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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35화 (135/153)

〈136화〉

나도 모르게 귀찮은 한숨이 흘러나 왔다. 설마 또 잔소리를 한가득 장 전하고 온 건 아니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나가 윈 스턴 백작을 응접실로 데리고 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 다.

윈스턴 백작은 그새 살이 약간 빠 져 있었다. 그가 나를 이리저리 둘 러 보았다.

“……괜찮은 게냐?”

“네? 괜찮냐니요?”

“지하 수로에 함께 갔다는 기사, 봤다. 검 한 번 배운 적 없는 녀석 이 도대체 겁도 없구나!”

윈스턴 백작이 역정을 내려다가, 곧 지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 봐야 네 귀엔 들리지 않을 테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으 로 윈스턴 백작이 맞는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집을 나가라고 했을 때, 설마 그 대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윈스턴 백작이 기가 찬 듯 헛웃음 을 뱉었다. 그의 시선이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비좁구나. 나를 제대로 설득했다 면 훨씬 더 좋은 건물에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을.”

역시 윈스턴 백작의 안목은 꽝이었 다. 내 고풍스럽고 우아한 가게를 처음으로 본 소감이 고작 ‘비좁다’ 라니.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괜찮습니다. 곧 다른 가게도 인수 할 예정이라서요.”

“또 허영심만 부리는 거라면…… 아니, 아니다.”

윈스턴 백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

다.

“나는 이제 너를 모르겠구나.”

백작은 몇 달 사이 많이 늙어 보 였다.

“내쫓았을 땐 보나 마나 곧 돌아오 겠지 싶었지만…… 이젠 알겠다. 너 는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리 라는 것을.”

미간을 꾹꾹 문지른 백작이 데리고 온 사용인에게 턱짓했다.

“상자를 아리엘에게 건네주거라.”

“예, 백작님.”

사용인이 내게 커다란 상자를 건넸 다.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꽤 묵직했다.

“이게 뭔가요, 아버지?”

“열어 보면 알 것이다.”

상자를 열자마자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것들은

윈스턴 백작저에서 생각을 정리할 때 끄적였던 노트와 미처 챙겨 오지 못했던 조향 기구들.

상자 안에는 백작저에 놓고 왔던 내 물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네가 도통 찾으러 올 것 같지 않 으니, 그냥 치워버리기로 했다.”

“그러셨군요.”

나는 상자 안을 내려다보며 제법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백작에게 이런 말 을 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작 상자 하나기는 했다.

백작이 여태 나를 성가시게 굴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났 다. 자식을 거래 상대로만 취급하는 이 노인과는 한 시도 같은 장소에 있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백작위를 물려줄, 생물학적 아버지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굳이 관계를 파탄 낼 정도 로 백작이 증오스러운 건 아니었다.

내겐 별 의미 없는 사람에 더 가 가웠다.

“그래서.”

백작이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올리 며 말했다.

“정말 에반스 공작과 결혼하는 것 이냐?”

오고:”

하마터면 목을 축이던 찻물에 사레 가 들릴 뻔했다.

윈스턴 백작이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예법 교육은 아직도 덜 됐구나. 저런 여식을 부끄러워서 어떻게 시 집 보낼는지……/

“아니, 아버지. 너무 멀리 가시고 계세요. 결혼이라뇨. 그럴 계획 없어

요.”

그러자 백작이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공작은 아직도 네가 마음에 안 든 다더냐? 네가 날뛰는 마수 앞에서 공작을 손수 업어 구출하기까지 했 는데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여기 또 부풀 려진 소문의 피해자가 있었다.

“이상하구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공작은 분명 너를 아끼는 것 같 았는데. 설마 공작이 너를 헷갈리게 만들며 우롱하고 있는 것이냐?”

“예? 아뇨. 세드릭은, 아니. 전하께 선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왜 아직도……!”

“잠시만요, 아버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서 세드릭, 세드릭, 세드 릭. 내 얼굴만 보면 한 번씩 세드릭 의 이름을 꺼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설레발도 적당히들 치란 말이야!’

피곤함에 미간을 꾹꾹 주무르는데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엘. 만약 공작이 너를 우롱하 고 있는 거라면 내게 말하도록 해 라.”

백작의 눈빛이 꽤 결연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려 드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나는 백작에게 한 번 더 명확히 선을 그어주기로 했다.

“저와 전하 사이의 문제는 제가 알 아서 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도움은 필요치 않아요.”

“……그래.”

윈스턴 백작의 얼굴에 찰나 간 낙 담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곧 백 작이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 보겠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얼 른 일어나 백작에게 작별인사를 했 다.

백작은 늙고 쓸쓸한 얼굴을 한 채 퇴장했다.

그 모습은 나이 들어 기댈 곳 없 어진 노인의 모습 그 자체였지만, 동정심 같은 것은 전혀 일지 않았 다.

