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화〉
호
[그래서.]
수정구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반질반질한 표면 위에는 하이넨 크 뤼거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로드 리제로,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세드릭은 간단히 대답했다.
“황성 지하 감옥 안.”
[어이쿠, 확실한 곳에 가둬 놨군. 형은 일주일 뒤에 집행된다고 했던 가?]
“그래.”
하이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제국의 큰 우환거리가 하
나 사라지겠어. 아무튼 저번 건은 레이디 아리엘께 큰 빚을 졌다네. 하마터면 죽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자 다가 골로 갈 뻔했지 뭔가? 목숨값 으로 거하게 사례를 드려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글쎄.”
세드릭은 짧게 생각에 잠겼다.
아리엘이 가장 좋아할만한 것. 대 답은 쉽게 떠올랐다.
“희귀 허브가 좋겠군.”
[오오, 허브! 아이디어 고맙네! 아
주 식물원 채로 차려드려야겠어!]
하이넨이 열심히 부산을 떨더니, 곧 은근히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그래서, 레이디와는 심도 있는 이 야기를 나눠 보았나?]
“무슨 이야기.”
사실 아리엘과는 나눠야 할 이야기 가 많았다.
아직 정식으로 제가 가진 감정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마땅히 했어 야 할 사과도 아직 이 었다.
그것들을 생각하니 세드릭은 가슴 이 긴장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십년 전 일 말일세.]
“……아.”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로드 그 자식이 뿌린 독가스에 레이디께서도 당하셨다고 했지?]
아리엘이 정말 마수와의 융합 실험 을 당한 거라면 독에 면역이 되어 있어야 했다. 세드릭과 마찬가지로.
물론 세드릭보다 마수의 피가 훨씬 덜 섞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아리엘에게 직접 묻지 않는 한 어느 쪽으로도 확신할 순 없었다.
[레이디의 상처를 함부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네만, 이 문제는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네.]
“……그래. 그래야겠지.”
세드릭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넨은 아리엘이 실험체가 아니 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실험체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점 이 있었다.
곧 수정구의 연결이 끊어졌다.
수정구를 대충 덮어 둔 세드릭은 황성을 향했다.
머지않아 황성에 도착한 그는 지하 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 다.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던 병 사들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세드릭은 지하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밀폐된 지하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돌바닥을 걷던 세드릭은 지하 복도 의 끝에서 멈췄다.
“잘 지내고 있었나?”
아드득, 힘없이 이 가는 소리가 들 렸다.
창살 안에는 남자로 보이는 형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세드릭은 창살 사이로 검을 집어넣 어 남자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이 리저리 얼굴을 살폈다.
“많이 상했군. 형을 버틸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남자, 로드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는지 메마른 목소리였다.
모르고 있다가 겪는 편이 더 재미
있지 않나?”
세드릭이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지탱하던 것이 사라지자 로드의 고 개가 툭, 꺾이듯 떨어졌다.
“레이디 아리엘께서 친히 생각해내 신 형벌이다. 네겐 영광인 셈이지.”
검 끝에 묻은 로드의 핏자국을 바 닥에 닦으며 세드릭이 말했다.
“나는 좀 관대한 처사가 아닐까 싶 지만…… 레이디의 뜻이 그러시다
니.”
“……너는?”
로드가 쿨럭이며 말했다.
간신히 고개를 든 로드가 힘겹게 비린 미소를 띠었다.
“넌 내 처벌에 관심이 없다는 것처 럼 말하는군. 너도 내가 증오스럽지 않나? 직접 복수하고 싶을 텐데?”
세드릭은 무심한 눈으로 로드를 내 려다보았다.
의미 없는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에 로드는 애가 닳았다.
“널 그렇게 만든 건 나잖아! 복수 하고 싶지 않다고?”
“복수?”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십 년 전 잡힌 네 아버지의 형 을 누가 집행했는지 모르나 보군.”
“내 복수는 일찌감치 끝났어. 이번 에 구출한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 지겠지. 네 형이 집행되고 나면 복 수심이 해소될 테니까. 머지않아 네
존재감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 질 거다.”
“너는 네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야.”
로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로드 리제로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가 비상했다. 아버지를 닮아 화학적 인 재능이 남달랐고, 사악한 계획을 꾸미는 일에도 능했다.
그는 자신이 머지않아 뒷세계를 장 악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 구든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
도 벌벌 떨게 될 터였다.
분명 그렇게 믿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예상이 빗겨 나가더니, 한순간에 모든 것이 와르 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로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계획은…… 이렇지 않았어.”
세드릭은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군. 어쨌든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어.”
세드릭이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스릉,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 렸다.
“감히 레이디의 머릿속을 멋대로 어지럽힌 벌을 받아야지.”
어둠 속에서 검날이 번쩍였다. 로 드의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서렸다.
창살 문을 열며 세드릭이 말했다.
“레이디께는 비밀인 걸로.”
로드는 엉덩이 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가씨, 아가씨!”
리나가 허겁지겁 응접실로 달려 들 어왔다. 가게 문을 열기 전, 아침 간식을 음미하고 있던 나는 눈을 동 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야?”
“오늘 신문에 아가씨 이름이 나왔
어요!”
“ 으응?”
나는 얼른 리나에게서 신문을 받아 들었다.
