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국풍경戰國風景 1 (3/66)

전국풍경戰國風景 1

1

“우이엽, 찻, 우엽!”

미리 정해 줬던 함성을 지르며 친위대까지 전장으로 달려들었을 때, 철린鐵麟 증선회曾仙回의 전신은 비로소 나른한 피로감에 젖어 들었다.

‘이겼다!’

식읍食邑 오만 호의 강주姜州, 명문 증가曾家가 난세를 헤치고 전국패권戰國覇權에 뛰어든 지 어언 백오십여 년!

이젠 강주 땅 전체와 회주淮州의 대부분을 차지한 식읍 오십여 만 호로서, 가문이 스스로 왕王이라 칭한 지 벌써 삼대三代,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난세 이백 년…….’

지그시 감은 증선회의 눈꺼풀 속에, 평생을 전장에서 굴러야 했던 선조들과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먼 옛날 안강安康 삼 년에 있었던 외척환란外戚患亂으로 시작되었다. 어린 황제의 외척들이 발호하여 국정을 어지럽혔고, 바야흐로 천하의 영웅호걸들은 각기 독립 정권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황실은 유명무실해져 버렸고, 급기야 황제도 유랑하기에 이르렀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자들은 없었다. 혹은 왕을 자칭하고 혹은 제후帝后니 패주覇主로 군림하면서, 피로써 피를 씻는 전국의 그림을 그린 지 어언 이백여 년!

이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회주까지 온전히 병탄倂呑하면, 지금까지 이름뿐인 황실만 앞세워 강주 증가의 세력 확장을 탄핵彈劾하던 무리들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으리라.

감은 눈 속에서 증선회는 긴 한숨을 토했다. 열일곱 나이로 선왕先王 대신 첫 출전한 이후 전장을 누빈 지 사십여 년, 이제 그의 육신은 노쇠를 강하게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선회는 눈을 부릅뜨며, 말 등자를 딛고 몸을 세웠다. 아침부터 투구를 달궜던 여름 햇살이 따갑게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바람에 증선회의 눈길이 다시 좁혀졌다. 그래도 전장의 상황쯤은 한눈에 읽어 낼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숫자는 비슷하지만, 어린진魚鱗陣으로 대적해 온 적들의 옆구리가 장맛비에 밀린 둑처럼 터진 이상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긴장을 늦출 증선회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이 싸움의 고비라고, 숱한 전장의 경험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기군虎旗軍은 좌측으로 선회해서 적의 후미를 치라고 신호하라! 정가군鄭家軍은 우측으로 파고들어 가 적장이 있는 적의 본대를 노려라!”

증선회의 명령은 서릿발 같았다.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의 신체에선 조금 전의 피로 따위는 전혀 표출되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기수가 증선회의 명에 따라 깃발을 휘둘렀고, 잇달아 전령들이 말을 달려 전장으로 향했다.

“전하! 이제 장막을 치고 잠시 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침부터 이처럼 더운 날씨를 견디셨으니…….”

“아니다!”

전장에서 자신의 상징이랄 수 있는 장수기將帥旗를 책임진 젊은 부하의 말을 증선회는 가볍게 잘랐다.

“배워 두도록 해라, 강헌姜憲! 전쟁이란 미친 말과도 같다. 어디로 뛸지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지금 아군들이 비록 이기고 있지만, 바로 그게 약점으로 작용될 수도 있는 게 전쟁이다. 수세에 몰린 적들이 생사를 도외시한 채 덤빈다면 자칫 역전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명을 내릴 때와는 달리 부하에게 이르는 증선회의 어조는 마치 자식을 가르치는 어버이처럼 부드러웠다. 비록 전장의 소음 탓에 목소리 자체는 컸지만 말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방심을 하지 말라는 전하의 가르침, 뼈에 새겨 두겠습니다!”

장수기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강헌은 마상에서 가볍게 군례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보며 증선회는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키운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 이제 적의 후미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적의 본대는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만!”

강헌이 재차 상황 보고를 했을 때, 증선회는 오히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황은 물론 주변의 정세에까지 꼼꼼하게 마음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증선회가 본진을 둔 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기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널찍한 평사릉平沙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거기다 왼쪽으론 언덕을 내려가며 무성한 억새밭이 형성되어 있고, 오른쪽 아래론 사통팔달로 뚫린 관도가 보였다.

‘나라면 유군遊軍을 이용하여 기습이라도 한번 감행해 보련만…….’

왼쪽 억새밭에 매복을 두거나, 아니면 관도를 통해 경무장輕武裝한 빠른 기병으로 기습을 감행해 왔다면, 자신은 부하들의 거의 전부를 전장에 투입하지 못했을 거라고 증선회는 생각했다.

바로 이런 전략을 세우지도 않고 자신에게 덤벼든 젊은 적장에게 일종의 안타까움까지 느끼고 있는 증선회였다.

‘하긴 생각했다고 해서 별수도 없었겠지!’

이미 억새밭에는 자신의 부하들이 매복해 있고, 관도에도 곳곳에 감시병을 두고 있다. 두 곳에서 기습을 당한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 적의 반격입니다!”

불이 튀는 듯 다급한 강헌의 말에 증선회는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대로 적의 본대가 아군인 정가군을 밀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호기군을 돌려라. 자, 이제 싸움은 막바지다. 일거에 몰아쳐 적의 숨통을 끊도록!”

다시 명을 내리는 증선회에게 조금 전 가졌던 젊은 적장에 대한 애틋한 감상 따위는 씻은 듯 보이지 않았다.

명과 동시에 기수와 전령이 움직였다. 그리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번엔 증선회의 오른쪽에서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우렁찬 북소리도 들려왔다. 바야흐로 최후의 총공격을 감행하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적장은 누구라더냐?”

그제야 적장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증선회가 강헌에게 물었다.

“양원陽元과 영림靈林 두 개 현을 다스리는 사문기史文基라 합니다. 나이는 스물하나!”

“스물하나, 역시 젊군! 하긴 그 젊은 혈기가 있으니 고작 일개 성의 성주로서 내게 덤볐겠지만!”

강헌이 말한 두 개 현에 있는 성이라고 해 봐야 기껏 고응성孤鷹城 하나뿐이란 걸 떠올린 증선회는 다시 약간의 감상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두 개 주에, 거느리고 있는 큰 성만 해도 벌써 다섯이고, 그에 딸린 작은 성채는 일일이 헤아리기도 귀찮았다.

거기에 비해 두 개 현을 다스리는 사문기는 증선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개 성지기 장수에 불과하다. 국명國名을 강姜이라 하고 나라를 세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자신에게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힘의 비교도 무시한 채 달려드는 사문기의 젊음이 아까워진 증선회의 입에선 저절로 조금 전의 감상이 다시 흘러나왔다.

“적이지만 훌륭한 젊은이다. 혹시 베거나 사로잡더라도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도록!”

