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49화 (149/153)

〈외전 3화〉

‘설마 칸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아제키안은 로드와 결탁해 꽤 많은 정보를 그에게 넘겼었다.

세드릭의 약점, 제도에서 파악할 수 있는 그의 동선. 내게 성흔이 없 다는 것까지.

전부 세드릭을 몰락시키기 위한 정 보들이 었다.

6헛수고이긴 했지만

그래도 위협적이었던 것은 사실이 었다.

로드가 저 먼 지하 수로에서 지휘 만 하며 크뤼거 후작저에 손쉽게 침 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제키안이 가까이서 보조했기 때문이었다.

로드가 잡히고 그의 죄목이 줄줄이 밝혀지며 아제키안과 결탁했다는 사 실 역시 밝혀졌다.

황족으로서 나라를 지킬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되레 범죄자에게 정보

를 넘긴 대가는 엄했다.

그 결과, 아제키안은 황자의 몸임 에도 황성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뭐, 로드처럼 극형을 받지는 않겠 지만……/

그래도 다시는 그 느끼한 얼굴을 잘난 듯이 들고 다니진 못할 것이 다.

나는 델레이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 다.

“황녀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닌걸

요.”

“아니오. 내가 먼저 눈치채고 오라 버니를 막았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일에서 황녀님은 조금도 잘못하신 게 없으니까요.”

아제키안의 죄가 밝혀진 이후, 황 제 부부도 나와 세드릭에게 델레이 나처럼 사과를 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자식 농사를 아무리 잘 지어도 건실한 열매만 맺히리란 법 은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연회 초대장을 보내겠소. 꼭 외숙과 함께 참석해주 었으면 하오.”

델레이나가 수줍은 얼굴로 부탁해 왔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황녀님. 기다리겠습니 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하 이넨 크뤼거가 세드릭과 황태자 사 이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크뤼거가 나를 돌 아보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레이디 아리엘!”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해 보였다.

“생명의 은인이시여. 잘 지내고 계 셨습니까?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 다.”

“축하드려요, 아리엘 양.”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이쪽은 제 부인님, 줄리엣 크뤼거

입니다. 이전부터 레이디의 팬이었

고요.”

줄리엣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인 사를 건넸다.

“정말 뵙고 싶었어요. 이이가 말했 듯 예전부터 아리엘 님의 팬이었답 니다. 제 사용인들은 하도 제 심부 름을 다녀오느라 아리엘 님 가게로

가는 길을 전부 외고 있을 정도예

요!”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방긋 미소 지었다. 이런 이야기는 몇 번 을 들어도 늘 처음 듣는 것처럼 기 분 좋았다.

“늘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 을 정도로 향수를 애용하고 있었는 데, 저희 목숨까지 구해주실 줄이야. 요즘 저희 저택에서는 아리엘 님을 은인님이라고 부른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과찬이세요. 부끄럽습니다.”

나는 수줍은 얼굴로 겸손을 떨었 다.

줄리엣은 연신 내 총명함을 칭찬하 더니, 목숨을 구해 준 선물을 준비 하고 있다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 다.

괜찮다고 극구 사양하는 척했지만, 사실 무척 기대됐다.

내 향수를 애용한다는 이야기로 미 루어 보아 레이디 줄리엣은 고급스 러운 취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 다. 그런 사람의 선물이면 분명 센 스가 넘칠 것 같았다.

피로연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 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와 세드릭 한정으로 끝이 났다. 남은 사람들은 아마 새벽이 될 때까지 신나게 먹고 마실 것 같았다. 황궁 정원에서 음 주 가무를 즐길 수 있는 기회는 흔 한 게 아니니까.

나는 피로연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 해 탈의실로 향했다. 샤를로트가 나 를 돕기 위해 따라왔다.

드레스를 갈아입기 전, 나는 화장 대 앞 의자에 주저앉아 가볍게 한숨 을 내쉬었다.

“편안해 보이네요, 아리엘.”

