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세드릭!’
나는 한달음에 세드릭의 침대로 달 려 갔다.
세드릭은 한 손으로 심장께를 움켜 쥔 채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지하 피바다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다행인 건 그때보단 강 도가 덜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황급히 가져온 아닉시아 향을 뿌렸다.
효과가 있었던 건지, 다행히 조금 뒤 세드릭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아리엘, 하고 그가 내 이름을 희미 하게 속삭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예요, 세드릭. 정신 들어요?’
‘아리엘……/
세드릭이 또 내 이름을 불렀지만, 눈빛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나는 그의 두 팔을 꽉 쥐었다.
‘저 맞아요! 정신 차린 거 맞죠?’
세드릭이 위에 드리운 나를 올려다 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와준 겁니까?’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팔을 뻗어 내 등을 끌어 안았다.
균형이 흐트러진 나는 그의 가슴 위로 무너져 내렸다.
‘꿈인 줄 알았는데
머리 위에서 세드릭의 속삭임이 들 렸다.
나는 그의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눈을 꾹 감았다.
세드릭을 낫게 해주고 싶었다.
원작을 완결까지 읽지 않은 걸 이 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전설로만 여겨지는 방법이 하 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 적인 방법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 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세 드릭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품에서 빠져나 와 침대 머리맡의 줄을 당겼다.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가 얼른 달려 와 세드릭의 맥박을 재 보았다.
‘정상이십니다.’
주치의가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
았다. 마치 무슨 마법을 부렸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드릭의 침실을 떠나 손님방 침대 에 누운 나는 아낙시아 향수병을 이 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분명 이 향에는 세드릭을 진정시키 는 효과가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좋지 않은 상태조 차도 즉각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던가?
이전에도 그랬다. 피바다 속에서 세드릭을 발견했을 때, 그는 아낙시 아 향을 뿌리지 않고도 진정되었었 다.
‘설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나치게 낭만적이기만 하고, 도무 지 현실성이라곤 없는 그 방법에 대 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분명, 그때 아닉시아 향
없이도 진정됐던 건 정말 이상하단 말야……/
어젯밤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꾸벅 꾸벅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 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세드릭을 돌아보 았다.
상념을 너무 열심히 한 모양이었 다. 세드릭이 조금 불만 어린 표정 을 지었다.
“제가 옆에 있는데.”
뭐야. 귀여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 다.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이 지나 치게 귀여웠다. 이건 투정의 탈을 쓴 애교가 틀림없었다.
나는 뭉친 적도 없던 마음이 사르 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저희 무슨 얘기하고 있 었죠?”
“오늘 밤도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길 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리 엘 ”
문득 세드릭이 내 이름을 불렀다. 긴장한 목소리로.
나는 덩달아 긴장해 그를 마주 보 았다.
“왜 그래요?”
“내일 저녁, 제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일 저녁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내 일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예 요?”
“그렇습니다.”
“뭔지 여쭤봐도 돼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드릭의 목소리는 여전히 긴장으 로 굳어 있었다.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긴장해 있 지?’
그러고 보니, 비행선에서도 세드릭 은 비슷한 이야길 한 적이 있었다.
다녀오고 나면 내게 하고 싶은 말 이 있다고.
‘그 이야기인 걸까?’
세드릭이 긴장한 모습을 보자, 덩 달아 나까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에반스 저택에 들어서자 리키온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리키온 씨, 좋은 저녁이에요.”
“정말 좋은 저녁입니다!”
리키온이 나를 극진히 대접하며 저 녁 식사를 할 식당까지 안내했다.
내가 엄청난 귀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살짝 어색했다.
에반스 저택에서의 식사는 오늘도 훌륭했다. 솔직히 감상을 이야기하 자 세드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까? 주방장에게 보너스를 두둑이 줘야겠군요.”
우리 곁에서 식사를 보조하던 주방 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식사를 한 뒤 우리는 식후 운동 겸 정원을 산책하고, 다시 돌아와 저택을 구경했다.
세드릭은 저택의 이곳저곳을 안내 해 주었다.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린 방, 그림과 조각상으로 장식한 방, 거의 집 한 채 크기만 한 연무 장.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서재였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수십 개나 빽빽이 서 있었다.
“세상에. 이게 다 정말 책이에요?”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양이었다.
나는 몇 권을 뽑아 보았다가 눈을 비비며 다시 내려놓았다.
마도 공학 원론, 고대 전쟁사, 마 나 이론 등. 전부 내 관심사와는 영 동떨어진 분야였다.
마지막으로 뽑아 들었던 마도학을 다룬 책에는, 책장 가득 복잡한 설 계도와 물리 공식이 적혀 있었다.