“그건 벌써 출동해 있는 장병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고작 두 개 현을 다스리면서 잘도 이만한 병력을 모았다. 삼만 가까운 병력을 모아서 통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재능이 아깝군.”

양원과 영림의 두 개 현이라면 식읍이라고 해 봐야 고작 십만 호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군사나 사용할 수 있는 군자금도 턱없이 부족할 게 뻔하다.

‘일 년 동안 거두는 세미稅米가 십만 섬이나 될까?’

이런 전국시대에 있어 한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나 패주들의 힘은 대개 일 년간 거둬들이는 세미로 가늠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땅덩어리만 넓다고 해서, 식읍이 많다고 해서 그게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자금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통상 식읍 일만 호당 최대한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오백 정도로 본다. 한 집에서 병사를 내면, 그 병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군자금을 적어도 다섯 호에서 충당해야만 한다. 군량은 물론 마초馬草나 부역, 식수까지 공급해야 되니 식읍만 많다고 많은 수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문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삼천 정도다.

그런데 그 열 배나 되는 삼만 가까운 병력을 동원했다. 어딘가 비상한 재주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증선회는 진심으로 아까웠다. 이 빌어먹을 전국난세만 아니었다면, 사문기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훌륭하게 쓰일 재목이 됐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장에서 서로 적으로 만났다.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는 최선을 다해 싸워 주는 일이다.

“이제 곧 적들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후미를 치던 호기군이 가세하자, 완강하게 저항하던 적들이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게 역력히 보였다.

그제야 증선회는 비로소 어깨로 쉬는 큰 한숨을 내뿜었다. 적들의 최후 발악은 저걸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리라.

증선회의 예측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적들이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전하!”

“조금만 더 추적하도록 해라. 이곳의 지형은 우리들에겐 익숙지 못하니 조심하도록!”

“존명!”

제꺽 대답하긴 했지만, 강헌으로선 다소 불만이었다. 이제 쫓기기 시작한 적을 철저히 짓밟아 버렸으면 싶지만, 명이 내려졌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인마가 움직이는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억새밭에 매복해 있던 근위대近衛隊가 속속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징을 쳐 병사들을 거둬들여라. 이긴 싸움 끝에 서로 공을 다퉈 아군들끼리 싸울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주의를 준 후, 증선회는 말에서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뒤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야전에서 사용하는 의자를 내왔다. 그와 함께 다른 자들은 주변에 장막과 차양을 치느라 부산을 떨었다.

증선회는 의자에 느릿하게 엉덩이를 걸치며, 새삼 갑옷이 너무 무겁다는 걸 실감했다. 역시 나이는 속이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래도 의자를 내온 부하에게 장군도를 선뜻 넘기지는 않았다. 말에서 내린 순간부터 묘하게 저릿하니, 온몸을 감싸고 있는 기분 나쁜 기운 탓이었다.

별안간 증선회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건 순전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전하?”

거의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부하의 외침이 들렸고, 증선회는 엉덩이 부근에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피잉!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그 뒤에나 들렸다.

“앗, 전하께서 유시流矢에 당하셨다. 모두들…….”

“닥쳐라! 깊지 않은 상처니 소란을 피우지 마라!”

주변에 알리려고 고함을 지르는 부하를 증선회는 세차게 억눌렀다. 말한 그대로 엉덩이 부근에 맞은 화살은 그리 심한 부상을 입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장에서 뒹군 오랜 경험에 따라 그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 화살은 틀림없이 목덜미를 꿰뚫었으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순간, 증선회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이건 눈 없이 그냥 날아온 화살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쏜 것이었다. 그것도 쓰고 있는 투구 정도는 쉽게 꿰뚫을 정도로 강한 것으로!

그리고 증선회는 보았다. 이제 막 귀환하고 있는 근위대의 뒤를 쫓듯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일기一騎의 병사를…….

아니 정확하게는 일기가 아니었다. 두 필의 말에 탄 한 명의 잡병雜兵이었다.

아직 부하들 중에서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자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부상에 신경을 쓰고 있는 탓이리라.

그러나 증선회는 그가 적병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게 사십여 년을 전장에서 뒹굴면서도 여태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자는 무척이나 빨랐다. 처음 발견했을 땐 근위대의 후미였으나, 증선회가 생각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 벌써 그들을 지나쳐 십 장 정도까지 거리를 좁혀 놓았다.

“저자를 막아라!”

증선회가 명령을 내린 것보다 조금 더 빨리, 근위대와 측근에 있던 부하들이 그를 알아차리고 쫓거나 그 앞을 막아섰다.

강헌도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적병이다. 전하를 감싸라!”

고함을 지르며 말을 몰아, 인마가 동시에 증선회의 방패가 된 듯했다. 강헌의 손엔 여전히 장수기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부하들의 반응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는 벌써 증선회의 지척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강왕姜王이라 알고 목을 받으러 왔소!”

“무엄하다. 이름을 밝혀라!”

전장에서의 예를 갖추는 그에게 강헌은 맞고함을 질렀다. 이름도 없는 자에게 주군의 목을 뺏긴다면 그야말로 무장의 수치다.

“이 몸은 광운狂雲, 사문기 공公 휘하의 잡가군雜家軍 소속이오!”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을 때, 벌써 광운은 근위대 서너 명을 거꾸러뜨리며 곧바로 강헌에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오호, 용맹한 구름이로다! 오라, 그 칼은 내가 상대하겠다!”

강헌도 호기롭게 한마디 지른 후, 깃발을 들지 않은 손으로 대도를 휘둘렀다. 한 손으로 다루기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지만, 마치 썩은 나무로 만들기나 한 것처럼 가볍게 광운의 가슴 쪽을 쪼개려 허공을 그었다.

하지만 강헌의 대도는 광운의 가슴에도 닿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광운이 내민, 창처럼 생긴, 그러나 창보다 훨씬 가늘고 뾰족한 기병奇兵에 찔려 뒤로 벌렁 자빠져 버렸던 것이다.

허공으로 꼴사납게 들린 강헌의 두 다리와 달리 그가 들고 있던 장수기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끼히히히힝-!

주인 잃은 강헌의 말이 두 앞발을 번쩍 쳐들었고, 그보다 먼저 광운이 이름 그대로 미친 구름처럼 증선회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갔다.

증선회도 용장이다. 채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칼을 쥐고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육십여 년!

한 명의 이름 없는 잡병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근위대가 광운을 따라잡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게 증선회의 실수였다. 특별히 발탁해 장수기를 맡긴 강헌이 단 일 합에 쓰러진 걸 잊었고, 자신의 나이도 잊은 채 광운에게 장군도를 휘두른 것 말이다.

증선회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건 장군도가 맥없이 미끄러진 뒤였다.

