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머리가 말뜻을 해석하기도 전, 뺨 에 먼저 화르르 열이 올랐다.
“어,어디를…… 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바보같이 더듬거렸다.
그게 또 재미있는 듯 세드릭의 입 가에 미소가 번졌다.
“침실은 이 층에 있습니다.”
“그. 그렇더군요.”
기계처럼 뻣뻣한 목소리가 나왔다.
당황한 머리가 폭주하듯 팽팽 돌아 갔다.
‘일 층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있 나?’
식사는 마쳤다. 후식까지 모조리.
창 너머로 아름답게 노을 지고 있
는 바다가 보이기는 했지만, 이미 실컷 구경하다 오는 길이었다.
‘이제 시간도 많이 늦었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 역시 곧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잠을 자 고……/
그리고 내 몸은 꽤 지친 상태였다. 아침부터 많은 일정을 소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머지않아 결론이 나왔다. 올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만 길었던 하루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심장은 도리어 길고 길었던 오늘 하루 중 가장 세차게 뛰기 시 작했다.
‘진정. 진정해.’
나는 스스로를 강하게 타일렀다.
난 세드릭 앞에서는 특히 감정이 다 티가 나는 편이니까, 반드시 침 착해야 했다.
‘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냥 잠을 청하러 가는 것일 뿐이 다.
스스로를 열심히 세뇌하며 나는 자 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세뇌가 너무 강했던 걸까. 스프링 튕기듯 일어난 나를 세드릭 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리엘?”
나는 세드릭의 놀란 눈빛을 못 본 척 밝게 웃어 보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는다고 웃은 건데, 세드릭 눈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괜찮습니까?”
“그럼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뻔뻔스레 내뱉었지만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이 층엔 방이 몇 개일까?’
……하나겠지. 이 별장은 외견부터 내부까지 모두 아주 아름답고, 우아 했지만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방이 하나라면 그 안에 침대는 몇 개일까?
‘상식적으로 하, 하나겠지.’
신혼부부가 머무는 침실에 침대 가 두 개인, 그런 기묘한 상황이 벌 어질 리 없었다.
세드릭은 갑자기 고장 난 나를 살 피듯,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문득, 그 역시 나처럼 긴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결혼이 처음인 건 나처럼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는 나 이전엔 가벼운 연애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교계 가십에 빠삭한 루나의 귀띔에 의하면 그랬다.
결혼은 물론 제대로 된 연애가 처 음인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난 세드릭보단 사정이 나았 다.
‘내가 여태 읽은 로맨스 소설이 몇 권인데!’
글로 배운 연애라 해도 안 배운 것보단 나을 것이다.
몇 가지 이유 끝에 나온 결론은 이랬다.
내가 세드릭보다 조금이나마 더 경 험이 많으니, 마땅히 내가 리드해야 만 했다.
부끄럽고 떨린다고 마냥 소극적으 로 수줍어하고 있어서는 안 됐다.
‘좋아.’
나는 온 용기를 끌어모은 뒤, 홱 고개 들어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살짝 당황한 눈으로 나를 마 주 보았다.
나는 낚아채듯 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손을 휘어 잡힌 세드릭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선언 하듯 말했다.
“갑시다. 이 층으로.”
“……네.”
세드릭이 조금 멍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최대한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연출 하고 싶었지만, 과하게 기합이 들어 간 다리는 로봇처럼 팔과 다리가 같 이 움직였다.
‘안 돼. 긴장하지 말자.’
내가 긴장하면 세드릭은 더 긴장하 고 말 거다.
계단을 모두 올라선 나는 갈림길을 맞닥뜨렸다.
왼쪽으로 가면 테라스, 오른쪽으로 가면 침실로 이어지는 갈림길이었 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여전히 한쪽 손으 로는 세드릭을 끌고 있는 상태였다.
당차게 문을 연 나는 순간 잠시 굳어버렸다.
커다란 방엔 침대가 예상대로 하나 뿐이었다. 짐작했으니 그건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대의 생김새가 지나치
게, 뭐랄까. 낭만적이었다.
하얀 침대 위의 캐노피로부터 하늘 하늘한 레이스 커튼이 나비 날개처 럼 늘어져 있었다. 로맨스 소설 속 삽화에서나 봤던 로맨틱한 광경이었 다.
그 옆에 놓인 협탁에는 은은히 향 초가 타오르고 있었는데, 관능적인 자스민 향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 다.
‘신혼부부의 침실’을 형상화한 듯 한 광경에 나는 또 바보처럼 굳어버 렸다.
‘안 돼 안 돼.’
여유롭진 못할망정 긴장은 하지 말 자.
