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41화 (141/153)

〈142화〉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매그너스가 입술을 물고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 다. 패배를 인정하기가 분하긴 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매그너스는 사업가다. 분한 것관 별개로 제게 그나마 이득이 되 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톡톡,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이젠 슬슬 이 대치 상태도 지루해지 려 했다.

매장을 느긋이 둘러보며 내가 말했 다.

“일 초라도 빨리 파시는 게 이득일 텐데요. 망설일 시간이 있나요? 이 순간에도 남작님의 적자는 늘어나고 있는걸요.”

“……다른 사람에게 매각한다는 선 택지도 있습니다. 이 근방 건물들은 최근 값이 많이 올랐으니 잘하면 레 이디가 제시한 가격보다는……,”

“농담하시는 거죠, 남작님?”

나는 즐겁게 웃었다.

“하필 이 근방 건물들만 값이 오른 이유가 뭘까요? 제 가게 때문이라는 걸 굳이 제 입으로 말하게 하실 생 각은 아니시겠죠, 부끄럽게.”

내 가게에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 기 시작하면서, 근방 상점들 역시 덩달아 호황을 맞았다.

향기 살롱의 대각선에 위치한 카페 의 주인은 내 덕분에 매상이 몇 배 는 뛰었다면서 툭하면 빵 바구니를 보냈고, 그 옆의 꽃 상점의 주인 역 시 꽃다발을 자꾸만 선물했다. 덕분 에 내 가게 안의 장식용 생화는 시

들어 있는 법이 없었다.

“제가 남작님의 가게를 노리고 있 다는 게 온 사방에 소문이 나 있는 데, 굳이 절 거스르면서 이 가겔 사 들이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매그너스가 못되긴 했어도 바보는 아니니, 내가 짚어준 것들을 모르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매그너스는 주먹 쥔 손을 한 번 더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억눌린 중얼거림이 들렸다.

“내가…… 이런 애송이한테……『

“자, 자. 여기 말고도 사업체는 많 으시잖아요. 이쯤에서 향수 사업은 포기하시죠. 그럼 피차 편해질 거예 요.”

나는 펜을 매그너스에게 건넸다.

“어서요.”

사인을 종용하자 매그너스의 미간 에 깊게 골이 파였다.

오 분 뒤, 나는 계약서를 보고 활 짝 웃었다.

서명란에는 매그너스의 이름이 예 쁘게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참 예쁘시네요, 남작님.”

나는 흥얼거리며 계약서를 갈무리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며 나 는 대강 계획을 잡았다. 이 구역은 매대로 쓰고, 저 구역은……오

짧게 궁리하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남작님의 후원자께서는 어디 계신 건가요?”

처음 매장을 오픈했을 때, 매그너 스는 분명 유리구두 마법이니 뭐니 돈을 왕창 뿌려댔었다. 매그너스 혼 자만의 자금으론 불가능했을 것이 다. 절반은 강력한 후원자의 덕택이 었다. 그런데 아제키안이 어느 순간 부터 게임에서 빠진 것이다.

매그너스와의 대결이 생각보다 싱 겁게 끝난 건 그 때문이었다.

내 말에 매그너스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절 놀리시는 겁니까?”

“무슨 말이죠?”

“아제키안 전하께서 잠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말씀하신 건 아니시 겠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금시초문인데요?”

어쩐지 안 보인다 싶더라니. 매그너스가 버럭 화를 냈다.

“거짓말 마십시오! 아낌없는 후원 을 약속하셨던 분께서 하루아침에 연락을 뚝 끊으셨는데, 레이디의 입 김이 닿지 않았을 리 없지 않습니 까!”

매그너스는 내가 아제키안을 구슬 려서 후원을 끊게 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랑 관련 없는 일이에요.”

“끝까지 이러시깁니까? 에반스 공 작 전하와 황자 전하를 동시에 포섭 하시다니, 과연 수완이 대단하시긴 합니다!”

매그너스가 분한 목소리로 비아냥 댔다.

나는 코를 긁적였다. 아제키안이 잠적했다는 소식은 나 역시 의외였 다.

‘나와 매그너스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해서 내게 투자 중인 세드릭을

이기려는 계획인 줄 알았는데?’

뭐. 한동안 성가시게 굴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나는 의아함을 지우고 매그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글쎄요. 높게 평가해주시는 건 감 사하지만, 전 그렇게까지 재주가 좋 진 않아요. 그나저나 좋은 거래였습 니다. 남작님.”

매그너스가 악수하기 위해 내민 내 손을 노려보았다. 나는 생긋 웃었다.

“앞으로도 자주 보겠죠, 저희? 같 은 미용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니까요.”

매그너스가 향수 매장에서 손을 뗀 이상 이전처럼 자주 부딪치진 않겠 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매그너스가 마지못해 손을 맞잡으 며 말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향수 쪽엔 앞으로 눈길도 두지 않을 테 니.”

“그건 모르는 일이죠. 안 그래도 어제 라비올리 백작님께서 동업을 제안하셨거든요.”

매그너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 다.

라비올리 백작은 최근 화장품 산업 에 손을 대고 있는 부호였다. 매그 너스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대상 중 하나일 것이다.

매그너스가 목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업이 라니……?”

“화장품 라인을 새로 출시할 계획 이신가 봐요. 거기 제가 만든 향기 를 첨가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시 더군요.”

지금은 사들인 매그너스의 가게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니 거절했 지만,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승낙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그너스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아, 안 됩니다! 거절하십시오!”

“ 어째서요?”

“어째서냐니요? 레이디께선 저와

또 마주치고 싶으십니까? 레이디께 서도 제가 지겨우실 텐데요!”