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잔뜩 얼 굴을 구기며 책을 덮었다. 옆에서 세드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 나갈까요?”
“아뇨? 지금 너무 좋은데요.”
나는 책장을 거닐며 숨을 깊이 들 이마셨다.
오래된 책 냄새가 한껏 폐부를 적 셨다. 나는 눈을 감고 은은히 미소 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책 냄새를 좋아하거든요.”
나는 살짝 눈을 뜨고 세드릭을 돌 아보았다.
“전하께선 안 좋아하세요?”
세드릭은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다시 전하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입술을 뻐끔 거렸다.
“어, 그러니까
“여태 이름으로 잘만 부르셨으면 서.”
“……알겠어요. 세드릭.”
잔뜩 의식한 채 세드릭의 이름을 부르자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치 공식적으로 서로의 이름을 부 르는 게 허용된 사이가 된 것 같아 서.
세드릭이 기쁜 듯 웃었다. 그리곤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책 냄새.”
“……정말요?”
“빳빳한 새 종이 냄새도 좋아하고, 오래된 책 위에 쌓인 먼지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 그러시군요.”
나는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과 취향이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한 건 분명 기쁜데, 왠지 어색 한 기분이 들었다.
세드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 다.
“좋아합니다. 정말로.”
그 말이 괜스레 이상하게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얼굴로 확 열이 올랐다. 이런 분위 기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심장 이 빠르게 뛰면서, 자꾸 헛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짝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오래된 책에서 왜 좋은 냄새 가 나는지 아세요?”
아, 이런.
첫 마디가 나가자마자 나는 내가 헛소리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헛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책에 들어 있는 성분이 시간이 지 나면서 산화되기 때문이래요. 그러 면서 다른 성분들이 생겨나는데, 그 성분들에서 아몬드 향이랑 바닐라 향이 난다고하더라고요.”
아, 망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이게 갑자기 웬 지식 자랑이람. 이
번엔 창피함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 는 게 느껴졌다.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네요.”
“이제 제가 알려드렸네요. 하 하……-”
제발 입 좀 다물어, 아리엘 윈스턴!
나는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러 자 세드릭이 내 입술 위로 손가락을 스쳤다.
“입술 상하십니다.”
입술 위를 맴도는 손가락이 간질거 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느라 눈을 감은 듯한 모양새가 됐다.
일 초 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굉 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을 만지는 동안 눈을 감고 있 다니.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닌데!’
뒤늦은 깨달음에 화들짝 놀란 나는 도로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세드릭의 체향이 천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바 짝 굳었다. 체향이 점점 더 가까워 졌다.
바짝 굳은 것이 세드릭에게도 느껴 진 걸까.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 리는 것 같았다.
발끈한 내가 정말 눈을 뜨려고 했 을 때였다.
입술로 따스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녹을 듯
입술에 달라붙었다. 나는 떨리는 손 으로 세드릭의 옷깃을 잡았다.
곧 그의 손바닥이 내 등을 부드럽 게 받쳤다.
오래된 책 향기와 빳빳한 새 종이 냄새, 그리고 세드릭의 체향이 한데 얽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기분을 영원히 느끼고 싶다고.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각을.
# # 소
다음 날 아침, 세드릭이 나를 가게 까지 데려다주었다.
가게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엘 님!”
어색하게 앉아 있던 소녀가, 나를 바라보더니 번쩍 몸을 일으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원해 보이는 하늘색 머리카락과 예쁜 금 안.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소녀, 레 티아나였다.
“레티아나 양? 그리고 옆엔
나는 레티아나 옆에 서 있는 청년 에게 시선을 주었다.
테오 유브르. 잘 그을린 다갈색 피 부가 인상적인 청년이 담담한 표정 으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엘 님.”
그 순간, 나는 세드릭이 갑자기 내 등 뒤로 바짝 다가오는 것을 느꼈 다.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레티아나
가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리 엘 님……! 바쁘시다면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
“아뇨, 아니에요. 아직 가게 열기까 진 시간이 남았으니까, 와서 차라도 함께 마셔요.”
“감사합니다!”
나는 둘을 응접실로 안내하기 전, 먼저 세드릭을 배웅하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세드릭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날 따라올 태세를 하고 있었다.
“안 돌아가 보세요?”
“괜찮습니다. 오전 내내 한가해서 요.”
응? 아닐 텐데…… 분명 저택을 나올 때 리키온이 오늘 일정을 브리 핑하는 걸 들었었는데.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세드릭을 올 려다보았다.
세드릭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더니 내 응접실로 나를 에스코트하려 했다.
“가시죠, 아리엘.”
마치 내 가게가 너무나도 익숙하다 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