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31화 (131/153)

〈132화〉

오 # 쑤

“아리엘 님! 세상에, 너무 오랜만 이에요!”

“이제 가게는 아예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 었다.

“잠시 급한 일이 좀 있었어요. 제 가 그동안 가게에 좀 소홀했지요?”

“맞아요. 소홀하긴 하셨어요. 올 때 마다 아리엘 님이 안 계셔서 내심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어머나. 저 역시 여러분을 못 뵈 어서 너무 아쉽고 허전했답니다.”

나는 방긋 영업용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아리엘 님, 신상품은 언제 나오나요?”

“맞아요. 여름용 신상품을 계획 중

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랬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칸 때문 에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여 름용 새 향수를 개발해 열심히 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게요. 늦어졌네요, 죄송해요. 생각해둔 레시피는 대충 있기는 해 요.”

“어머! 정말인가요?”

“저희한테만 살짝 귀띔해 주세요!”

“하하. 아직은 비밀이에요.”

나는 찡긋 눈웃음을 쳤다. 손님들 이 아쉽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손님들과의 대화, 직원들이 향수를 설명해주는 소리. 여기저기서 향수 를 시향해보는 냄새.

모든 익숙한 것들, 그러나 최근에 는 동떨어져 있던 것들이 무척 기껍 게 다가왔다.

‘역시 난 이 일이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손님들을 접대 중인 직원들의 얼굴

에는 활짝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일하는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음, 보너스 덕분인가.’

오늘 아침, 며칠 동안이나 나 없이 수고해준 게 고맙다고 보너스를 넉 넉히 지급했던 기억이 났다.

‘역시 고용주는 돈으로 보답해야 해.’

다시 한번 경영 철학을 되새길 때 였다.

“아리엘 님!”

“흐엉, 아리엘 님!”

데시벨 높은 울음소리가 등장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루나를 비롯한 소녀들이 울먹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뛰지 마! 넘어지겠다!”

“아리엘 님, 허엉! 어디 계시다 이 제 오신 거예요!”

“미안,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출

장을 좀 다녀왔어.”

“출장이 요?”

“ 0 으”

— 0 으

“저희도 데려가시지 그러셨어요!”

“하하, 출장은 여행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흐윽.”

“루나, 그만 울어. 무사히 돌아오셨 잖아.”

릴리가 허둥지둥 루나를 달랬다. 그러자 이번엔 에일린이 울망거리기 시작했다.

“저희가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 는지 아세요?”

“소문? 무슨 소문?”

“에반스 공작님과 아리엘 님이 사 랑의 도피를 떠났다는 소문이요!”

“사랑의, 뭐?”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에일린이 크흥, 코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공작님이랑 아리엘 님은 속세에 질려서 단둘이 밀월여행을 떠난 거 라고, 그래서 두 분 다 요즘 감쪽같

이 안 보이는 거라고 로미나가 그랬 어요.”

“결혼식도 이미 비밀리에 치렀는데 저희만 초대 안 한 거라고 했어요!”

루나와 에일린이 합창하듯 서러움 을 토했다.

손님들의 시선이 이리로 꽂히는 것 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호기심과 해 명을 요하는 눈빛들이었다. 아무래 도 그런 소문이 정말 돌기는 돈 모 양이 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해명에 나섰 다.

“그럴 리가. 완전히 헛소문이야. 결 호…… 흐흠, 결혼식이라니. 소문이 진도를 나가도 너무 나갔구나.”

‘결혼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샤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 정하지 않으시네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나는 빠 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하하하……,”

너희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 이 후로 세드릭과 나 사이에 이런저런 진전이 조금 있었거든.

나는 솔직히 털어놓는 대신 대충 얼버무리기를 택했다.

“결혼식이라니, 아무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그 로미나라는 친구에게 이상한 소문 퍼뜨리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렴.”

“아리엘 님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드레스 자락은 저희가 들어드 리면 안 되나요?”

“제발요. 저희가 하게 해 주세요!”

소녀들은 내 필사적인 얼버무림에 전혀 협조해주지 않았다.

애절한 눈빛 공격에 한참이나 시달 린 나는 결국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 에 없었다.

“그래…… 언젠가 결혼하게 되면 꼭 너희를 브라이드 메이드로 쓸 게……/,

“정말인가요! 약속해주신 거예요!”

소녀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미래의 언젠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결혼 식 쯤이야 좀 팔아도 되겠지.

때마침 와 있던 멜리사가 중얼거리 며 수첩에 펜을 놀렸다.

“아리엘 윈스턴 양의 브라이드 메 이드는 루나 양과 에일린 양, 그리

“잠깐, 멜리사! 그거 기사로 낼 생 각 아니죠!”

허겁지겁 멜리사를 말리고, 소녀들 과 잠시 놀아준 뒤 돌려보내고.

