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신랑. 언제나 신부만을 바라보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젠 아주 익숙해진 목소리가 대답 했다.
“맹세합니다.”
낮고 따스한 목소리. 그리고 살짝
끝이 젖은 듯한 목소리였다.
일주일이나 기억 속에서만 되풀이 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녹일 듯이 파고들었다.
“신부는 언제나 신랑만을 바라보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몇 번이나 연습한 순간이었다. 에 른이 주례를 맡고, 리나가 세드릭 역을 맡은 채로 이 순간을 되풀이해 연습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답하려 하자, 쉽사
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았 다.
침묵이 길어졌다. 이 홀 안의 모두 가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 다.
그때 세드릭이, 내 턱밑을 들어 올 렸던 손가락으로 이번엔 뺨을 조심 스레 쓰다듬었다.
그가 입술을 열고 나지막이 속삭였 다.
“아리엘, ……맹세해 주세요.”
달큰한 애원에 나는 세드릭을 올려 다보았다. 애가 타는 듯 세드릭이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드디어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네. 맹세합니다.”
언제나 당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세드릭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 다. 그가 내 베일을 들어 올렸다.
밝아진 시야로 세드릭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제 신랑과 신부는 서로의 손가 락에…… 에?”
신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순간에 다가온 세드릭이 내 입술 위로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입술을 덮 쳤다.
일주일만의 감각에 나는 살며시 눈 을 감았다.
살짝 입술을 떨어뜨린 세드릭이
속
삭였다.
“감사합니다. 아리엘.”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이유를 물을 필요도, 고맙다고 답을 돌려줄 필요 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마주 본 채 미소를 지었다.
관중석에서 때아닌 환호가 들렸다. 소녀들과 직원들의 목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신관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이다음은 어떤 순서였더라.
세드릭이 반지를 끼워주는 대신 키
스한 덕분에 순서는 엉망진창 꼬이 고 말았다.
하지만 순서 같은 건 이제 아무래 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내 곁에 서 있다는 사실 뿐이 었다.
“우리 둘만 있는 결혼식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입술 위에서 세드릭이 속삭였다. 달짝지근한 속삭임이 귓가에 녹은 설탕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반지, 끼워주셔야죠.”
나는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세드릭이 조심스레 내 손바닥을 쥐 었다.
곧 그가 내 손끝에 반지를 끼웠다. 청혼을 받았던 한 달 전의 밤에 본 바로 그 반지였다.
반지의 차가운 감촉이 넷째 손가락 을 감쌌다.
세드릭이 그 광경을 뚫어지라 바라
보며 말했다.
“반지는 족쇄라더군요.”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손이나 주세요.”
이번엔 내가 세드릭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조각처럼 잘 뻗은 손가락에 예쁜 반지가 끼워져 있으니 참 보기 좋았 다.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미술품을 보듯 잠시 그 광경을 감상했다.
짧게 찾아든 침묵에, 끼어들 순간 을 찾지 못하고 있던 신관이 드디어 축사를 끝맺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 을 선포합니다!”
짝짝짝짝!
우레 같은 박수가 홀을 가득 메웠 다.
나와 세드릭은 서로를 바라본 채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것이 되었다.
그 간단한 문장이 아리도록 달콤하 게 다가왔다.
피로연은 황후궁의 공중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오늘을 위해 황후는 순백색과 황금 색 꽃으로 정원을 장식했다. 환상적 으로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사람들 의 흥분에 찬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엘 양, 세드릭 공. 축하하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곧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와주셨군요, 제이나 백작님.”
“당연하지 않소? 그대의 결혼인 데.”
그러고 보니 정원 한구석에서, 털 이 잘 관리된 사냥개 세 마리가 턱 시도 리본을 맨 채 얌전히 앉아 있 는 걸 본 기억이 났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곧 찾아뵐게요, 백작님. 서부 왕국 에서 꼭 수입해주셨으면 하는 허브 가 있거든요.”
“기다리겠소.”
제이나가 빙긋 웃었다.
나와 세드릭은 제이나와 잠깐 서부 관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 즘 그쪽에 도적떼가 출몰해 상단이 지나다니기가 좀처럼 어렵다는 이야 기였다.
안 그래도 그쪽에 기사단을 파견
할 계획이 있습니다. 곧 토벌될 테 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리 엘 ”
세드릭의 목소리에 나는 그를 돌아 보았다.
‘뭐지.’
이게 결혼의 효과인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세드릭의 모습이 지나치게 믿음직스럽고 멋있 어 보였다.
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정말인가요, 세드릭?”
“……비행선째로 한 대대를 보낼까 요?”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한 세드릭이 홀린 듯 덧붙였다.
제이나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 다.
“아니, 에반스 공, 그렇게까지 규모가 큰 도적 떼는 아니오만……/
그때 환성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한 무리의 영애들이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은……오
‘응? 에른 경?’
투구를 벗고 있는 에른 경이었다.
오늘은 나와 세드릭의 결혼식이니 만큼, 에른은 아주 오랜만에 투구를 쓰지 않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그의 화사한 금 발이 햇빛 아래에서 찬란한 빛을 자
랑했다.
“역시 인기 좋네요, 에른 경.”
