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
하지만 향이 마음에 든다고 마구 캐다가 재료로 삼을 순 없는 일이 다.
나는 신관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신관은 셀레스틴의 향기에 연신 감탄하는 내가 흐뭇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 신관님. 혹시
55
# # 호
나는 힘차게 커튼을 쳤다. 눈부신 여름 햇살이 가게로 쏟아져 들어왔 다.
“음, 날씨가 너무 좋다.”
나는 눈을 감고 아침 공기를 느끼 며 말했다. 흡족한 내 목소리가 재 있었는지 리나가 웃었다.
“네, 정말 화창한 날이에요. 아침부 터 드시겠어요, 아가씨?”
“응! 부탁해.”
곧 리나가 테이블 위로 아침 식사 를 차려주었다. 나는 까만 씨가 촘 촘히 박힌 바닐라 스콘 위로 딸기잼 을 얹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리나, 기사님들은?”
“바쁘신 것 같았어요. 아까 사다리 를 들고 다니시던데요?”
사다리?
나는 스콘을 입에 넣으며 눈을 끔
뻑였다. 아침부터 웬 사다리…… 까 지 생각한 순간 혀에 닿은 스콘이 입안에서 바닐라 향을 확 터뜨렸다.
“이거 진짜 맛있다, 리나.”
“어머, 그렇죠? 이 앞에 새로 오픈 한 베이커리에서 사 온 대표 메뉴예 요.”
“에일린이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거긴가?”
이렇게 맛있는 빵집이 가게 근처에 오픈하다니. 역시 내 가게는 입지
조건이 완벽했다. 나는 신나게 스콘 을 해치웠다.
“아, 잘 먹었다. 고마워, 리나.”
“뭘요. 오픈 시간까지는 꽤 남았는 데 뭘 하시겠어요?”
“아, 오늘은 할 일이 있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는 활 짝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실내용 로브에서 간단한 외출용 드레스로 갈아입었 다. 짙은 남색 모자까지 갖춰 쓴 나 는 거울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
소를 지었다.
“웬일이세요, 아가씨? 거추장스럽 다고 모자는 잘 안 쓰시잖아요.”
모자 뒤로 삐져나온 머리를 손질해 주며 리나가 말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하게 갖춰 입어 봤어.”
나는 또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요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시 네요. 특히 그저께 공작님과 외출하 고 돌아오신 이후로는 부쩍 더요.”
“하하…… 내가 그랬나?”
지레 찔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 었다. 리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에. 항상 콧노래를 흥얼거리시 고, 시종일관 웃으시고…… 종종 아 무 이유 없이 혼자 웃기도 하시잖아 요.”
“내, 내가?”
“응? 모르셨어요? 손님들까지도 아
가씨께 경사가 생긴 거면 귀띔해달 라고 제게 부탁하던걸요. 축하하고 싶다면서요.”
“그, 그래? 하하, 난 평소랑 같은 것 같은데 이상하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요즘 틈만 나면 아젠드릭에서 세드 릭과 보냈던 시간을 돌이키고는 했 는데, 그게 다 티가 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공작님께서 잘해 주시나 봐요.”
리나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에서 내가 술에 취해 돌아왔 던 날 밤, 세드릭에게 날을 세우던 리나완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뺨을 긁적거리며 부끄러워했 다. 리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가게 문밖으로 나온 나는 일단 한 껏 아침 공기를 만끽했다. 시원하고 맑은 산소가 뇌를 깨웠다.
“아리엘 님, 좋은 아침입니다!”
머리 위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머리 위? 내 고개가 죽 위로
돌아갔다.
“헉.”
고개를 젖힌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붕 위에 멜른과 휴고가 올라가 있었다.
“거기서 뭘 하고 계세요?”
“아, 여기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보여서 말입니다. 이제 거의 다 됐 습니다.”
망치를 손에 든 멜른이 환한 얼굴
로 말했다.
