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풍경戰國風景 2
1
양원 땅에서 평사릉 전투가 있었던 그해 겨울엔 유난히 많은 눈이 천하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처럼 많은 눈은 오 년간 내리 쏟아졌다.
* * *
여기는 파양破陽 땅 영욱성永旭城.
천하에는 여전히 먹고 먹히는 살벌한 싸움의 서슬 퍼런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이곳만은 예외인 듯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비단 사람의 표정만이 아니었다. 길가에 들어선 상가마다 화려한 꽃등이 걸렸고, 더러 서 있는 탑이나 불상들도 화려한 비단으로 꾸며져 영글어 가는 가을 햇살 속에 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야기해 주는 건 단 하나였다. 바로 혼인이었다.
실제로 내일이 대륙의 서북방에 위치한 파양주를 지배하는, 영욱성주 귀도鬼刀 마용승馬龍乘의 혼례 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흥청거리고 있는 영욱성으로, 광운은 들어섰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애마인 질풍을 타고, 병장기를 실은 또 다른 말 한 필을 끌고 있는 모습은 오 년 전 평사릉 전장을 누비던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사람 한 명과 또 다른 두 필의 말이 광운과 동행하고 있었다.
광운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은 아이였다.
얼굴만 보면 이제 갓 젖을 뗀 것처럼 아주 앳되어 보였지만, 발육이 남달리 좋은지 신체는 벌써 예닐곱 살 먹은 것처럼 튼실했다.
그 아이가 타고 있는 말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질풍에 버금가는 명마 두 마리, 정말이지 보기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아무리 발육이 좋다고 해도 저런 꼬마가 말을 탄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희한한 기마술을 가지고 있었다. 안장도 재갈도 없이, 그대로 말 등에 올라앉아 갈기를 쥔 것만으로 말을 조정했다.
그 뒤를, 아이가 탄 것보다 조금 작은 말이 따라왔다. 거기엔 광운의 것처럼 각종 병장기가 실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도 아이의 손에 딱 맞춘 듯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었다.
“여기가 대륙의 서북방을 지배하는 영욱성이다, 편월!”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운은 마치 자기 집을 소개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말했다.
그랬다. 바로 이 아이가 오 년 전 평사릉 전투 이후 광운과 기이한 인연을 맺은 편월이었다.
“여긴 좋은 곳이야?”
천진한 목소리로 물으며,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운이 묘하게 흥분하고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좋아하고 있잖아. 미친 구름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는 편월을 보는 광운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속마음을 들킨 놀라움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표시가 나나?”
“응!”
편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편월! 넌 그게 문제라고 내가 얼마나 얘기했나? 곧이곧대로 속마음을 그렇게 털어놓는 게 아냐. 그러다간 네 목이 어디에 떨어져 뒹구는지 한참 찾아야만 될걸.”
“난 거짓말하기 싫어! 거짓말은 나빠!”
“그러나 거짓말을 해야 될 때도 있다. 이런 시대를 살려면 거짓말도 누구보다 능숙하게 할 줄 알아야 해.”
이해를 하는지 어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광운은 편월에게 시대의 엄격함을 이야기해 줬다.
지금만이 아니었다. 편월이 말을 배우고, 남의 말귀를 알아들을 만했을 때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 줬던 얘기였다.
“그럼 광운도 거짓말을 해 봤나?”
광운은 갑자기 말문이 콱 막혔다. 거짓말을 해 봤다고 하면 편월이 자신을 나쁘게 볼 것이고, 안 했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거짓말이 되고 만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했지.”
“피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지금까지 편월은 몇 번이나 전투에 참가했지?”
갑자기 광운은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고 거짓말에 관한 얘기 자체를 돌리려는 건 아니었다.
“두 번!”
편월이 앙증맞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그때마다 아군들 중에서 죽은 자와 산 자들을 기억하나?”
“응!”
“누가 죽고 누가 살았지?”
“음…….”
광운의 질문에 편월은 조그만 입술을 꽉 다문 채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염진廉鎭과 홍과옥洪果玉은 살았고, 죽은 사람은 황규黃圭, 설인薛仁…….”
“그들 중에서 편월은 누구를 좋아했지?”
“황규와 설인!”
“왜?”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왜 좋았지?”
“거짓말을 안 했어. 내게도 잘해 줬고.”
“그 점을 명심해라, 편월! 네게 잘해 주고, 거짓말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남을 속이고, 네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았고.”
광운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이해가 부족할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작은 가슴에도 잔잔한 파문을 던져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아직 광운은 대답을 안 했어.”
“내가 뭘?”
“아까 여기가 좋으냐고 내가 물었잖아!”
“흐흐흐…….”
얼굴까지 약간 상기시키며 언성을 높이는 편월에게, 광운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여기가 그렇게 좋아?”
“가 보면 알아. 흐흐흐…….”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광운은 재빨리 말을 몰았다.
광운이 편월을 이끌고 간 곳은 영욱성의 대로에서 벗어난, 상가商街로 지정된 곳에 있는 허름한 기루였다.
“에계, 여자에게 온 거야?”
“글쎄 기다려 보래도.”
하얗게 눈을 흘기고 있는 편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광운은 곧바로 후원으로 나갔다.
“손님, 여기는 예약하신 분들만 오는 곳입니다.”
점소이가 재빨리 따라와 광운을 제지했다.
“괜찮아. 죽영竹影에게 광운이 왔다고 해. 그리고 말을 좀 잘 보살펴 주고, 거기 실린 물건들도 내게 가져다주게.”
“광운…….”
점소이가 멍하니 그 이름을 되뇌고 있을 때, 광운은 편월을 데리고 후원에 있는 방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죽영이 누구야?”
방에 들어서자마자 편월이 물었다. 세상 모든 게 궁금하다는 듯 유난히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이번에 광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미소만이 입가에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던 편월은 이내 다른 물건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름 아닌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였다.
“이게 엄마 거라고?”
“응.”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모른다고 했잖아.”
