마용승의 등장을 알리는 부하 장수의 외침이었다.

동시에 광운과 편월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공손한 자세를 갖췄다.

아직 왕이라고는 칭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에게 마용승은 이미 일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대로 좋다. 전령은 어서 보고부터 하도록!”

군례를 갖추려는 광운에게 마용승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늘 바빴기에 시간을 절약하려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자연스레 광운의 어조도 빠르고 간결해졌다.

“정체불명의 군세 삼만, 괴룡산의 산적들과 결탁해 이 파양주를 공격하는 중입니다!”

“확실한가?”

“이 눈으로 분명히 확인한 점입니다.”

“곽 장군의 전갈은?”

“‘구원군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죽는다.’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구원병을 보내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얘기로군.”

입가에 미소까지 떠올리며 마용승은 농담조로 말했다. 곽준방이나 잡가군의 희생 따위는 전혀 애석해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고로 전쟁은…….”

“무엄하다! 하문하실 때만 대답하도록!”

“괜찮소, 호 장군. 전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할 말도 있을 것이오. 들어 봅시다.”

호윤천의 호통을 눌러 버린 마용승은 광운에게 어서 얘기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자고로 전쟁은 쳐들어가서 적의 땅에서 싸우는 거라 들었습니다. 내 땅에서 싸운다면 이겨도 그 상처가 남기 때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곽 장군이나 이번에 참가한 잡가군은 어떻게 되더라도 반드시 파양주로 쳐들어온 자들을 격퇴하고, 그들이 어디의 군세인지 알아내어 정벌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광운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지라 어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아시면서 곽 장군과 잡가군 낭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시오?”

마용승을 대신한 호윤천의 대답에 광운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른 모든 걸 배제하더라도 곽준방만은 결코 죽여선 안 된다. 이게 바로 지난 며칠간 함께 전장을 뒹군 그에 대한 느낌이었다.

“곽 장군은 내 명령이 없다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삼만이나 되는 대군입니다. 곽 장군에 대한 성주님의 신뢰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코 저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광운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신뢰한다면서 도와주려는 기색이 없는 마용승 때문이었다.

“그보다 자넨 처음 보는군. 복장으로 봐서 잡가군인 건 알겠는데, 이름이 뭔가?”

“광운!”

“저 꼬마도 잡가군 소속인가?”

“편월이라고, 전장에서 내가 유일하게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입니다.”

“허허허!”

마용승은 웃었다. 그렇다고 비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신기하기도, 대견하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뿐, 마용승은 편월에겐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송용조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송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소생의 생각으로는 파양주에 들어와 있는 군사들은 건주군일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병사들을 동원하여 건주를 쳐야 한다고 봅니다. 건주를 병탄하고 나서, 거기에서 율천국의 군사를 막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뭐요?”

“예, 약 여섯 달 전부터 건주에선 뻔질나게 율천국에 밀사를 보냈습니다. 이는 이번 건주의 군사행동에 대해 율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그 증거로 건주에선 성주님의 혼인을 급작스레 진행시켰고, 또 가짜 딸을 내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이번에 시집을 오다 죽은 여자가 가짜인 건 확실하오?”

자기 부인이 될 뻔한 사람이 가짜일 수도 있었다는 말을 마용승은 담담하게 들어 넘겼다. 미리 보고를 받은 게 분명했다.

“틀림없습니다. 그 증거로 신부의 행렬이 출발하기 하루 전에 그보다 훨씬 화려한 행렬이 무융성을 떠났습니다. 분명히 고욱교의 딸이 움직인 것이고, 그 행렬은 율천국으로 향했습니다.”

마용승과 송용조의 대화를 듣고 있는 광운은 일견 기가 막혔다.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다!’

그제야 광운은 송용조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떤 일 하나를 보고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그 탁월한 능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주 무융성을 먼저 공격해야겠는데 어떤 작전을 세우겠소, 호 장군?”

마용승은 벌써 송용조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호윤천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지금부터는 군사작전이다. 잡가군의 낭인은 물러가라!”

“아니! 잠깐만, 호 장군! 비록 잡가군이라지만 목숨을 걸고 포위망을 벗어나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 온 사람입니다. 그냥 머물러 있게 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낭인은 물러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호윤천에게 송용조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로선 광운을 좀 더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광운은 지금이 바로 물러갈 때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은 낭인이다. 너무 많은 군사기밀을 알게 되면 뒤에 생길지도 모를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감시가 따라붙거나, 아니면 아예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집요한 유혹을 할 것이란 말이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곽 장군의 일은 유념해 주시길!”

가볍게 군례를 취한 광운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역시 앙증맞은 군례를 해 보인 편월이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돌아가야지.”

적금각을 나오자마자 묻는 편월에게 광운은 가볍게 대꾸했다.

“죽영에겐 안 들러 볼 거야?”

“왜? 보고 싶어?”

“보고 싶다기보다는 배도 고프고… 하여튼 들렀다 가자. 응?”

“보고 싶은 거야, 배가 고픈 거야? 어느 쪽이든 솔직히 말하면 들렀다 가지.”

“싫어. 말 안 해!”

“그럼 이대로 싸움터로 가야겠군.”

“광운이 그랬잖아.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지 말라고.”

“뭐?”

광운은 기가 막혔다.

편월을 위해 해 줬던 자신의 말이 이처럼 멋진 비수가 되어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좋아. 그럼 잠깐 들러서 요기만 하고 곧장 출발하는 거다?”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세 필의 말을 끌고 내성 정문을 걸어서 빠져나왔다. 전령의 용무가 끝났으니, 성주가 기거하는 곳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는 없어서였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내내 말이 없었다. 너무 피로한 탓이었다. 도중에 혹 매복이 있을까 염려하여 세 시진이면 도착할 길을 여섯 시진이 넘도록 돌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긴장감의 이완도 빼놓을 수 없었다.

적을 맞거나 떨어진 명을 수행할 때는 팽팽하게 당겨졌던 근육들도, 그게 끝나는 순간 마치 늙은이처럼 축 늘어져 버린다.

벌써 노쇠를 의식할 나이는 아니지만 여태 전장에서만 살아온 육신은 기회만 닿으면 누적된 피로를 호소하곤 했다.

우두두둑-!

돌연 편월이 앞서 말을 달려 나갔다. 벌써 죽영루가 있는 골목에 들어섰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광운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배가 고프다는 편월의 말은 분명 거짓말이다. 예전 전장에선 사흘을 굶고도 결코 배고픔을 호소하지 않았었다.

지금 편월은 분명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이번 싸움에서 자신이 어떻게 싸웠으며, 몇 명을 죽였는지도 죽영에게 자랑하고 싶은 게 뻔하다.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은 으레 그날 세웠던 자기의 공훈을 자랑하기 마련이고,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편월도 자연스레 거기에 따르려는 것이리라. 그 치기가 광운을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건 그대로 전국난세가 갖는 또 하나의 슬픔이다.

모름지기 아이들은 싸움이나 살인이 아닌 다른 것들을 그 부모에게 자랑해야 한다. 예를 들면 글자를 익혔다든가 심부름을 잘했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보다 철저하게 편월에게 이 전국난세의 생리를 가르치리라 광운은 다시금 결심했다.

이 미친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본성조차 광기로 물들여야 하니까 말이다.

죽영루 앞에서 내린 편월에게 죽영이 빠르게 달려 나와 안으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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