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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46화 (146/153)

〈147 화〉

“ 와아

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두 손 으로 테라스 난간을 잡았다.

황금빛, 오렌지빛 불빛이 수도의 밤거리를 밝혔다. 여기저기 반딧불 이를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수도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어요.”

나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돌아오 는 대답은 없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테라스 문을 닫은 탓에 악단의 연주마저 아 주 희미하게 들렸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의아해진 나 는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은 다가오지 않은 채, 몇 발 자국 뒤에서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드릭?”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세 드릭이 얼음에서 깨어난 것처럼 넋 놓았던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가 긴 다리를 움직여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미소 지으며 가까워진 세드릭 을 올려다보았다.

“세드릭, 저기 봐요.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위에서 보니까 달라요.”

예쁘게 차려입고 몰려나온 사람들

이 신난 걸음걸이로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광경인데 도, 야경의 마법 때문인지 스노우 글로브 속 광경처럼 아름다워 보였 다.

“아리엘.”

세드릭이 대답 대신 내 이름을 불 렀다.

아래를 가리키던 나는 다시 세드릭 을 돌아보았다.

야경의 마법은 세드릭에게도 효과

를 발휘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에 세드릭의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루비 같은 적안 속으로 황금빛이 일렁였다.

나는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 다.

왜일까.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 을 뿐인데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 다.

그가 입술을 벌려,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담았다.

아리엘 윈스턴.”

지겹도록 들었던 그 이름이 현악기 의 음악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방금까지 야경을 내려다보며 아무 렇지 않게 잡담을 나눴던 것이 거짓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금 다물리는 세드릭의 입술을 바라보았 다.

현악기 연주가 느리게 흘렀고, 세 드릭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순간이 었다.

무언가, 마치 마법 같은 일이.

그리고 드디어 세드릭이 입을 열었 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리 엘 ”

꾸밈없는 고백이 귓가에 내려앉았 다.

이미 한 번 들은 적 있는 말인데 도 처음 들은 것처럼 심장이 쿵 내 려 앉았다.

세드릭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언제부턴가 당신 생각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이 마음이 어떻게도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번에야말로 멋들어진 대답을 돌 려주고 싶은데, 머릿속은 마구 뛰어 대는 심장 소리로만 가득 찼다.

갑자기 세드릭의 눈높이가 낮아졌 다.

“세드릭?”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내려다보 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 다.

“제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 인지 아십니까?”

나를 올려다보며 세드릭이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따스해서 어째서인 지 목이 메었다.

“요즘이었습니다. 눈을 뜨면 아리 엘이 같은 지붕 아래 잠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하루하루, 심장이 멈

출 것 같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세드릭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제게 남은 날들에도 그 행복들을 허 락해주지 않으시 겠습니 까?”

세드릭이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 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한숨처럼 웃어버렸다.

거울의 결정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보석은 내가 본 그 어떤 반지의 보

석보다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완벽해서 나 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리엘?”

말없는 내 미소에 세드릭이 애가 타는 듯 속삭였다.

만약 내가 세드릭을 사랑하지 않았 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세 드릭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 다.

그와. 그리고 그가 준비한 이 완벽 한 순간들과.

하물며, 세드릭에게 빠져 있는 지 금의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허리 숙여 세드릭 의 턱을 쥐었다.

당황한 세드릭은 쉽게 고개를 들었 다. 나는 살짝 벌어진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갰다.

이런 반응을 생각지 못한 듯 세드 릭이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 그가 몸을 일으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세드릭이 달려들 듯 입술을 집어삼 키는 바람에 허리가 뒤로 휘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목을 끌어안았

다.

“세드릭, 천천히

그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입술을 더듬으며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등을 받쳤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헤치고 그의 손이 피부에 맞닿았다.

세드릭이 헛숨을 들이 삼켰다.

등에 닿았던 손바닥이 불이라도 만

진 듯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몰랐구나, 등이 트여 있는 거.

나는 짓궂게 웃으며 떨어져 나간 손을 다시 맞잡았다.

“꽉 안아주셔야죠.”

다시금 등허리에 세드릭의 손을 가 져다 대자, 그의 뺨이 눈에 띄게 달 아올랐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 다.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기예요?”

방금 멋들어지게 청혼까지 한 주제 에.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수줍어하는 그를 보며 나는 미소를 흘렸다.

다시 키스해주세요. 내가 속삭였다.

세드릭은 소년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린 듯 다 시 다가와 내 입술을 삼키려 했다.

