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30화 (130/153)

〈131 화〉

“저놈이야 전장에서 굴렀던 몸이니 고통에 익숙하겠지만, 아리엘 양, 넌 아니잖아? 자, 말해봐. 그동안 많이 고통스러웠지?”

“그 입 닥쳐.”

세드릭이 검끝으로 로드의 목을 찔 렀다. 핏방울이 송글 맺혔다.

“감히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거지.”

당장이라도 로드의 목이 꿰뚫릴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야기만 들어볼 수 있을까 요?”

만약 로드가 정말 세드릭을 치유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거라면, 이대로 죽여버릴 순 없었다.

세드릭이 겪는 광증엔 마땅한 치유 제나 치료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완화시키는 방법만 있을 뿐, 그저 고통에 무뎌지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을 빼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거의 전설로 내려오는 방법이나 다름없고……/

원작을 읽은 나지만 그 유일한 방 법의 진위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읽 은 부분까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 으니까.

‘어쩌면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걸지

도 몰라.’

나는 로드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낫게 하겠다는 거지?”

“하하하역시 궁금하구나. 좋 아, 아리엘 양. 알려줄 테니까 일단 이 무서운 것 좀 치워 보라고 해.”

로드가 제 목을 겨눈 검에 손가락 질을 했다.

세드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궁금하시다면 지껄이게 두겠습니 다만…… 살기 위해 하는 헛소리일 겁니다.”

“헛소리라니, 무슨 그런 말을! 아 니니까 좀 치워 보라고!”

나는 세드릭을 향해 작게 고갯짓을 했다. 세드릭이 마지못한 듯 검끝을 약간 떨어뜨렸다. 로드가 그제야 한 숨을 내쉬었다.

“말려줘서 고마워. 어휴, 살벌해서 죽는 줄 알았……-”

“방법이 뭐야?”

나는 로드의 말을 뚝 자르고 물었 다.

로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알고 싶어?”

“이제와서 무슨 헛소리야?”

나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로드가 아주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 듯 목소리를 낮췄다.

“방법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아주, 아주…… 고통스러운 방법이 거든.”

“……고통스럽다고?”

“그래. 뭐, 한 번 아프고 마는 게 평생 고통받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 르지만 말이야.”

로드가 뻔뻔스레 지껄였다. 그 고 통의 원흉 중 하나인 주제에.

나는 로드를 노려보았다.

“그만 밑밥 깔고 대답해. 방법이라 는 게 뭐냐고 물었어.”

로드가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 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넓은 실험실 안이 긴장으로 무거워졌다.

오가는 대화가 어리둥절하기만 할 기사와 마법사들 역시 덩달아 숨죽 인 채 로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식을 치러야 해.”

“의식?”

“그래. 마수를 몰아낼 수 있는 유 일한 존재가 뭐겠어? 바로 하늘에

계신 신님이시지.”

로드가 히죽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 다.

“대성당이 있는 아젠드릭으로 가. 거기서 내가 알려주는 의식을 치르

면 돼.”

“강조하는데 의식의 준비물이나 과 정에 대해 아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날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알겠지? 일단 저 검부터 멀찍이 좀 던져

“세드릭.”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세드릭을 불 렀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이디.”

“죽여요, 그거.”

“……어? 뭐라고?!”

로드가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곤 주 저앉아 있는 로드를 내려다보았다.

“ 야.”

“……뭐, 뭐야?”

“목숨에 미련 없어?”

“뭐라고?”

로드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팔짱을 끼며 로드를 노려보았 다.

“목숨에 미련 없냐고. 감히 이런 걸로 거짓말을 쳐?”

“뭐? 거

거짓말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여자?”

로드가 황망한 얼굴로 나와 세드릭 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세드릭 역시 조금 놀란 얼굴로 나 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젠드릭에서 치르는 의식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지.’

그 이야기는 원작의 중요한 챕터 중 하나였다.

마족과 성신은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니 성직자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면 마수의 피를 정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원작 속에서 세드릭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세드릭은 대성당이 있는 신 성도시 아젠드릭으로 떠나고, 그곳 에서 구마 의식을 받는다.

결과는?

‘참혹했지.’

구마 의식은 정화는커녕 심각한 부 작용을 낳았다.