“봤다며?”
“죽어 있었어.”
이 문답은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건지 모른다. 그때마다 편월의 검은 동공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깃들곤 했다.
그럴 때면 광운도 할 말이 없었다. 기실 그 자신도 아주 어릴 때 전화戰禍로 부모를 잃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다. 편월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손님, 다른 곳으로 모시라는 주인의 분부십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 주는 점소이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광운은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편월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오래 지켜본다는 건 어떤 경우든 고역이었다.
“그래? 자, 가 보자. 죽영이 얼마나 좋은 곳으로 안내할지.”
“응.”
벌써 목걸이를 다시 집어넣은 편월의 눈동자에선 조금 전의 쓸쓸함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점소이가 안내해 간 곳은 주루의 맨 꼭대기 방이었다. 그래 봐야 고작 삼층이었지만, 내부는 후원의 방보다 훨씬 화려했다.
“장사가 잘되나 보군.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게 벌써 육 년이 넘었다는 걸 기억하시나요?”
들어서자마자 감탄사를 발하는 광운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운과 편월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어!”
문득 편월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토해졌다.
지금까지 광운이 기루의 기녀를 찾는 건 수차례 봐 왔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같은 여인은 결코 없었다.
나이는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것 같았다.
수수한 화장과 몸단장이 기녀라기보다는 여염집 아낙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예쁘다.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는 건 아니지만, 볼수록 그 매력에 빠져 결코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물론 편월이 그녀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인 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생각했었던, 엄마라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에 실려 오셨나요? 미친 구름이라 이 대 그림자[竹影]가 그리워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고.”
조금은 늘어지는 듯한 음색으로 말하며, 죽영은 방 가운데 있는 탁자에 앉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예요? 귀엽게 생겼네.”
“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죽영의 손길을, 편월은 거칠게 떨쳐 버렸다.
그러고는 당황한 눈초리로 광운을 흘낏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거칠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왜? 죽영이 싫어?”
죽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광운이 편월에게 물었다.
편월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자기 자신도 왜 그렇게 거친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 와요. 이름이 뭐지?”
한차례 세찬 거부를 당했음에도 죽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편월을 불렀다.
편월은 잠깐 망설였다. 당황스러운지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연방 광운의 눈치만 살폈다.
‘후후후.’
고개를 끄덕이며 광운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오랜만에 어린애다운 편월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제야 편월은 쭈뼛거리며 죽영에게 다가갔다.
“아휴, 귀여워!”
“당분간 여기 머물까 하는데, 그동안 저 아이의 엄마가 돼 주면 안 되겠소?”
편월을 안아 무릎에 앉혀 연방 머리를 쓰다듬는 죽영에게 광운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흥!”
“흥? 흥이라는 건 거절하겠다는 건가?”
“낳기는 다른 배를 빌려 낳고, 이젠 나더러 키우라는 건가요?”
“하하하! 그 애는 내 아들이 아니오.”
“아니라고? 흥,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 아냐!”
또 한 번의 콧방귀로 광운의 말을 부정하려는 죽영에게 편월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느새 앉아 있던 무릎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적의에 찬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내게 사과하는 게 좋을 거요, 죽영. 저 아이 화나면 무서우니까.”
그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광운은 연방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흥! 사과는 무슨, 내가 못할 말을 했나요?”
“광운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했어. 사과해!”
“뭐?”
너무도 격렬한 편월의 말에 죽영의 미간도 살짝 찌푸려졌다.
‘뭐 이런 아이가 다 있지?’
지금 죽영의 가슴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편월의 눈동자에 서린 지독한 살기 탓이었다. 광운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덤벼들 것만 같은 위기감이 자욱하게 느껴졌다.
“하하하! 그만 해라, 편월! 그녀는 내게 농담을 한 것이다.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 남자와 여자가 친구?”
광운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눈 속에 깃든 살기만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편월은 남자와 여자가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나?”
“응. 친구는 전장에만 있어.”
이어진 광운의 질문에 편월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가슴을 쑥 내밀고 어깨에도 힘을 넣어 으쓱거리는 게, 전장에서 함께 뒹구는 사나이들만이 친구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잘 들어 둬라. 전장엔 친구가 없다! 친구랍시고 믿고 등 뒤를 맡겼다간 죽어 나가기 십상이다. 전장에선 오직 타고 있는 말과 내 손에 쥔 병기만이 날 지켜 주는 친구다! 알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애한테!”
탁!
광운의 말이 지나치다 싶었는지, 죽영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한 대 때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정작 그 얘기를 들은 편월의 표정은 심각했다.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모르겠지. 하지만 차차 알게 될 거다.”
“당신 대체 아이에게 뭘 가르치는 거예요? 혼자 전장을 뒹구는 것도 모자라,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까지 그 바닥으로 끌어들이려는 거예요?”
“저 아이는 이미 그 바닥에 발을 적셨소.”
“네? 어쩜 그럴 수가…….”
죽영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만 보면 네댓 살, 덩치가 크다는 걸 감안해서 많이 봐 줘야 일고여덟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편월이 벌써부터 전쟁을 안다니…….
죽영은 내심 한숨을 머금었다. 대체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저 어린 나이에 전장을 전전하게 되었을까 싶어서였다.
“주안상을 봐 왔습니다.”
그때 마침 밖에서 점소이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편월에 대한 죽영의 생각은 어디까지 비약되었을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들어오너라.”
죽영의 말에 따라 점소이들이 술과 안주 그리고 광운과 편월의 말에 실려 있던 각종 병기들을 챙긴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자, 한잔 드세요.”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술병을 들어 죽영은 광운의 잔을 채웠다. 또한 그녀 자신의 잔도 채웠다.
“오랜만이군. 자, 듭시다.”
광운의 말에 따라 죽영은 홀짝 잔을 비웠다. 술은 광운이 좋아하는 죽엽청竹葉靑, 여자가 마시기엔 다소 독한 술인지라 목구멍이 찌릿하니 아렸다.