고개를 돌리자 샤를로트가 의미심 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이젠 에반스 공작부인이라 고 불러야 할까요?”

샤를로트의 짓궂은 얼굴에 나는 몸 서리를 쳤다.

에반스 공작부인이라니. 앞으로는 그렇게 불릴 일이 잦겠지만, 지금은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으윽, 됐어요. 그냥 하던 대로 아 리엘이라고 불러 줘요.”

“좋아요. 아리엘. 유부녀가 된 소감 은 어떤가요?”

“ 0 ”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겠어요. 멍한 기분이랄까… 실감이 아직 잘 안 나요.”

나는 넷째 손가락에 걸린 결혼반지 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가 한 사람과 깊숙이 얽히 게 되었다는 증표였다.

반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아도, 세 드릭이 내게 속하게 되었다는 사 실이 완벽히 실감나지 않았다.

“아직 진정한 부부가 아니니까 그 렇죠.”

샤를로트가 빙그레 묘한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첫날밤은 아직이잖아요?”

은근한 속삭임에 귓가로 오소소 소 름이 끼쳤다.

나는 능글맞게 웃는 샤를로트로부 터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왜 이래요? 아저씨처럼.”

“어머나? 새신부라 그런가. 수줍음 을 많이 타시네.”

“진짜 왜 이러세요. 느끼해.”

질색하자 샤를로트가 재밌어 죽겠 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 부럽네요. 사랑의 섬에서 보내 는 신혼여행이라.”

사랑의 섬.

그게 우리가 머지않아 출발할 목적 지의 이름이었다.

연인들의 천국으로 유명한 유페리 아 섬은 이미 내게 익숙한 곳이었 다. 델레이나에게 그곳을 모티프로 한 향수도 만들어준 적이 있으니까.

“전 잘 모르겠어요.”

나는 뺨을 긁적였다.

이 세계에도 결혼식 뒤엔 여행을 다녀온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따르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사실 나는 여행 자체에 그리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진 않았 다.

‘그냥 세드릭의 저택에 나란히 누 워 도란도란 이야기만 나눠도 좋을 것 같은데.’

청혼 받았던 그날처럼 말이다.

그날 밤은 정말 행복했다. 그가 키 스해올 때면 심장이 터질 듯 설렜지

만, 이야기를 나눌 땐 좋은 친구와 있는 듯 편안한 즐거움이 더 컸다.

유페리아에서의 신혼여행은 분명 즐겁겠지만, 거기서 보내는 밤들이 청혼 받았던 그날 밤과 그렇게까지 다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이제 식을 치르고 부 부가 된 것은 맞다.

하지만 고작 이름 뒤에 성 하나를 더 붙이게 된 것뿐인데 그리 많은 것이 달라질까?

세드릭과의 관계는 이미 나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나는 이제 시도 때 도 없이 조향을 하다가도, 손님을 맞이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웃어버리는 실없는 인간이 되었다.

이미 이렇게 많이 달라져 버렸는 데, 이 이상 더 달라질 것이 있을 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까지가, 1일 차 새신부 아리엘 윈스턴 에반스의 안일한 생각이었 다.

“와아.”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나는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 나는 유페리아 섬의 비밀 선 착장에 서 있었다.

유페리아 섬은 제도로부터 수만 마 일이나 떨어진 곳이지만, 여정은 그 리 길지 않았다. 워프와 고속 유람 선을 이용하니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래가 분홍색이에요!”

나는 흥분해서 외쳤다.

모래사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연분 홍색의 곱디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

이로 스며들었다.

“정말 그렇군요.”

세드릭도 신기한 목소리로 나와 함 께 모래를 구경했다.

나는 잠시 동안, 모래를 구경하는 세드릭을 구경했다.

섬으로 가기 전, 그는 정장이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 다.

얇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셔츠는 해변에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몸 선에 달라붙었다.

견장도, 검도, 그 외 거추장스러운 장식이라곤 전혀 착용하지 않은 그 는, 제국의 공작이라기보다는 그저 해변가에 놀러 온 청년 같았다.