세드릭은 몸속에서 날뛰는 마수의 피를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어버 렸다. 그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강력 한 고위 신관들이 몇이나 희생되어 야 했다.

나는 로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 자식은 알고 있을 거다. 구마 의식은 세드릭을 구원하기는커녕, 최악의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제시 한 거다.

“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네가 나불댄 소리가 거짓말이란 것쯤은.”

“……하, 기가 막히네.”

로드가 냉소를 띠었다.

“기껏 알려줬더니 다짜고짜 의심부 터 해? 아리엘 양, 이게 말이 되는 경우야?”

로드는 뻔뻔함을 잃지 않았지만 나 역시 그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 았다.

만약 세드릭이 저 말에 속아넘어갔 다면, 원작과 똑같은 전철을 밟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속에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보아하니 너, 유용한 정보라곤 아

무것도 아는 게 없나 본데.”

로드가 희미하게 어깨를 굳혔다.

“추하게 발버둥치지 말고 이제 그 만 죗값을 치러.”

“레이 디.”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 다.

로드를 노려본 세드릭이 내키지 않 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이자가 맞는 정보를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로드의 필사적인 마지막 사기질에 세드릭이 넘어가버린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 면 홀랑 넘어갔을지도.’

“이야기를 들어볼 가치 정도는 있

을지도 모릅니다.”

세드릭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수와 치르던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의 성직자들 은 이런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오히려 부작용만 낳을지도 모5죠 ”

“확실히 레이디의 말씀도 맞습니다 만……:’

“아니, 아리엘 양, 제정신이야? 유 일한 방법이라니까? 네가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로드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이녀석, 아까 이상한 말을 했었지.

‘내가 세드릭처럼 이십년 전의 실 험 체 였다고?’

재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 역시 세드릭처 럼 시시때때로 마수의 피가 주는 부 작용에 몸부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몸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이후 나는 한 번도 그런 증상을 겪

은 적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하지 만……/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 다.

‘내가 스스로 실험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니.’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뱉은 적이 없다. 그건 확실했다.

그러니 남은 가능성은 내가 아닌

나, 즉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아리엘 윈스턴’뿐이었다.

‘아리엘 윈스턴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 었다.

세드릭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던 캐릭터였으니. 실험체 발언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드릭이 실험체였단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안 건진 의문이지만

짧게 고민하던 나는 다시 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세드릭이 다시 장검을 로드의 목에 들이밀었다.

“안타깝게도, 레이디께선 네가 거 짓말 중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군.”

“아…… 아니라니까? 그래, 의심이 든다 쳐.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확 실하지도 않은 의심 때문에, 널 구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외면하겠 다는 거야? 그게 얼마나 멍청한 소 리인 지 알지?”

“글쎄.”

세드릭이 로드의 피부를 가볍게 긁 었다.

로드가 힉, 숨을 집어삼켰다. 검끝 이 지나간 곳으로 희미하게 선홍빛 피가 배어나왔다.

“사실 나도 아젠드릭에 가능성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뭐가 됐든 네놈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을 것 같

군.”

로드가 떨리는 눈으로 제 목을 긁 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공포의 빛이 스쳤다.

로드가 애써 다시 허세를 끌어올렸 다.

“자세한 얘기 정돈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분명 후회할걸?”

세드릭이 픽 웃었다.

“블러핑도 이렇게까지 티가 나니 안쓰러운데.”

“……잠깐! 내 얘기를……,”

“레이디 말씀이 맞다. 너무 추해.”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검을 들어 올렸다.

베지는 않고, 칼등으로 쳐 기절시 키려는 것 같았다.

그때 로드가 내내 왼손에 쥐고 있 던 시험관을 깨뜨렸다.

진녹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 다.

“이, 이건…… 다들 피하십시오!

독가스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코와 입 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연기는 미세한 틈 사이를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차츰,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에른!”

세드릭이 날카롭게 외쳤다.

에른이 빠르게 나를 안고 자리를 피했다.

로드는 혼란을 틈타 문으로 달려가

려 했다. 그러나 세드릭의 손아귀에 곧장 뒷덜미를 잡혔다.

“제길…… 제길!”

로드가 욕설을 뱉었다.

