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머지않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 치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향이 섞여 묘한 향기를 발산 하는, 내 가게 특유의 냄새였다.
짝짝짝!
손뼉 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 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계속 걸었다. 세드릭의 손을 꽉 쥔 채.
박수 소리 한가운데로 나를 이끈 세드릭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부드럽게 내 손을 놓은 그가 눈가 리개를 벗겨 주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세드릭의 얼굴이 보였다. 나 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돌아보시죠, 아리엘.”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
삭였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 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채 내게 박수를 보내고 있 었다.
“축하해요, 아리엘 양!”
“드디어 다시 가게를 여는군요!”
여기저기서 축하와 웃음소리가 들 렸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선 채로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준 게 정말 고마운 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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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손뼉을 멈추고 귀 를 기울였다.
‘ 민망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공개적인 화답이라도 몇 마디 해야 할 분위기 였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대본
없는 임기응변엔 자신 없는데…… 나는 어색함을 누르며 애써 입을 열 었다.
“이렇게…… 와 주시고, 축하해주 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별 것 없는 인사에 사람들이 흐뭇 한 얼굴을 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 는 민망함을 삼키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은 직원들끼리만 완공식을 할 생각이었는데, 저기 있는 루나 양이
결사반대를 외쳐서
해
나는 루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선의 끝에서 루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 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고 마워, 루나. 그리고 모든 분께 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박수 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아리엘!”
밝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 다. 샤를로트였다.
여느 때보다도 더 화사하게 빛나는 샤를로트는, 요정 같은 녹안을 반짝 이며 말했다.
“무사히 완공했네요! 축하해요!”
“고마워요, 샤를로트.”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샤를로트는 여기 모여준 많은 사람 중에서도 특히 내게 각별한 존재였 다. 나는 샤를로트에게 속삭였다.
“샤를로트가 없었다면 가게는 시작 도 못 했을 거예요.”
“어머나, 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죠?”
“아뇨. 정말인데요.”
샤를로트는 내 첫 손님이었다. 각 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샤를로트에게선 내가 특별 제작해 선물한 향수의 냄새가 났다.
알코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복숭 아 향은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녀의 따스한 녹안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기, 샤를로트. 앞으로도 저랑 자 주 놀아주셔야 해요.”
내 진지한 부탁에 샤를로트가 웃음 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매일 놀러와서 향수도 안 사고 눌러앉아 있을래요.”
환영입니다. 마침 응접실을 크게
넓혔거든요.”
시원하게 웃은 샤를로트가 눈짓으 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아가씨께서 할 말이 있나 본데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 다.
크림색 나들이용 드레스를 차려입 은 레티아나가 수줍은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아리엘 님, 축하드려요.”
레티아나가 천사 같은 자태로 내게 축하를 건넸다.
나는 웃으며 두 사람에게 화답했 다.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요즘 두 사람 다 한창 바쁠 때 아 닌가요?”
테오는 기사단 훈련으로 바쁠 거 고, 레티아나 역시 재활과 마법 수
련으로 바쁠 터였다.
최근 전해 듣기로는, 레티아나에게 서 치유 마법의 재능을 발견한 마탑 이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나.
“아무리 바빠도 아리엘 님을 축하 하는 자리엔 꼭 오고 싶었어요.”
레티아나가 예쁘게 웃으며 기특한 이야기를 했다.
“제가 이렇게 다시 밖으로 나오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은인이신 아리엘 님 덕분이니까……『
레티아나가 수줍게 말했다.
나는 민망함에 코를 긁적였다.
누누이 말했지만 내가 레티아나에 게 한 일이라곤 철창을 먼저 열어준 게 전부였다. 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한 게 없는 은인일 거다.
레티아나 곁을 호위 기사처럼 지키 고 있던 테오도 입을 열었다.
“완공,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무뚝뚝한 인사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도 생각한 거지만, 테오는 에반스 기사단복이 아주 잘 어울렸 다. 사막 부족 특유의 갈빛 피부는 하얀 기사단복과 좋은 대비를 이루 었다.
“잘 어울리네요, 기사단복.”
“아. 감사합니다.”
테오가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테오? 내가 잘 어울린다 고 했잖아.”
레티아나가 즐겁게 웃었다.
“특히 네 피부와 황금 장식이 진짜 잘 어울린다구.”
“적극 동감해요. 맞춤옷 같네요, 테 오 씨.”
갑자기 쏟아지는 칭찬에 테오의 귓 불이 순식간이 시뻘게졌다. 표정은 그대로인데 귓불만 빨개지는 게 재
미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등 뒤로 바짝 다 가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이었 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서 있던 그가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레티아나의 시선이 세드릭을 향했 다. 그녀가 예쁜 금안을 내리깔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에반스 공작님.”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
는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쿨한 사 람이 되고 싶은데.
세드릭과 레티아나가 마주할 때마 다 자꾸 긴장을 하게 된다. 운명이 란 게 언제 어디서 어떤 힘을 발휘 할지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원래 두 사람이 인연이었다는 건 알지만…… 나라는 캐릭터는 스쳐 가는 기차역 같은 존재였다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홀라당 갈아타
버리면 용서 안 할 거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세드릭을 노려보 았다.
