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29화 (129/153)

〈130화〉

“……알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고개를 끄 덕였다.

“안 떠날게요. 대신 같이 움직여요. 다친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 치유 마법사를 찾아가야 해요.”

나는 세드릭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 보았다.

피투성이긴 했지만, 아마 대부분이 마수의 피인 것 같았다. 그래도 혹 시 모르는 일이었다.

“외상도 그렇고, 내상도 확인해봐 야죠. 이제 일어나요, 우리.”

나는 조급히 속삭였다.

어떻게 하면 세드릭을 당장 일으킬 수 있을까.

짧게 궁리한 나는 세드릭을 붙잡고 외쳤다.

“그렇지. 그 길드 마스터 자식, 아 직 이 근처에 있을 거예요! 저한테 조금 전에도 텔레파시를 걸었거든 요. 마중을 나오느니 어쩌느니 헛소 리도 했어요. 잡으러 가야죠!”

효과는 내 생각보다 더 즉각적이었 다.

세드릭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 고 적나라하게 들렸다.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저 분노가 나를 향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순간 등골이 섬찟했다.

세드릭이 천천히 내 팔을 감쌌다. 나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 스럽고 느릿하게.

“약속합니다, 레이디.”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자를 한 시간 안에 잡아다 레이 디 앞에 바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은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세드릭은 분명 약속을 지킬 것 같았 다.

그가 한 시간이 아니라 십 분을 말했다 하더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 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천천히 내 머리칼을 쓰다 듬었다. 내가 아까 그를 토닥여줬을 때와 비슷하게.

“그리고…… 죄송합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에게 사과를 받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세드릭이 왜 제게 사과를 해요?”

“지금도, 이렇게 떨고 계시지 않습 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 다.

나는 그제야 내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했 다.

“그러네요. 떨고 있네요.”

“제가…… 레이디를 많이 놀라게 해드린 것 압니다.”

세드릭이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마치 내가 자신을 경계할까 봐 겁이라도 난 듯 한. 끝이 떨리는 목소리는 당치 않 게 초식동물인 척을 하는 맹수 같기 도 했다.

“하지만 저는 레이디를 해치지 않 습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

도.

세드릭이 간절히 속삭였다. 믿어 달라는 듯.

“그러니 떨지 마세요. ……피하지 도, 말아 주십시오.”

대답을 기다리는 세드릭의 눈이 전 에 없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했는데, 설 마 이런 이야기였을 줄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

도 안 되는 것으로 사과하고 긴장하 며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좀 귀여 운 것도 같았다.

“제 담을 너무 얕잡아 보시네요. 고작 이런 일로 제가 겁을 집어먹을 까 봐요?”

세드릭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한숨 쉬며 코를 살며시 쥐었다.

“몸이 떨리는 건 냄새 때문인 것 같아요. 피비린내가 너무 심해서 역 할 정도네요.”

!”

세드릭이 얼른 대답했다.

“당장 나갑시다.”

“이제야 그 말을 하시네요. 좋아요, 어서 나가요. ……잠깐, 세드릭? 뭐 하는- 으앗!”

“실례하겠습니다.”

세드릭이 그대로 나를 안아 올렸 다.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의 어깨 를 두들겼다.

“내려주세요! 저 발 멀쩡해요!”

“레이디께 이런 피바다 위를 걷게 할 순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피바다면서……소

나는 폭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이 세드릭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자기도 피투성이면서.”

“갈아입을까요?”

“됐어요.”

나는 세드릭의 옷깃에 코를 묻었 다.

비록 혈향이 배어있긴 해도, 세드 릭의 냄새가 가득 담겨 있는 지금이 좋았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과연 엘리트 중 의 엘리트였다.

우리가 피투성이 방을 나왔을 땐, 추적 마법사들이 이미 길드 마스터 의 발자국을 추적해놓은 뒤였다.

“방금 전까지 이곳 주변을 얼쩡거 렸던 것 같습니다. 무슨 배짱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추적 마법사 한 명이 미간을 좁히 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거죠.”