“독도 안 듣다니, 빌어먹을 괴물 새끼! 뒈져!”

소매에서 단도를 꺼낸 로드가 세드 릭을 찌르려 했다.

세드릭은 어린애를 상대하듯 손쉽 게 로드의 손목을 비틀었다. 챙강, 소리와 함께 단도가 바닥을 나뒹굴 었다.

“제길…… 제기랄!”

로드가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

로드의 멱살을 높이 들어올린 세드 릭이, 곧 그의 몸을 바닥에 내던졌 다.

“아악!”

새된 비명이 울렸다.

엎어진 로드의 등을 밟은 세드릭이 칼등으로 뒷덜미를 후려쳤다.

실 떨어진 인형처럼 로드는 팔다리 를 축 늘어뜨렸다.

멀리서도 거침없이 전해져오는 타 격감에 나는 아낌없이 손뼉을 쳤다.

# # 호

독가스에 들이마신 사람들이 몇 있

긴 했지만, 다행히 멀쩡한 쪽이 훨 씬 더 많았다.

쓰러진 이들을 들쳐업은 채 기사단 은 지하를 탈출했다.

드디어 지상으로 나온 우리를 뜻밖 의 풍경이 맞이했다.

“황태자 전하……?”

황실 회의 때 보았던 황태자가 염 려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 괜찮소?”

그러나 정말 놀라운 건 황태자의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황태자 뒤로 펼 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득 덮을 정도로 수많은 군사들. 범죄자들이 싹 사라진 도시.

한바탕 대청소라도 한 것 같았다.

세드릭이 질질 끌고 오던 로드를 황태자 앞에 내던졌다. 마치 잡아 온 사냥감을 자랑하듯이.

황태자는 제 앞에 던져진 것을 보 고 표정을 굳혔다.

그자인가, 세드릭?”

“예. 로드 리제로. 칸의 길드 마스 터입니다.”

세드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나와 황태자는 알고 있었 다. 세드릭은 평생에 걸친 원수에게 복수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리란 걸.

황태자가 꾹 눈을 감았다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고생 많았다, 세드릭. 정 말로…… 고생이 많았어. 그래, 이자 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일단 심문할 겁니다. 새끼친 하위 조직들을 모조리 소탕할 수 있는 정 보를 얻어야죠.”

“좋은 생각이군. 그 다음은?”

“글쎄요. 레이디의 생각은 어떠십 니까?”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깊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 다.

“제 생각은

나도 이 녀석을 잡으면 어떻게 죗 값을 치르게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 다.

마냥 잔인하기만 한 것보다는, 제 가 저지른 죄들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드는 형벌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고민했던 결과를 속닥속닥 세 드릭과 황태자에게 털어놓았다.

“과연.”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제안이군.”

황태자도 턱을 쓰다듬으며 동의해 주었다.

쓰 # 오

귀환은 올 때보다 훨씬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도시를 싹 정리한 덕택에, 이젠 워 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다.

“여기 들어가면 정말 수도로 갈 수 있는 건가요?”

나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딱 내 키 정도 되어 보이는 반원을 바라보 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여러 마법을 보았지만 공간을 이동하는 건 처음 이었다.

‘부작용으로 팔만 간다든가, 머리 만 가 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내 뇌가 잔인한 장면들을 쉬지 않고 떠

올렸다.

세드릭이 낮게 웃었다.

“긴장되십니까?”

“네. 솔직히요.”

“그럼 같이 갈까요?”

나는 홱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정말요? 그럴 수도 있나요?”

“원래는 한 사람씩이라는 규칙이 있지만…… 제가 레이디를 안고 들 어가면 함께 이동할 수 있을 겁니

다.”

안고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 마법사들, 아직 호송되지 못한 죄인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 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사람들 앞에서 스킨십 한 전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잖 아!’

“그냥 혼자 갈게요.”

“씩씩하십니다.”

세드릭이 설핏 웃었다.

나는 세드릭을 살짝 흘겨보곤 워프 앞에 섰다.

어려울 건 전혀 없었다. 그냥 걸어 가기면 하면 된다.

그럼 드디어 돌아가는 것이다. 내 가게가 있는, 그새 정이 많이 든 수 도로 1 프1- 9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워프 안 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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