어떻게 칼을 피할 수 있었을까? 광운은 분명 말을 탔고, 또 한 마리 더 끌고 있기까지 했는데?

그 답은 시퍼런 칼날이 투구 사이로 훤히 드러난 자신의 목젖에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두 마리 말은 허공으로 뛰었고, 광운은 바닥을 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증선회의 목이 광운의 허리춤에 매달린 뒤였다.

“훌륭한 전사다, 광운!”

이러한 칭찬은, 이미 저승에서나 해 줘야 하게 된 증선회였다.

증선회의 목을 갈무리한 광운은 다시 곧장 말에 뛰어올랐다. 사람과 말의 호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흡사 묘기를 보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이름을 내건 놈이거든 달아나지 마라!”

증선회의 근위대장이 전장이 떠나갈 듯한 고함을 지르며 광운의 뒤를 쫓았다. 눈앞에서 왕이 살해당한 것도 기가 막히는데, 그 목까지 빼앗겼다. 그것만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근위대장에게 있어 다행인 것은 광운이 전장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잡는 건 염려 없을 듯했다.

강국 근위대장의 예상처럼, 전장을 이탈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애당초 하지 않은 광운이었다. 초반부터 밀리기 시작한 전세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적장을 쳐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 목표는 이제 십분 달성되었다. 상처 하나 없이 증선회의 목을 베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전세가 역전되는 건 아니다. 증선회의 죽음이 적에게 타격을 주겠지만, 그걸로 전투 전체가 좌우되기는 힘들다. 다만 아직까지 중요한 일이 하나 더 남았기에 전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운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사문기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적과 아군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만 찾으면 그만이었다.

과연 그곳엔 사문기가 분전하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직접 적과 싸워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임에도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멍청이다!’

지금의 사문기를 보는 광운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장수란 단 몇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와도 항상 뒷일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하물며 사문기는 두 개 현과 한 성의 주인이다. 삼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나왔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처신을 해야만 한다. 젊음에 이끌린 용맹에만 모든 걸 맡기는 건 금물이다.

게다가 적들은 아직 증선회의 죽음을 모른다. 사기충천하여 사문기를 마구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돌연 광운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증선회의 목을 높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강왕 증선회의 목을 사문기 공의 휘하 광운이 쳤노라!”

이 한마디가 던진 효과는 컸다. 사문기를 공격하던 강회군姜淮軍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돌아봤을 정도였다.

광운이 그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사문기의 말고삐를 잡는 건 쉬웠다.

그러나 사문기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놔라!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놈이기에 이토록 방자한가? 놔라! 놓지 못하겠나!”

고삐를 잡고 달려가는 광운의 말 뒤에 끌려가다시피 하며 사문기는 연방 고함을 질렀다.

“다 끝났다, 멍청아! 이젠 달아나는 거다!”

“뭐, 뭐라고? 비표秘標를 보니 네놈은 아군의 잡가군 소속이로구나. 당장 그 고삐를 놓지 않으면 명령 불복으로 죄를 묻겠다!”

“그 죄를 물으려면 살아남으라는 거다, 멍청아!”

사문기는 기가 막혀 버렸다. 스물한 해를 살아오면서 이처럼 지독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으드득, 어금니가 강한 소리를 내면서 맞물렸다.

하지만 사문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 목숨을 노리던 적들의 병기 끝에서 벗어나니 온몸이 저리고 아파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래도 입만은 여전히 왕성하게 움직였다.

“이대로 돌아가도 내가 온전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패장敗將답게 깨끗이 자결하고 싶다. 그러니 멈춰라!”

이번에도 멍청이라는 욕이 날아올 것이라고 사문기는 예상했지만, 광운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광운에게는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강회군들이 본격적으로 추적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회군의 추적은 필사적이었다. 주군의 목을 빼앗기고, 거기다 적장까지 살려 보낸다면 씻지 못할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광운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는 했다. 생각과 현실은 너무 다르다는 게 문제였지만…….

실제로 이 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전장은 지나치게 넓었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힘든 노릇, 차라리 사문기의 말처럼 그를 자결케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용장이었다는 이름만은 남기게 될 테니 말이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 심정으로 급박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광운의 눈에 마침 일기의 기마 무사를 에워싼 몇몇의 아군이 저만치 앞서 가는 게 보였다. 엄중한 부상을 당한 한 부대의 대장과 그 직속 부하들인 것 같았다. 비표를 보니 틀림없는 아군이었다.

그야말로 광운이 찾고 있던 대상이었다.

“어느 부대의 분들이오? 이분은 바로 고응성의 성주이신 사문기 공이시오!”

그들에게 접근하며 광운은 큰 소리로 물었다.

동시에 그들은 몸을 돌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모두들 전장에 익은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광운의 말처럼 뒤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이 사문기임을 알아보자 다들 가벼운 군례를 갖췄다.

“저희들은 양원의 허가군許家軍으로 대장께서 심한 부상을 입어…….”

“고응성 주인의 위기요. 그대들의 대장을 빌려야겠소!”

누군가가 말하는 걸 제지하며, 광운은 다짜고짜 사문기의 투구를 벗겼다.

그러고는 부상을 당해 말 위에 엎어져 있다시피 한 허가군 대장의 투구 역시 벗기고는 그 머리에다 사문기의 투구를 씌웠다.

“뭐 하는 짓이오?”

“이 일로 성주께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허가군의 영광이 될지언정 수치는 되지 않으리다! 그렇지 않소이까?”

따지려는 허씨 부하들을 억누르며, 광운은 곧바로 그 대장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으… 성주를 무, 무사히…….”

그 말을 듣자마자 광운은 재차 말을 몰았다. 이번엔 사문기와 허가군 대장의 말 두 필을 동시에 끌었다.

“고응성 성주께서 가신다! 길을 트고, 뒤를 막아라!”

온 전장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듯한 목소리로 재차 고함을 지르며, 광운은 연방 박차를 가했다.

와두두둑-!

원래 광운이 끌고 온 말이 두 필, 거기다 사문기와 허가군 대장의 말까지 가세한 네 필이 달리면서 일으키는 먼지는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달린 후, 광운은 같이 끌고 가던 허가군 대장의 말고삐를 놓았다.

“미안하오. 하지만 그대의 이름은 무장으로서 길이 남으리다!”

잠깐 동안 허가군 대장의 말을 따르며, 그 엉덩이에 몇 차례 칼질을 해 댄 광운은 나직이 말했다.

허가군 대장이 탄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당연히 광운이 칼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비로소 광운은 말 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허여창許與昌…….”

“뭐라고?”

갑자기 들려온 사문기의 말에 광운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 대신 죽으려고 달려가고 있는 저자의 이름이다.”

“그걸 알거든 반드시 살란 말이오! 그 일족을 찾아 뒤를 잇게 해 그의 제사가 끊이지 않게 하란 말이오!”

