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전 이제야 알겠어요.”
로잘린이 꿈꾸는 듯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완벽이란 단어는, 지금 이 순간의 아리엘 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로잘린 양도 참 천연덕스러워졌군 요.”
거울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 쉬듯 웃었다.
내 머리 위로 베일을 단단히 고정 해 주며 로잘린이 재잘댔다.
“천연덕스럽다뇨? 제 진심을 매도 하지 말아 주세요, 아리엘 님. 거울 을 보시라고요.”
로잘린이 답답한 듯 거울을 가리키 자, 그 안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 은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여자의 얼굴은 진주 가루를 뿌려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전날부터 우유와 꿀, 장미수로 목 욕한 피부는 투명한 빛을 내며 반질 거렸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금발 위에는 우 아한 티아라가 꽂혀 있었고, 그 아 래로 투명한 베일이 나비 날개처럼 하늘거 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공들인 보람이 있긴 하네.’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가게에 손님들이 와글거리는데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꼬박꼬박 자야 했고, 가끔 즐기던 새벽의 야식도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어제는 우유와 꿀을 푼 목욕물에 세 시간이나 담겨 있었다.
아무리 목욕을 좋아하는 나라지만 그건 좀 힘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세드릭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결혼식을 올리는 연인 은 식 일주일 전부터 서로의 얼굴을 봐선 안 된다는 전통이 있었다.
정말 쓸데없고 부질없는 전통이었다.
뭐 하고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까워진 뒤, 일주일 넘게 만나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드릭도 나처럼 목욕물에 세 시간 이나 들어가 있었을까?
야근을 금지당했을까?
날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가 리키온 에게 타박을 들었을까?
“목소리도 못 듣게 하다니…… 악
습이야, 악습.”
내 투덜거림에 리나가 풋 웃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아가씨.”
“그래요. 이제 정말 곧이라고요.”
리나와 루카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손질했다.
나는 아련한 눈으로 루카를 바라보 았다.
“매장은 잘 돌아가고 있나요?”
줄근하지 못한 지 벌써 열다섯 시 간이 됐다.
루카는 성의 없이 엄지를 치켜들었 다.
“그럼요. 최고예요. 모든 게 완벽해 요.”
“그렇게 대충 대답하지 말고, 조금 더 자세히이상한 손님은 없었 나요? 직원들은 건강하고요?”
“당연하죠, 사장님. 아, 참. 사장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초대장을
조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긴 해요. 저희가 함부로 초대할 수 있는 장소 가 아니니 전부 거절했지만요.”
“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는 황성 안에 있었다. 나와 세드릭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치러지 기 때문이었다.
‘황성에서 결혼을 하다니……/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세드릭과의
결혼이라는 이 사건 자체가 별일이 기는 하지.
사실은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 았다.
청혼을 받은 것도. 곧 내 이름 뒤 에 ‘윈스턴’이 아닌 ‘에반스’가 붙는 다는 것도.
‘아리엘 에반스라니.’
역시 어색했다. 나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아리엘 윈스턴 에반스’ 가 될 터였다. 윈스턴 백작위를 상
속받고 난 뒤의 이야기겠지만.
“자아, 다 됐어요.”
로잘린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일어나 보시겠어요?”
이 세 시간 동안, 말 잘 듣는 착한 마네킹이었던 나는 이번에도 재깍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백색 드레스 자락이 만개한 꽃잎 처럼 펼쳐졌다.
“와아……,”
“다시 봐도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 예요.”
리나와 루카 그리고 내 치장을 도 와준 사용인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드레스의 제작자인 로잘린은 몹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완벽하네요. 오늘을 위해 심 혈을 기울여 만든 보람이 있어요.”
“고마워요, 로잘린 양.”
나는 빙긋 웃으며 로잘린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웨딩드레스는 내가 보기에도 눈부 시도록 아름다웠다.
상체는 아름다운 레이스로 짜여 있 었고,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드레스 자락은 수천, 수만 개의 크리스탈을 달아 어느 각도에서도 반짝거렸다.
과연 요즈음 제도에서 가장 핫한 디자이너 명단에 당당히 이름 올리 고 있는 로잘린의 작품다웠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문을 살짝 열고 리나가 속삭였다.
그러자 네 명의 소녀들이 신부 대 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리엘 님!”
“보고 싶었어요, 아리엘 님!”
병아리 떼처럼 달려온 소녀들이 나 를 보곤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너무, 너무 아름다우세요. 기절할
것 같아요.”
“세드릭 전하께선 정말 기절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리엘 님…… 정말 결혼하시는군 요.”
차례대로 릴리, 루나, 에일린, 사샤 가 재잘거렸다.
그러다 사샤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 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달 랬다.
“사샤, 울지 마! 왜 울어?”
“이제 정말, 흡, 결혼하시는 거구나
싶어서요……/,
사샤가 또 훌쩍였다. 나는 사샤를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세상에, 메리지 블루를 왜 나 대신 사샤가 앓는담!
“오늘 너무 예쁘다, 사샤.”
