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대화라니, 무슨 대화를 말씀하시 는 겁니까?”
“음, 저도 아직 뭐가 뭔지 정확히 는 모르겠는데요.”
일단 세드릭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오해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내야 했 다.
세드릭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일단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화 는 충분히 안정을 취하신 후에 얼마 든지……-”
“아니, 저 지금 완전히 건강해요. 뛸 수도 있어요. 보실래요?”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세드릭이 소스 라치게 놀랐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안정을 취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왜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요?”
“ 예?”
“그리고 제가 왜 세드릭에게 의지 해야 한다는 거예요?”
세드릭이 충격받은 눈을 했다. 곧 그가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저와 아리엘이……/’
세드릭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문득 떠오르는 단서들이 있었다.
여기 오기 전 봤던 아리엘의 일기
장.
그간 나를 지나치게 과보호해왔던 세드릭의 모습.
곧 한 가지 가능성이 형태를 띠었 다.
“세드릭.”
“예, 아리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아니, 이젠 ‘혹시나’가 아니었다. 나는 시시각각 확신으로 바뀌어 가 는 의심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혹시 제가 과거에 칸에게 납치되 어 실험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계시 는 건가요?”
세드릭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나는 완벽히 확신했다.
‘맞네.’
정답이었다.
하긴, 세드릭을 그렇게 오해하게 할 만한 단서들은 충분히 있었다. ‘아리엘’이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했던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
닉시아 향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만 생각해봐도 의심스러 웠다.
‘그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지. 이해는 하는데……/
미안하지만 거하게 헛발 짚으셨어 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세드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네?”
“아니라고요. 제겐 그런 과거가 없
어요.”
세드릭의 눈빛이 혼란으로 가득 찼 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예전에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든, 어떤 소문을 들으셨든 모두 헛소문 이에요. 아, 그렇지. 로드가 했던 말 역시 헛소리고요.”
나는 이마를 느리게 쓸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세드릭이 그런 오해를
할 만한 단서가 차고도 넘치게 많기 는 했다.
‘진작 예상했어야 했나.’
뭐, 이제라도 진상을 알게 되었으 니 바로잡아야겠지.
“……아리엘?’’
세드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
까?”
이런. 안 믿고 있다.
세드릭이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 다가 다시 말했다.
“왜, 숨기시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의지가 안 되시는 겁니까?”
세드릭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대신관에 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세드릭.”
대신관이 그새 웃음기가 사라진 인 자한 얼굴로 말했다.
“아리엘 양의 말이 맞습니다. 그녀 에게서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 어요.”
세드릭의 눈이 커졌다.
붉은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 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세드릭을 마주 보았다.
“대신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잖
아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깰 으쓱였 다.
저렇게까지 놀라는 것으로 보아, 세드릭의 오해는 꽤 오랫동안 이어 져 온 듯했다. 이제라도 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세드릭?”
세드릭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심하 게 흔들렸다.
나는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대신관님.”
대신관을 돌아본 나는 정중히 부탁 했다.
“잠시 세드릭 전하와 둘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내 사유 정원
을 내어 드리죠.”
대신관이 방 한쪽을 가리고 있던 흰색 벨벳 커튼 쪽으로 다가가 황금 색 줄을 당겼다. 그러자 커튼이 벌 어지면서 그 사이로 드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나는 대신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나는 세드릭을 데리고 정원 안으로 발을 디뎠다. 노을이 막 내리고 있 는 정원은 이 와중에도 눈이 부시도
록 아름다웠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대신 관이 손을 흔들더니 황금 줄을 당겨 도로 커튼을 쳤다.
여름꽃이 만개한 정원 한가운데에 서 나는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 생각이 휘몰아치는 듯,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 었다.
“세드릭? 괜찮아요?”
“……아리엘.”
세드릭이 메마른 목소리로 나를 불
렀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리 엘의 과거를, 오해했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예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드릭이 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이렇게까지 놀라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동병상련인 줄 알았는데 알 고 보니 아니라서 실망한 건 아니시 지요?”
“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세드릭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 간신히 말 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됩
니다.”
“네? 뭐가요?”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세드릭이 말을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리엘이 옆에 있어 야만, 진정이 되었습니다.”
“향조차 듣지 않을 때도 아리엘을 떠올리면 심장이 차분해졌습니다. 이젠 실제로는 곁에 있지 않은데도,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진정이 되 는 지경입니다.”
세드릭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동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
까?”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세드릭 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내가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세드릭. 따라 해보세요.”
세드릭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네.”
“연상 효과.”
“연상 효……:’
착하게 내 말을 되풀이하던 세드릭 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세드릭이 내 손을 잡더니 제 심장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날 지하에서 제 가 하마터면 부하들에게까지 손을 댈 뻔했다는 것.”