어쩐지, 스콘을 먹는 동안 어디서 소음이 좀 들린다 싶더니……,
나는 아침부터 공구를 들고 내 지 붕 위에 올라가 계시는 엘리트 기사 님들께 황급히 외쳤다.
“그런 일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 사람을 부르면 되는걸요!”
“에이, 저희 둘이서 하면 금방인데 왜 사람을 부릅니까?”
“맞습니다. 아리엘 님의 안전에 위 해를 가할 수 있는 이런 문제들은 바로바로 해결해야죠.”
해맑게 말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심각한 인재 의 낭비였다.
세드릭에게 이젠 정말 기사님들을 데려가라고 말해야지. 이젠 내가 실 험체였다는 의심도 해소했으니 세드 릭도 더는 고집 부리지 않을 거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가게 울타리를 나섰다.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오십 발자국 정도를 걸은 나는, 옆 가게 앞에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 았다.
사장의 취향을 잘 반영한 건물은 문부터가 몹시 화려했다. 문패에는 매그너스 가의 상징인 날개가 양옆 으로 쭉 뻗어 있었다.
‘인테리어는 잘해 놨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한 감상 을 떠올렸다.
살짝 헛기침을 한 나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 너머로 널따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나를 맞는 직원이 하나도 없었다.
“어, 어서오세요……!”
몇 초 뒤에야 직원 한 명이 헐레 벌떡 달려 나왔다. 깜빡 졸기라도 한 건지 뺨에는 쿠션 자국이 나 있 었다.
내 얼굴을 바라본 직원이 입을 딱 벌렸다.
“허, 헉. 손님께서는……!”
어찌나 놀랐는지 직원은 말도 제대 로 잇지 못했다.
나는 직원의 앞치마에 새겨진 자수
를 슬쩍 흘긋거리곤 말했다.
“안녕하세요, 루카 양.”
이름을 불리자 루카가 눈을 휘둥그 레 떴다.
“아, 안녕하세요, 아리엘 윈스턴 님!”
“제 이름을 알고 있네요?”
“당연하죠! 어떤 분이신데……,”
루카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매장은 넓었고, 진열된 제품도 많았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듣던 대로 심각한 상태군. 나는 다 시 루카를 바라보곤 바로 본론을 꺼 냈다.
“매그너스 남작님은 어디 계시죠?”
“아, 사장님이라면…… 죄송합니다. 저도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언제쯤 돌아올지도 알 수 없나 요?”
“그게, 죄송합니다. 전 알고 있는 것이 없어요……!”
루카는 딱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 었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가 게에 출근을 얼마나 안 하면 직원이 사장의 행방을 전혀 몰라?
“아니, 루카 양이 죄송할 일은 아 니죠.”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가게에 없다면 있을 만한 곳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손님 들이 최근 귀띔해줬던 증언들을 되 새겼다. 요즘 폰타 매그너스가 여러 지구의 주점을 전전하며 술잔을 기 울이고 있는 모습이 허다하게 목격 되고 있다고 했다.
어디 보자, 최근엔 어느 주점에 주 로 출몰한다고 했더라.
기억을 되새기는데 문고리 돌아가 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루카가 깜짝 놀라 달려나갔다. 매
그너스는 루카를 흘긋 보곤 혀를 찼 다.
“젠장, 직원 얼굴 보는 것조차 짜 증 나는군.”
“사, 사장님.”
“이래서 망한 사업체엔 들르고 싶 지 않은 건데.”
“……사장님, 저, 드릴 말씀이……,”
“됐다. 매상 얘기라면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나머진 네가 알아서 처리 해. 모실 손님도 없는데 그 정돈 알 아서 할 수 있잖아?”
“그, 그게 아니라……『
“안녕하세요, 남작님.”
나는 웃으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 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매그너스의 눈 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다, 다, 당신은!”
매그너스가 심하게 말을 더듬거렸 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매그너스 가 루카를 홱 돌아보았다.