달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기도 했다.
아침하늘처럼 청명한 하늘색 들러 리 드레스를 입은 사샤는 무척 귀엽 고 사랑스러웠다.
“어젯밤에 잠 잘 잤나 보네?”
혈색 좋은 사샤의 뺨을 톡 건드리 자,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새빨개졌 다.
루나가 아우성을 쳤다.
“아리엘 님, 저는요? 저도 잠 많이 잤어요!”
연노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나 가 외쳤다. 나는 웃으며 루나의 머 리도 살짝 토닥여 주었다.
“루나도 너무 예쁘다. 드레스 새로 맞췄어?”
“네! 다 함께 로잘린 님께 맞췄어 요!”
어쩐지. 소녀들이 들어오자, 로잘린 이 지나치게 흐뭇한 표정을 짓더라 니. 엄마인 줄 알았다.
나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에일 린,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릴리에게 도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브라이드 메이트가 되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얘들아.”
황궁, 그것도 가장 화려한 연회 홀 이 있다는 황후궁에서 주인공이 되 어 융단길 위를 걸을 생각을 할 때 마다 살짝 긴장이 됐다.
하지만 이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 이라면 안심이었다.
게다가, 그 길의 끝에는 세드릭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제 출발할까요, 아가씨?”
리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 다.
소녀들이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 주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신부 대기실을 나섰다.
시원하게 창이 트인 복도로 들어선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 었다.
“날씨가 완벽하죠, 아리엘 님?”
“주신께서도 오늘을 축복하신다는 증거가 분명해요.”
리나와 루카가 차례대로 말했다.
복도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 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가볍게 피부를 감쌌고, 높고 청명한 여름 하늘은 짙푸른 창공을 마음껏 자랑했다.
이대로 이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감상하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도록 아름다운 날씨였다.
밖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만 빼면, 작은 이야기 소리 하나 들리 지 않았다.
모두 나의 입장만 숨죽이고 기다리
고 있는 것이다.
“긴, 긴장돼.”
나는 손바닥을 꾹꾹 손톱으로 누르 며 우는소리를 했다.
리나가 내 팔을 잡더니 믿음직스러 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가씨, 연습하신 대로만 하면 돼 요. 순서가 뭐였죠?”
“주례석 앞까지 걸어가기, 주례 듣 기. 그리고 약속의 말 읊기.”
“맞아요. 완벽해요. 그 뒤는 전하께
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주례석 앞까지 못 걸어가면 어떡 하지? 너무 떨려.”
“그럼 주저앉으세요. 전하께서 알 아서 안고 가실 거예요.”
“그게 무슨 창피야!”
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정말 출발하셔야 해요.”
“아리엘 님, 할 수 있어요!”
“해치워 버려요!”
뒤에서 소녀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후욱 심호흡을 하곤 정면을 바라보았다.
높고 거대한 문이 시야를 가로막았 다.
“준비됐어요.”
내 말과 동시에 문이 양옆으로 열 렸다.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쏟아져 들어 왔다.
내 발 앞부터 저 먼 끝까지 길게 뻗은 융단길이 보였다.
주변이 황금 장미로 장식된 길은 내가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곤 발걸 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윈스턴 백작이 어색한 손짓으로 내 손을 잡았다.
백작과는 처음 해보는 스킨십이었 다.
융단길은 내 생각보다도 더 길었 다.
고개 들어 길의 끝을 마주한 순간, 나는 짧게 숨을 멈췄다.
저 멀리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 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세드릭의 실루엣을 오래 바라 보지 못하고 다시 고개 숙였다.
쿵쿵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 이 내게 따라붙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 을 한 몸에 받은 채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융단길도 어느
새 끝이 났다.
세드릭의 발끝이 보였다. 구두코만 봐도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이제 고개만 들면 그의 얼굴이 보 인다.
일주일 동안 기다리고 기다린 순간 인데도 좀처럼 세드릭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를 주례석까지 인도한 윈스턴 백 작이 물러났다.
이젠 정말 나와 세드릭, 그리고 주 례석에 자리한 신관뿐이었다.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확인해보지 않아도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는 뻔
했다.
베일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다행이 었다. 지금 내 얼굴은 긴장과 설렘 에 엉망으로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 하니 까.
‘그렇게 연습했는데, 왜 이렇게 긴 장되는 거야.’
신관이 주례사를 읊는 소리가 들렸 다.
“기쁜 날, 혹은 슬픈 날에도 서로 와 나누며……
무언가 감동적인 이야기일 것이 분 명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 다.
나는 그저 세드릭의 구두만을 뚫어 지라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서 있다 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맹세하세요.”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주례사가
끝나고, 드디어 신관이 마지막 대사 를 읊었다.
이제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가게를 오픈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숨을 내쉬려던 순간이었 다.
따스한 손가락이 내 턱밑을 조심스 레 들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태엽 돌아간 인형처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 아.’
나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보였다. 세드릭 에반스가.
일주일 동안 보고 싶다고 투덜거렸 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