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화〉
호
[향수를 사치품을 넘어 유행 그 자 체로 바꾸어버린 아리엘 윈스턴! 그 녀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된다!]
[신상품〈천사의 숨결〉첫 1백 병 은 한정판! 아르키오스의 비늘로 깎 은 향수병과 함께 제공!]
멜리사의 기사는 ‘특집’ 문구를 달 고 문화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신문이 나간 다음 날 ‘향기 살롱’ 은 드디어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만 에 다시 문을 열었다.
“안내해 드리는 대로 줄을 서세 요!”
“질서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오랜만에 출근한 직원들이 열심히 질서를 잡았다.
“세상에, 온 제도 사람들은 다 몰
려온 것 같아요!”
리나가 신이 나서 속닥거렸다. 한 달 만의 재오픈이라서 그런지 화제 성은 확실히 거머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인기를 실감할 겨를이 없었다. 숨 한 번 돌릴 틈 없이 했 던 설명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했 으니까.
“아리엘 님. 이게 이번 신상품인가 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청년이 반짝
이는 눈으로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나팔 부는 아기 천사를 형상화한 향수병은 지나치게 영롱했다. 첫 백 개에 한해서는 특별히 아르키오스의 비늘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구름 같은 인파의 이유엔 선착 순 백 명에 들기 위한 숨 막히는 경쟁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사의 숨결〉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새로운 고객님에 게 새로운 설명을 시작했다.
“시향을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첫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셀레스틴이 지닌 강렬하고 시원한 특유의 향이 느껴지실 겁니다.”
“셀레스틴이라면, 혹시 성수에 들 어간다는……?”
“어머, 아시는군요. 바로 맞추셨어 요.”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설명을 듣던 청년이 내 대답에 한 층 경건해진 눈으로 향수병을 내려 다보았다.
“그렇게 귀한 재료가 들어갔다니!”
“실제로도 향수 판매 수익의 일부 는 고귀한 목적을 위해 쓰인답니다. 고객님께서 지불하시는 대금의 일부 는, 신전 관할 고아원으로 기부될 거예요.”
“오오, 고아원에! 정말인가요?”
“그럼요. 아이들에게 큰 보탬이 될 겁니다.”
고아원에 기부된다는 말에 청년의 눈이 반짝였다.
“목적이 훌륭하군요! 당장 구매하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계산은 저쪽 에서 부탁드려요.”
그렇게 청년은 한정판을 구매했다 는 뿌듯함과 고아원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안고 돌아갔다.
저녁 네 시쯤, 나는 여전히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바라보며 손수건 으로 이마를 훔쳤다.
새삼 신기했다.
이 세계에서 향수는 분명 그렇게 대중적인 상품은 아니었다. 일부 귀
족들만 즐기는 사치품에 그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행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 병씩 구매해서 뿌려 보곤 했다. 취미로 향수를 모으는 사람도 있었다.
문득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게 고 작 몇 달 만에 일어난 변화라는 것 이.
하지만 그런 생각을 오래 할 겨를 이 없었다.
종이 쉴 새 없이 울렸고, 나는 활 짝 웃으며 수백 번째 같은 인사말을 외쳐야만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리엘의 향기 살롱
입니다!”
호 호 오
“하아아.”
나는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장 밋빛 감도는 거품이 내 한숨을 타고 목욕물 위를 유영했다.
“기분 좋다.”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즐기는 목욕이었다.
동시에 오랜만에 만끽하는 휴일이 기도 했다.
매장을 다시 열고 일주일간 정신없 이 바빴다. 끼니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향수를 영업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기보다 보람찼으니 까.
하지만 점점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나를 보다 못한 리나와 직원들은, 내게 무려 닷새간의 휴가를 명령했 다.
정말로 ‘명령’했다. 추가로 고용해
이젠 열 명도 넘는 직원과 리나가 합세해 몰아붙이니 나는 꼬리를 내 릴 수밖에 없었다.
‘리나도 강경했지만, 제일 무서웠 던 건 루카였지……/
루카는 이러다가 사장님께서 쓰러 지신다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내 고집을 꺾기 위한 연기라는 건 알았지만 거기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쉬는 것도 좋긴 좋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장밋빛 거품을 갖고 놀았다.
오랜만에 늘어져라 늦잠을 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지금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6일곱 시까지 데리러 온다고 했었 지?’
세드릭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코 밑까지 욕조 안으로 잠겨 들었 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세드릭의 저택
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드 릭은 아쉬워하기는커녕, 이동 시간 조차 줄이는 게 맞다며 저택으로 가 겠다는 나를 극구 만류했다.
‘일주일 만에 하는 데이트네.’
이틀에 한 번 정도 세드릭이 가게 로 찾아오긴 했지만, 그리 오랜 시 간을 함께하진 못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데이트는 오늘 이 처음이었다.
‘ 헤헤.’
나는 손을 뻗어 장밋빛 거품을 가 지고 놀았다. 손바닥 위로 영롱한 오로라빛이 흩어졌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나를 리나와 루카가 비장한 얼굴로 맞았다.
“오셨군요, 아가씨.”
“사장님! 나오셨어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루카를 바 라보았다.
“루카 양, 일하는 날도 아닌데 정 말 나와도 괜찮아요?”