속으로 다시 한 번 각오를 되뇐 나는, 세드릭을 방 안으로 끌어당기 고 박력 있게 침실 문을 닫았다.
쾅!
‘으앗.’
깜짝이야. 너무 세게 닫았는지 소 리가 조금 크겨] 울렸다.
어깨를 움찔한 나는, 아무렇지 않 은 척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가장한 채.
그런데 돌아본 세드릭은 긴장으로 굳어있기는커녕……소
웃고 있었다.
“……지금 웃고 계신 거예요?”
나는 충격에 젖어 속삭였다.
내 필사적인 리드가 세드릭에겐 웃 음거리였단 말인가?
내 목소리에 세드릭이 더 이상 참 지 못한 듯 쿡쿡대며 소리 내어 웃
기 시작했다.
“웃지 마세요!”
억지로 용기 냈던 것이 다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눈치를 챘으면 맞춰주진 못할망정 웃음이나 터뜨리는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웃음이 나와요, 지금?”
나는 울컥해서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세드릭은 그제야 표정 관리를 하려 는 듯했지만, 그래도 입가에 잔상처 럼 남은 웃음기가 사라지진 않았다.
‘긴장한 건 나뿐이었어.’
세드릭은 웃음이나 나올 정도로 여유로웠던 것이다. 강한 배신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입술을 깨문 나는, 아직까지 쥐고 있던 세드릭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 다.
예상치 못했는지 세드릭이 손쉽게 끌려왔다.
“아리엘?”
세드릭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손목 쥔 채 그대로 성큼성큼 침대를 향해 걸어 갔다. 세드릭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 히 끌려왔다.
침대 앞까지 도달한 나는 그를 침 대 위로 던지듯 앉혔다.
웃음을 터뜨린 죄를 아는 건지, 세 드릭은 내가 던지는 대로 얌전히 침 대에 앉았다.
그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
다보았다.
“아리엘? 진짜 화났습니까?”
“ 아뇨.”
나는 코웃음을 쳤다.
화가 난 것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약간 울컥했을 뿐이다.
세드릭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웃 음이나 흘릴 정도로 여유롭다면, 나 역시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세드릭의 턱 밑을 들어 올렸다.
세 드릭.”
침실 안을 가득 채운 자스민 향 덕분인지,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세드릭이 둥그렇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혹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에 만족 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여태까지 세드릭의 시 야는 이랬구나.’
침대에 앉은 세드릭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늘 보던 각도와 다르니 생소하기도 했고……오
까치발을 들어야 했던 이전과 달리 입 맞추기도 훨씬 쉬워 보였다.
울컥함과 창피함은 어느샌가 깨끗 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아 래로 숙였다. 세드릭은 여전히 당황 한 표정이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이 었다.
‘ 어?’
몸이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발이 휘청였다. 아래까지 늘어져 있는 침대보를 잘못 밟은 것이다.
“으앗I”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짚 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려던 때, 강한 손아귀가 나를 끌어당겼다.
“아!”
넘어지는 대신 세드릭의 가슴팍을 짚은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렸 다.
엎어진 나를 받치느라 세드릭의 상 체가 뒤로 쓰러졌다.
“ 괜찮아요?”
황급히 세드릭의 가슴에서 손을 떼 며 내가 말했다. 몸무게가 다 실렸 는데, 아팠으면 어떡하지!
얼른 떨어지려는 내 몸을 커다란 손이 또 한 번 끌어안았다.
“……아하하.”
온몸으로 쓰러진 나를 안은 채, 세 드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 다.
분위기 잡다가 넘어질 뻔한 상황이 몹시도 재미있었는지 그는 눈꼬리까 지 접어가며 시원하게 웃었다.
으윽
이번에야말로 창피해서 얼굴로 확 열이 올랐다.
분위기 좋았는데. 어떻게 그 타이 밍에 침대보를 밟는담. 나는 리드에 아무런 재능이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세드릭이 갑자 기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의 손이 내 뒷덜미를 감싸 안았 다.
이번에야말로 두 입술이 맞닿았다.
“ 0”
“77’
정신을 온통 앗아갈 정도로 황홀한
입맞춤과는 별개로, 나는 또 조금 분해 졌다.
역시 세드릭의 여유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능숙히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짓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등에 그의 다른 쪽 손이 닿은 순간.
‘아……/
나는 그가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감싸 안은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세드릭 역시 나만큼이 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아니, 애초에 누가 한 수 위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를 통해 배워가게 될 터 였으므로.
그제야 나는 괜한 오기를 버리고 세드릭의 품 위로 완전히 무너져 내 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