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나는 굳은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 보았다.
사슬로 단단히 묶여 있는 로드는 수척해 보였다. 지하 수로에서 들이 닥친 우리를 보고서도 뻔뻔스레 지 껄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로드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구경 중인 수많은 시 선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로드의 눈
빛엔 분노와 굴욕감이 서려 있었다.
구경꾼들이 로드의 시선에 야유로 맞받아쳤다.
“어디 고개를 빳빳이 들어!”
“더러운 범죄자 주제에!”
로드가 이를 빠득 가는 게 보였다. 구경꾼 중 하나가 뭉친 쓰레기를 던 졌다.
“난장판이네요.”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
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처벌 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하지 만 로드가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것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었다.
곧 법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로드의 죄를 줄줄 읊었다.
인신매매, 마약 유통, 납치, 살인교 사, 살인과 살인미수……,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중범죄 이름 에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와 같이 극악한 죄를 저지
른 죄인에게, 영구 노예형을 선고한 다!”
법관이 외쳤다.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한참인 제국 에서, 노예형은 가장 잔인한 극형이 었다. 이 나라에 노예는 노예형을 받은 범죄자들뿐이었다.
강력한 처벌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옳소!”
“평생 남 밑에서 죗값을 치러라!”
로드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는 노예형이라는 판결보다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야유 받는 이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든 것 같았 다.
하긴, 늘 뒤에 숨어 사람들을 조종 하며 범죄를 저지르던 놈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곧 병사들이 낙인 도구를 가져왔 다. 도구를 알아본 로드가 진저리를 쳤다.
병사들은 로드의 반항은 아랑곳하 지 않고 그를 바닥에 엎은 뒤, 뒷목 에 노예 낙인을 찍었다.
“끄아아악!”
낙인에 지져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지 로드가 몸을 뒤틀었다.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낙인입니 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세드릭이 입 을 열었다.
“저 낙인이 찍혀 있는 한, 어딜 가
든 위치를 추적할 수 있죠. 더해 함 부로 제국 국경을 넘으려 했다간 낙 인을 찍힌 부위가 터질 겁니다.”
“그렇군요.”
“공식적으론 제국 소유의 노예지 만…… 아리엘이 제안하신 대로, 지 하 수로에서 구줄해왔던 피해자들에 게 신병을 넘기기로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로드는 평생 노예라는 낙인 이 찍힌 채, 제가 파리 목숨처럼 취 급했던 자들을 섬기게 될 터였다.
악당의 말로로 썩 괜찮은 결말이었
다.
고통으로 헐떡이는 로드를 바라보 고 있는데, 문득 시야 끝에 익숙한 빛깔이 걸렸다.
고개 돌린 나는 레티아나 특유의 연하늘색 머리칼을 발견했다.
레티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로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에선 에반스 기사단원 복을 입은 테오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 는 것이 보였다.
“괜찮겠죠, 레티아나 양.”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 다.
원작을 읽으면서 응원했던 캐릭터 이기 때문일까. 레티아나는 실제론 몇 번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못내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다.
내 시선을 따라간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나 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방금 그것은, 스스로의 경험에 빗
대어 한 이야기였을까?
무심코 세드릭을 돌아보자 그가 내 게 시선을 돌려주었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나는 가 만히 마주 보았다.
시간은 세드릭의 상처도 완전히 아 물게 만들 수 있을까. 후유증마저도 씻은 듯 치유할 수 있을까.
세드릭의 저택에서 지낸 이 며칠 간, 그는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킨 적 없었다.
내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드는 게 정말 영향을 미치는 걸까?
확실한 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존재가 심리적으로라도 세드릭에 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백 밤이고 더 그의 지붕 밑에서 함께 잠들 수 있었다.
병사들이 로드를 강제로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로드의 뒷목엔 새빨간 낙인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 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바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하루
하루가 급물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
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루 하루 급류 위에서 노를 저었다.
가게는 한 달 동안 문을 닫았다. 확장 공사를 위해서였다.
인수한 매그너스의 매장을 두고 나 는 꽤 한참 동안 고민했었다. 2호점 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기왕 이웃 한 건물인 김에 합쳐버릴 것인가.
격렬한 고민과 여러 사람의 조언을 얻은 결과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 다.
두 건물을 하나로 만드는 건 상당 한 대공사였지만, 건축업자는 한 달 이면 완성될 거라고 내게 확언했다.
한 대 대여비만 해도 말도 못하게
비싼 건축용 마도 기계를 열 대나 사용하기로 한 덕분이었다.
솔직히 내 자금만으로는 이런 대공 사를 감행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불가능했겠지.
진행했더라도 아주 아주 느리게 굼 벵이처럼 진행했어야 했을 거다.
하지만……오
‘이정도는 돕게 해 주십시오.’
답답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던 세 드릭이 떠올랐다.
나는 손사래를 쳤었다.
‘아니, 괜찮아요. 제가 가진 자금만 으로도 조금만 기간을 타협하면
‘대체 왜 타협을 합니까? 아리엘 앞에 이렇게 버젓이 투자자가 서 있 는데 왜 타협이 필요하단 겁니까?’