‘자식 농사를 잘 좀 짓지 그러셨어 요.’

딸을 사랑도 주고, 관심도 주고 키

웠더라면 늘그막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겠어?

나는 코웃음을 치며 상자를 뒤적였 다.

상자 맨 밑바닥에 낯선 물건이 있 었다.

‘이건 뭐지. ……노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죽으로 장정(뽀또)된 노트는 척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윈스턴 백작저에 살 때 이런 노트를 본 기억은 없었다.

‘사용한 기억은, 더더욱 없고.’

나는 조심스레 표지를 넘겨 보았 다.

첫 장에는 아리엘 윈스턴이라는 이 름이 쓰여 있었다.

‘아리엘이 쓰던…… 일기장?’

연도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3년쯤 전부터 쓴 일기장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쓰던 일기장이 아

니었다. 남의 일기장이었다. 그러니 보지 않고 덮는 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홀린 듯 일기를 읽어내려갔다.

첫 문장이 다음과 같은 단어로 시 작되었기 때문이다.

[세드릭. 세드릭 에반스.]

첫 장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을 더 넘겼다.

[오늘은 먼발치에서 세드릭을 봤

다. 기분이 좋았다.]

그게 내용의 전부였다.

다음 장도, 또 그다음 장도 비슷한 내용만이 이어졌다.

세드릭을 구경했다는 것. 더 나아 가서 오늘 세드릭의 의상과 안색이 어땠는지 구구절절 적혀 있기도 했 다.

세드릭을 스토킹하던 ‘아리엘’은 머지않아 에반스 저에까지 숨어들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이 기묘한 기분이 들었 다. 일기장을 덮어야 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읽은 순간, 나는 벼락 맞은 듯 굳어버렸다.

[오늘은 에반스 공작저에 숨어들었 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드 릭에게 아직 ‘실험 후유증’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뭘까? 무슨 이 야기일까? 나의 세드릭과 실험, 그 리고 후유증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라 더 열심히 엿들었 다.]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손이 살짝 씩 떨렸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강 요라도 하고 있는 듯 읽는 것을 멈

추지 않았다.

다음날의 일기는 글씨체부터 환희 에 차 삐뚤거렸다.

[황녀의 생일 축하연에서 빠져나온 세드릭을 염탐하다가 드디어 그의 비밀을 알아냈다! 알아낸 내용은 길 지만 요약하자면, 세드릭은 정말 불 법 실험을 당했던 게 맞았다. 아아, 너무 심장이 떨린다. 이 약점을 이 용하면 그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실마리를 손에 쥔 기분이다!]

[만날 때마다 살갑게 인사하고 있 지만, 세드릭은 좀처럼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귀한 것일수록 얻기 힘들다는 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 에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활용할 것이 다. 마수, 분명 마수의 피를 주입 당했다고 했지?]

다음에는 복잡한 화학 공식이 적혀 있었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기 호와는 많이 달랐지만, 나는 ‘아리 엘’이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단박 에 알아챘다.

몇 달을 꼬박 틀어박힌 후에 그녀 는 원하던 것을 얻어냈다.

[아닉시아 향을 재현하는 데 성공 했다! 역시 나는 천재야!]

[이걸로 세드릭과 가까워질 수 있 게 됐다. 네게 안식을 줄 유일한 치 유제가 내 손에 있다고 말하면, 세 드릭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무 기대가 돼서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을 정도다.]

[황궁 무도회에서 드디어 세드릭을 만났다! 계획했던 이야기들을 줄줄 읊자, 세드릭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 다! 너무 심장이 뛰어서 하마터면 울어버릴 뻔했다. 꼴사납게…… 자 중해야지. 세드릭 앞에선 예쁜 모습

만 보여야 하니까.]

[오늘 데이먼 남작의 살롱에 가서 술에 취한 척 인체 실험을 당한 과 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남작은 이 해하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 지만, 상관없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언젠가 세드릭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는 비극적인 과거를 숨기고 있 었던 나를 안쓰럽게 여기겠지? 게다 가 자신과 같은 과거이기도 하니까, 운명의 한 쌍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 하게 될 거야! 나는 정말 천재적이 다!]

[해냈다! 해냈어. 세드릭이 거래에

응했다! 내 조향 재능이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다. 이제 세드 릭은 내 것이다. 적어도 계약서 상 에서만큼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일기장을 거칠 게 덮었다.

이 일기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 리엘’의 스토킹 일지나 마찬가지였 다.

“아가씨?”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어머나, 제가 놀라게 해드렸나 요‘?”

“아…… 아니야. 괜찮아.”

“아까부터 뭘 그렇게 골똘히 보시 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리나.”

리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나를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하곤 물

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왜 불렀 어?”

“아, 그렇지. 에반스 전하께서 찾아 오셨어요.”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응접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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