그래도 죽영은 좋았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기루에 팔려 와 처음으로 맞은 손님이 광운이었다.
그 후로 벌써 십오 년이었다. 이제 그녀 자신이 이 기루의 주인이 된 사이에, 광운은 난세의 바람을 따라 훌쩍 떠났다가 다시 이지러지는 계절풍에 밀려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죽영은 가슴이 아렸다.
광운이 떠날 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서러웠고, 이처럼 곁에 앉아 있으면 언제 떠날까 싶어 마음이 졸아들었다. 그 아픔에 비하면 죽엽청이 주는 자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소? 당분간 저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해 줄 수 있겠소?”
“내게 맡기고 또 전장으로 가시려고요?”
“아니. 얘기했다시피 당분간은 이 영욱성에 머물 거요.”
“아-!”
자신도 모르게 죽영은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당분간 머물겠다는 광운의 말이 가져다준 반응이었다.
“당신 집에 좀 머물게 해 주시오. 돈은 얼마 줄 수 없지만, 대신 허드렛일은 하겠소.”
“누가 돈을 내랬어요!”
죽영은 빼액 고함을 질렀다. 지르고 나니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져 얼른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차라리, 차라리 이젠 전쟁 따위는 잊고 여기서 살아요. 저 아이가 자라는 걸 함께 지켜보면서.”
“그건 어렵소. 난 이름 그대로 미친 구름! 전쟁이 없으면 이 광기를 발산시키지 못해 스스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오.”
“그러시겠죠. 그렇게 전장 어딘가에 당신은 그 시신을 눕히겠지요. 알아요. 알면서도… 흑!”
기어이 죽영은 흐느낌을 토하고 말았다. 왜일까?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는데, 유독 오늘따라 이처럼 심한 감상에 젖어 드는 건 대체 왜일까?
광운은 떨리고 있는 죽영의 어깨에 손을 얹어 살며시 끌어당겼다.
“미안하오. 하지만 가슴속의 이 광기가 잠드는 날, 난 반드시 죽영 당신에게 돌아오겠소.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밀려다녀도, 결국 내가 돌아올 곳은 당신뿐이오.”
광운은 가슴에 기대 울고 있는 죽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안 돼요. 편월이 보고…….”
“저 아이 걱정은 하지 마시오.”
죽영의 걱정을 일축하며, 광운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저절로 감기려는 눈을 죽영은 애써 부릅떴다. 편월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광운의 말대로였다. 편월은 두 사람에겐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했다. 장정보다 몇 배는 왕성한 식욕이었다.
그제야 죽영은 눈을 감으며, 두 팔을 광운의 목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끌어 당겼다.
와두두둑-!
“급전急傳이다! 길을 비켜라!”
저 멀리서 말굽 소리와 호통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세 사람에겐 어떤 의미로도 인식되지 않았다. 둘은 아픔만큼 달콤한 사랑에 취해, 편월은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지 모를 맛난 음식에 취해…….
2
편월을 데리고 이렇게 시가지를 거니는 게 광운은 즐거웠다. 딱히 여기 영욱성만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의 전투가 끝나고 틈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시간을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제 하루는 죽영이 운영하는 기루`─`나중에 알아보니 상호가 죽영루竹影樓였다`─`에서 자고,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편월을 데리고 나선 길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 땅의 주인인 마용승의 혼례 날이다. 상가 전체가 떠들썩한 활기로 가득 차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뭐야?”
길거리에 쭉 늘어서 있는, 좌판에 진열된 물건 중 하나를 가리키며 편월이 또 물었다.
“으흐흐흐…….”
바로 이게 광운의 즐거움이었다. 편월이 제 나이에 맞는 어린애다운 행동을 하는 것 말이다.
“얘야, 그건 탕과糖菓(사탕)란다. 좀 주련?”
광운보다 장사치가 먼저 대답했다. 하나라도 더 팔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먹는 거야?”
“그럼. 아주 아주 달단다. 자, 요만큼만 먹어 보렴.”
장사치는 편월의 입에 부서진 탕과 한 조각을 넣어 주었다.
탕과를 입에 넣은 편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음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편월의 얼굴은 이내 활짝 펴졌다. 탕과의 그 달콤함이 어린 마음 깊숙이 젖어 들었던 것이다.
“나 이거 사 줘! 응? 사 줘. 사 줘!”
편월은 광운의 손목을 잡고 매달렸다. 연방 떼를 쓰면서 팔짝팔짝 뛰기도 했다.
“내가 그걸 사 주면 편월은 내게 뭘 줄 건가?”
“목숨!”
장난기 어린 광운의 말에 편월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들었다.
“그럼 편월은 내게 줄 목숨을 몇 번 빚졌나?”
“으응…….”
편월은 그 작은 입술을 꼼지락거리면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하나!”
“왜 하나지? 여태 편월이 내게 목숨을 준다고 한 적이 한 번뿐이야?”
“많아! 하지만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주지 못해!”
“그럼 이건 내가 손해인데…….”
“아냐! 내가 손해야. 난 하나밖에 없는 걸 주는데, 광운은… 광운은…….”
편월의 말끝이 흐려진다 싶자, 광운은 그 머리를 쓸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목숨의 가치를 알고 있다. 오 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산 사람만큼이나 죽은 사람들을 많이 봤던 탓이리라.
“두 번 다시는… 편월, 내 말을 들어라. 두 번 다시는 세상의 다른 물건과 네 목숨을 바꾼다는 약속 따위는 하지 말아라! 알겠지?”
“응. 하지만 광운에게는 줄 수 있어.”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광운은 탕과 한 꾸러미를 샀다. 편월은 자신에게 주는 목숨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그건 이 탕과와 맞바꾼 것이 된다. 아직은 그 이치를 설명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탕과 하나를 뺨이 볼록하게 입에 넣은 편월이 막 다른 좌판으로 쪼르르 달려갔을 때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듣거라! 지금 당장 상가를 철시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앞으로 닷새간 자숙하며 애도하라! 그 기간 동안 음주 가무를 벌이는 자는 신분에 상관없이 엄벌에 처하겠다는 주공의 명이시다! 다시 한 번…….”