1면에 박힌 헤드라인 제목은 다음 과 같았다.
[범죄자들의 소굴, 지하 수로 드디 어 소탕!]
그 밑에는 에반스 기사단과 마탑 마법사들의 사진이 위용 있게 실려 있었다.
나는 빠르게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에반스 기사단과 마탑 연합이 지하
수로 기습에 대성공했고, 그 결과
숨어 있던 수천 명의 범죄자와 범죄
길드 ‘칸’의 본거지 역시 말끔히 소
탕되었
열심히 기사를 읽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앳된 얼굴을 한 마법사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치유 전문 마법사 ‘에 키르 세반테인’이라고 자신을 소개
한 마법사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본 중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긴 마수였는데, 에반스 공작 전하께서 완전히 압도하면서 숨통을 끊어 버 리셨어요. 하지만 그 끔찍한 마수가 죽어가면서도 공작님을 공격한 모양 이에요! 곧 공작님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으셨죠!]
마법에 걸린 에키르의 사진이 생동 감 있게 연신 입을 움직였다. 덕분 에 기사가 몇 배는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괴로워하시던 공작 전하를 구한 건, 어떤 치유 마법사도 아닌 바로 아리엘 윈스턴 영애셨답니다.]
그 대목에선 에키르가 감격에 잠긴 채 두 손을 맞잡은 사진이 함께 게 재되어 있었다
[모두들 공작 전하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아리엘 님만이 두려움을 모르는 듯 달려가 공작 전하를 구하 셨지요.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어 요!]
오
하
대충 기사를 홅은 나는 황망한 얼 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세드릭, 내 사랑, 내 가 구해줄게요!’ 라니? 내가 언제 이딴 대사를 외치면서 달려갔다는 거야!”
나는 신문을 펄럭펄럭 흔들며 황당 함을 토했다.
리나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흥분해서 외쳤다.
“지금 반응이 아주 뜨거운가 봐요. 벌써 신문이 거의 다 팔렸다고 배달 부가 싱글벙글하던걸요!”
“하이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느끼한 대사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 다.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리나의 말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그날 손님들을 상대하는 내내, 나 는 그 기사에 대해 수많은 물음을 들어야 했다.
“잠시 출장 다녀오셨다는 게, 지하 수로를 소탕하고 오셨던 거군요!”
“그 범죄자 집단이 싹 사라졌다니 요즘 아주 두 발 뻗고 잠이 잘 온 다니까요?”
“너무 멋있으세요, 아리엘 님!”
나는 어느새 훈련도 받지 않은 몸 으로 마수 앞에 뛰어들어 세드릭을 구출해 온, ‘사랑의 영웅’이 되어 있 었다.
열심히 해명해도 별 소용은 없었 다.
“마수가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 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죽은 상태 였다니까요!”
“아이, 참. 죽었든 살았든 아리엘 님께서 용감하게! 달려 들어가 에반
스 전하를 업고 나오신 건 사실이잖
아요?”
“업고 나오다니, 안 그랬어요!”
도무지 해명한 보람이 없었다. 오 해를 하나 풀면 저기서 새로운 헛소 문이 생겨났고, 그걸 해결하면 앞서 해명했던 오해가 되살아나는 식이었
다.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 다.
“예에. 제가 바로 마수를 한 합에 무찌른 뒤 세드릭 전하를 팔 하나로 들쳐메고 구줄해온 사람입니다.”
자포자기한 나를 멜리사가 안쓰러 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런. 많이 힘드시죠? 지금 한창 아리엘 양에게 관심이 주목돼 있을 때라 그래요. 조금만 견디면 다 사
그라질 거예요.”
“조금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 동안 인가요?”
“음…… 한 삼 년 정도?”
“전혀 위로가 안 되네요.”
나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이 내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건 아 니었다.
매상만 생각해보면 둘도 없는 호재 라고 할 수 있었다.
“줄을 서셔야 합니다, 줄을!”
“예? 향수병에 아리엘 님의 사인만 받고 싶으시다고요? 그것도 일단 줄 은 서셔야 해요!”
직원들이 오랜만에 목 터져라 줄을 세웠다. 호위기사들도 부지런히 손 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관리를 도 왔다.
계산대에선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 다가도 장부를 떠올리면 못내 미소 가 우러나왔다.
‘이 속도대로라면, 이번 달 안엔
목표 달성을 할 수 있겠어.’
나는 아련한 눈으로 옆집을 바라보 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부터, 매그너스의 가게는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소문으로는 매그너스의 투자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제키안이 한동안 안 보이기는 했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제키안이야 무슨 일이 생겼건 아
니건 내 알 바가 아니었지만, 매그 너스는 이야기가 달랐다.
‘연락이 되어야 거래도 할 수 있을 것 아니야?’
그러니 매그너스는, 최소한 내가 목표 금액을 달성할 이번 주말까지 는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장부를 떠 올리고 있는데, 리나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아, 아가씨.”
“응? 왜 그래?”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백작? 어느 백작?
내가 아는 백작이 한두 사람이 아 니었다. 제이나 백작, 오드리 백 작으
아, 나는 곧 리나가 저렇게까지 놀 란 이유를 깨달았다.
‘윈스턴 백작이구나.’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처음으로
가게에 행차하신 것이다.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나는 시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세 드릭과의 약속 시간이 고작 두 시간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