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뭐지.’
나는 묘한 기분을 지우며 응접실로 향했다.
곧 응접실 테이블에 나와 세드릭, 레티아나, 테오라는 묘한 조합이 마 주 앉았다. 리나가 의아한 눈으로 차를 세팅해 주었다.
그동안, 테이블에는 잠깐 날카로운 정적이 흘렀다.
세드릭과 테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 번 맞부딪쳤다. 알 수 없는 긴장 감이 흘렀다.
‘무인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 는 건가?’
어쩌면 지금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서로의 강함을 측정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짧은 적막을 레티아나가 깨뜨렸다.
“저, 아리엘 님. 다시 한번 말씀드 리지만,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레티아나가 수줍은 얼굴로 내게 말 을 걸었다.
“마법사님이 그러셨는데, 조금만 더 늦게 깨웠으면 위험했을지도 모 른대요. 제가 거기 갇혀 있던 사람 들 중에서 가장 건강 상태가 안 좋 았다고 하더라고요.”
테오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런 일’이라는 건, 물론 실험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레티아나 역시 실험의 희생양 중 하나였다. 세드릭처럼 심각한 수준 은 아니었지만.
원작에서 둘이 서로를 통해 안식을 얻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괜스레 세 드릭과 레티아나를 한 번씩 돌아보 았다.
둘의 시선은 신기하리만치 제각각 이었다.
세드릭은 여전히 테오를 주시하고 있었고, 레티아나는 수줍은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 테오. 이젠 지나간 일인걸.”
레티아나가 씩씩하게 말했다.
물론 레티아나는 심지가 곧고 건강 한 아이이니 곧 회복하리란 것은 알 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레티아나 양?”
“그럼요. 황제 폐하께서 이번 일에 연루된 피해자들에게 지원을 약속하 셨어요. 약값도 그렇고, 기본적인 의 식주도…… 아, 참. 그렇지!”
레티아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폐하께서 수도에 집도 얻어주셨어 요. 저는 저쪽, 로브르 지구에 거주 지를 얻었답니다!”
“정말인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가 집까지 얻어주었을 줄이야, 듣던 중 잘 된 이야기였다.
“잘됐네요! 로브르 지구라면 살기
도 딱 좋은 동네고요.”
“네! 이 세논 지구와도 그리 멀지 않아요. 저어, 아리엘 님, 혹시 앞으 로 종종 들러도 될까요?”
레티아나가 긴장한 얼굴로 내 대답 을 기다렸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이 아이가 내게 호감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싫을 건 없었다. 오히려 환영이었 다. 레티아나처럼 선하고 다정한 소 녀의 호감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테 니까.
나는 뺨을 긁적였다. 사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가끔 진짜 여주인공의 등장을 상상 해보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를 예상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대답이 조금 늦어진 걸 뭐라고 해 석했는지 레티아나가 손사래를 쳤 다.
“죄송해요, 아리엘 님! 종종 들른 다는 말은 그럼……,”
“아, 아니에요. 당연히 자주 와도
되죠.”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레티아나 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정말인가요? 감사해요! 잘 됐다, 테오! 그렇지?”
“네, 누님.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가끔씩 바쁘지 않으신 시간에 들르 겠습니다.”
“자네도 같이 오는 건가?”
세드릭이 툭 이상한 물음을 던졌 다. 테오와 세드릭의 시선이 또 허 공에서 부딪쳤다.
“예. 레티아나 누님을 모셔다 드려 야 하니까요.”
‘%음”
1 ― I ―1 #
세드릭이 찻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테오 유브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메사르 부족이라고?”
“그렇습니다.”
“내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
나?”
‘에 9’
0 으
뜬금없는 발언에 차 홀짝이던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테오가 무표정도 잊고 얼떨떨한 얼 굴을 했다.
“……예?”
“ 싫은가?”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제안 해주신 것은 영광입니다. 하지 만……,”
아무래도 갑작스러운지 테오가 레 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당장 감사하다고 해, 테 오! 너무 영광이잖아!”
레티아나가 입을 가리고 외쳤다.
하긴, 에반스 기사단에 입단하는 건 무인으로서 대단한 영광이기는 했다. 특히 테오처럼 어린 나이엔 더욱 그럴 것이다.
테오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되겠습니까?”
“음. 에른.”
문을 지키고 있던 에른이 다가와 테오를 이곳저곳 관찰했다. 곧 그가 짧게 결론을 내렸다.
“골격이 훌륭합니다. 기본기도 탄 탄한 듯하고요. 지금은 근육이 많이 상했지만, 시일이 지나면 회복될 겁 니다. 키울 가치는 충분해 보입니 다.”
테오의 얼굴에 미미하게 동요가 생
겼다.
역시 유혹이 들기는 하는 모양이었 다. 레티아나는 옆에서 계속 잘 됐 다며 손뼉을 쳤다.
에른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단, 입단하면 당분간은 자유시간 을 갖지 못할 겁니다. 갇혀 있는 동 안 약해진 신체를 복구해야 하니까 요.”
테오는 긴장한 얼굴로 에른의 설명 을 들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
니 저 나이대 소년처럼 풋풋해 보였 다.
“티타임을 가질 시간 따윈 없을 겁 니다.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호위할 시간 역시.”
“그럼 레티아나 누님은……,”
“테오! 나는 괜찮아!”