“광운!”
그 고함을 듣자마자 편월은 다시 광운에게 달려왔다. 입엔 여전히 탕과가 물려 있었지만,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이게 또 광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철시 명령은 주로 군병들이 출병할 때 내려진다. 그걸 편월은 저 어린 나이에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닷새간 애도하라는 말까지 했다. 이 경사스러운 혼례 날 영욱성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긴 게 분명했다.
“편월, 따라와!”
이런 의외의 사태를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려면 바로 성내의 병사들이 거주하는 집무창集武倉으로 가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대륙의 모든 성에는 통상 이런 집무창을 구비하고 있다. 물론 이름 그대로 창고가 아니라, 일군의 대장을 비롯해서 그에 따른 직속 무장들과 하급 병졸들의 집이나 숙소를 모아 둔 거리를 일컫는 말이다.
영욱성의 집무창은 실로 방대한 규모였다. 그 거대한 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들어앉았으니, 항상 상주하고 있는 병사들만 해도 족히 오만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파양 땅을 지배하는 마용승의 공식 식읍은 이십만 호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상주하는 병사들 수는 일만 정도만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속내를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륙의 서북방에 위치해 평야가 좁은 대신 대부분 산악 지대인 파양 땅은 예로부터 광산업이 발달했다.
게다가 그 광산에서 주로 생산되는 건 아주 질 좋은 금과 철이다.
그것도 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와 마용승이 일부 광산을 폐쇄했을 정도였다. 그걸로 병사들을 양성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리라.
광운과 편월이 달려갔을 때, 그 너른 집무창 전체는 술렁거리고 있었다.
‘전형적이군!’
이건 출병을 앞둔 모습이라고 광운은 직감했다. 그러면서 집무창의 입구로 달려갔다.
다른 거리와 집무창은 확실히 달랐다. 입구에 십여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광운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애당초 집무창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입구에 서 있을 고지판告知板을 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오늘 주공과 혼례를 올리기로 했던 무융성武隆城 성주의 영애令愛께서 어제 관내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수행했던 무융성 병사 일백과 영접을 나갔던 우리 측 병사 이백도 전원 몰살당했다. 이 고지를 보는 즉시 장령將領 급 이상의 무장은 집결하도록!
내용이야 좀 더 길었지만, 요지만 따져 보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 글을 읽고서야 광운은 퍼뜩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죽영과 함께 있을 때 급박하게 달려가던 말발굽 소리가 선명하게 고막을 울렸던 것이다.
“뭐라 적혀 있었어?”
“돌아가자.”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묻는 편월의 어깨를 밀어, 광운은 서둘러 집무창 앞을 떠났다. 더 얼쩡거렸다간 병사들에게 걸려 약간의 곤욕을 치렀을 터였다.
죽영루에 돌아오니 여기도 한창 수선스러웠다. 철시와 애도의 명이 내려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셨네요. 걱정했어요. 난데없는 일이긴 하지만, 방금 애도하라는 명이 내려와서…….”
“알고 있소.”
죽영의 말을 제지하는 어투만큼이나 무거운 표정으로 광운은 가까운 탁자에 앉았다.
정말이지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끼리 전장에서 만나 싸우다가 서로 목숨을 나누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 그것도 오늘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는 여인의 목숨을 무참하게 짓밟는 건 아무리 피에 굶주린 전국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직도 신행에 오른 신부를 납치해서 신랑에게 몸값을 얻어 내는 풍속이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반쯤은 장난이 가미된 일이다. 그 일로 액땜을 하고,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토록 무참하게 죽이다니.’
“무슨 생각을 하세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광운은 비로소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편월이 그 선명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고 있고, 죽영이 옆에 앉아 차를 따랐다.
“당분간은 이걸로 참아야 해요. 닷새 동안은 음주 가무를 금한다니, 우리는 파리나 날리게 생겼어요.”
“흐음…….”
여기서도 광운은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비릿한 생명의 냄새를 맡았다.
매일같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을 사는 백성들은 강력한 보호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좀 더 강한 패주가 지배하는 땅으로 이주해 들어가고, 그 패주의 명이라면 이유도 묻지 않고 따른다.
“그런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래요? 여태 한 번도 출병과 애도를 동시에 명한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철시 명령이 출병에 연관된 것이라는 건 죽영도 익히 알고 있었다. 거기에 애도의 명령까지 겹쳐 내려졌으니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광운은 그녀에게 집무창의 고지판에서 봤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일이…….”
설명은 간단했지만, 죽영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녀도 역시 여자다. 여자에게 혼인이 갖는 의미가 어떤지는 광운보다 훨씬 잘 아는 바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어차피 이건 전국에 만연한 정략혼인이오. 정작 당사자인 마용승 공에겐 그리 가슴 아픈 일도 아닐 것이오.”
“어쩌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이 혼인의 배경을 얘기했을 뿐이오. 이곳에서 남아도는 금과 철을 건주建州의 무융성에 넘쳐 나는 쌀과 말로 교환하고자 하는 거요. 당사자들의 그런 계산에 우리들이 일일이 가슴 아파할 일은 없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광운도 실상 그리 편한 속은 아니었다. 자칫 너무 깊이 상심할 것 같은 죽영을 위로하려고, 스스로 생각해도 매몰차다 싶은 현실만 얘기했기 때문이다.
하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남녀 간의 결합이란 게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턱이 없다. 특히 한 지방의 패주라면 이 결합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래도 광운의 이 말이 죽영에겐 더욱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위로하려고 했던 게 오히려 여자의 감정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는 무정한 인간으로 비친 셈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여자를 죽인 놈은 아주 오래 살 거야!”
여태 말없이 듣기만 하던 편월이 갑자기 톡 한마디 던졌다. 비록 세세한 곳까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좋은 일로 오던 여자가 도중에 죽었다는 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제 광운이 그랬잖아. 나쁜 놈들이 오래 산다고!”