“그때 제겐 이성이 전혀 없었습니 다. 그저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어대서, 진정시키기 위해 서는 닥치는 대로 뭐든 부숴야 한다 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말없 이 세드릭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세 드릭이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리엘이 제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고, 오감이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심장 역시, 다시 느리게 박동하기 시작했 습니다.”
세드릭이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세드릭의 가슴 위로 밀착한 손에 깊 은 심장박동이 쿵, 쿵 전해져 왔다.
“그게 어떻게, 단지 연상 효과에 불과할 수 있는 겁니까?”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세드릭의 말이 맞았다. 연상 효과
라는 건 그냥 말장난에 불과했던 건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나는 입을 열기 전 짧게 심호흡을 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몇 초 뒤에야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세드릭. 이건 확실히 말 씀드릴 수 있어요. 전 실험체가 아 니었다는 것.”
세드릭이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 다. 나는 얼른 이어 말했다.
“연상 효과를 운운하면서 또 우기 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아.”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고개 숙여 땅이 꺼져라 한숨 을 뱉었다. 세드릭이 불안한 목소리 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리엘?”
“세드릭의 그 증상, 일단 알려진 치료법은 마계의 물질과 접촉하는 것이죠. 아닉시아 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마계는 닫힌 지 오래이니, 그건 불가능한 방법이고.”
그러니까 세드릭의 증상은 불치병 이다. 여기까지가 원작에 확실히 적 혀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확신 없는 가 능성의 영역이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또 하나의
방법이 존재해요.”
!”
세드릭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또 심호흡을 했다. 몇 번 떠 올린 이론이기는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각오했던 것보다 훨 씬 더 많은 결심이 필요했다.
‘이거, 말해도 되는 건가.’
아무리 세드릭이 내게 마음을 열었 다고는 해도, 이걸 들으면 코웃음 치는 거 아니야?
“어떤…… 방법입니까?”
뜸 들이는 내가 애탔는지 세드릭이 물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원작 작가가 소설 속에 적어 놓았 던 내용이니까 영 헛소리는 아니겠 지. 작가도 떡밥을 회수할 생각을 하고 설정에 집어넣었을 테니까.
그냥 지르자, 아리엘. 말해버려!
“사, 사랑이요.”
망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온몸에 우수 수 두드러기가 돋았다.
“……네?”
역시 예상대로 세드릭은 단번에 이 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꾹 쥐고 부가 설명을 했다.
“그,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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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이랬다.
세드릭의 증상은, 마수의 피가 인 간 몸에 제대로 융합되지 못해 일어 나는 현상이다. 아주 오래전 마계와 이 세계가 이어져 있을 때는 마족 혼혈들 역시 겪던 증상이었다.
그걸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피 에 섞인 마수의 성질을 제거하는 수 밖에 없다. 즉, 마수의 성질 대신 인간의 성질로 채우는 것이다.
인간의 성질. 마수는 받아들이기는
커녕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인간만의 것. 바로 사랑이었다.
그 감정을 짙게 느끼면 느낄수록 마수의 성질은 옅어지고 흐려진다고 한다.
‘아무래도 원작 작가는 미녀와 야 수 같은 동화를 너무 많이 본 게 틀림없어.’
아무튼, 이곳은 다름 아닌 그 원작 작가가 쓴 세계관이다. 작가의 로망 이 실현되는 세계일 가능성이 농후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세 드릭에게 전하려 애썼다. 마수의 성 질과 인간의 성질 운운할 때는 좀 버벅거렸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논지는 제대로 전달한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세드릭의 눈동자는 점점 더 커졌다.
“……여기까지가 제가 들은 이야기 예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 만.”
설명을 쏟아낸 나는 슬그머니 시선 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얼굴이 잘 구운 당근처럼 달아올랐 다.
인간의 성질이 어쩌니 열심히 설명 은 했지만, 이걸 간단히 요약하자 면……으
‘당신이 날 너무 좋아하는 게 이유 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맨정신으로 이런 말을 쏟아내자니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나는 세드릭과 눈도 못 마주치고 계속해서 애꿎은 땅만 바라보았다.
음, 아젠드릭은 흙이 회갈색이군.
돌멩이는 흰색이고. 꽃들이 정갈히 줄 맞춰 피어있는 걸 보니 정원이 아주 열심히 관리되고 있는 것 같……,
“그게 정말입니까?”
세드릭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었 다. 그가 다급히 내 어깨를 쥐었다.
“그런 이론이 정말 존재하는 겁니 까?”
“아, 음…… 네. 말 그대로 이론일 뿐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
고 하더군요. 제가 본 역사서에서는 그랬어요.”
“어떤 역사서인지 기억하십니까?”
“음…… 못 찾으실걸요. 엄청 방대 한 도서관에서 어쩌다 찾은 거라 아 마 절대 못 찾으실 거예요.”
다른 세상에서 본 책이니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세드릭은 다행히 책의 행방에 집착 하진 않는 듯했다. 대신 그는 다급 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