그놈의 계획은 뻔했다.

나를 공격해서 세드릭의 광증을 재 촉한다. 그 뒤 그가 이성을 잃고 날

뛰며 동료들을 모두 몰살하길 기다 린다.

마지막으로 지쳐 쓰러진 세드릭을 손쉽게 주워간다.

뭐 그런 쓰레기 같은 계획이었겠 지.

그 자식은 두 가지 변수를 예상하 지 못했다.

첫째, 세드릭이 선물한 아티팩트.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나는 집 몇 채 를 목에 걸고 다니는 상태일 거다.

둘째, 나 아리엘 윈스턴의 철저한 준비성.

상대는 다름 아닌 칸의 길드 마스

터다. 세드릭의 광증을 이용하리란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내 가 방은 아낙시아 향과 여러 진정제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효과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다행히 진정제는 효과가 탁월했다. 아낙시아 향과 달리 자주 사용하면 면역이 되겠지만, 이런 비상사태 때 한 번 사용하기엔 더없이 훌륭했다.

아무튼, 이런 변수들을 길드 마스 터는 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 는 오만하게 손을 놓고 있다가 꼬리 를 밟힌 거다.

“그렇군요. 아리엘 님의 말씀이 과 연 맞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 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다 들 지나치게 귀담아듣고 있잖아?’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좀 어색했 다.

그러고 보면 내가 세드릭의 품에 안겨 방을 나선 순간부터, 우릴 목

격한 사람들은 묘한 눈길로 나를 바 라보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자면, 존경 같은 것이 느 껴진다고 할까.

특히 나를 치료해 주었던 앳된 얼 굴의 마법사는 거의 몽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에 심한 감동 을 받은 듯했다.

“놈은 지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펜듈럼처럼 생긴 마도구를 주시하 던 마법사 한 명이 말했다.

“내려가다 보면 막다른 곳에서 그 놈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움직이지.”

세드릭이 짧게 말했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잡 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와 세드릭 은 그 뒤를 따랐다.

“마수는 더 이상 없겠지요?”

“네. 아까 죽은 마수가 최후의 무 기였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드 릭이 막아주어 망정이지 정말 무시 무시한 놈이었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쭈뼛 설 만큼.

그런 게 두 마리나 있었으면 길드 마스터는 아마 진작 근처 도시 하나 정돈 먹었을 거다.

그렇다는 건, 이제 남은 적은 정말 그 자식뿐이란 이야기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지식욕에 미친 사이코패스.

나는 주먹을 부서지라 쥐곤 걸음을 옮겼다.

몇 분간 전진하던 우리는 곧 어떤 소리를 들었다.

부글부글, 뭔가가 끓는 듯한 소리. 플라스틱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욕설 소리도.

“젠장, 빨리 되란 말이야. 빨리…… 빨리 I”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저건 주구 장창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대던 그 목소리였다.

나는 이를 부득 갈고 발을 뗐다. 앞장서있던 기사들이 발로 문을 걷 어 찼다.

잠금쇠가 떨어져 나가며 문이 시끄 럽게 열렸다.

“……제기랄!”

남자 한 명이 문을 돌아보며 욕설 을 뱉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사람은

분명, 그 자였다.

건국 무도회 중, 독향을 운운하며 내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

“세드릭! 저 사람……!”

“네. 구면이군요.”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를 뱉으며 검 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이 양옆으로 물러나 세드릭을 위한 길을 터주었 다.

길드 마스터가 뒷걸음질 치며 입꼬 리를 끌어올렸다.

“오랜만이네, 세드릭. 아버지의 실 험실에서 봤을 땐 우리 둘 다 어렸 을 때였지?”

세드릭은 대답 대신 검끝을 남자에 게 겨눴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는 주제에 잘도 재잘재잘 입을 놀렸다.

