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런 이론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그제야 슬쩍 시선을 올려 세 드릭을 살펴보았다.
세드릭은 딱히 나를 비웃거나 무시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붉은 눈동자가 떨렸 다.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오해하지
않았을 텐데.”
“……믿으시는 건가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에 세드릭이 곧장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캐
내 눈이 커다래졌다.
비웃음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역사서가 아니라 동화책을 읽은 게 아니냐고 황당해하는 반응도 예상했 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반응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나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당연하다고요?”
“어쩐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 다. 아리엘이 나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진정시키는 거라면, 처 음 만난 순간부터 그랬어야 했는 데.”
해
“사실 처음에는 연상 효과라는 아 리엘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 었습니다.”
세드릭이 나지막이 고백하기 시작 했다.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 각했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 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리엘.
나지막이 불리는 내 이름에 나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마주 보았다.
세드릭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내 턱 을 들어 올렸다.
“더 완벽한 장소에서, 완벽한 타이 밍에 고백할 생각이었지만…… 이젠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오 캐
으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리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심장이 누군가 펌프질하듯 빠르게 뛰었다.
세드릭이 내 뺨을 감싸 쥐며 말했 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연모합니 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적나라한 고백에 머릿속이 새하얘 졌다. 심장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박동했다.
붉은 눈동자가 빤히 나를 직시했 다. 짙은 간절함이 그의 눈 위로 드
티웠다.
‘사랑한다고……/
세드릭 에반스가, 나를 사랑한다고.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 같았다.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어 봐야 바보 같은 말만 튀어나갈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 을 할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입술 만 달싹이고 말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뭐라 고 말을 해야 완벽한 대답이 될까.
“아……,”
결국 내 입에선 이도 저도 아닌 소리만 흘러나갔다. 내 어깨를 쥔 세드릭의 손이 딱딱히 굳었다.
곧 그가 괴로운 듯 제 입술을 씹 었다.
“……죄송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세드릭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네?”
“제가 아리엘을 무뚝뚝하게 대했다 는 것,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드릭이 이번에는 사랑이 아닌 죄 를 고백하듯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 다.
“저도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 습니다. 이중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 요. 저조차 제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이별 통보를 받은 그 순간, 왜 아 리엘을 다시 보게 된 건지. 어쩌면 저도 흔하디흔하게 널린 남자 중 하 나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그제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말 마세요! 과거 때문 에 못 믿겠다는 게 아니에요.”
세드릭이 자책하는 모습은 보고 싶 지 않았다.
“믿, 믿어요. 바로 답하지 못한 건
너무 떨려서였어요. 저도…… 그러 니까, 저도.”
나는 눈을 꾹 감고 내질렀다.
“저도 세드릭이 좋아요.”
얼굴이 터져나갈 듯 새빨개졌다.
입맞춤은 진작에 했는데 이제 와서 고백 정도에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게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감정을 곱씹기 만 하던 것과 그걸 입 밖으로 내놓 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정말입니까, 아리엘?”
세드릭이 물었다. 아주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간절한 목 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정말 제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겁 니까?”
‘다시’라는 말은 틀렸다. ‘아리엘
윈스턴’이 아닌, ‘나’와 세드릭 사이 에는 제대로 된 기회가 없었으니까.
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세드릭 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저는 세드릭에게 한 번밖에 기회를 드린 적 없어요.”
언젠가는 내 진짜 과거를 털어놓을 날이 올까?
실험체도, ‘아리엘 윈스턴’도 아니 었던 지구에서의 진짜 내 과거를.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했
다.
하지만 언젠가 털어놓더라도 세드 릭은 조금 놀랄지언정, 나를 믿어주 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 기회가 지금이고요.”
나는 살짝 떨며 까치발을 들었다.
먼저 입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세드릭은 돌이 된 듯 굳어서 움직이 지 않았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그의 입술에 내 것을 겹쳤다.
한참처럼 느껴지던 몇 초 뒤, 세드
릭의 손이 다급히 내 뺨을 감싸 쥐 었다.
달콤한 입맞춤이 한참이나 이어졌 다. 세드릭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세드릭의 어깨를 콩콩 두드려야 했다.
겨우 떨어져 나간 그가 이마를 맞 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세드릭의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이 옷 너머로도 느껴졌다.
나와 있으면 심장이 차분해진다고 하더 니. 나는 살며 시 미 소를 지 었다.
“지금은 빠르게 뛰고 있네요.”
저랑 있는데도.
내 말뜻을 이해한 세드릭이 눈썹을 찌푸렸다.
곧 그가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달 려들었다.
나는 숨을 깊게 몰아쉬며 세드릭의 목 위로 팔을 감았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이대로 라면 몸이 두둥실 떠오를 것 같았 다.
나는 손을 뻗어서 세드릭의 머리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흑발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촉은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말 동화 속 세계에 빙의한 거라면, 지금 이 장면 아래 에는 ‘11우 머시’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을 거라고.
우린 한참 뒤에야 서로에게서 떨어 져 나갔다.
정원을 다시 나서기 전 나는 내 입술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부었어요?”
“아뇨, 전혀.”
세드릭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까슬한 입술을 만지며 세드릭 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사실 조금 부었습니다.”