‘아니, 하지만……/
‘이 정도 도움도 안 받으실 거면, 애초에 투자는 왜 요청한 겁니까? 제가 명색이 투자자인데 이 정도 참 견도 못 한다는 겁니까?’
세드릭은 드물게 결사반대를 외쳤
다.
질문을 빙자한 압박에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알겠어요. 이번엔 세드릭의 도움 을 받을게요.’
‘여러 사람에게 투자해 봤지만, 아 리엘처럼 까다로운 분은 처음입니 다. 투자를 하겠다 해도 굳이 마다 하다니.’
‘알겠어요. 받겠다니까요, 투자. 화 난 거 아니죠?’
‘안 났습니다. 제가 아리엘에게 어 떻게 화를 냅니까.’
아니라곤 했지만 좀 삐진 것 같긴 했다.
세드릭과는 가까운 사이가 된 만큼 지나친 도움은 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고집을 약간만 꺾기로 했다.
세드릭에게 건축 자금을 후원받자, 건축 기간은 한 달이라는 놀라운 기 간으로 단축되었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가게는 공사 가 이뤄지는 한 달 동안 문을 닫기 로 했다. 직원들에겐 유급휴가가 주 어 졌다.
작업장에서 조향을 돕는 직원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 한 달 동안 대대적인 프로젝트에 돌입했 다.
이름은 ‘한여름 접수 프로젝트’.
이 직관적인 네이밍은 작업장 직원 이 라비의 작품이었다.
라비를 비롯한 직원들 모두 새로운 향수로 올여름 유행을 휘어잡겠다는 야심에 가득 찼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보며 몰래 흐뭇해했다. 내가 인복은 있는 모양이라고.
그조차 잠깐, 곧 다시 작업에 몰두
해야 했지만.
아무튼,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곧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는 한여 름이 되었다.
“루나. 진짜 이걸 또 해야 해?”
나는 눈가리개용 벨벳 천을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막 루나에게 이걸 쓰고 가게 까지 걸어가 달라는 부탁을 들은 참 이었다.
루나가 두 손을 모으고 커다란 눈 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제발요! 루나 일생일대의 부 탁이에요!”
그 일생일대의 부탁, 저번 개업식 때도 들어줬던 것 같은데……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까 짓것 이번에도 들어주기로 했다.
“알았어. 쓸게.”
“와아! 아리엘 님 최고!”
루나와 소녀들이 손뼉까지 치며 좋 아했다.
소녀들은 이번에도 파스텔톤 드레 스를 맞춰 입고 있었다.
저렇게 입고 나란히 서 있으면 자 기들이 무해한 햄스터들처럼 귀여워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제가 씌워드릴게요, 아리엘 님!”
“그래. 고맙다.”
순식간에 눈앞이 천으로 덮여 깜깜 해졌다. 나는 팔을 뻗어 앞을 더듬
었다.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네. 나 방 향감각 꽝이라 너희가 진짜 잘 안내 해줘야…… 어?”
허공을 더듬던 손이 따스한 체온으 로 감싸였다.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였지만 나는 단박에 체온의 주인을 알아챘다.
“세드릭? 언제 왔어요?”
“ 지금.”
깊게 손깍지를 끼며 세드릭이 대답 했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사방이 고요 해졌다 싶었다.
“그렇구나. 좋은 오후예요.”
아침 식사할 때도 봤지만, 나는 잡 히지 않은 쪽 손을 세드릭에게 흔들 어 보였다.
그러자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 좋은 오후입니다.”
손깍지가 더 깊어졌다. 나는 온몸 의 솜털이 바짝 솟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까지도 세 드릭과의 스킨십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순식간에 말이 없어진 나를 눈치챈 건지 채지 못한 건지, 세드릭이 웃 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시죠. 다들 주인공을 기다 리고 있을 겁니다.”
입을 연 내가 더듬거리며 속삭였
다.
“손…… 손잡은 채로 갈 거예요?”
“방향감각이 꽝이라 잘 안내해줘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더 듣지 않고 세드릭이 내 손을 이끌었다. 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한 시예요.”
“헛, 벌써?! 아리엘 님, 어서 출발 해요!”
루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암 흑 속에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히 나를 지탱해 주는 손 덕에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가 앉아 있던 카페에서 가게까 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대로도 건너야 했다.
바로 방금 전 무섭지 않다고 생각 했던 게 무색하게 나는 겁을 집어먹 었다.
“세, 세드릭. 마차 안 오는 거 맞 죠?”
“네.”
“제 앞에 돌부리가 있는지도 잘 살 펴주셔야 해요. 소홀히 보시면 안 돼요.”
“행여나 그러겠습니까.”
무서워하는 내가 재미있는 듯 세드 릭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배어 있었 다.
우리 뒤로 소녀들이 졸졸 따라오며 응원의 소리를 외쳤다.
“거의 다 왔어요, 아리엘 님!”
“힘내라! 파이팅!”
‘하아
눈 가린 여자와 그녀를 이끄는 남 자, 그리고 연신 파이팅을 외치며 따라오는 소녀들.
보지 않아도 이 대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릴 구경하고 있으리란 건 알 수 있었다.
‘홍보 하나는 톡톡히 되겠네.’
오늘은 확장 공사가 끝난 지 일주 일이 지난 날.
그리고 ‘향기 살롱’ 완공식 기념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