“왜 저 사람이 내 영업장 안에 있 는 거냐!”
“그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죄 없는 직원을 너무 몰아세우시 네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매그너스 앞으 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이 어떻게 손님을 내쫓겠어 요, 남작님? 아, 하긴. 오늘은 손님 으로 온 건 아니지만.”
매그너스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이웃끼리 방문도 못 하나요?”
“여태 코빼기도 비친 적 없지 않 소!”
“저희가 이웃이면서도 여태 통 왕 래가 없긴 했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가게 인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 은데, 이렇게 서서 대화할까요?”
“ 인수?!”
매그너스가 입을 딱 벌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누가 레이 디에게 내 매장을 넘겨준다고 했 죠!”
“그럼 계속 끌어안고 있으실 건가 요? 방금 남작님께서 손수 말씀하 신, ‘망한 사업체’를?”
“……윽!”
매그너스가 분한 듯 입술을 잘근잘 근 씹었다.
“레이디가 되어선 품위 없이 엿듣 다니!”
“글쎄요. 손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 도 하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투덜거 린 남작님의 실수가 아닐까요. 아무 튼, 오늘은 말싸움이나 하자고 들른 건 아니에요.”
그동안 매그너스를 늘리는 게 제법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오늘부 로 안녕이었다.
나는 차분히 테이블 앞 의자를 빼 앉았다.
“왜 허락도 없이 앉는 겁니까!”
“다리가 아파서요. 남작님께서도 앉으시죠? 진지하게 인수 조건에 대 해 이야기 나누려 하는데.”
“매장은 안 판다고 하지 않았습니 까!”
“정말요? 손해가 꽤나 막심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직원들은 루카를 포함한 몇 명을 제외하고 거의 다 잘랐다고 들었지 만, 그래도 적자는 메꿔지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팔리지 않 은 건지, 유행이 다 지난 향수만 남 아 있는 매대가 그걸 증명했다.
나는 은근히 목소리를 깔았다.
“남작님. 전 지금 남작님을 도와드 리러 온 거예요.”
“무, 무슨……『
“그래도 이웃으로 살아온 정이 있 으니까요.”
사실 굳이 매그너스의 매장을 살 필요는 없었다.
가게 확장 공사를 위해서라면 반대
편에 있는 건물을 사들여도 됐고, 아예 다른 지구에 진정한 2호점을 세워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땍땍거리는 우리 이 웃님의 매장을 사들이기로 한 데에 는……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로망이랄까.’
매그너스는 처음으로 내게 동업 제 안을 한 사람이었고, 또 처음으로 내 향수 사업을 곤란하게 만든 인물 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우리 이웃님의 매장을
사들이고 싶었다. 상징성이 있잖아.
“당신한텐 안 팝니다!”
“그러지 말고 계약서나 보시죠.”
나는 서류를 슥 내밀었다. 반사적 으로 서류를 읽어내려간 매그너스가 콧김을 뿜으며 팽개쳤다.
“이런 헐값에 사들이려 하다니! 내 가 이 가게에 들인 돈이 얼만데!”
“어라. 부족하지 않게 쳐 드린 건 데요. 남작님께서 매입하실 때보다 못한 가격은 아니잖아요?”
매그너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 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뱉 었다.
“하긴. 남작님께서 애초 이곳을 사 들일 때 생각하셨던 가격은 이 수준 이 아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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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이디어를 쏙 빼먹어서 매장 을 키우고, 바짝 가치를 높여놓은 다음 되팔고 손 털 생각이셨지요?”
매그너스는 비슷한 방법으로 제국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차익을 챙겼 다. 어쩌면 매그너스가 이렇게까지 부들거리는 건 지금이 첫 실패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은 항상 짜릿한 법이지. 나는 활짝 웃으며 매그너스가 팽개친 서 류를 다시 밀었다.
“다시 생각해 보시죠? 굉장히 너그 러운 조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