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응접실을 나선 나는 단박에 세드릭 을 발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중심으 로 손님들이 둥그렇게 둘러싸서 공 터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아, 나오셨습니까?”
나를 돌아본 세드릭이 빙긋 웃었
다. 자신을 둘러싼 이 위화감 넘치 는 공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시선을 잔뜩 달고서 세드릭이 내게 다가왔다.
“모시러 왔습니다. 약속대로 오늘 저녁부터 제게 할애해주시는 겁니 까?”
“물론이죠.”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사실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하고
싶기는 했다. ‘아리엘’의 일기장을 본 뒤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 다.
‘아리엘’이 세드릭에게 집착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생생한 일지를 목격하는 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세드릭을 가만히 올려다보았 다.
물론 그 일기장 속의 스토커는 내 가 아니다. 하지만 세드릭에겐 똑같 은 ‘아리엘 윈스턴’일 뿐이었다.
새삼 과거의 내 행동들이 떠올랐다.
‘다짜고짜 이별부터 선고한 건 그 렇다 쳐도……?
멋대로 스토킹하다가 멋대로 차버 린 주제에, 투자까지 요청했었지?
이제 생각해보니 세드릭 입장에서 나는 굉장히 뻔뻔한 캐릭터 그 자체 였다.
‘그땐 아직 나와 제대로 친분이 생 기기도 전이었는데…… 싫고 꺼림칙 한 사람에게 오직 사업 계획서 하나 만 보고 투자해준 거잖아?’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내가 계획서를 잘 쓴 덕도 있기야 하지만, 그보다 색안경 끼지 않고 서류를 검토했던 그때의 세드릭이 놀라웠다.
“아리엘?’’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 아뇨.”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완벽 그 자체예요.”
확신 어린 말에 세드릭이 기분 좋 은 듯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채비는 마 치셨습니까?”
“그럼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사장님.”
직원들이 흐뭇한 얼굴로 인사를 건 넸다. 나는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었 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올게요.”
아직 구체적인 행선지는 못 들었지 만, 워프를 타야 할 정도로 먼 곳이 란 건 알고 있었다. 나를 닮아 단 것을 아주 좋아하는 직원들이 신나 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 # 호
“마탑으로 가나요, 저희?”
나는 선선한 초저녁 공기를 들이마 시며 물었다. 지하 수로에서 수도로 돌아올 때도 마탑에 있는 워프로 빠 져나왔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선지가 어디예요? 이젠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자 세드릭의 표정이 살짝 굳었 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아젠드릭 입니다.”
‘또 거기야?’
세드릭은 내게 벌써 몇 번이나 아 젠드릭에 함께 가자고 말한 적이 있 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가고 싶다면 가 줘야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 다.
“좋아요. 그 도시에 꿀이라도 발라 놓으신 모양이죠. 갑시다.”
내 흔쾌한 대답에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마탑에 들어선 나는 몇 번 마주쳐 눈에 익은 직원을 발견했다. 얼마 전 델레이나 황녀를 위해 사랑의 묘 약을 구매할 때 만났던 직원이었다.
직원이 나와 세드릭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흐뭇한 미소와 함께 엄 지를 치켜올렸다. 나는 어색한 미소 를 돌려주었다.
워프는 저번에도 이용해 보았기 때 문에 이번에는 그다지 떨리지 않았 다.
“머리나 팔다리만 따로 이동되는 불상사는 정말 없는 거겠죠?”
사실은 아주 조금 떨렸다.
내 물음에 세드릭이 바짝 다가왔 다.
“걱정되시면 이번에야말로 안겨서 가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워프를 관리하는 마법사들이 흥미 로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 다.
나는 일렁이는 거울 속으로 얼른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곧 뵈어요.”
세드릭을 돌아보며 인사하자,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울 속으로 완전히 들어선 나는
꾹 눈을 감았다.
몇 초간, 미끄럼틀을 타듯 울렁이
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잠시 뒤 나는 내 두 발이 단단한 바닥을 짚 은 것을 느꼈다.
동시에 코끝으로 상쾌한 향기가 스 며들었다.
‘이 냄새는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낯이 익은 향 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청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남녀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워프를 열 어두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두 분의 안내를 맡은 안내인입니다. 아리엘 윈스턴 님이 맞으시죠?”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나는 얼른 그들에게 잘 그려낸 미 소를 돌려주었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하얀색밖엔
보이지 않았다. 순백색으로 물든 공 간에 절로 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과연 대성당이 있는 도시……/
나는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았다.
아젠드릭은 수도에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도시다. 처음 세드릭이 여기 까지 동행해달라고 할 때만 해도 코 웃음을 쳤는데, 정말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여자 쪽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아리엘 님. 조금 앞으로 나오
셔야 할 것……-”
“네? 으앗!”