“아. 잠깐.”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나는 손바닥 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하마터면 잊고 지나칠 뻔했다.

이렇게 중요한 단계를 그냥 넘겨서 는 안 되지.

나는 세드릭의 뺨을 살짝 감싼 채 속삭였다.

“할게요, 허락.”

환한 미소와 함께 나는 이어 말했 다.

“이제 매일매일,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나는 거예요.”

그 말은 흘러나감과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내 가슴을 가득 부풀렸다.

이제부터 매일매일, 내가 좋아하는 세드릭과 함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아 버렸다.

세드릭은 밀착한 나를 살짝 떨어뜨 리곤 다시금 내 턱을 쥐었다.

조금 급한 숨결로 그가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나는 이번에는 방해 없이 기꺼이 그 키스에 응했다.

# # 고

청혼받은 날의 밤은 어떤 식으로 보내야 특별한 걸까?

기억에 남을 만한 이벤트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 화려한 장소에서 진탕 술에 취한다든가, 로맨틱한 장소에 서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 는 것도 좋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다소 평범한 일정으 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고요한 그의 저택 안에서 나란히 앉아, 새벽이 오도록 조곤조곤 대화

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내가 세드릭을 붙잡았기 에 이뤄진 일이었다.

원래 세드릭은 나를 침실로 데려다 준 후 방을 나서려 했었다.

“조금 더 있다가 가요.”

“하지만, 많이 피곤하시지 않습니 까? 어제도 밤늦게까지 가게를 지키 셨고……-”

세드릭은 여전히 나를 과보호하려 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실험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도.

나는 고개를 젓고 그를 침대맡에 앉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더 얘기하고 싶어요.”

별로 로맨틱할 것도 없는 그 말에, 세드릭은 기쁜 듯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특별한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 었다.

색다를 것 없는 근황 이야기가 이 어졌다. 매장 이야기, 손님 이야기,

새로 얻은 향수 아이디어 이야 기……,

세드릭은 잔잔히 미소 띤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웃음을 흘렸다.

별다른 맞장구 아닌 그 웃음소리만 으로도, 나는 신이 나서 자꾸자꾸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2호점은 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 내고 싶으시다고요?”

“네. 사실은 제국이 아닌 다른 나 라에도 진출하고 싶어요. 완전히 문 화가 다른 곳에서도 내 향수가 통할 지 궁금하거든요!”

“다른 나라라…… 좋은 포부군요.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감사해요. 언제쯤 이룰 수 있을까요?”

“내년으로 봅니다.”

“네? 내년이요?”

나는 터무니없는 대답에 웃음을 터 뜨렸다.

그러자 세드릭이 진지한 눈으로 말 했다.

“왜 웃으십니까? 농담이 아닌데. 한 번 날개 달기 시작한 사업이 얼

마만큼 뻗어 나갈 수 있는지는 본인 조차 모르는 법입니다.”

“으음, 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 해요. 최대한 멀리 날아볼게요.”

“믿고 있습니다.”

나는 세드릭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방긋 미소로 화답했다.

종종 세드릭도 먼저 이야기를 꺼냈 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기사단 이야기 나, 황제 부부와 가졌던 만찬, 골치 아픈 사업 이야기 같은 것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세상에. 저기 북쪽 광산 하나에 그렇게나 많은 세력들이 달라붙어 있다고요?”

“예. 포기하기엔 아깝고 뛰어들자 니 귀찮아진 상태죠.”

“세력이 열여섯 개나 끼어들어 있 다니. 생각만 해도 정말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네요. 차라리 모두 한자 리에 모여서 결투로 승자를 가리는 게 낫겠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내 농에 세드릭이 낮게 웃음을 터

뜨리더니, 곧 눈을 반짝였다.

“아니, 정말 그렇게 하는 게 낫겠 군요. 이번 달 안에 총회를 열어서 이젠 진짜 소유주를 가리자고 해야 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참석 안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요?”

“그런 자가 있다면 자동으로 경쟁 에서 제외되겠지요.”

“대단히 독단적이시네요.”

“가끔은 그러는 편이 더 낫더군 요.”

아하. 명쾌한 답변에 나는 킥킥거 리고 웃었다.

예고 없이 세드릭이 불쑥 가까워졌 다.

나는 약속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지고, 또 각도를 바꾸어 반복했 다.

사향과 침엽수 향 섞인 향기가 폐 부를 가득히 적셨다.

문득 어떤 확신이 들었다.

지금부터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이 향기만 맡게 된다 해도, 언제까지고

질릴 일 없으리라는 확신이.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뷰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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