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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51화 (151/153)

〈외전 5화〉

호 # 호

[그쪽은 날씨가 어때요?]

반질반질한 수정구슬 너머에서 샤 를로트가 눈을 반짝거렸다.

나는 대답 대신 수정구를 반대편으 로 돌려주었다.

[와아!]

곧장 수정구로부터 탄성이 터져나 왔다.

“ 예쁘죠.”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샤를로트 가 보고 있을 광경을 함께 쳐다보았 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바다, 영롱하 게 내리쬐는 태양 빛. 분홍빛 모래 사장. 그 위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 는 사람들.

지상에 천국이 존재한다면 그 이름 은 유페리아 섬일 것이 분명했다.

[당장 뛰어들고 싶은 바다네요.]

“그렇죠? 저도요.”

[으응……? 아리엘은 그냥 뛰어들 면 되잖아요.]

“음…… 그렇죠. 이론적으로는.”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나는 해변가에 놓인 천막 아 래 선베드에 늘어지라 누워 있는 상 태였다. 파라솔 너머로 내리쬐는 따 스한 햇볕에 이대로 마시멜로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다.

[이론적으로는?]

수정구 너머에서 샤를로트가 고개 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바다에 못 들어가는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나는 옆을 돌 아보았다.

“ 왤까요?”

돌아본 곳엔 세드릭이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시선을 내려뜨리고, 귓불을 붉게 물들인.

지금 나는 바다에 들어가기는커녕 수영복조차 입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가린 얇은 가운을 내려다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 다.

남들이 보면 피부가 타는 걸 죽도 록 무서워하는 영애인 줄 알 것이 다.

사실 난 태닝을 좀 하고 싶었다. 전에 휴가 다녀온 샤를로트가 과시 하듯 온몸을 갈색으로 그을리고 나 타났던 게 부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피부를 드러내고 햇볕 아래 태우는 일 따윈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수치심을 아는 레이디였으니 까.

샤를로트와 나는 짧게 더 시시덕거 린 뒤 수정구 연결을 끊었다.

텅 빈 수정구를 옆으로 치워 놓으 며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샤를로트가 계속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날이 좋은데 왜 물에 들어가 지 않느냐고요.”

“……그, 렇습니까?”

양심은 있는지 세드릭이 말을 더듬 거렸다.

“아무리 샤를로트가 친한 친구라지 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는 없었어요. 누가 내 몸을 성한 곳 없이 물고 씹어놓는 바람에 차마 옷 을 벗을 수가 없다고는……『

세드릭이 사레들린 듯 헛기침하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콜록거리는 게 그답지 않게 귀여웠기 때문에 좀 봐주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세드릭이 다시금 사과를 해 왔다.

사과할 일은 맞았으므로 난 거만하 게 눈을 내리깔았다.

“목말라요.”

“여기 드시던 음료입니다.”

세드릭이 아까까지 내가 마시던 칵 테일을 대령했다. 개인 집사를 둔 기분이었다.

“다른 서비스는 없나요?”

턱 끝으로 그를 부릴 수 있는 기 회는 흔치 않았기에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사용하기로 했 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음, 글쎄요. 뭐가 있을까

나는 고민하는 척 말꼬리를 늘였 다.

세드릭은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기세로 충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지금이라면 정말 뭐든 들어주겠는 데.’

뭔가 어마어마한 것을 말해도 분명 고개를 끄덕일 거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에 세드릭을

벗겨 먹는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목이 결려요.”

“마사지사를 불러올까요?”

당장 일어날 기세로 세드릭이 말했 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그럼 제가……『

“그건 더 아니거든요.”

나는 흘긋 세드릭을 째려보았다.

또 한 번 작게 한숨을 내쉰 내가 지나가듯 말했다.

“누가 받쳐 줬으면 좋겠는데.”

“목이 결려서, 누가 받쳐 줬으면 좋겠다고요.”

나는 세드릭을 지그시 쳐다보며 다 시 말했다.

세드릭은 한 차례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더니, 머뭇머뭇 손을 들어 내 뒷목을 받쳤다.

“……그거 아니거든요.”

“ 네?”

“하아, 손 이리 줘요.”

나는 박력 있게 세드릭의 손을 끌 어당겼다. 그가 속수무책으로 끌려 왔다.

세드릭에게 안기듯 팔베개를 한 나 는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이제 좀 편하네요.”

그러자 세드릭의 얼굴이 누가 불을

붙인 듯 새빨개졌다.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그를 보 자 새삼스러운 감회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바랐던 그림 이 바로 이거잖아.’

멋지게 리드하는 나와 수줍게 나를 따라오는 세드릭. 문득 이 광경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된 나는 뿌듯함 을 느꼈다.

‘하룻밤 새에 나도 레벨업을 했나 봐.’

세드릭은 나를 품 안에 넣고서도 붉게 열 오른 채로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왠지 그 모습이 조금 가증스럽게 느껴져, 나는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그에게 전했다.

“세드릭, 지금 그 표정 좀 가증스 러운 거 알아요?”

“ 예‘?”

세드릭이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나 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했 다.

“달라도 너무 다른데요? 어제 제 위에 있던 사람의 얼굴하곤…… 읏?”

시야가 깜깜했다.