“그럼요! 사장님께 제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다니 영광인걸요.”
채용할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루 카는 머리 손질의 대가였다.
듣기로는 전문 헤어 디자이너와도 견줄 만한 솜씨라고 했다. 그쪽으로 취직하지 않은 건, 취미가 일이 되 는 게 싫어서라나.
오늘 나와 세드릭이 만난다는 걸 알게 된 루카는 제 솜씨를 내게 발 휘하게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해 왔
었다.
리나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죄송해요. 아직 오늘 입으 실 옷을 못 골랐어요.”
“으응, 괜찮아. 둘이 토론하는 소리 욕실 안까지 들리더라. 뭘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어?”
“그게, 루카 양과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요.”
“뭔데?”
리나와 루카가 나를 미니 드레스룸 으로 데려갔다.
잠시 뒤 루카가 꺼낸 옷을 본 나 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 이걸 입으라고요?”
“네, 사장님!”
루카가 반짝이는 눈으로 외쳤다.
“디자인도, 색깔도 너무너무 완벽 해요! 사장님을 위해 만들어진 옷 같은걸요!”
루카가 내민 드레스는 실제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이긴 했다.
다름 아닌 로잘린이 직접 디자인해 선물해준 드레스였으니까.
하지만 난 저 드레스를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저건 너무……오
‘너무 야하잖아!’
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건 민망해서 못 입어요.”
“그것 봐요, 루카 양. 아가씨는 이 런 디자인은 별로 안 좋아하신다니 까요.”
“하지만……!”
루카가 아쉬운 듯 외쳤다.
“너무 아름다운 옷인걸요! 등이 파 인 것 때문에 그러세요? 요즘 저런 스타일이 얼마나 유행인데요!”
“ 0 으”
- 1그 -
나는 난감한 얼굴로 드레스를 바라 보았다.
우아하게 드레이프가 들어간 드레 스는 분명 아름답기는 했다.
원단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계절감에 알맞게 시원해 보였다. 가슴 쪽이 살짝 파여 있긴 했지만, 한여름이니 만큼 저 정도의 노줄은 봐줄 만했 다.
문제는 등 쪽이었다.
과감하게 등을 모두 노출해버린 디 자인은 분명 파격적이면서도 세련되 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생각 을 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정 부담스러우시면 등을 가릴 수
있도록 머리를 묶지 않고 늘어뜨린 채로 손질해 드릴게요. 사장님은 머 리숱이 풍성하셔서 충분히 가려질 거예요.”
“ 0 으”
— V그 ’
루카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등만 아니면 한 번쯤 입어보고 싶 은 드레스이기는 했다.
오로라를 뿌린 듯 영롱하고 반짝거
리는 원단은, 로잘린이 특별히 나를 위해 힘들게 구해 온 원단이라고 생 색을 낸 적도 있었다.
“입어만 볼까요, 그럼?”
“네! 그러세요!”
아름다운 원단의 유혹에 넘어간 나 는 결국 드레스를 걸쳐 보았다.
잠시 뒤, 거울 앞에 선 나를 향해 탄성이 쏟아졌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정말 그래요, 아가씨. 옷이 날개라
더니, 훨훨 날아가 버리실 것 같아 요.”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솔직히 내가 봐도 이 드레스는 놀 랍도록 내게 잘 어울렸다.
로잘린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던 것 이다.
오로라를 수놓은 듯한 원단은 몸을 아름다운 곡선으로 감쌌다. 이렇게 드레이프가 들어간 드레스는 처음 입어보는 것이었는데, 왜 로잘린이 하필 이 디자인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이, 이렇게 예쁜데 등 좀 드러 나는 게 무슨 상관이야.’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넘어간 나는 순식간에 과감해졌다.
“이걸로 입겠어요.”
“와! 잘 생각하셨어요!”
루카가 환호성을 질렀다. 리나 역 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고른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았
다. 리나와 루카가 내 얼굴을 단장 해 주었다.
“드레스가 화려하니까 화장에는 조 금 힘을 뺄게요.”
“어휴, 우리 아가씨는 피부에 결점 이라곤 없어서 화장시켜드리는 맛이 안 나네요.”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나 안 하나 똑같네요, 똑같아!”
리나와 루카가 재잘거리며 내 얼굴 위에서 붓을 놀렸다. 둘이 제법 합 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보기 흐뭇했
다.
화장을 마친 내 얼굴은 아까보다 생기로 반짝거렸다.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달라진 부분 은 없었지만, 일주일간의 피로가 누 적된 다크서클은 감쪽같이 지워졌 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와아. 하나도 안 피곤해 보여.”
“헤헤, 그렇죠? 열 시간은 주무신 것 같죠?”
리나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화장까지 마쳤으니 다음은 장신구 를 골라야 했다.
리나가 다섯 개나 되는 보석함을 트레이로 끌고 왔다. 윈스턴 백작이 백작저에 남아 있던 것을 가져와 준 덕분에 선택지가 몹시 많아졌다.
“아가씨, 추천해드리고 싶은 목걸 이가 있어요.”
“응? 뭐야?”
“이 목걸이요!”
리나가 보석함 중 가장 커다란 것 을 열었다.
드러난 검은 벨벳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연자수정이 가냘프면서도 영 롱한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