저놈의 투구만 벗으면 온 제도 아 가씨들의 마음을 다 훔쳐 버릴 만한 미모이긴 했다.
‘이제야 저 얼굴이 빛을 보는구나.’
그동안 투구 속에 묻힌 보물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마 음이 찝찝했었다.
늘 에른과 같이 생활했던 리나까지
도 홀린 듯 에른을 훔쳐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재밌는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뭔가가 불쑥 시야를 가렸다.
“세드릭? 손 치워 주세요, 안 보이 잖아요.”
세드릭의 손바닥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조금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딜 그렇게 보십니까?”
“어디긴 어디에요? 에른 경이지.”
오
“부하가 인기 많은 걸 보면 세드릭 도 뿌듯하지 않아요?”
에른과 몇 달 동안 함께 지낸 나 도 이렇게 흐뭇한데, 세드릭은 더할 것 같았다.
“이래서 투구는 웬만하면 벗지 말 라고 했는데.”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는 기가 막혀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에른이 그렇게 투구를 사수하던 이 유가 세드릭 때문이었단 말이야?
“세드릭! 진짜 그랬어요?”
그러자 세드릭이 조금 찔린 목소리 로 말했다.
“괜히 이목을 끌면 귀찮아지니 투 구를 쓰고 다니는 게 좋겠다고 조언 한 것뿐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럼 세드 릭도 쓰고 다녀야죠.”
이목을 끄는 걸로 따지면 에른보단 세드릭이 더 심했다.
“전 에른보다 강해서 상관없습니 다.”
세상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세드릭은 가끔 이렇게 유치한 면모 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그게 귀여 워 보이는 나 자신이었다.
‘팔불출에는 약도 없다고 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바보 같은 대화를 듣고 있었을 제이나에게 미 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해요, 백작 님. 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요. 곧 찾아뵙겠다는 말, 잊지 말아 주세요.”
“물론이오. 여행은 얼마나 다녀오 시오?”
여행.
피로연의 끝엔 여행의 시작이 기다 리고 있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대
답했다.
“한 달이요.”
“넉넉한 휴가로군. 즐거이 다녀오 시게.”
제이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갑자기 정원 입구를 향해 예를 차렸다.
고개 돌린 나는 황제 부부가 입장 중인 것을 발견했다.
그 뒤로는 델레이나와 황태자가 뒤 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훤칠한 황 실 가족의 입장에 정원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드릭. 그리고 아리엘 양.”
황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혼 축하하오. 그대들의 앞길에 언제나 영광만이 깃들길.”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꾸벅 황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황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 한 미소를 지었다.
“기뻐 보이는군. 세드릭.”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기쁩니다.”
“그래. 아리엘 양, 고맙구려.”
황제가 뜬금없이 내게 감사의 인사 를 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황제 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황제가 내게 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저 아이가 저렇게 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오.”
나는 ‘아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커 버린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은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마주 보았다.
‘편안해 보이…… 나?’
나는 처음 만났던 날의 세드릭을 떠올려 보았다.
그날 세드릭에게 받았던 첫인상은 단순했다.
첫째, 과연 남주인공 아니랄까 봐 눈 돌아가게 잘생긴 미모. 둘째. 세 상사에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듯 무 심하고 차갑던 시선.
그땐 상상도 못 했다. 그 눈빛이 이렇게 따스한 빛을 띨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런 날이 올 거라곤 그땐 상상도 못 했지.’
믿지 못할 거다.
이별 통보를 하기 위해 만나러 간 남자와 고작 일 년 뒤엔 웨딩마치를 울리다니.
‘역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니까.’
“축하합니다, 아리엘 양. 아티팩트 는 여전히 잘 어울리시는군.”
황태자가 미소와 함께 축하의 말을 건넸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내 팔목을 내 려다보았다.
지하 수로로 가기 전, 세드릭이 내 게 선물해준 아티팩트가 팔찌 형태 로 손목에 걸려 있었다. 난 항상 이 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겐 넷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결혼반지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소중한 물건이었다.
‘세드릭을 구했던 물건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를 구한 물건이지
만, 만약 그대로 정신을 잃었더라면 제때 세드릭을 도우러 가지 못했을 거다.
나는 미소 지으며 아티팩트를 살짝 쓰다듬었다. 황태자는 흐뭇한 얼굴 로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도 우리에게 한 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넸다.
마지막은 델레이나였다.
내 결혼식이라고 평소보다도 더 열 심히 꾸미고 오신 황녀님이 내게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델레이나에게선 내가 선물한 향수 냄새가 났다.
“오늘도 뿌리고 나오셨군요, 제 향 수. 기뻐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델레이나가 살 짝 얼굴을 붉혔다.
“약속은 지켜야 할 거요, 레이디. 선물해주었던 향수, 셋 다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
“물론입니다.”
향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새것으 로 바꿔주겠다는 약속, 물론 기억하
고 있었다.
내 대답에 흡족해하는 얼굴로 고개 를 끄덕이던 델레이나의 낯빛이 순 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델레이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 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나 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일은 정말, 미안하오.”
“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제키안은 지금 황성 감옥에 갇혀 있었다.
황족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