세드릭은 내 입을 막는 대신 나를 품에 꼭 안아버렸다.

셔츠 너머로 보이는 피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의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기, 있잖아요.”

세드릭의 품속에서 꿈지럭거리며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가슴에 부딪 혀 웅웅거렸다.

“저 아직 온몸에 성한 곳이 없는 데……/

“위로의 키스라도 해 주세요.”

세드릭의 몸이 흠칫거렸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콕콕 찔렀 다.

“세드릭?”

그제야 그가 나를 풀어주었다.

세드릭의 손이 내 뒤통수를 조심스 레 감쌌다. 나는 살며시 위를 올려 다보았다.

조심스러운 손길, 그보다 더 긴장 한 얼굴에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몰 려 왔다.

그때 역시 처음엔 지금 같았다. 신 사가 따로 없었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처음 침 대에 등이 닿았던 그때 역시 세드릭

은 지금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피부에 닿는 그의 숨결은 꾹 억누 른 듯 불규칙하게 호흡하고 있었고, 조금씩 움직이는 손짓은 행여나 내 가 유리병처럼 깨어질세라 조심하는 사람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희미 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웃음과는 별개로, 어젯밤의 기억이 그대로 공명하는 것처럼 갑 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할 만큼 숨 막히는 긴장이 호흡을 막았다. 나는 어느새 웃음기를 거두고 눈을 감았

다.

떨리는 숨결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 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해맑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끔뻑였 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세드릭이 속삭였 다.

“무시하면 갈 겁니다.”

“관광객이 신가요?”

해맑다 못해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한 목소리가 또 외쳤다.

파라솔이 크게 드리워져 있어 밖에 서는 안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드릭의 품에서 꾸물꾸물 빠 져 나와 몸을 일으켰다.

“어어, 왜 그러니?”

“역시 관광객이시군요!”

꼬마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어린애만 아니었더라도 무시하고 하던 일을 마저 했을 텐데. 나는 머 리를 긁적이며 살짝 파라솔을 걷었 다.

“무슨 일이야?”

파라솔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가 보였 다.

목에는 열대 꽃 목걸이를 걸고 머 리에는 수경을 걸친 꼬마는 살아 숨 쉬는 이 해변의 마스코트 같았다.

꼬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저희 해변에 서 이벤트를 열고 있는데, 참여하지 않으시 겠어요?”

“이벤트?”

“네! 이 안에서 쪽지만 뽑아주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며 꼬마가 웬 분홍색 항아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좋은 거야?”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꼬마가 활 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건 없어요!”

“좋아. 나중에 돈 내라고 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이벤트예요!”

“안에 뱀 같은 거 넣어 놓고 장난 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너무 놀린 건지 꼬마가 울상이 되 었다.

나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좋아. 믿어 볼게.”

그렇게 말한 나는 진지한 얼굴로 항아리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세드릭이 셔츠를 여미며 다가왔다.

“뭡니까?”

“음, 사각사각한 게…… 종이 같은 데요?”

“네, 맞아요! 종이예요! 이제 뽑아 주시면 돼요.”

꼬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항아리에서 손을 뺐다. 종잇 조각 안에 귀여운 글씨체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미래 엿보기 1회 무료 쿠폰?”

“헉, 그걸 뽑으셨군요!”

꼬마가 짝짝짝 손뼉을 쳤다. 열렬 한 반응에 아주 살짝 호기심이 갔 다.

“이게 뭔데?”

“점쟁이 마녀님께 점괘를 1회 무료 로 받을 수 있는 쿠폰이에요! 줄도 무시하고 바로 입장할 수 있답니 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줄을 무시할 수 있다는 대목이 마음에 들 었다.

문제는 내가 미신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세드릭, 공짜 점이라는데 관심 있

어요?”

“글쎄요. 평소에도 관심 없지만, 지 금은 더더욱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지분거리 며 세드릭이 한숨 쉬듯 말했다. 다 행히 꼬마에게는 보이지 않는 방향 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꼬마를 돌아 보았다.

“미안. 우리 둘 다 관심이 없어. 기왕 당첨된 거니까 쪽지는 다른 사 람에게 넘겨줄래?”

“아…… 그러시군요!”

꼬마가 몹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 다.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실지도 모르니까 갖고 계셔 주세요. 당첨 쪽지를 양도하는 건 금지되어 있거 든요! 프리미엄 거래를 제한하기 위 해서요!”

오, 꼬마가 어려운 말도 아네.

나는 기특한 꼬마에게 아직 안 깐 코코넛 튀김 봉지를 들려주었다. 좋

아하는 간식인지 꼬마는 언제 시무 룩했냐는 듯 싱글벙글해져선 돌아갔 다.

“출입 금지 팻말이라도 앞에 박아 놓고 와야겠습니다.”

내 허리를 끌어당기며 세드릭이 말 했다.

“바다 구경, 더 하실 겁니까?”

“글쎄요, 어쩔까……『

나는 짐짓 고민하듯 뜸을 들였다. 세드릭이 안달하듯 내 어깨 위로 고

개를 묻었다.

나는 가늘게 웃음을 흘렸다.

“아뇨. 이제 바다는 질릴 만큼 본 것 같아요.”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천장에 매달린 술을 잡아당기 자 천막 문이 사르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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