레티아나가 깜짝 놀라 외쳤다.
“지금처럼 일일이 지켜줄 필요 없 어! 수도는 내가 본 곳 중 가장 치 안이 좋은 동네인걸. 내 걱정은 말
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잖아?”
그래도 테오는 아직 갈등하는 듯했 다. 레티아나가 테오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더 강한 사람들과 만나서 강해지 고 싶다고 항상 말했었잖아. 공작님 께서 마음 바꾸시기 전에 얼른 덥석 물어. 응?”
“……알겠습니다.”
테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하겠습니다. 입단.”
결심한 듯 테오가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좋아.”
세드릭이 비릿하게 웃고는 에른에 게 고갯짓했다.
“데려가.”
“예.”
“지금 바로 가는 겁니까?”
테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에른 은 대답 대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멜른을 불렀다.
“새 기사단원이다. 데리고 가서 입 단 절차를 밟도록.”
“호오, 그렇습니까? 신입이란 말이 죠‘?”
멜른이 눈을 빛내더니 테오를 잡아 끌었다.
“가자, 신입! 제국에서 가장 고강 도 훈련으로 유명한 에반스 기사단 에 온 것을 환영하네!”
멜른이 테오의 어깨를 툭 치더니 어깨동무를 했다.
테오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질질 멜른에게 끌려갔다.
“잘 하겠죠, 테오……,”
레티아나가 아련한 얼굴로 멀어지 는 테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강한 기사가 되어 나오겠지.”
세드릭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간 기분이었 다. 나는 테오의 뒷모습이 문 너머 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레티아나 양, 그나저나 앞으론 무 슨 일을 할 생각이에요?”
“아, 그게…… 저를 치유해주신 마 법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제가 물 속성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것 같
다고 하시더라고요.”
레티아나가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일단은 마탑에 수련생으로 들어갈까 해요. 낙제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레티아나가 밝은 얼굴로 외쳤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은 들 지 않았다. 잘 할 것이다. 레티아나 라면.
원작에서도 레티아나의 꿈은 대륙 을 방랑하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었
다. 마법으로 자신처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좋은 생각이네요. 종종 와서 소식 전해줘요. 아, 그렇지. 그리고 선물 할 게 있어요.”
“네? 정말요?”
레티아나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 다. 나는 웃으며 선반 깊숙한 곳에 서 선물을 꺼내왔다.
내가 가져온 향수병을 본 세드릭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여기 있어요.”
“세상에! 향수인가요?”
레티아나가 방방 뛰며 기뻐했다.
“너무 신나요! 돈 모으면 꼭 아리 엘 님 향수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했 거든요!”
“아리엘, 그건.”
세드릭이 말했다.
레티아나 역시 로드의 실험실에서 마수의 피를 약간 주입당했다. 세드
릭만큼은 아니겠지만 가끔 부작용이 을 수도 있고, 그럴 때면 아닉시아 향이 도움을 줄 것이었다.
짧게 향수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자 레티아나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되나요?”
“그럼요. 다 떨어지면 다시 오고 요.”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레티아나의 눈에 감동이 일렁거렸 다. 하도 기뻐해 주니 내 기분도 덩 달아 좋아졌다.
슬슬 가게 문 열 시간이 되자, 레 티아나는 곧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하며 인사를 했다.
“잠깐.”
세드릭이 레티아나를 불러세웠다. 깜짝 놀란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아직 이름을 모른다고?
레티아나가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티아나 윈드벨입니다.”
“레티아나 윈드벨 양이라.”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두 주먹을 쥐었다.
꼴사나운 일이지만, 솔직히 긴장이 되었다.
세드릭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한참 같던 몇 초 뒤 세드릭이 말 했다.
“기사단 사무소에 이야기해 놓겠 다. 테오 유브르를 면회하고 싶다면 자네 이름을 대도록.”
“아, 감사합니다!”
레티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게 전부였다. 세드릭은 더 이상 의 용건은 없는 듯 레티아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제야 굳어 있던 숨을 내쉬 었다.
내가 긴장해있었다는 사실이 창피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 란 걸 알기에 스스로를 탓하진 않기 로 했다.
어느샌가 욕심이란 것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설령 상대가 여주인공이 라고 하더라도, 내 남주인공을 양보 하고 싶지 않았다.
‘정작 그 여주인공도 남주인공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같긴 한
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세드릭이 말을 걸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아 쉽군요.”
“네? 뭐가요?”
뜬금없는 말에 나는 세드릭을 돌아 보았다.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고 말 했다.
그 향수의 향기는 제게서만 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네? 뭐가…… 아, 설마 아닉시아 향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세드릭만을 위한 향수도 만들어 줄게요.”
“정말이십니까?”
세드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어 깨를 으쓱이며 흔쾌히 답했다.
“네에. 일단은 여름 신상품이 먼저 지만, 그걸 만든 뒤부터 생각해 볼 게요.”
“감사합니다.”
세드릭은 즐거워 보였다.
고작 향수 하나를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에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래서 살짝 놀려 보기로 했다.
“잘 만들어지면 비싸게 팔아야겠네 요. 세드릭 에반스 에디션이란 이름 도 붙여서.”
“ 네‘?”
세드릭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세드릭만을 위한 향수인데, 그렇 게 쉽게 팔아버리면 아깝죠. 대대적 으로 행사를 열어서 추첨을 해야겠 어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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