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다음은 저기요!”
나는 젤리 꼬치 든 손으로 우측 전방을 가리켰다. 미니 서커스단이 화려한 불쇼를 벌이고 있었다.
세드릭은 착실히 내가 가리킨 곳으 로 걸음을 옮겼다.
세드릭이 움직일 때마다 두둥실 시 야가 위아래로 울렁였다. 나는 세드 릭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힘들어요?”
별 질문을 다 한다는 듯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전혀 안 힘듭니다.”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현재 나는 세드릭의 등에 업힌 채
해변 축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축제 구경은 하고 싶은데, 걷긴 힘 들다고 우는 소릴 하던 날 위해 세 드릭이 생각해낸 조치였다.
평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맡는 공기라 그런가, 짭짤하면서도 시원 한 공기가 가슴을 채웠다.
해변의 저녁은 도시의 저녁보다 서 늘했다. 하지만 축제가 한창인 거리 의 열기는 밤바람의 서늘함조차도 이겼다.
업힌 채로 이리저리 방향을 지시하 는 여자와 그녀를 업은 남자. 조금 은 독특한 조합에 행인들이 계속해 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와
세드릭이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좀 색다른 기분이네.’
제도에서는 어딜 가든 시선이 뒤따 랐으니까.
이곳에선 우리 이름을 수군거리는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었고, 다음 날 신문에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이 실려 있을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세드릭에게 업힌 채로 발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 편하다.”
헤헤 웃으며 말하자 세드릭이 픽 웃음을 돌려주었다.
“이대로 제도까지 돌아갈까요?”
“진짜요? 오붓하고 좋겠다.”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우 리는 축제를 실컷 구경했다.
다트 던지기 천막에서 경품으로 커 다란 인형을 타기도 했고, 온갖 길 거리 음식도 잔뜩 먹었다.
지금 멈춰선 곳은 캠프파이어 근처 였다.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사람 들이 빙글빙글 돌며 포크 댄스를 추 고 있었다.
따스한 불의 열기에, 흥겨운 음악 과 줌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나른하 게 풀어졌다.
최고의 여행이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을 만큼 행복했 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완벽한 순간을 만끽하던 때였다.
“진짜 용하다. 나 온몸에 소름 돋
았어.”
“나도, 나도. 점술가님, 괜히 유명 하신 게 아니구나?”
‘점술가님?’
문득 아까 낮에 꼬마에게서 받았던 쿠폰이 떠올랐다.
미래 엿보기 1회 무료 쿠폰…… 이었지, 아마.
점술가 천막이 이 근처에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순간 깜 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세드릭. 저기 줄 선 것 봐요!”
저 멀리 인파가 뱀처럼 길게 늘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기가 점술가 천막인가?”
저렇게 많은 사람이 찾을 정도로 용하단 말이야?
나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서 리나에게 점괘를 본 이야기를 들려주면 무척 좋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가볼까……?”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아까 대충 쑤셔 넣어 놓았던 쿠폰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쪽지를 꺼낸 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보였다.
[미래 엿보기 1회 무료 쿠폰!]
쪽지 위로 발랄하게 쓰인 글씨가 눈을 사로잡았다.
“이거 분명, 줄도 무시할 수 있는 쿠폰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 또 뵙네요!”
그때 해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 다.
고개를 돌리자 낮에 보았던 그 꼬 마가 거기 서 있었다.
“찾아주셨군요! 잘 생각하셨습니 다!”
꼬마가 싹싹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로 다다닥 달려왔다.
“쿠폰 갖고 계시죠? 보여주시면 바 로 입장하실 수 있어요.”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보고 갈래요? 몇 달 전에 한 번 타로를 본 적이 있는데, 결과는 영 꽝이었지만 재미는 있었거든요.”
“가시죠.”
세드릭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꼬마의 안내를 받아 사이좋 게 천막 안에 들어갔다. 줄을 서 있 던 사람들이 질시와 선망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야, 뭐야. 왜 그냥 들어가?”
“그거 아냐? 뽑기에서 쿠폰 뽑은 거!”
“와, 진짜 운 좋다.”
수군거림을 한몸에 받으며 우리는 점술가를 찾았다.
천막 안은 고요한 분위기였다. 바 깥은 밝고 시끌벅적한데, 고작 한 꺼풀 안에 들어왔다고 빛과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테이블 위에는 오묘한 빛을 띤 수 정구슬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 희미한 향을 피워 놓았다. 나는 코 를 찡그렸다.
‘자스민 향기.’
심신을 진정시켜주는 냄새였다. 손 님을 향한 적절한 애티튜드에 기분 이 좋아졌다.
“어서 오십시오.”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귀에 익었 다.
점술가의 얼굴을 흘긋거린 나는 곧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엇, 당신은?”
“……아리엘 님?!”
점술가 역시 나를 알아본 듯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아, 여기서 또 뵙네요! 이렇게 먼 곳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원래 방랑하는 것이 취미인지 라…… 아리엘 님이야말로 유페리아 섬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신혼여행 왔어요.”
“ 예?”