“넌 아버지의 첫 성공작이었지. 실 험이 성공했던 날 아버지가 뛸 듯이 기뻐하던 게 아직도 생생해! 아버지 는 자식인 나보다 너를 수백 배는 귀하게 여겼다고. 네 실험관에만 달

라붙어서, 온종일 네 데이터만 들여 다보면서……,”

남자가 히힉, 웃었다.

“그까짓 괴물 피 좀 섞인 게 뭐라 고! 강력해봤자 결국은 쓰다 버릴 괴물인데 말이야. 넌 아버지의 성공 작이지만, 인간으로선 실패작이야. 그렇잖아?”

“누가 마수의 피가 섞인 널 인간으 로 쳐주겠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그래. 몰라서 널 공작 전하라며 칭

송하는 거야! 곧 모두들 알게 만들 어 줄게. 네가 얼마나 징그러운 괴 물이고, 이성 없는 살인마인지……-”

“전하! 나불대는 입부터 닥치게 만 들까요? 저 금수 같은 자가 감히 전하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제 주군을 욕하는 발언에 기사 하 나가 울컥해서 외쳤다.

“됐다.”

세드릭은 동요 없는 얼굴로 남자에 게 다가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자가 뒷걸음질 쳤다.

“하하. 성격 한 번 급하네, 괴물 새끼가.”

세드릭이 내뿜는 살기에 남자의 얼 굴이 새하얘졌다. 그런 주제에 남자 는 느긋하게 비아냥거렸다.

“네 몸에 있는 괴물 피, 빼고 싶지 않아? 아버지는 이십 년 전에 죽어 버렸으니까 이제 그게 가능한 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세드릭 의 몸에서 마수의 피만 제거하는 게 가능하단 말이야?

남자가 허풍을 떠는 것일 확률도 높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 미 몸속에서 융합된 마수의 피를 감 쪽같이 제거한다는 건 믿기 힘든 이 야기 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 가능하다 면……/

세드릭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강렬한 망설임이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세드릭의 검은 곧게 남자의 목덜미를 향했다.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로드 리제로.”

남자가 어깨를 움찔 굳혔다. 로드 리제로. 그게 남자의 본명인 모양이 었다.

“나는 내 잡종 피에 별 유감이 없 어.”

“무슨……/

“부작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반 대로 얻은 힘 역시 확실하니까. 그 힘 덕분에……/’

세드릭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날에 반사된 빛이 번쩍였다.

“이렇게 지금, 너를 쥐새끼처럼 도 살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잠깐!”

로드가 황급히 외쳤다.

“넌 괜찮을지 몰라도, 네 여자는?”

세드릭이 우뚝 검을 멈췄다.

틈을 놓치지 않고 로드가 빠르게 지껄였다.

“내가 얼마 전 이상한 정보를 입수 했거든? 저기 뒤에 서 있는 네 여 자, 아리엘 윈스턴. 저 여자가 과거 에 묘한 소리를 지껄이고 다녔다더 군!”

로드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리엘 양! 네가 말했잖아. 너 역 시 이십 년 전 우리 아버지의 실험 체였다지?”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해 홱 돌아 갔다.

‘응?’

나는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자리에 ‘아리엘’이 라는 이름을 가진 건 나 하나뿐이었 다.

난 스스로를 가리키곤 물었다.

“……나? 내가 뭐였다고?”

“실험체 말이다! 너 역시 살아남은 실험체 중 하나였다고, 네 입으로 떠벌린 적이 있다며!”

로드가 당당히 외쳤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로드를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웬, 자다가 봉창 두드 리는 소리지?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향한 그의 눈은 애처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로드의 황당한 이 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놀란 기색도 아니었 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 럼.

그 눈빛에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 어 졌다.

‘아니, 지금 세드릭까지 믿고 있는 거야? 저 황당한 소리를?’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것까지 로드의 허풍인 걸까. 아

니, 저 당당한 표정을 보아 아무래 도 그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게 헛소리라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리엘 양, 내가 널 낫게 해줄 수 있어.”

로드가 뱀처럼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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