“그럼 편월은 그 여자를 죽인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나?”
“응! 이 성에 사는 누군가와 친구가 되려고 오던 길이었다며? 친구란 좋은 거고, 그럼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었을 거 아냐. 좋은 사람을 죽인 놈들은 나빠!”
광운과 죽영은 그저 실소를 하고 말았다. 편월의 말이 너무 엉뚱했던 탓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편월의 말은 또 얼마나 정곡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가.
남녀 간의 혼인이 서로 친구가 된다는 것 정도만 이해하고 있었지만, 좋은 일을 하러 오는 건 좋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죽인 건 나쁜 놈이라는 극명한 이분법적 논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성엔 잡가군이 필요 없나?”
“아니 그건 또 왜?”
“곧 병사들이 출동할 거고, 그럴 때마다 다른 성에선 잡가군을 모았었잖아. 광운도 매번 거기 끼었고.”
“글쎄, 그게 왜 궁금한데?”
“잡가군을 모으면 광운도 갈 거지?”
얘기가 싸움, 혹은 전쟁에 이르자 편월의 말은 또다시 나이를 넘어선 감이 없지 않았다. 참가하겠다고 하면 분명 그도 같이 가겠다고 나설 게 뻔했다.
광운은 슬쩍 죽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은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상기한 탓이었다.
그 눈길을 받은 죽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성에서 잡가군을 모집한다면 광운이 거기에 참가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꺼낸 편월이 얄미워지기까지 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대낮인데도 그 소리가 들려오는 건 사방이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상가는 모두 철시했고, 사람들은 전부 집에 들어앉아 애도를 해야 할 판이니 말이다.
그러나 광운에게 있어 이 정적은 긴장이었고, 살기였다. 이제 곧 병사들을 소집하는 큰 북소리가 성 전체에 울려 퍼질 터이고, 말의 투레질 소리와 각종 병장기, 갑옷 자락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그들먹하게 들려오리라.
그 느낌은 편월도 고스란히 감지하고 있었다. 태를 끊은 바로 그다음 순간 광운의 갑옷 자락에 싸여 전장을 누볐기에 이 공기의 흐름에 긴장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마치 무덤 속 같군요.”
그 정적을 참지 못한 건 죽영이었다. 광운이 떠날까 두려운 심정에, 느닷없이 찾아든 한낮의 고요는 그녀로 하여금 입을 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용해진 김에 모처럼 낮잠이나 잘까, 편월?”
“광운은 아직 대답을 안 했어.”
“아니, 뭘?”
“이번에 참가할 거야, 말 거야?”
“안 가!”
잊지도 않고 물어 오는 편월에게 광운은 딱 잘라 대답했다. 죽영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그녀 곁에서 편월이 엄마라는 존재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광운의 대답이 편월은 실망스러웠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축 처지고, 당차게 움켜쥐고 있던 주먹도 맥없이 풀려 버렸다.
그때였다. 한 필의 말이 거리를 달려오는가 했더니, 한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영욱성에 들어와 있는 낭인들에게 알린다! 본성에서는 잡가군에 편성될 낭인들을 고용한다! 토벌할 적들은 괴룡산魁龍山의 산적들이다! 일단 편입된 자들에겐 과거를 묻지 않을 테니, 혹 한때 주공께 적대했던 전력이 있는 자들이라도 안심하고 나오라!”
이런 내용의 고함을 지르며, 말 탄 자는 거리를 몇 차례나 왕복했다.
아마 이 일은 다른 거리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유난히 이 상가, 특히 유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더 많이 신경 쓰는 건 낭인들이 이곳에 많이 모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다시 시무룩해졌던 편월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진즉부터 잡가군을 모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한결 힘이 솟구쳤다.
광운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금방 생기를 찾는 편월의 태도나, 어딜 가든 한결같은 잡가군 모집의 말투가 오늘따라 왠지 우울하게 들렸다.
낭인들은 말 그대로 떠돌아다닌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 각자 갈 길로 가다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어제 같은 편에서 싸웠던 사람의 얼굴을 오늘은 적군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일국의 왕이나 한 지방의 패주들은 낭인들의 과거는 애써 무시해 준다. 지난 전쟁에 앙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다시는 고용할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도 낭인들은 결코 가볍게 처신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저 말만 믿고 광운 자신이 강회군의 잡가군에 참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보는 눈이 있으니 겉으로는 포용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뒤에서 아군의 손에 목이 달아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급 병졸이나 몇몇 이름 있는 무장을 벤 것과 왕을 죽인 건 전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무융성주의 딸을 죽인 건 괴룡산의 산적들인 모양이군.”
“가 보세요.”
“응? 뭐라고 했소?”
자신의 말꼬리를 잡은 것처럼 곧바로 이어진 죽영의 말을 광운은 얼핏 이해하지 못했다.
“잡가군에 참가하세요. 저 애도 저렇게 원하고, 또 미친 구름이 그런 얘기를 듣고 그대로 흘려버리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가세요. 괴룡산이라면 파양주 안에 있으니까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자.”
광운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편월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죽영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가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괜찮겠소? 하지만 넌 안 돼!”
죽영의 뜻을 물었으면서도, 그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대신 그의 손은 먼저 설치고 있는 편월의 어깨를 낚아채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번엔 데리고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역시 당신은 정신없는 구름이군요. 벌써 마음속으로 결정을 했으면서 내 뜻을 묻다니. 그리고 편월도 데려가세요.”
“뭐요?”
“전쟁터에도 편월을 데려갔다고 하셨잖아요. 그보다는 산적 토벌이 덜 위험할 거예요.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당신과 같이 전장에 나설 게 뻔하니, 보다 덜 위험한 곳에서 경험을 쌓게 해 주세요.”
사실 지금 죽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인지하고 있는 한 가지는 광운이든 편월이든 자신의 품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소. 그럼 다녀오리다.”