점술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우리의 결혼 소식을 모르다니, 최 근 제도를 떠나 있었던 게 맞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 곁에 서 있는 세드릭을
가리켜 보였다.
“제 남편이에요.”
남편이라니. 언제 말해도 간지럽고 이상한 어감이었다.
세드릭이 점술가에게 악수를 청했 다.
“제 아내의 지인이십니까?”
“예? 예, 그렇다고 할 수 있…… 아, 아니, 그런데 혹시 공작 전하 아니신가요?”
점술가가 허둥지둥 세드릭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세드릭이 빙긋 웃 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세드릭 레이너 에반스입니다. 아 리엘의 남편이죠.”
뿌듯한 미소가 세드릭의 얼굴을 밝 혔다.
그 미소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점술가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아, 그, 그러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공작 전하……!”
세드릭과 악수를 한 점술가가 나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마치 ‘해내셨군 요, 아리엘 님!’ 하고 외치고 있는 듯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리엘 윈스턴’이 오랜 기간 세드 릭을 짝사랑해왔다는 것은 제도의 공공연한 가십거리였으니, 우리의 결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종종 이 런 식으로 나를 죽하해주곤 했다.
어린 영애들 사이에는 ‘기다림은 승리한다!’면서 포기하려던 짝사랑 을 이어가는 유행이 번지고 있다고 들었다. 좋은 영향인지 나쁜 영향인 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방긋 미소를 짓곤 자리 에 앉았다. 점술가가 흥분한 것이 역력한 손짓으로 카드 뭉치를 꺼냈 다.
“이렇게 아름다운 신혼부부께서 저 를 찾아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애정 운으로 보시나요?”
“네!”
활짝 웃으며 끄덕이자 점술가가 검 은 천 위로 카드를 주르륵 펼쳤다.
오묘한 문양의 카드에 시선이 쏠려 있는데, 점술가가 세 장을 고르라고
속삭였다.
“음.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요.”
거침없이 카드를 고르자, 점술가가 즉시 내가 고른 카드들을 펼쳤다.
‘ 오.’
펼쳐진 카드들은 척 보기에도 희망 차 보였다.
첫 카드에는 찬란한 태양이 그려져 있었고, 두 번째 카드에서는 연인이 서로의 팔로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웬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는 마지막 카드가 가장 애매했는데, 장식이 화 려하고 아름다운 걸로 보아 나쁜 카 드는 아닌 듯했다.
오, 이것은.”
점술가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으흠, 오호라
카드를 찬찬히 살피며 점술가가 계 속해서 감탄했다.
이거 은근히 조바심이 드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점술가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점술가가 환한 얼굴로 고 개를 들었다.
“이것, 참. 두 분, 천생연분이시군 요!”
“와! 그렇대요?”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기뻐했 다. 점술가가 흐뭇한 표정으로 카드 들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 태양 카드를 보세요. 두 분 의 앞날에 환한 빛만 가득하리라는 걸 암시하고 있어요. 운명을 만난 두 사람 앞에서는 곤경이 나타나더 라도 금세 기가 죽을 거라는군요.”
“어머나.”
나는 흥미진진하게 설명을 들었다.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콧대 높게 말 해왔던 나지만, 좋은 이야길 해 주 니 기분이 좋았다.
태양 카드와 수레바퀴 카드를 번갈 아 짚으며 설명하던 점술가가, 이번 엔 가운데에 있는 연인 카드를 짚었 다.
“그리고 여기 이 카드는
나는 또 다른 덕담을 기대하며 눈 을 빛냈다.
연인이 그려진 카드는 애정운을 보 고 있는 지금, 누가 봐도 최상급 카 드임이 분명했다.
한껏 기대를 끌어올리며 점술가의 입술에 집중하던 때였다.
“두 아기 천사님들이 찾아오리라는 징조군요.”
“아기 천사?”
나는 기대하는 눈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좋은 소리 같기는 한데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점술가가 활짝 웃으며 나와 세드릭 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축하드립니다.”
“쌍둥이세요.”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네?”
갑작스러운 단어를 뇌가 이해하지 못했다.
점술가가 만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 년 안에 두 아기님이 찾아올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네?”
나는 여전히 당혹에 빠져 더듬거리
며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은 나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쌍둥이라니……/
세드릭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큰일이군요. 모체에 부담이 클 텐 데…… 정말 큰일입니다. 실력 좋다 는 산파와 마법사는 모두 불러야겠 군요.”
점 보는 거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관심이 없긴커녕 철석같이 믿고 있 는데?
나는 아직도 멍한 머리를 문지르며 다시 연인 카드를 쳐다보았다.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이라 아찔하 기 그지없었다. 세드릭과 내가 얼마 나 천생연분인지 덕담이나 기대하고 있던 와중이라 더 그랬다.
‘어,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건가?’
만약 점술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물론 나는 미신은 믿지 않는 편이 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점술가가 정말 용해서 진짜 미래를 예언한 거 라면.
나는 잠시 두 아기를 끌어안고 있 는 세드릭을 떠올려 보았다.
‘나쁘지 않…… 나?’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입가에 미 소가 떠올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점술가가 더없이 흐뭇한 표정으 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