“지겹다니요. 저희 이웃으로 꽤 잘 지내왔잖아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거래도 잘 성사되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계약서에 적힌 대로 건물은 이번 달까지 비워 주시고요.”

내 환한 미소에 매그너스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혔다.

문을 향해 돌아서자 루카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 루카는 망연 자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녀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직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나는 루카에게 다정히 말했다.

“내일부턴 내 가게로 출근하도록 해요, 루카 양.”

“네, 네?”

루카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살짝 눈웃음을 쳤다.

“물론 루카 양이 괜찮다면 말이에 요. 내일 내 가게로 출근한다면 바 로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죠.”

“무슨 소리죠! 루카는 내 직원입니 다!”

매그너스가 발끈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매장도 없으시면서 웬 욕심 이에요? 그럼 루카 양에게 선택하도 록 하죠, 누구에게 고용될지. 아, 루

카 양. 내게 온다면 위약금은 내가 부담할게요.”

“레이디! 이렇게 상도덕이 없어도 됩니까? 전 다른 매장도 많습니다! 루카는 그쪽에 고용할 겁니다!”

나는 매그너스의 말을 듣는 둥 마 는 둥 하며 루카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고용인에게 소리치지도 않 고, 반말도 하지 않아요. 장사가 안 되는 걸 고용인에게 화풀이하지도 않고요.”

앳된 얼굴의 루카는 겁먹은 눈으로 매그너스를 힐끔거리다가, 곧 결심 한 듯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달라붙었 다.

나는 활짝 웃었다.

“루카! 저 배은망덕한!”

나는 씩씩대는 매그너스를 내버려 두고 루카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그럼 내일 봐요, 루카 양.”

“넷, 아리엘 님……!”

루카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 지만, 그 와중에도 몸에 밴 듯 싹싹 하게 인사했다.

나는 내 가게로 돌아가려다 말고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거대하고 위용 넘치던 매그 너스의 가게가 오늘따라 더 멋져 보 였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2호점.’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꽤 한참 동안 매그너스의, 아니. 이젠 내 것이 된 가게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사장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아침 산책 중이셨나요?”

출근 중인 내 직원들이었다.

“맞아요, 아가씨! 거기서 한참 동 안 뭘 보시는 거예요?”

저쪽에서는 리나가 외쳤다. 에른과

기사들 역시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 다보고 있었다.

문득 뜬금없는 자각이 들었다. ‘내 사람’이 어느새 이렇게나 많이 늘어 났구나, 하는.

‘작업장으로 출근 중일 직원들까지 생각하면…… 와, 나 정말 고용 계 약서 많이 썼네.’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책임감 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내가 고용 내 사람들. 내겐 이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 그냥요.”

나는 직원들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 다.

“다 같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머나, 갑자기요?”

직원들이 까르르 웃었다. 나는 웃 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 분. 오늘도 힘내죠.”

“네! 힘내겠습니다.”

기합 들어간 직원들의 얼굴 위로 여름 해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 # #

나는 피곤한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 다.

간밤엔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책 냄새를 맡으러 들어간 세드릭의 서 재에서 발견한 체스판으로 내리 네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도 체스가 있을 줄은 몰 랐기 때문에 나는 꽤 신이 났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삐걱거리긴 했 지만 그래도 한 판은 이겼다.

‘혹시 져 준 건가?’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옆에 앉은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 자 세드릭이 눈가가 빙긋 접혔다.

다정한 웃음에 나는 얼굴을 붉혔 다. 문득 어젯밤이 생각나 버렸기 때문이다.

세드릭은 연달아 네 게임을 하고 난 뒤 뻗어버린 내게 안은 채로 침 대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졸린 와중에도 한사코 거절했었다.

그런 일을 당했다간 침대로 옮겨진 내 얼굴이 사정없이 달아오를 게 분 명했고, 그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아 주 야릇해질 것 같았다.

우린 마음이 통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지난 사이다. 그렇게 짙은 분위기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같은 집에

서 지내는 건 괜찮냐고 물으면 할 말 없지만.’

뭐, 일단은 간호하기 위해서고, 그 리고 세드릭의 집은 아주 크니까 괜 찮지 않을……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세드릭이 내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시야에 들어찬 잘난 얼굴에 나는 숨을 들이 삼켰 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하하…… 별거 아니에요.”

어젯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고 털어놓을 순 없었다.

세드릭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정말요?”

나는 그제야 차창 밖을 내다보았 다.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사람이 아주 많네요.”

차창 밖을 휘 둘러보며 내가 말했 다. 듣기 좋은 미성이 답했다.

“오랜만에 벌어지는 행사니까요.”

내 말대로, 원형 경기장의 관중석 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떠들썩한 수다 소리가 귓가를 메웠 다.

“가시죠.”

먼저 마차에서 내린 세드릭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드릭은 나를 사람으로 가득한 입 구 대신 계단으로 데려갔다. 계단을 꽤 오른 끝에 우리는 상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래로 넓은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곧 시작할 겁니다.”

밑에서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 다.

“뭐 하는 놈이래?”

“나도 잘은 몰라. 그런데 아주 흉 악한 범죄자인가 봐.”

“듣자 하니 어느 높으신 분 저택을 싸그리 몰살시키려 했다던데?”

“어휴, 그건 그래도 미수에 그쳤잖 은가. 듣기론 저놈이 납치해간 사람 들만 해도 마을 하나 규모라는군.”

사용인이 나와 세드릭에게 와인을 건넸다. 나는 기꺼이 잔을 받곤 보 랏빛 액체를 홀짝거렸다.

시간이 됐군요.”

세드릭의 말이 신호탄이 된 듯, 경 기장 안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어우우우!,,

야유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오늘의 주인공이 칭칭 묶인 채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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