짤막하게 내뱉은 후 광운은 곧장 편월과 함께 자신들의 무구武具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게 좋다. 이별이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짧아야 하니까 말이다.
재차 가 본 집무창 앞은 벌써 사람들의 그림자로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노을이 시작된 하늘을 배경으로 그들이 든 병장기들은 어느새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들이 끌고 온 말들도 싸움의 냄새를 맡았는지, 투레질하는 소리에도 긴장이 들어차 있었다.
3
출발은 다음 날 인시寅時 정각이었다. 이번 토벌엔 어제 편성된 잡가군만 참가하기로 되어 있어, 무운을 빌어 주는 환송꾼 한 명 보이지 않는 쓸쓸한 출동이었다.
마보병을 합쳐 이번에 편성된 잡가군은 모두 천 명이었다. 괴룡산의 산적들 숫자가 오백으로 추정되었으니, 딱 두 배를 모집한 셈이었다.
그들은 우선 성문까지는 모두 걷기로 했다. 새벽부터 말을 달리면 성민들을 놀라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성문을 나서면서부터 기병과 보병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동력이 있는 기병이 먼저 가서 괴룡산을 포위하라는 작전 지시가 이미 지난밤에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괴룡산은 영욱성에서 남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어차피 관내이기 때문에 병참 부대가 따로 필요 없는지라 기병들의 행군 속도는 놀라웠다.
“뒤처지지 마라, 편월! 여기서 낙오하면 두 번 다시는 싸움터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
“흥, 미친 구름이나 내 말 꼬리의 먼지를 마시지 말어!”
편월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처럼 전장에 나서면 말투부터 확 달라지는 게, 벌써부터 여간 아니다 싶은 느낌이 왈칵 풍겨 나온다.
지난밤 잡가군 모집에 참가 신청을 했을 때를 떠올리며, 광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저 어린 편월이 벌써 두 번의 전쟁에 참가해 모두 이겼다는 데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편월이 이 싸움에 참가하게 된 데는 광운이라는 이름이 크게 작용했다. 많은 전장을 흘러 다녔던 미친 구름은 어느새 낭인들 사이에선 전설 비슷하게 회자되고 있었기에 모병관募兵官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다음은 쉬웠다. 각자의 무구를 점검하고, 최대한 편하게 휴식을 취하며 배를 채우고, 지금처럼 마구 달리는 것뿐이었다.
뒤로 슬쩍 처진 광운은 다시 한 번 편월의 무장 상태를 살펴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갑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역시 장난감처럼 보이는 병장기를 말에 주렁주렁 매달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은 신장이 작아 자신처럼 두 필의 말에 나눠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 이처럼 전장에 나설 땐 한 필은 두고 다녔다.
투구는 아직 쓰지 않았다. 이 역시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머리에 땀을 흘릴 필요는 없다는 광운의 철칙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날씨도 덥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해가 중천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괴룡산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전군 정지!”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 지휘는 곽가군郭家軍의 부장副將 중 한 명인 곽준방郭俊芳이었다. 무공이 혁혁해서 마용승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였다.
“여기서 취사를 하고, 두 시진 정도 휴식을 취한다. 각 부대의 대장들은 즉시 집결하고, 경계를 늦추지 마라!”
잡가군이라고 해서 혼자서 단독으로 싸우는 건 아니다. 그들을 백 명씩, 혹은 그 이상의 숫자로 하나의 부대를 형성하고 대장을 뽑아 그 지휘를 따른다.
일단 말에서 내리자 편월이 쪼르르 달려와 광운 옆에 탈푸닥 주저앉았다. 최대한 편하게 쉬겠다는 뜻이었다.
“오늘도 날 업고 싸울 거야?”
“그럼!”
“에이, 오늘은 혼자 싸우게 해 주지.”
“말과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때까진 안 된다고 했지? 그러니 어서 커라!”
“어이, 광운. 배급된 식량일세.”
편월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와 제법 큼직한 봉지 두 개를 내밀었다. 전에 어느 전장에서도 보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통상 전장에서의 식량은 간단하게 먹는 걸 좋아한다. 건량이나 육포가 주종이고 주먹밥 정도면 진수성찬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희한한 물건이 배급되었다.
광운은 가져온 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에 한 번 같은 편에서 싸운 적이 있었던 자였지만, 그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게 식량이란 말인가?”
“그렇다네. 영욱성에선 최근에 이걸 병사들에게 지급하더군.”
말을 하면서 그자는 봉지를 뜯어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그 순간 광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에는 작은 솥과 또 그 속엔 각 종류의 음식 재료들이 바짝 마른 상태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솥 밑 부분은 불을 땔 수 있는 공간까지 있었고, 숯과 간단하게 음식을 떠먹을 수 있는 도구까지 봉지 하나에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다음엔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허리에 찬 대통의 물을 솥에 부어, 같이 들어 있던 숯으로 불을 때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잠시 후 솥 안의 물이 부글부글 끓는다 싶더니, 이내 아주 훌륭한 고기 죽이 되었다. 말린 음식 재료 중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았던 것 같았다.
‘이건 만 명의 병사보다 더 큰 무기가 되겠군!’
음식을 먹는 광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전쟁에 나선 병사들이 가장 곤란을 겪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취사다.
불을 제대로 피울 수 없으니 건량 같은 거칠고 험한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밖에 없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어떤 용맹한 장수라도 제 힘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고 보면, 사람은 어딜 가나 먹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모양이다.
게다가 기회가 닿아 불을 피워 제대로 음식을 만들 수 있다손 쳐도 지휘자는 선뜻 취사를 허락할 수 없다. 그때는 어느 정도 무장을 풀어야 하기에 기습 공격을 당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그런 문제를 싹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물을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 무장을 풀 이유도 없다. 게다가 숯이 연료이기에 연기를 피워 아군의 위치를 노출시킬 염려도 없는 물건이었다. 전쟁의 달인인 광운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배도 충분히 불렀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잠을 자 두면 오늘 야간 전투에서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광운은 편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솥을 깨끗이 비우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자자!”
