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아.”
나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 고 보니, 한창 아이리스 색으로 도 배하고 다니던 시기 이후론 이 목걸 이를 걸지 않았었다.
루카가 감탄을 터뜨렸다.
“와아, 이게 뭔가요? 자수정? 색이
너무 특이하고 예뻐요!”
“그쵸? 특별한 의미도 있는 목걸이 라구요.”
“의미요? 무슨 의민데요?”
리나가 비밀스레 속닥거렸다.
“에반스 전하께서 선물하신 목걸이 거든요.”
“첩!”
루카가 입을 틀어막았다.
“완벽하네요. 이걸로 해요!”
“그쵸? 이런 날에 걸치기 특히 완 벽하겠죠?”
이런 날?
살짝 의아한 단어 선정이었으나 나 는 굳이 되묻진 않았다.
연자수정 목걸이는 오랜만에 봐도 아름다웠다. 오늘 저걸 목에 걸면 리나의 말대로 완벽할 것 같았다.
장신구까지 걸친 나는 마지막으로 자스민과 베르가못 향이 어우러지는 향수를 뿌렸다. 그제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마지막으로 스 스로를 돌아보았다.
“ 와.”
“이야.”
리나와 루카가 합창하듯 탄성했다.
“오늘 밤엔 우리 사장님이 이 제도 에서 최고로 아름다우실 거예요.”
“정말요, 아가씨. 저도 장담할게 요.”
“하하, 됐어. 하지만 고마워. 루카
양도 정말 고마워요.”
배시시 웃으며 나는 거울을 다시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봐도 만족스러 운 모습이긴 했다.
드레스는 하늘 위 오로라를 잘라 두른 것처럼 아름다웠다.
큼지막한 연자수정 목걸이는 드레 스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돋 보이게 했다.
풀어헤친 채 끝을 장미유로 촉촉이 적신 머리칼은 드레스 자락 위로 예 쁘게 흩어졌다.
“엇,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루카가 깜짝 놀라 외쳤다. 시곗바 늘은 오후 여섯 시 사십 분을 가리 키고 있었다.
세드릭은 항상 약속 시간보다 십분 즈음 일찍 도착한다.
그러니 곧 그의 마차가 당도할 때 가 되었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완연한 저녁 시간임에도, 한 여름의 햇살은 아직 지상에 노을을 흩뿌리고 있었다.
노을 지는 지평선 너머에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드릭?’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점점 더 가 까워지는 마차는, 분명 에반스 가문 의 것이었다.
‘ 벌써?’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걷어들고 드레스룸을 나섰다.
“지금 마차가 오고 있어.”
“헉, 벌써요?”
리나와 루카도 부산스럽게 나를 따 라 내려왔다.
새롭게 개장한 매장은 원래 가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무척 컸다. 그래서 드레스룸과 현관까지 의 거리가 꽤 됐다.
층을 두 개나 내려오고, 일 층을 한창 가로지른 끝에야 우리는 현관 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가 열게요.”
리나가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걸이 를 옮겼다.
문이 열리자, 세드릭 에반스가 노 을을 등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세드릭.”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로 걸음을 내디뎠다.
“못 보던
나를 내려다본 세드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드레스군요.”
“네. 로잘린 양이 만들어준 건데 개시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나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 다.
“어울리나요?”
“네, 굉장히…… 무척.”
세드릭이 더듬거리며 순식간에 세 개의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속으로 몰래 웃으며 리나와 루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게, 리나. 루카 양, 오 늘 도와줘서 다시 한 번 고마워요.”
“뭘요! 조심히 다녀오시고 또 불러 주세요!”
“다녀오세요, 아가씨!”
둘에게 손을 흔든 나는 세드릭과 함께 마차로 향했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내가 물었다.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노래하듯 흘 러나왔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조금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네? 아뇨. 세드릭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맞는 말씀입니다.”
세드릭이 당황한 듯 고개를 주억거 렸다.
뭐지.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의 세드릭은 평소와 조금 달랐 다. 언제나 그의 곁을 한 꺼풀 두르 고 있던 여유로움이 왠지 오늘은 보 이지 않았다.
“식사부터 하나요, 저희?”
“네.”
“좋아요.”
나는 미소 지으며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세드릭이 정한 음식점이라면 어디 든 맛있을 거다. 굳이 도착지를 물 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머지않아 마차가 도착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여기는.”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눈을 동 그랗게 떴다.
“그곳이네요?”
세드릭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 리며, 나는 높고 거대한 건물을 올 려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이 명품 거리에서도 유 난히 도드라지게 부티 나는 건물에 는, 메르엔이라는 글씨가 멋들어지 게 새겨져 있었다.
메르엔 백화점. 딱 한 번 들러 본
곳이지만 이곳엔 여러 가지 추억이 있었다.
세드릭의 소유라는 것도 모르고 그 의 집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들렀던 곳이기도 했고, 무엇보다……소
나는 걸고 있는 연자수정 목걸이를 살짝 쥐었다. 이 목걸이와 처음 만 난 장소이기도 했다.