여전히 물어뜯을 듯한 어투였지만, 광운의 말은 조금 전처럼 마구잡이식 반말은 아니었다.

“그게 내가 할 일인가?”

조금은 기운을 차린 듯 목소리에 약간 힘이 실린 사문기가 물었다.

광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정도라면 이젠 쉽게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대의 이름은?”

다시 질문이 던져졌을 땐, 광운도 더 이상은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광운. 잡가군에 소속된 낭인이오!”

“광운… 그 이름에 딱 어울리는 미친 구름 같은 놈이로군.”

그 말엔 대답 않고 광운은 주변을 살폈다. 이제야 겨우 강회군의 추적을 따돌린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다. 사문기가 다스리는 고응성까지 가려면 아직도 숱한 난관이 남아 있을 게 뻔하다. 당장 강회군도 그 귀로에 천라지망을 펼쳐 뒀을 테니 말이다.

목구멍을 찢을 듯한 갈증이 찾아들었지만, 광운은 새삼스레 고삐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2

왕의 전사를 알리려 무려 세 시진 이상을 달려 강회 땅 두 개 주를 다스리는 본성, 거죽성에 당도한 전령 이환李桓은 지체 없이 세자의 거처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이환은 기가 막히고 말았다. 질펀하게 벌어졌던 술자리의 뒤끝을 본 탓이었다.

“이, 이건 대체 누, 누구의…….”

말을 타고 세 시진 이상을 달린 이환이었다. 가쁜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세자인 증두신曾斗愼을 보좌하고 있었어야 할 측근들이 하나같이 취해 자빠져 있다가 그제야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환은 그들에게 마구 발길질을 가했다.

“일어나라. 이런 불충한 것들! 전하께서 전장에 나가 계신데, 안에선 술판을 벌여?”

그 바람에 이환의 호흡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깔딱거렸지만, 행동을 멈추진 않았다.

“세자, 세자 저하께서…….”

“어디 계시느냐?”

이젠 더 이상 발길질도, 말하기도 귀찮아 이환은 증두신이 있는 곳을 물었다.

“연미각燕尾閣에…….”

“끄흐으으음!”

누군가가 미처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이환은 기묘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연미각이라면 여자들만 있는 곳이다. 딱히 내전內殿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란 말인가?’

아버지는 이 무더위에 치른 전쟁에서 전사를 했는데, 그 아들은 주색잡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처럼 기가 막힐 노릇도 다시없을 터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증선회가 식읍이 채 십만 호도 되지 않는, 콧구멍만 한 땅을 노려 사문기와 전쟁을 벌였던가? 배후의 적을 없애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증두신의 근심을 덜어 주려는 것 아니었던가!

“앞장서라! 대체 어느 계집의 엉덩이에 깔려 계신단 말이냐?”

이환은 대답했던 자의 멱살을 끌었다. 아무리 증두신이 세자라 해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환의 입에선 욕도 튀어나왔다. 왕의 내전에 있는 정식 처첩妻妾이라면 그 역시 ‘계집’이라는 말은 함부로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증두신은 아직 미혼이다. 정식 내실은 없고 시녀들만 거느리고 있기에 이런 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환의 언사가 난폭한 건 사실이다. 세자가 데리고 있을 여자에게 욕을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바로 이게 전국난세를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기질이었고, 말투였다.

씩씩거리는 호흡을 아직도 가누지 못한 이환이 연미각으로 통하는 협문夾門 앞에 이르렀을 때…….

“서라! 여기서부턴 남자들은 출입하지 못한다!”

별안간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 가벼운 무장 차림의 무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썩을 놈들!’

입 밖으로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욕을 이환은 꿀꺽 삼켰다. 이 시각이라면 성내 어디를 가더라도 수하誰何부터 하는 게 기본이다. 오늘 밤 성에서 통하는 음어陰語를 모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놈들은 그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다. 거죽성의 군기가 어느 정도나 해이해 있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나는 근위대 소속의 전령 이환이다. 세자 저하께 급한 전갈이 있어 전장에서 달려왔다!”

이환은 일부러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있을 증두신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오셨다는 건 내가 전해 드리겠소. 그러니 일단 물러가 기다리시오!”

“뭐라고? 대체 네놈은 누구냐?”

“이번에 새로 세자의 측근으로 발탁된 자요. 더 이상 소란 부리지 말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오!”

“뭐라고? 당장 네놈의 이름을 밝혀라. 세자 저하 앞에서 네놈의 잘못을 가리겠다!”

“새로 온 사람이라 이름을 밝혀도 모르실 터! 모르는 이름을 얘기해 봐야 서로가 입과 귀만 아플 것이오. 만약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포박을 하는 수밖에 없소!”

“뭐라고?”

이환은 머리 꼭대기가 화끈하게 타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게 솟구친 노기로 인해 쓰고 있는 투구가 밀려 올라갈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써늘한 냉기도 있었다.

‘예사로운 놈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앞길을 막는 자는 모두 베고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상대를 하고 있는 자는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뽑을 듯 자루까지 쥔 칼을 아직도 뽑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 번만 더 얘기하겠다! 지금 당장 세자 저하께만 드릴 보고가 있다. 당장 길을 비켜라. 아니면 모두 베고 들어가겠다!”

“이 몸도 세자 저하께 오늘 밤은 누구도 허락 없이는 들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소. 명을 받은 이 몸의 체면도 있으니 물러설 수는 없소. 자, 마음껏 해 보시오!”

정말이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놈의 응대에 이환은 새삼 마른침을 한 모금 삼켰다. 비로소 긴 시간 동안의 승마에서 오는 피로와 갈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이환도 그 혼란한 전장 바닥을 누비며, 전령이라는 막중한 임무로 잔뼈가 굵은 무장이다. 이대로는 결코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선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사실 그사이 이환은 몇 번이고 증선회의 전사를 알리고 싶었다. 그러면 이 귀찮은 문답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왕의 전사는 함부로 입에 올릴 게 아니었다. 아직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패주의 죽음을 경솔히 입에 올려도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적어도 현재 벌이고 있는 사문기와의 싸움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숨기거나, 아니면 몇 년 정도 가짜를 내세우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 그처럼 험악한 전국 세상인 것이다.

“말을 낸 이상 그 책임도 각오했을 줄 안다. 뽑아라!”

차앙!

말과 함께 이환은 기어이 칼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세자의 측근이라지만 이런 방자함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 얘들아, 묶어라!”

놈의 명령과 동시에 이환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일렁거렸다.

‘다섯, 일곱, 아홉…….’

그 공기의 흔들림으로 이환은 베어야 할 자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비록 두꺼운 갑옷 차림이지만, 전신의 감각만은 예민하게 살아 꿈틀거렸다.

꾸웅!

돌연 이환은 오른발로 지면을 세차게 찍었다. 갑상甲裳이 마주치며 철커덕 울리는 소리를 냈다.