광운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낀 편월은 그의 다리를 베고 그 자리에 누웠다.
광운은 편월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 역시 길게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비록 둘 다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서로의 심장 고동을 흠씬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 *
그건 실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습이었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광운이었다. 이런 경우에 발휘되는 그의 감각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기습이라고 해서 화살을 쏘며, 밀물처럼 마구 밀려든 게 아니었다. 묘한 느낌에 실눈을 떴을 때, 어느새 적`─`괴룡산 산적`─`들은 감시병을 해치우고 잠든 아군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여전히 실눈으로 적들의 동태를 살피며, 광운은 편월이 베고 잠든 팔뚝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편월도 살짝 실눈을 뜨더니 눈으로 물었다.
‘적?’
그리고 이내 편월의 시선은 광운의 뒤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도 한 명의 적이 시퍼런 박도朴刀를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쯤이야 물론 광운도 진즉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다만 그자를 해치운 뒤의 일까지 생각하느라 잠깐 두고 봤을 뿐이다.
광운은 우선 자신의 말들부터 찾았다. 제대로 된 병기는 거기에 모두 실려 있으니, 뒤에 선 놈을 제압한 후에 가장 먼저 그쪽으로 달려가야 한다.
다행히 말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역시 영욱성에서 제공한 식사의 편리한 효용 중 하나였다. 만약 단체 취사를 해야 했다면 말들은 멀찍이 한곳에 모아 둬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긴, 그랬다면 최소한의 병기 정도는 지참하고 있었겠지.’
어쨌든 근처에 있는 적은 두 명뿐이었다. 광운 자신에게 한 명, 식사를 가져와서 같이 먹고 잠들었던 자에게 한 명, 아마 편월은 놈들 눈에도 어려 보여서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적들도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제대로 구입한 무구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어느 전장에서 버려져 있는 것들을 주웠으리라. 혹은 부상병이나 패잔병을 습격해 죽이고 빼앗았거나.
‘여기서 절반 이상은 죽어 나가겠군. 늦어지면 손실은 더 커지고!’
판단을 내리자마자 광운은 행동을 시작했다. 그대로 몸을 굴려 뒤를 노리던 놈 발치로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어엇!”
투구 속에 들어 있던 놈의 눈이 커다랗게 불거졌다. 깊이 잠든 줄 알았던 광운이 이처럼 갑작스레 공격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히 수중의 박도는 휘둘러 볼 생각조차 못 하고 광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광운은 그 박도를 놈의 갑옷과 갑상 사이 빈틈에 깊숙이 찔러 넣어 강하게 그어 버렸다.
으드득!
배는 물론 척추까지 긁어내는 소리와 감촉을 전해 주며 박도는 놈의 배에서 빠져나왔다.
광운의 동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밥을 가져다준 자를 노리던 적의 얼굴에 박도를 그대로 던져 버렸다.
“편월!”
그 직후 이름을 부르자 그때까지 누워 있던 편월이 토끼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그사이 광운은 갑옷 속에서 제법 큼직한 자루를 하나 꺼내 들어 그 입구를 활짝 벌렸다. 구멍이 몇 개인가 뚫려 있어, 뭔가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자루에 편월이 발부터 뛰어들었다. 진즉부터 뚫려 있던 구멍으로 자그마한 손발이 쏙 나오자, 광운은 그걸 등에 둘렀다.
그렇게 광운은 편월을 업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가 등을 맞댄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이 동작은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났다. 광운이 던진 박도에 얼굴이 관통당한 놈이 미처 쓰러지기도 전에 이뤄졌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이다!”
비로소 광운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질풍을 비롯한 자신들의 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전장에 나선 사나이들의 감각은 기형적일 정도로 예민해진다. 집에서 자다가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적’이란 말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민감해진 감각에 따라 행동도 더불어 작용한다. 영욱성 잡가군은 ‘적이다!’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잠에서 깨는 것, 각자의 병기를 휘두르거나 몸을 굴려 피하는 걸 동시에 해냈다.
당연히 주변은 곧바로 난전으로 번져 갔다. 잡가군은 자다가 벼락 맞은 기분으로, 적들은 거의 성공할 뻔했던 기습이 마지막에 들통 났다는 낭패감으로 더욱 광분해서 설치기 시작했다.
그사이 광운은 벌써 말에 올랐다. 여느 때의 질풍이 아니라 편월의 말인 소질풍少疾風이었다. 물론 편월이 무기를 쉽게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말을 한 바퀴 돌리며, 광운은 전황을 살폈다.
‘이상하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괴룡산 산적들의 숫자는 오백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니 여기에 투입된 적들만 해도 그보다는 많은 듯했다. 산채를 텅텅 비우고 내려왔을 리는 만무하니, 아군의 정보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적들을 돕는 놈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그건 차후의 문제다. 지금 당장은 기습해 온 자들을 물리쳐야만 한다.
“간다, 편월!”
“좋아!”
“들고 있는 무기는?”
“활!”
“뒤쪽의 상황은?”
“다섯! 오른쪽에 셋, 왼쪽에 둘! 모두 도보!”
“놈들의 무기는?”
“창과 칼!”
이 짤막한 대화로 광운은 뒤쪽에 대해선 일단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섯 모두 도보라면 말을 탄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 짧은 시간에도 벌써 소질풍을 앞세운 나머지 두 마리 말들은 난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서로 뒤엉켜 드잡이질을 벌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적과 아군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통상 전장에 나설 땐 같은 편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비표를 한다.
‘보병과 기병이 따로 출발했던 게 다행이군!’
절각도折脚刀로 소질풍의 앞다리를 자르려는 두 놈을 창보다 길고 뾰족한 병기로 거의 동시에 찍어 넘기며 광운은 미소를 지었다.