세드릭은 난데없는 내 째림에 당황 하는 대신, 내 등을 끌어안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깜 짝 놀라 속삭였다.
세드릭? ……뭐 해요?”
요즘 우리가 스킨십이 조금 늘었다 고는 하지만, 여긴…… 장소가 좀 그렇잖아?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우릴 구경하 는 게 느껴졌다. 나는 빨개진 얼굴 로 속닥거렸다.
“갑자기 뭐하는 거예요?”
“그냥. 안고 싶어서요.”
너무 간단한 대답이라 할 말이 없 었다.
세드릭이 나를 더 단단히 품에 안 았다. 폐부를 채우는 그의 체향은
이 와중에도 향기로웠다.
‘아니, 체향이나 맡을 때가 아니지.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담?’
세드릭에게 덥석 안긴 채 나는 곤 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에 레티아나가 웃음을 참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테오, 저쪽으로 가 있자.”
레티아나가 테오에게 속닥거렸다.
두 사람이 멀어지고 난 뒤, 세드릭
이 내게 충격적인 말을 속삭였다.
“저도 태워볼까요.”
“네? 뭘요?”
“그다지 잘 타는 체질은 아니지만, 노력한다면 한동안은……『
“잠깐, 잠깐만요. 지금 설마 피부 얘길 하는 건 아니시겠죠?”
“맞습니다만.”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웬 태닝 타령일까.
……설마 테오 때문에? 기사단복이
랑 피부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 니 전에도 자기가 더 세다는 둥 황 당한 이야길 했었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드릭의 말도 안 되는 질투에, 방 금까지 걱정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 껴 졌다.
그렇구나.
원작에 어떻게 적혀 있든, 지금 세 드릭과 레티아나는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여태 전전긍긍한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한숨 을 뱉었다. 그때 누군가 우리 앞으 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멜리사였다. 나는 여전히 등에 세 드릭을 매단 채 반갑게 인사를 건넸 다.
“멜리사! 와줘서 고마워요.”
세드릭의 손을 옆으로 치우자, 그 가 마지못해 떨어져 나갔다.
멜리사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뭘요, 당연히 와야죠. 완공 정말 축하드려요, 아리엘 영애. 이렇게 거 대한 매장을 갖게 되셨는데 소감이 어떤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 돌려 매장을 올려다보았다.
한 달간의 공사를 마친 매장은 몰 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다소 아담했던 내 가게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거의 백 화점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건물이 떡하니 서 있었다.
새 가게의 세련되고 위용 넘치는 자태를 감상하며 나는 미소를 지었 다.
“뿌듯하죠. 정말 계획대로 됐구나, 싶고.”
“오호. 아리엘 영애의 성공은 우연 히 얻은 행운이 아니라, 치밀한 계 산 끝에 거머쥔 열매였다는 말씀이 시죠?”
멜리사가 번드르르하게 내 말을 포 장했다. 기사에 쓸 문장을 벌써 고 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좋습니다, 좋아요. 아, 그리고 재 오픈과 동시에 준비한 신제품이 있 다고 들었는데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나는 흠, 흠 헛기침을 한 뒤 신제 품 홍보를 시작했다.
여태까진 극비를 지키고 있었지만,
멜리사에게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그녀라면 누구보다 요란하게 이번 신상을 홍보해줄 테니까.
“컨셉은 ‘사랑’이에요.”
“네? 어머나.”
멜리사가 나와 세드릭을 번갈아 가 며 쳐다보았다.
“최근 교제 중이신 어떤 분과의 관 계가, 영향을 끼친 건가요?”
“네? 아뇨. 그 사랑이 아니라!”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박애에 가까운 의미의 ‘사랑’이에 요!”
“오호. 박애라니, 어떤 의미일까 요?”
역시 멜리사라면 물어볼 줄 알았 다.
나는 자신감 있게 웃으며 말했다.
“이 향수를 구매하시면, 일정 금액이
신전에 기부금으로 전달된답니다.”
아젠드릭을 떠나기 전, 나는 신관 을 통해 신전에 한 가지 제안을 했 었다.
셀레스틴을 재료로 향수를 만드는 대신, 수익의 일부를 신전에 기부한 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신전은 처음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곧 흔쾌히 승낙 했다.
때마침 신전에서 좋지 못한 재정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 로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관들을 통해 점을 봐주던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신전에게 내 제 안은 나쁠 것이 없었다.
“기부라니!”
멜리사의 눈이 반짝였다.
“굉장히 멋진 선택을 하셨네요. 향 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 들 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나는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새로 출시될 향수가 어떤 컨셉으로 만들어졌는지, 가장 강렬한 향은 어 떤 느낌이고 잔향은 어떤 계열인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동안 내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멜리사는 열심히 내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관심 없는 향수 얘기가 지루할 텐 데도 세드릭은 줄곧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를 향한 따스한 눈길이, 오후의 햇살과 섞여 부드럽게 뺨에 내려앉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