“나 이환은 삼대에 이어 강왕실에 봉공奉公해 온 무장! 오늘이 바로 나라의 위기라고 봤기에 칼을 뽑았노라! 내 단심丹心을 아는 자는 길을 비키고, 막는 자는 베리로다! 이건 백오십 년 넘게 이 땅에 군림한 나라와 증씨왕조曾氏王朝의 안위를 위함이니, 귀로 들어 가슴에 새긴 자는 내 발길을 막지 말지어다!”

웅혼한 목소리로 크게 한소리 외친 후, 이환은 그대로 연미각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막아라. 베어도 좋다!”

여전히 차갑다 싶을 정도의 냉정한 어조로 놈은 어둠 속에서 명을 내렸다.

“명을 따르는 건 모실 주공主公을 정한 무인이 지켜야 할 일, 오늘 충신의 앞길 막음을 용서하시오!”

“부디 용서를!”

사방에서 말 소리가 들리며, 그보다 빨리 병장기의 예리한 날이 품고 있는 냉기가 이환을 에워싸고 누르듯 덮쳐 왔다.

아무리 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라지만, 이대로 달리면 어딘가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환은 달렸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린다고 해도 적어도 곧바로 죽지는 않는다. 세자인 증두신을 만나 전령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는 시간은 그 정도면 족했다.

“멈춰!”

어둠 속에서 날아든 병기들이 막 이환의 몸에 꽂히기 직전, 안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증두신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환의 전신을 도려낼 듯 날아들던 병기들이 씻은 듯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저하!”

이환은 증두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사이 서운했던 점이나 혹은 한순간 증오했던 감정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령은 말을 전하라. 전장에서 이 새벽에 달려와 내 잠을 깨웠으면, 그만큼 중요한 일일 거 아냐!”

증두신의 말에 이환은 투박한 천으로 만든 갑옷의 팔 가리개로 눈물을 닦았다.

“여기선 곤란합니다. 거처로 돌아가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려 주십시오.”

눈물 얼룩이 있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이환을, 증두신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따라와!”

짧게 한마디 한 증두신은 이환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 역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낀 듯 발길이 무척이나 빨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환도 그 뒤를 따랐다.

“너희들은 됐다!”

사람을 물리치라던 이환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뒤를 따르려는 측근들을, 증두신이 제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갈이 깔린 널찍한 마당의 한가운데 가 섰다.

“여기라면 누구든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고, 주변에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자, 이제 말해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환은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확실히 들은 말 그대로 누군가 접근하려면 자갈 밟는 소리가 날 테고, 확 트인 곳이라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이환은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잔뜩 억눌린 어조에, 흐느낌마저 스며 있어 자신조차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가?”

의외로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은 증두신은 담담한 태도였다.

“저하! 아니, 이제부터는 강회 땅 두 개 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각오를 단단히 가지시도록!”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울지 마라. 아버지는 무장이셨다. 죽을 자리에서 전사하신 것뿐이다!”

“오오!”

탄성도 오열도 아닌 기묘한 소리가 이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듣고도 침착한 증두신의 모습이 새삼 크게 보였다.

“하여튼 전달하느라 수고 많았다. 가서 쉬도록 해라. 차후의 일은 대소 신료들과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어느새 증두신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지만, 이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이환으로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증두신이 아버지의 부고에 당황했다면 보다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 어지러운 전국난세는 비록 아버지라고 해도 그 죽음을 슬퍼할 여유 따위는 주지 않는다. 오직 적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앞을 향해서만 달려야 한다.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이환이 물러간 후에도 증두신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겉으로 보였던 모습에 비해 속마음은 그리 모질지 못한 탓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증두신은 단호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퍼할 시간이 있으면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의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이 땅의 주인 자리를 비워 둘 순 없다. 당장 신료들을 소집해야겠군!’

그 결정에 의해 그날 거죽성은 밤을 잊었다.

* * *

“허허허…….”

사문기는 연방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지독한 패배였는지라 비참하다기보다는 차라리 허탈했다.

“웃을 힘도 아끼시오. 귀환은 무척 힘들 테니까!”

그런 사문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광운이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귀환이라… 허허허, 내가 무슨 낯짝을 들고 돌아가겠나?”

“그럼 왜 날 따라 전장에서 이탈을 했소?”

“언제 기회를 줘 본 적은 있나? 난 그곳을 내 죽을 자리로 봤었다.”

“그게 틀렸다는 거요.”

광운은 허리춤의 대통을 꺼내 그 안에 든 물을 사문기에게 권하며 느긋하게 웃었다. 보기에 따라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낭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 대체 왜 웃는 건가?”

건네받은 대통엔 입도 대지 않고 바닥에 내팽개치며 사문기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웃을 힘도 아끼라고 했더니, 되레 고함을 지르다니. 당신은 충분히 귀환하고도 남겠소.”

“뭐, 뭐라고? 당신? 당신이라고 했나?”

“내 계약은 이 전쟁으로 끝난 거요. 패한 전쟁이니 승전 수당이 없어 아쉽지만…….”

“다, 닥쳐라. 네놈을 당장, 당장… 에이익!”

“힘을 아끼시오.”

성질을 못 이겨 발작하려는 사문기에게 내뱉는 광운의 어투는 차디찼다.

“떠들면 적에게 들킬지도 모르니까.”

말은 그랬지만 광운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적의 총대장이자 왕인 증선회의 목을 베었으니, 강회군은 당장 사문기를 색출할 병력들을 낼 여유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아주 안심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강회군의 눈에 띄면 난처해질 것은 물론, 누군가 사문기의 모습을 알아보고 강회군에 고발을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허탈한 어조로 사문기는 새삼 물었다. 자기편인 건 알지만, 고용된 낭인들이 주축인 잡가군에 소속된 자들까지 일일이 알 수는 없었다.

“알아봐야 별 소용도 없을 거요. 다음 전장에서는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니까!”

“허어…….”

기가 막힌 사문기는 실소를 토하고 말았다. 잡가군에 소속되어 있는 낭인이 주인 격인 자신에게 이처럼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망연한 시선으로 앞서 가는 광운을 보던 사문기의 눈빛이 돌연 반짝였다. 말안장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사람의 모가지 하나를 본 탓이었다.

“그건 대체 누구의 목이냐?”

“이제야 보셨소? 바로 증선회의 목이오.”

“뭐라고?”

“온 전장을 누비며 그렇게 고함을 질렀건만 알지 못했다니, 정말 큰일 낼 대장이로군.”

“보자!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사문기로선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말을 광운의 바로 옆으로 바짝 붙였다.

광운은 말없이 증선회의 목을 건네주었다.

“오오, 확실히 증선회다. 증선회야!”

흐릿한 달빛에 목을 확인한 사문기는 신음처럼 증선회의 이름을 연발했다.