생각지 못한 장소에 도착하자 나는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세드릭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안도 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흘긋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역시 오늘의 세드릭은 어딘가가 살 짝 이상했다.
백화점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우리를 맞 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리엘 님.”
직원들이 내 이름을 합창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직원 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기분이 조금은 이상했 다.
백화점 안을 거닐고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 았다.
우리는 시선 속을 걸어 위층으로 향했다.
최상층에 도달한 나는 감탄을 흘렸 다.
“레스토랑이 있었군요! 와아……,”
나는 살짝 입을 벌리며 주위를 둘
러 보았다.
분위기가 예술적인 레스토랑이었 다.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고급 스러운 조명이 안을 밝혔다. 몇 개 없는 테이블은 흑요석을 깎아 만들 었는지 새까만 맵시가 무척 우아했 다.
한 편에는 악단이 연주하는 공간도 있었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매혹 적인 현악기의 선율이 귀를 울렸다.
“마음에 드십니까?”
세드릭의 물음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예요.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 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손님이 아무도 없지?’
레스토랑 안에는 직원과 악단을 제 외하곤 우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내부와, 훌륭한
연주를 즐기는 게 나와 세드릭뿐이 라니 아까울 정도였다.
자리에 앉은 순간, 나는 손님이 우 리뿐인 이유를 깨달았다.
직원이 메뉴를 묻지도 않고 곧장 식전주를 따라준 것이다.
메뉴판에 가격이 안 적혀있다는 건 대개 엄청나게 비싸다는 뜻이다.
아예 메뉴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눈이 튀어나오도록 충격 적인 가격일 게 분명했다.
‘굉장히 비싼 곳인가 봐.’
백화점을 주로 찾는 귀족들조차 쉽 게 엄두 내지 못할 정도로 비싼 곳 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 는 거겠지.
나는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는 식전 주를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빛 깔만 봐도 굉장히 값비싸 보였다.
“아리엘?”
말이 없어진 내가 의아한 듯 세드 릭이 물었다.
“뭔가가 맘에 안 드십니까?”
“네?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같은 질 문을 하네……/
“그냥, 좋아서요.”
식전주가 너무 비싸 보여서 긴장했 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얼버무리며 대답하자, 세드릭이 살 짝 눈을 크게 떴다.
곧 그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그…… 렇습니까.”
어라.
나는 세드릭의 목덜미가 희미하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참. 은근히 수줍음이 많다니까.’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몰래 웃었다.
식전주를 머금자, 감미로운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 게 떴다.
“맛있어요.”
내 중얼거림에 세드릭이 빙긋 미소 를 지었다.
식전주는 본 식사 전 입맛을 돋우 는 용도라던데, 그런 면에서 이 술 은 제 역할을 확실히 다하고 있었 다.
금세 잔을 비운 나는 한 잔을 더 달라고 할까 하다가 곧 스스로를 타 일렀다.
황궁 무도회에서 신나게 샴페인을 들이켰다가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곧이어 나온 식사 역시 놀랍도록 맛있었다. 나는 식탁 예절도 잊고 연신 감탄하며 그릇을 비웠다.
“여기 주방장님 솜씨가 정말 최고 네요.”
과연 메뉴판을 안 둘 만큼 자신감 이 넘칠 만도 했다. 가리비가 들어 간 클램 차우더, 양고기 스테이크, 바닷가재 테르미도르 모두 환상적인
맛을 자랑했다.
디저트는 아몬드를 듬뿍 얹은 비스 코티와 애플파이였다. 마지막으로 딸기 셔벗을 해치운 나는 만족스러 운 한숨을 내쉬었다. 입안에 달콤한 딸기향이 맴돌았다.
“제가 태어나서 먹어본 중 가장 완 벽한 식사였어요.”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그렇게 말 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도 몇 번이고 먹어 보았지
만, 단언컨대 이 레스토랑이 최고였 다.
마지막에 나온 와인까지 홀짝이고 나자, 기분이 구름 위를 오른 듯 행 복해졌다.
맛있는 식사와 아름다운 음악, 맞 은편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까지.
기분이 날개 달린 듯 날아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진정하자, 진정.’
나는 손등으로 뺨을 식혔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인지 고작 와인
한 잔에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절대 취하면 안 돼.’
세드릭 앞에서 두 번이나 만취하는 꼴을 보일 순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드릭이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리엘?”
“잠깐 바람 좀 쐴 수 있을까요?”
마침 저쪽에 운치 있는 테라스가 보였다. 안 갖춘 것이 없는 완벽한 레스토랑이었다.
네. 물론입니다.”
세드릭이 잠깐 멈칫하더니, 곧 비 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품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확 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체도 잠시, 곧 그는 자리에서 일 어나 나를 테라스로 안내했다.
커튼을 걷자 환상적인 야경이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