“어떡해.”
이 꼴로 대신관님 얼굴을 볼 순
없었다. 황급히 얼굴에 부채질을 하 는데 세드릭이 말했다.
“대신관께선 별로 신경 쓰지 않으 실 겁니다.”
“거짓말. 잠깐 이야기하겠다고 나 가 놓고 한참 동안 자리를 비웠는 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대신관 께서는 우리 사이의 오해를 대충 짐 작하고 계셨던 듯합니다. 분명 웃고 계셨거든요.”
“아. 그건 저도 봤어요.”
사레 좀 들렸다고 곧 죽을 시한부 취급을 받았으니, 모든 걸 알고 있 는 대신관이 보기엔 얼마나 재미있 었을까? 예능이 따로 없었을 것이 다.
“오해를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대신관께서도 이해해주시겠지 요.”
‘오해를 풀기는 풀었지만
그보단 키스한 시간이 훨씬 더 긴 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세드릭이 샬며 시 내 뺨을 쥐었다. 저절로 고개가 들리고, 루비처럼 예쁜 눈동자가 나 를 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있다 갈까요?”
귓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에 나는 몽롱히 눈을 감을…… 뻔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이제 돌아가야죠! 더 기다리시게 할 순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이 내 어깨 를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금 세드릭 의 품속에 갇혀 눈을 깜빡였다.
“저기요, 세드릭?”
“잠시만 더……『
내 머리칼에 코를 묻은 세드릭이 숨을 들이마셨다. 맞닿은 세드릭의 심장이 느리고 깊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고 있으니 스스로가 인간 진정 제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지만 반대로 나를 감싸 안은 체온 역시 나른하도록 기분이 좋았다.
‘……닳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만 더 이대로 둘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드릭이 내게 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돌아갈까요.”
세드릭이 싱긋 산뜻한 미소를 지었 다. 나는 눈치 없는 아쉬움을 꾹꾹 누르며 그와 함께 정원을 나섰다.
“오해는 풀렸나요?”
책을 보고 있던 대신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머쓱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관님. 터놓고 이야기했습 니다.”
“그럼 아리엘 양이 아주 건강한 상 태란 것도 이해했겠군요, 세드릭?”
“……그렇습니다.”
세드릭이 드물게 조금 민망한 표정 을 지었다. 대신관이 활짝 웃었다.
“무사히 오해를 풀었다니 다행입니 다. 아리엘 양은 아주 훌륭한 건강 체거든요.”
세드릭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시간 내어 레이디를 봐 주셔서 감 사합니다.”
“뭘요, 대가를 받고 한 일인데. 아 리엘 양과의 만남도 즐거웠고요.”
대신관이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 한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이 대신관 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의아한 눈 을 했다.
나는 그가 의심하기 전에 얼른 꾸 벅 대신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대신관님.”
대신관은 영광스럽게도 떠나는 우 리에게 축복을 걸어 주었다. 한 명 은 성흔이 없는 인간에, 한 명은 마 수의 피가 섞인 인간이라 과연 제대 로 흡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워프로 돌아가는 길, 두 신관이 다 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노을 내리는 아젠드릭을 크게 돌아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 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사실 이 문득 안타까웠다.
하지만, 기회는 다음에 또 있을 테 니까. 얼마든지.
“아, 돌아가기 전 잠깐 들르고 싶 은 곳이 있어요. 괜찮을까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그 래도 아직 한밤중은 아니었다. 세드
릭과 두 신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 였다.
“물론입니다, 아리엘. 어디든 가시 죠.”
“저, 셀레스틴 군락지를 보고 싶어 요!”
“아, 그러십니까?”
신관들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여자 신관이 고 개를 끄덕였다.
군락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
다. 안내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 다.
“저쪽, 보이십니까?”
여자 신관이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 다.
“셀레스틴 군락지입니다.”
“와……I”
여자 신관이 가리킨 곳에는, 보랏 빛 잎사귀를 가진 허브가 들판 가득 히 피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노을이 막 내리기 시작한 들판 위에 물감처 럼 번진 보랏빛 허브들. 이대로 액 자 속에 담아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 운 광경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치맛자락을 들고 군락지로 빠르게 다가갔다. 가까워 질수록 상쾌한 향기가 더욱더 짙게 폐부를 메웠다.
허브밭 사이에 도착한 나는, 쪼그 려 앉아서 보랏빛 잎사귀 사이로 코 를 살짝 묻었다.
세드릭, 향기가 엄청 아름다워요.
한껏 향을 들이마신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세드릭을 바라보았 다.
내 얼굴 가득히 번진 미소를 세드 릭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 주친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음…… 혹시 이 소리 들려요?”
“네? 무슨 소리 말씀이십니까?”
“금화 떨어지는 소리요.”
세드릭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 향으로 여름용 향수를 만들면 분명 대박 날 것 같은데. 세드릭 생 각은 어때요?”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세드릭이 한 숨 쉬듯 웃었다.
“동의합니다. 불티나게 팔리겠군 요.”
“역시 그렇죠?”
나는 지평선까지 펼쳐진 보랏빛 군 락을 탐욕스레 바라보았다.
잘만 터뜨리면 이 향수로 이번 여 름을 접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