광운은 그 자리에 멈춘 채 묵묵히 사방만 경계했다. 지금 사문기가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양원, 영림 두 개 현의 젊은 패주 사문기의 전 기업을 송두리째 앗아 갈 뻔했던 인물이 바로 증선회다. 원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눈 깜박할 사이에 뒤바뀐 삶과 죽음의 자리에 대한 회한이 더 클지도 모른다. 또 숨을 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상대의 목숨을 노려야 하는, 전국난세를 사는 사나이들의 운명에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사문기의 속내를 짐작하며, 광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무이레의 그믐에 가까운 날카로운 편월이 서쪽 하늘에 걸려 희뿌염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시대와 인간은 미쳐 날뛰어도, 달은 여전히 떴다가 진다!’

문득 광운의 입 꼬리가 여린 웃음을 베어 물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자신의 심정도 사문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은, 씁쓸한 자조의 미소였다.

“어디 적당한 곳에 묻어 주도록 해라.”

광운은 증선회의 목을 받아 다시 말안장에 매달았다.

“예사로운 자는 아니라고 여겼다만, 증선회의 목을 벨 정도일 줄은 몰랐다. 좋아! 돌아가는 즉시 너에게 잡가군의 한 부대를 맡기겠다.”

사문기의 이 말은 정말이지 파격적인 것이었다. 잡가군 소속 낭인을 정식으로 녹祿을 주는 장수로 삼겠다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광운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 노릇을 하기 싫어 낭인으로 떠돌고 있다는 걸 모르시겠소? 고응성에 돌아가면 귀하의 슬하에도 숱한 인재들이 있으니 그들 중에 골라 쓰시오.”

“그 인재들의 태반을 이번 평사릉 전투에서 잃었다.”

“그래도 양원, 영림은 예로부터 호걸들이 많이 배출된 땅이오. 굳이 이 미친 구름이 필요한 일은 없을 게요!”

거절하는 광운의 어조가 너무 단호했기에, 사문기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잡가군 한 부대를 맡기겠다는 얘긴 거두겠다. 대신 당분간 고응성에 머물러 줄 수는 없겠나?”

“강회군이 곧바로 쳐들어올 거라 생각하시오?”

“증선회의 아들 증두신은 예사로운 자가 아니라고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따위에 연연할 인물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언제 한번 만난 적이 있으시오?”

“전쟁의 승패라면 몰라도, 간인間人(간첩)들은 나도 부릴 줄 안다!”

‘이런 걸 보면 아주 맹탕은 아닌데…….’

단순히 전쟁만 잘한다고 해서 뛰어난 무장이나 패주가 되는 건 아니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력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나 패주들의 사정에도 밝아야 한다. 그래야 이 전국난세에 처신을 그르치지 않는다.

“어떤가? 이건 양원, 영림 두 현을 지배하는 나의 부탁이라고 해도 좋다!”

“기대는 하지 마시오. 우웃!”

끼히히히힝-!

부정적인 대답을 하던 광운은 돌연 짧은 경호성을 토하며, 말 등에 몸을 붙였다. 뭐에 놀랐는지 말이 앞발을 번쩍 쳐들었던 것이다.

“진정해라, 질풍疾風! 대체 뭐에 놀랐느냐?”

자신과 늘 함께하는 두 마리 말 중 한 마리인 질풍을 진정시키며, 광운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전장에서도 놀라지 않는 말이 이처럼 날뛴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다.

“적인가?”

사문기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아니요!”

광운은 단정적으로 대꾸했다. 만약 적이었다면 질풍은 오히려 더욱 조용했을 터였다. 그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말[馬]이었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던 광운의 동작이 한순간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거기엔 한 구의 시신이 있었다.

다만 그뿐이라면 질풍이 놀랄 이유가 없다 싶어 광운은 좀 더 세심하게 시신을 살폈다.

여자였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듯, 피로 물든 아랫배 부분이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광운은 재빨리 여인의 경동맥頸動脈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맥을 확인할 것도 없이 벌써 동체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틀거리고 있는 여인의 하복부 쪽으로 왼손을 뻗은 광운은, 오른손으론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 손잡이를 잡아 갔다. 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경계를 한 것이다.

광운은 재빨리 여인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웃!”

다음에 광운의 눈은 놀람으로 커다랗게 불거졌다. 질풍보다 훨씬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아이였다. 그것도 아직 탯줄도 자르지 못한…….

금방 세상으로 나온 게 분명해 보였다.

“신기하군!”

광운과 함께 그 아이를 본 사문기의 첫마디였다.

확실히 그랬다. 통상 세상에 갓 나온 아기들은 울기 마련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아기는 전혀 울지 않았다. 흑요석黑曜石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이제 막 기울어지려는 조각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진즉부터 잡고 있던 칼을 뽑아 광운은 아이의 태를 잘랐다. 그러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정말 묘한 놈이로군.”

그때까지도 아이는 전혀 울지 않았다. 달을 향해 있던 눈동자를 광운에게 돌리며, 그 작은 입술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광운은 자신에게 시선을 맞춘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지만, 그 눈 속엔 막 기울어 가는 편월이 선명하게 자리해 있었다.

“편월…….”

자신도 모르게 광운은 나직이 내뱉었다. 눈을 뜨면 죽음만 보게 되는 이 난세에서 만난 작은 생명체!

광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얽혀 있는 강한 운명을 느끼며, 입고 있는 갑옷 안으로 아이를 밀어 넣었다.

그사이 사문기는 여인의 시신에서 뭔가를 주워 들었지만, 광운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가슴 언저리에 번져 가는 아이의 따스한 체온만을 흐뭇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두 개의 작은 봉분이 만들어졌다. 여인의 시신과 증선회의 목을 묻은 게 그것이었다.

일이 다 끝났을 땐 안개에 잠긴 새벽이 밝아 왔지만, 그때까지 편월로 이름 지어진 아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3

일단 거성居城인 고응성으로 돌아온 사문기는 활기를 되찾았다. 비록 돌아오기까지 이틀간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말이다.

“성지기 여형呂馨을 부르고, 즉시 사람들을 풀어 우리 측 패잔병들을 불러 모아라!”

성에 들어서자마자 고응성의 해묵은 망루에 서서 이렇게 명을 내린 후에야, 사문기는 아직도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광운을 돌아보았다.

“돌아올 수 있는 병사들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이렇게 묻는 사문기의 얼굴이나 목소리에는, 패전 직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기백이 팽팽하게 넘쳐 났다.

“글쎄요. 삼만이 갔으니 오륙 천은 돌아올 것 같소이다만…….”

“그 오륙 천에다, 여형에게 맡기고 간 군사가 오백! 올가을 추수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삼사 년은 문제없겠군.”

그렇게 계산을 거듭하고 있는 중에, 사문기의 출전 중 성의 수비를 명받았던 여형이 반 무장 차림으로 달려 올라왔다.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우선 주공의 개선을 축하드립니다!”