통상 비표는 공격 직전에야 지급된다. 미리 착용하고 있다간 적의 간인들에게 염탐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성을 나설 때부터 착용했었다. 기병이 먼저 괴룡산을 포위하고 난 뒤에 보병과 합류하기로 했기에, 혹시라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까 싶어서였다.
“한 놈!”
갑자기 뒤에서 편월의 뾰족한 외침이 들렸다. 뭔가 신기한 장난감을 얻었을 때처럼 흥분이 실린 음색이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광운은 가슴이 짜릿하게 아려 왔다. 편월이 벌써 그 작은 화살로 한 놈을 거꾸러뜨렸다는 얘기다.
‘하긴 애초 모친의 죽음을 딛고 태어났으니…….’
그 후로도 편월은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보고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처럼 미쳐 날뛰는 전국 세상을 살려면 무엇보다 강해져야 하기에 광운도 애써 피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 어린 나이에 벌써 살인을 한다는 건 너무 무참한 일이다. 아무리 부처의 자비를 빌고 또 빌어도 구제될 길 없는 이 시대의 광기고 마성魔性일 수밖에 없다.
“왼쪽에 대장군 위기!”
다시 편월의 외침이 광운의 고막을 울렸다. 확인할 것도 없이, 뒤쪽 왼편에서 오늘의 지휘관인 곽준방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었다.
고삐가 없는 소질풍이었지만 능숙한 기마술로 말 머리를 돌리며, 광운은 또 한 번 이 전쟁이 구슬퍼졌다. 어리광이나 부려야 될 편월의 입에서, 누구보다 능숙한 군대식 보고가 술술 새어 나오게 하는 이 현실을 만든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런 복잡한 생각 속에서도 광운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소질풍은 곽준방이 위기에 처해 있는 곳까지 치달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십여 명의 적들은 일제히 무너져 흩어졌다.
“타시오!”
적들이 잠시 물러간 사이 광운은 곽준방에게 질풍의 고삐를 던져 주었다.
“그대는?”
“그게 무슨 상관이오. 어서 타시오.”
곽준방도 마용승의 총애를 받는 뛰어난 무장이다. 더 이상의 문답 없이 훌쩍 말에 올랐다.
“둘, 셋!”
편월은 연방 숫자를 헤아렸다. 곽준방을 공격하던 자들이 재차 덤벼들었고, 그중 둘이 화살 밥이 되고 만 것이다.
곽준방도 그냥 있지 않았다. 일단 말에 오르자 새삼 힘이 솟구치는지 들고 있던 언월도偃月刀로 대뜸 두 놈을 베어 넘겼다.
나머지는 광운의 몫이었다. 예의 그 기병을 화살처럼 빠르게 찔러 네댓 놈의 숨통을 단숨에 꿰뚫어 버렸다.
그리고 광운은 돌연 말에서 뛰어내렸다. 저만치 장수기가 나뒹굴고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그걸 지키던 무장은 그 근처에 목 없는 시신으로 뒹굴고 있었다.
장수기를 가지고 말에 다시 오른 광운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전군 집결! 전군 집결! 되도록 적은 상대하지 마라! 전군 집결!”
뭐라고 미화를 하든 자다가 기습을 당한 잡가군이었다. 우선은 한데 모아 안정감을 주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군의 기병이 오백, 거기에 기습을 감행했던 산적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다.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한 상황에서 집결을 하는 건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대여섯 명의 아군이 혈로를 뚫고 곽준방 곁으로 모여들었다.
팍!
그걸 본 광운은 높이 치켜들고 있던 장수기를 땅바닥에 세차게 꽂아 세웠다.
“실례!”
한마디 내뱉은 후, 광운은 곧장 소질풍을 몰아 곽준방 곁을 떠났다. 아군이 집결하는 걸 돕기 위해서였다.
“왼쪽을 뚫어라. 우선 말부터 타게 해!”
역시 곽준방이었다. 대뜸 아군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를 파악하고 달려가는 광운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의 잡가군은 모두가 기병이다. 말이 없으면 그 무용이 반감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싸움에 놀라 설치던 말들은 싸움터의 왼쪽에 몰려 있었다.
그걸 알기에 광운은 소질풍을 왼쪽으로 몰았다.
그사이 덤비는 적들이 더러 있었지만, 애당초 보병과 기병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소질풍의 발굽에 슬쩍 스치기만 해도 벌써 저만치 나뒹굴고는 했다.
곽준방과 광운의 의도는 성공했다. 잡가군도 말들이 절실했기에 왼쪽의 포위망이 터지자 그쪽으로 일제히 밀고 나갔다.
광운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 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놀라 달아나는 말들도 있을 터, 그걸 막기 위해서였다.
“와아아!”
잡가군은 모두 말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그들은 방향을 돌려 산적들을 짓밟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 선두도 역시 광운이었다.
일단 말을 탄 이상 따로 마음의 안정이니 사기의 진작이니 할 것도 없었다. 역전된 이 기세 그대로 적들을 괴멸시키는 게 상책이다.
기병의 파괴력은 과연 엄청났다. 숫자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마치 대나무를 베어 넘기듯 산적들을 쓰러뜨렸다.
쿠웅-!
돌연 한 발의 포성砲聲이 들려온 건, 몰리고 몰린 산적들을 완전히 괴멸시키기 위한 직전이었다.
이 시대의 대포는 인마의 살상보다는 다분히 위협용이거나 신호용일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급작스레 싸움터를 진동시킨 포성은 모든 사람들의 동작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광운도 재빨리 포성이 들려온 곳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이제 한창 무르익기 시작한 노을을 등지고, 기치도 정연하게 달려오고 있는 일단의 군마를!
그들은 포성이 들려온 곳에서만 몰려오는 게 아니었다. 삼면에서 영욱성의 잡가군을 포위할 기세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적어도 이만 이상, 이건 전쟁이다!’
생각했을 때, 광운은 벌써 말을 달리고 있었다. 오늘 지휘를 맡은 곽준방을 향해서였다.
아직은 어디서 온 군세軍勢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 파양주는 외세로부터 침입을 당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