좀 심하게 잘생긴.

‘잘났네.’

나는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모래가 분홍색인 게 그렇게나 신기 한지 세드릭은 아직도 모래사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별 것 아닌 모습이 사랑스럽게 여겨진다면 내가 중증인 걸까.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세드릭이 시 선을 느낀 듯 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왜 그러냐는 듯 세드릭이 살짝 고 개를 기울였다.

나는 대답 대신 흠흠, 헛기침을 했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드릭이 싱겁다는 듯 웃곤 부드럽

게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곧 우 리는 나란히 선 채 모래사장과 바다 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소라마저도 하트 모양이었 다. 연인의 섬이라는 별칭을 얻기 위해 태어난 장소가 아닐까 싶을 정 도였다.

바다 위로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탄 성을 터뜨렸다.

“파도가 반짝거려요.”

이 시간대면 해파리가 몰려들어서

그렇다더군요. 가까이 가면 안 됩니 다.”

“해파리가 사람을 무나요?”

“그렇다고 들었는데 확실하진 않습 니다. 제가 발을 담가 볼까요?”

“안 돼요!”

나는 얼른 세드릭을 끌어당겼다. 세드릭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추우신 것 같은데 이제 들어가 죠.”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나는 날이

꽤 쌀쌀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도 모르는 새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좋아요.”

우리는 해변 위에 지어진 별장으로 향했다.

하얀색 지붕이 인상적인 별장은 동 화 속 집처럼 사랑스러웠다.

“어머나.”

안으로 들어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식당 안에 만찬이 가득 차려져 있 었다. 예쁜 은촛대가 보기만 해도 황홀한 만찬장을 은은하게 비췄다.

‘방금 사용인이 다녀간 건가?’

“아직 따끈한가 봐요! 김이 나고 있어.”

아무래도 우리가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한 듯했다.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허기 가 느껴졌다. 나는 얼른 식탁 앞에

착석했다.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해변 냄새가 물씬 나는 해산물들을 나는 신이 나서 해치웠다.

“오늘은 어쩐지 하루 종일 먹기만 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식사하는 나를 세드릭이 희 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아예 턱까지 괴어가며 본격적 으로 나를 구경했다.

“맛있으십니까?”

“네! 최고예요. 세드릭도 좀 더 들 지 그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빙긋 웃으며 세드릭이 말했다.

나는 괜찮다는 사람에게 더 강요하 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마저 비웠 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나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세드릭이 자연스레 와인 병을 개봉 해 내 잔을 채워 주었다.

“와, 감사해요.”

나는 방긋 웃으며 와인을 홀짝였 다.

놀랍도록 향긋하고 부드러운 와인 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인 병 을 돌려보았다.

“되게 맛있네요. 어디 품종 앗!”

순간 손이 미끄러져 잔을 놓쳤다.

가벼운 소음과 함께 잔에서 보랏빛 액체가 흘러 테이블보를 적셨다.

“이런.”

세드릭이 테이블보를 옆으로 치워 주었다.

“괜찮습니까?”

그가 그렇게 물으며 와인 방울이 묻은 내 손목을 닦아주었다.

“ 괜찮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나는 문득 입 술을 다물었다.

세드릭의 손수건이 스치는 손목이 간지러웠다.

꼼꼼히 손목을 닦아준 세드릭이, 대답 없는 내가 의아한 듯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마 무척 다채롭게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내 표정을 마주한 세드릭의 눈빛이 곧 묘해졌다.

잠시 뒤 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리엘은 항상 대범한데 가끔 예 상치 못한 곳에서 긴장한다는 것 압 니까?”

그 말에 더 민망해진 나는 뺨을 긁적 거 렸다.

나도 내가 고작 손목에서 느껴지는 손길 때문에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 다.

“아리엘.”

세드릭이 여전히 웃음기 배인 목소

리로 말했다.

“올라갈까요?”

부드러운 속삭임이 심장에 쿵 내려 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