“닥쳐라! 졌다. 아주 철저하게 졌어!”

“그럼 그 패전을 축하드립니다!”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사문기를 억누르듯 여형은 다시 한 번 군례를 갖췄다.

‘예사 인물이 아니로군!’

일견 능글맞은 것처럼도 보이는 여형을 쳐다보는 광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마흔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여형의 얼굴에선, 사십 년 이상을 전국 바닥에서 뒹군 관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전쟁에 져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주군의 심기를 억눌러 가는 것도 그 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자는…….”

“잡가군 소속 광운이라 하오!”

“이번에 내 목숨을 구해 줬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묻는 여형의 말에, 광운과 사문기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가? 수고했다. 포상이 있을 것이니 내려가 기다려라!”

확실히 여형은 녹록지 않았다. 지금은 비상 시기니만큼 신분이 불분명한 낭인은 주공의 곁에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아니, 당분간 날 수행하라고 명해 뒀다. 이 자리에 있어도 좋다.”

물러가려는 광운을 사문기가 제지했다. 그를 어떻게든 곁에 묶어 두고픈 심경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그제야 여형도 광운을 의식하지 않고 사문기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성을 지키던 병사 오백에게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성 밖에 있던 백성들도 모두 대피시키고, 집에 있는 곡식들도 전부 식량 창고에 보관하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앞으로 오륙 천 명의 병사들이 더 이 성에 집결할 게다. 그때에 대한 대비는?”

“식량은 부족한 점이 없습니다. 일만의 군사가 반년은 농성籠城하면서 버틸 수 있습니다. 앞으로 백성들에게서도 더 나올 테니, 금년은 넘길 수 있습니다.”

“무기는?”

“그 역시 충분합니다. 갑옷과 창, 칼, 화살 등 모두 무기 창고에 가득 채워 뒀습니다. 물론 대장장이들은 지금도 주야로 무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걸로 되겠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곡류성曲流城에 구원을 청해야겠다. 사자使者는 누가 좋겠나?”

“그게 좀…….”

지금까지 막힘 없이 대답하던 여형은 금방 던져진 질문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문기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곳으로 보내는 사자, 그것도 구원을 청하는 사자라면 그에 걸맞은 직위와 관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자로 보낼 만한 자들은 이번에 치른 평사릉 전투에서 전사했거나,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은 파견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얘기다.

“어떤가, 광운? 자네가 한번 가 주지 않겠나?”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사문기는 약간 떨어져서 주변을 감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광운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오?”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지 못했나?”

“때로는 눈도 귀도 없애는 놈이오. 대체 무슨 말씀이오?”

“곡류성에 사자로 가 주게!”

“싫소!”

광운은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실제로 사문기와 여형의 얘기를 귀담아듣지도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곡류성에 사자로 가라는 그 용건만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왜 싫다는 건가?”

너무나 노골적인 거절에 얼굴이 조금 상기된 사문기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낭인을 사자로 보냈다는 얘기를 난 여태 들어 본 적이 없소. 게다가 누구를 보내도 이쪽의 뜻이 곡류성에는 통하지 않소이다!”

“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이번 평사릉 전투 때 귀하는 곡류성으로부터 오천의 군사를 빌렸소. 그런데 그들은 다 어디 있소? 구원군의 장수까지 전사시킨 마당에 더 이상의 원병을 보내 줄 것 같소?”

“말투를 삼가라!”

광운의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 싶었는지 듣고 있던 여형이 격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괜찮다. 이건 군사 문제! 군사 문제를 의논할 때는 말투를 꾸미지 않는 게 좋다.”

격앙된 여형을 눌러 놓은 뒤, 사문기는 광운에게 계속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광운은 이미 할 말은 다한 상태였다. 그저 입을 닫고 망루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동시에 광운은 짤막한 기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성 밖으로 펼쳐진 아스라한 평야의 끝, 양원 지방을 둘러싸고 있는 대진산맥大震山脈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뽀얀 먼지구름이 이는 걸 본 탓이었다.

분명 일단의 기마 부대가 달려오며 내는 먼지였다.

“몇 명 정도인가? 적인지 아군인지 기치를 확인하라!”

역시 그 먼지구름을 본 사문기가 외치듯 다급하게 말했다.

“숫자는 삼백에서 오백, 아직은 멀어서 기치가 보이지 않소!”

자기가 확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광운은 말해 주었다. 피아의 구분은 확실치 않았지만, 숫자는 가히 틀리지 않을 터였다.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 혹시 복귀하는 아군일지 모르니 성문은 열어 두되,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해라. 주방에 연락해서 돌아오는 병사들이 먹을 음식을 갖추는 것도 잊지 말고!”

명을 내리는 사문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형은 손수 북채를 쥐고 망루에 달린 큰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둥둥둥-!

급박한 북소리에 따라 성내도 어수선한 움직임으로 가득 찼다. 혹시 적의 공격일지 몰라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피신하는 아녀자들, 무장을 갖춘 채 각자 맡은 방어 위치로 달려가는 병사들, 그 병사들에게 무기들을 날라다 주는 병참 부대兵站部隊에 소속된 백성들…….

그 모든 움직임들이 높은 망루에서 내려다보니 개미 떼처럼 보였다.

“소관이 군사 일백을 이끌고 나가서 진을 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자기의 청이 받아들여지자마자 여형은 구르듯 망루에서 달려 내려갔다. 혹시 적이라면 밖에서 맞아 싸워 성문을 닫을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였다.

그 여형과 교차하듯 엇갈리며 스무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망루로 올라왔다. 말할 것도 없이 사문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디선가 ‘뚜우-! 뚜우-!’ 하는 소라고둥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여형을 선두로 한 일백여 기의 기마 부대가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토록 처참하게 패했으면서도 사기는 높군!’

먼지구름을 발견하고, 여형이 출동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본 광운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작디작은 양원과 영림 병사들의 기개를 본 듯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감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쨌든 성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직접적인 패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사기가 이 정도도 되지 않는다면, 애당초 강회군과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아직도 기치를 확인할 수 없는가?”

먼지구름이 산맥을 벗어나 평야로 성큼 다가섰을 때, 사문기는 다시 물었다. 말은 빨랐지만, 초조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직이오. 아, 아군이오. 유가군劉家軍의 기치요!”

정오를 갓 지난 강한 햇살 아래에서, 손으로 이마에 차양을 치고 먼지구름을 보던 광운이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그런가? 유가군인가? 용케도 살아남은 모양이군. 지금 즉시 주방의 아낙들에게 알려라. 돌아오는 병사들은 굶주려 있을 터, 음식을 성문까지 날라 놓으라고 해라!”

“존명!”

사문기의 명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우당탕거리며 망루를 달려 내려갔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신기한 놈이로군.”