또 손님들을 열심히 접대하다 보니 금세 해가 기울었다.

나는 쭉 기지개를 피며 마감 중인 직원들에게 말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뒷정리는 내가 마저 할 테니 들어가서 푹 쉬 어요.”

“아닙니다, 사장님!”

“이 정도는 저희가 해야죠!”

직월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

다.

보너스의 힘은 내 생각보다 더 위 대한 듯했다.

‘앞으로도 자주 줘야지.’

각오를 되새기는데 멀리서 마차 소 리가 들려왔다.

‘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우아하게 잘 빠진 마차 한 대가 대로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어둑해진 창가에 내 모 습을 비춰 보았다.

한창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머리가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리나가 고맙게도 빗을 가져와 내 머리를 빗겨주었다.

“내일 오시나요?”

“응, 가게 문 열기 전에 올게.”

나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리 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셨으 면 좋겠네요. ……대체 무슨 병이길 래 아가씨를 곁에 두어야 한다는 건 진 모르겠지만요.”

리나의 말에는 살짝 뼈가 담겨 있 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내가 전하께만 납품하던 향수 있잖아? 자세히는 말 못하지 만, 그 향수랑 관계된 일 때문이야.”

“그렇군요. 아, 공작님께서 내리셨

네요.”

나는 얼른 다시 창문을 돌아보았 다.

세드릭이 마차 밖으로 기다란 다리 를 내뻗는 게 보였다.

나는 커튼 뒤로 숨어서 가게로 가 까이 다가오는 세드릭을 훔쳐보았다.

“아가씨, 뭐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돼요?”

리나와 직원들이 그런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냥…… 새삼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리엘 아가씨가 행복해 보이 셔서 저도 정말 기뻐요.”

그때 세드릭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얼른 그를 마중 나갔다. 문을 열자 세드릭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좋은 저녁이에요.”

나는 방긋 미소를 되돌려주며 말했 다.

역시 창문 너머로 볼 때보다, 가까 이서 보는 게 더 잘생겼다.

세드릭이 나를 마차로 에스코트했 다. 마차 문을 닫은 뒤 그는 내 맞 은편 대신 곁에 앉았다.

세드릭의 손이 습관처럼 내 머리칼 을 들어 올렸다.

“오늘도 레이디께는 좋은 향기가 납니다.”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세드릭이 흘

리듯 중얼거렸다.

“심장이 편안해지는……『

세드릭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는 괜히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딴소리 를 했다.

“세드릭. 누누이 말하지만, 그거 그 냥 연상 효과예요.”

세드릭이 낮게 웃었다.

“요즘 계속 절 이름으로 불러주시 는 거 압니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내가 내내 세드릭을 이름으 로만 불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황급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 다. 대충 피바다 속에서 세드릭을 발견했던 때부터기는 한데, 잘 기억 도 나지 않았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나는 깜짝 놀라 사과부터 했다. 세 드릭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왜 사과하시는 겁니까?”

“그야……

“레이디가 부르는 제 이름을 듣는 게 요즘 저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은 없었 다.

나는 조금 빨개진 얼굴을 돌려 숨 기며 말했다.

“의식돼서 앞으론 못 부를 것 같아 요.”

“정말입니까? 이런…… 방금 제 말 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 오.”

“들은 말을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세드릭이 고개 돌린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레이디. 이쪽 안 봐주실 겁니까?”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다. 지금 얼굴이 너무 달아올라 있을 게 뻔하니까.

“……아리엘.”

고집스레 돌아보지 않는 내게 세드 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전기라도 맞은 듯 흠칫 어깨 를 떨었다.

홱 세드릭을 돌아보며 내가 외쳤 다.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시는 게 어 디 있어요!”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세드릭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밤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

니다. 아리엘.”

내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뭐, 뭘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도 와드려야죠.”

나는 당분간 세드릭의 저택에서 밤 을 보내기로 했다.

수도에서 되돌아온 어젯밤, 나는 오랜만에 가게에서 평화로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자정이 막 되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초인종을 눌렀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레이디! 혹시 계십니까?’

리키온의 목소리가 하도 다급해서 나는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리키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전하께서, 전하께서숨을 제 대로 못 쉬십니다.’

‘ 네?!’

‘주치의도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선 과호흡이

오신 상태에서도 계속 레이디의 이 름만은 부르고 계셔서…… 혹시 레 이디께선 이유를 알고 계신가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리키온의 횡설수설에 나 역시 얼굴 이 새하얘졌다.

‘설마……/

그날 폭주했던 부작용이 아직 남아 있는 걸까?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닉시 아 향을 챙겨 에반스 저로 달려갔었

다.

그리고 도착한 세드릭의 침실에서 마주한 광경은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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