갑자기 묵직한 무게감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아직 여기 있었습니까?”
세드릭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으 로 워프해 올 세드릭을 위해 자리를 비켜섰어야 했다.
등장하자마자 날 껴안다시피 한 세 드릭에게 신관들이 허둥지둥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에반스 공작 전 하. 그럼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란히 붉어진 얼굴을 하곤 신관들 이 앞장섰다.
워프가 설치된 건물을 나오자, 또 그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분명 한 번쯤 맡아본 적이 있는 향기인데.’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코를 킁킁
대며 향기의 정체를 탐색해 보았다.
숨이 탁 트이는 민트 같은 향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당장이라도 유리병에 가두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향기였다.
‘이 향기를 어디서 맡았더라…… 아! 그렇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성수!”
“ 네?”
세드릭이 눈을 깜빡거렸다. 두 신 관 역시 나를 돌아보았다.
“이 향기, 성수에 들어가는 허브의 냄새지요?”
그러자 여자 쪽 신관이 방긋 미소 를 띠었다.
“맞습니다. 알아봐 주시는군요.”
“기억하고 있어요. 저번에도 향기 가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 요.”
루나를 위시한 소녀들과 함께 신전 에 찾아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 랐다.
“연애점을 보러 갔었지.”
“연애점이요?”
흘리듯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세드릭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한테 이끌려서 보러 갔던 적
이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두 번이네요. 생각해보니 리나랑도 타 로 점을 본 적이 있었지.”
스며들 듯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습니까?”
세드릭이 픽 미소를 지었다.
결과가 어땠습니까?”
지나가듯 묻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세드릭이 내 대답에 귀 기울이고 있 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풋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 운명의 상대가 할아버지랬어 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듯 세드릭이 멍하니 되물었다. 나는 꽤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살날이 멀지 않은 할아버지랬는
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웃기긴 하네요.”
“하……,”
기가 막힌 듯 세드릭이 헛웃음을 뱉었다.
“수명도 얼마 안 남은 노친네가 어 딜 감히 아리엘을 노린단 말입니 까?”
“세드릭, 그냥 점괘예요. 진정하세 요.”
그러고 보니 그 타로 가게, 꽤 용
한 곳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 신은 믿는 게 아니라는 내 편견이 또 한 번 강화되었다.
“그럼 계속해서 안내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대로를 따라갈수록 점점 건물이 많 아졌다. 하나같이 끝이 뾰족하고 전 체가 순백색인 건물들이었다.
‘ 예쁘다
나는 이국적인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도시의 중앙에는 커다란 탑이 있었 다. 저곳이 대성당인 모양이었다.
신관들은 우리를 대성당 앞까지 안 내했다. 높고 새하얀 건물을 올려다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스 럽고 정갈한 느낌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드시지요.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신관…… 께서요?”
나는 눈을 끔뻑였다.
방금 지나치게 높은 사람의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남자 신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예, 두 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성상들이 복도 양 옆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세드릭의 옷깃을 살짝 잡았 다. 새삼 굉장히 역사적인 건물 안
에 서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리엘.”
내가 긴장한 걸 느꼈는지 세드릭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순식간에 따스한 체온이 손을 타고 심장까지 흘렀다.
“오늘만 지나면, 편안해질 수 있을 겁니다.”
‘ 응?’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무척 의미심장한 대사였다.
무슨 말인지 되물으려는 찰나, 앞 서 걷던 신관들이 걸음을 멈췄다.
“대신관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두 신관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셀레스틴 향이 혹 끼쳐왔다.
“아, 오셨군요.”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신의 모습을 조각한 성상 앞에 서, 자애롭고 푸근해 보이는 여성이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다.
“대신관님.”
세드릭이 예를 차렸다. 나는 얼른 덩달아 그의 자세를 따라 했다.
“오랜만입니다, 세드릭. 여기 이 영 애께서 세드릭이 말했던 그분인가 요?”
“그렇습니다.”
대신관이 찬찬히 나를 살펴보았다.
긴장으로 몸이 바짝 굳었다. 나는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왜 대신관 씩이나 되시는 분이 코 앞에서 날 관찰하고 계시는 거지?’
황후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긴장감으로 배가 아팠다. 나는 이런 거물들을 직접 마주하기에는 담이 약한 소시민이었다.
대신관이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세드릭이 놀란 눈으로 대신관과 나 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신관이 미 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른 말은 들어야지.
내 눈빛을 이해한 세드릭이 기도실 문을 열고 나섰다. 나가기 전 한 번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리엘 양.”
단둘이 되자 대신관이 입을 열었 다. 대신관이라는 직책을 몰랐다면, 옆집 할머니처럼 느껴질 정도로 포 근한 음성이었다.
“옙.”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신관이 부드럽 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세상에서 오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