여전히 먼지구름에 시선을 주고 있는 광운의 뒤에서 사문기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투로 말을 붙여 왔다.

“뭐가 말이오?”

“그 아이 새끼!”

사문기의 말에 광운은 자신의 갑옷 자락을 살짝 들춰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주운 편월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배가 고파서라도 울 터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울지 않다니, 혹시 벙어리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소.”

정말로 편월이 벙어리일 수도 있겠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울지 않는 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벙어리라고 해도 눈물은 있고, 말은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소리는 낸다.

“여형이 유가군과 합세해서 돌아오고 있군.”

그 말을 듣고서야 광운은 편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묘하게 그놈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무지 눈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곡류성에서 구원을 보내 주지 않을 것 같나?”

“이런 시대의 옹서지간翁壻之間이란 전혀 쓸모가 없소. 하긴, 내가 곡류성주라면 얼씨구나 하고 구원병을 내겠소. 손도 대지 않고 이 고응성을 냉큼 삼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곡류성주는 바로 사문기의 장인이다. 전국시대의 혼사가 흔히 그렇듯 이 역시 정략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정말로 장인이 사위인 날 노리고 있을까?”

“그저께까진 아니었을 게요. 혹시라도 강회군을 이길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패하고 난 오늘은 사정이 달라졌소. 패전의 뒤처리가 조금이라도 어지럽다면, 당장 이를 드러내고 덤빌 게요.”

“자네라면 어떻게 처리하겠나?”

“당장 거죽성에 사자를 보내 증두신과 화친을 맺으시오. 그리고 적어도 삼 년은 전쟁 없이 내부의 충실을 기하는 게 상책이오.”

“그 아비가 이번 전쟁에서 죽었는데, 증두신이 화친에 응할까?”

“증선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게 씌우시오. 낭인인지라 전쟁이 끝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면 될 것이오.”

“그걸로는 힘들 걸세!”

“힘든 걸 성사시키는 게 바로 백성을 다스리는 패주의 능력이오. 화친을 위해선 뭐든 하시오. 조공을 바치든지 아니면 인질을 넘겨주든지. 지금 다시 강회군과 전쟁을 치른다면, 내 장담컨대 이 고응성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적어도 금년은 버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문기에게 광운의 말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 옳은 소리였다.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죽고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시대에 장인을 믿고 구원을 청하려는 생각도 약해 빠졌고, 적과 화친을 맺을 방도도 강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도 사문기는 뼈에 사무쳤다.

“여 장군과 유가군이 돌아왔으니, 난 이만 내려가겠소. 오늘 하루 쉬고, 날이 밝는 대로 고응성을 떠나겠으니 통행증이나 마련해 주시오. 다음에 어느 전장에서 만나든 그때까지 몸 보중하시오!”

정중하게 군례를 갖춘 후, 광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루를 내려왔다.

망루 바로 옆은 성문이었다. 거기엔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방금 복귀한 유가군이 연출해 낸 것이었다.

하나같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꾀죄죄한 몰골에, 눈만 새카맣게 반들거리는 얼굴들이었다.

개중에는 바지에다 변을 지린 자들도 더러 보였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얘기다.

그런 모습을 한 인간들의 입에는 음식이 비어져 나올 듯 가득했다. 아직 채 삼키기도 전에 다른 음식을 맨손으로 잡아 가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애처롭고 힘겨웠다.

그래도 광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지나쳤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광운이 찾은 곳은 기루였다. 아직 대낮이고, 또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지라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여긴 손님 안 받나?”

자신을 반기는 점소이조차 나오지 않자 광운은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회계대 뒤의 쪽문이 슬며시 열리며, 닳고 닳은 인상의 점소이가 뛰어나와 반기는 체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때가 때인지라 미리 영접을 못 했습니다요. 혹시 찾는 기녀라도 있으신지요?”

입가엔 미소, 말은 녹을 것처럼 달콤했지만, 점소이의 미간은 언뜻언뜻 찌푸려졌다. 광운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은 탓이었다.

실제로 광운의 몸에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악취가 났다. 그 역시 땀과 먼지, 그보다 더 많은 피에 절었고, 또 편월이 가슴에 안겨 있어서였다. 비록 울지는 않았지만, 생리 현상까지 멈춘 건 아니기에 그사이 많은 변을 지린 것이다.

“기녀는 필요 없고, 목욕물과 젖 잘 나오는 아녀자 한 명을 구해 오너라. 아기가 있다.”

필요한 것을 말하며, 광운은 은자 두 냥을 점소이에게 주었다.

악취에도 불구하고 점소이는 입이 귀에 걸린 채 광운이 말한 걸 준비하기 시작했다.

목욕이 끝났다. 어른인 광운이 느끼기에도 약간 뜨겁다 싶을 정도의 물로 편월과 함께 씻었음에도, 녀석은 역시 울지 않았다.

편월을 침상에 눕힌 광운은, 이번엔 빨래를 시작했다.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옷도 물론 있었지만, 이처럼 빨아 입을 수 있을 땐 아끼는 게 좋다.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광운을 찾아왔다. 한 명은 부탁했던 유모乳母, 다른 한 명은 사문기가 보낸 병사였다.

속곳 차림인지라 광운은 편월을 유모에게 맡겼다. 더불어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좀 사 달라며 다시 은자 두 냥을 주었다.

그 뒤에야 광운은 사문기가 보낸 병사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편하게 말하시오. 무슨 일로 왔소?”

탁자 위에 놓인 십여 종의 기괴한 병기를 본 병사는 바짝 주눅이 들었고, 광운은 그 긴장을 풀어 주려 부드럽게 말하며 염두를 굴렸다.

‘혹시 사문기가 날 잡아 두려는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처럼 병사를 보낼 턱이 없었다.

하지만 병사가 꺼낸 말은 전혀 뜻밖의 얘기였다.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병사가 내놓은 것은 하나의 목걸이와 작은 전낭錢囊 그리고 통행증으로 보이는 종이였다.

“주군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이 목걸이는 그 아, 아이 새끼와 함께 있었던 여인의 것이다.’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병사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으스스한 빛을 뿌리는 병기들과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 자국이 가득한 광운 앞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광운은 병사가 두고 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꽤 고급스럽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달리 흥미를 끌진 못했다.

아무렇게나 목걸이를 던져 둔 광운은 통행증을 신중하게 갈무리했다.

이게 없으면 몇 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는 대륙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된다.

그 후에야 광운은 다시 못다 한 빨래를 끝냈고, 갑옷을 세심하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 * *

강회군이 고응성을 포위한 것은 그 다음다음 날이었다.

새카맣게 몰려들어 알록달록한 숱한 기치의 색깔로 대지를 물들이고 있는 강회군의 모습을 보면서, 광운은 대진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때에도 편월은 광운의 품에 안겨서 흑요석보다 더 새카만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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