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호 호
눈을 뜬 나는 코부터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지?’
지독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혼미했 다.
“저, 정신이 드십니까, 아리엘 님?”
앳되게 생긴 마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 것…… 같아요.”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피비린내에 코가 마비될 것 같다는 점만 빼면 몸은 멀쩡했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왜 정신 을 잃었던 거지?’
생각해보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 다.
“세드릭. 세드릭은요?”
“저, 전하께서는 저쪽에……,”
나는 마법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 개를 돌렸다.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 다.
“세드릭?”
참혹한 피바다 속에서 세드릭이 무 릎을 꿇고 있었다.
몹시 괴로운 듯, 가슴께를 움켜쥔 채로.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나자 머리가 어지럼증을 호소했 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법사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가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요.”
“아리엘 님……
“놓으라니까!”
마법사를 밀치고 세드릭에게로 달 려가는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 다.
[어라, 깼나 보네? 생각보다 일찍 정신 차렸잖아?]
목소리가 뭐라고 종알거리든 나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저 세드릭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세드릭!”
나는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세드릭 의 양어깨를 쥐었다. 초점 나간 붉 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괴로운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세드 릭은 광증에 잡아먹힌 상태가 분명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짐 작도 되지 않았다.
“세드릭, 정신 차려요.”
나는 간절히 속삭였다. 일단은 세 드릭이 이성을 차리게 만들어야 했
다.
[이미 늦었어, 아리엘 양. 저 꼴 안 보여? 너도 못 알아보잖아.]
이럴 때를 대비해 가지고 온 물건 들이 있었다.
나는 황급히 품속을 뒤졌다. 일단 아낙시아 향수병이 손에 잡혔다.
[원래는 수도 한복판 광장에서 날 뛰게 할 계획이었지만…… 그때 아 리엘 양이 망쳐준 덕분에 이렇게 좋 은 세컨드 플랜이 생겼네? 이런 곳
에서 폭주해서 제 부하들을 제 손으 로 다 죽이게 하는 것도 너무 재밌 을 것 같아!]
향수병을 여는 손길이 자꾸만 헛돌 았다. 내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늦게 깨어난 건 지도 모른다.
세드릭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 지 못할지도 몰랐다.
[근데 아리엘 양도 슬슬 도망치지 그래? 걘 이제 가망 없어. 너도 죽 이려 들걸?]
제발…… 제발.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향수병을 열 었다.
[지금 밖으로 나오면 내가 마중 나 갈게. 아리엘 양은 이런 데서 죽기 엔 아까운 인재니까!]
목소리가 계속해서 지껄였다.
여기서 나가면, 기필코 저 목소리 의 주인을 죽여버릴 것이다.
그렇게 맹세할 때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뒤통수를 끌어 당겼다.
‘ 어‘?’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세드릭이 내 목에 고개를 묻었다.
“세드릭?”
혹시 정신을 차린 걸까?
가냘픈 희망이 피어올랐다.
[아리엘 양!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나도 못 구해줄…… 어, 어라?]
목소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단 호히 정신을 차단했다. 그제야 머릿 속이 고요해졌다.
그때 세드릭의 또 다른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품속에 완전히 갇혀 버리고 말았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다는 점은 긍 정적인데……/
일단은 세드릭의 상태부터 확인하 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세드릭을 달래도 그 는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오히려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내 어깨와, 등, 팔을 더듬거렸다.
마치 내 모든 것이 그대로 그 자 리에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 다.
‘나를 걱정한…… 건가?’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 마지
막으로 본 세드릭의 모습은, 내 이 름을 부르며 절망하는 얼굴이었다.
이성이 흐릿한 와중에도 내가 무사 한지 확인하려는 건 참 고마운 일이 었다.
하지만 손길이 어째, 갈수록 좀 집 요해지는데오
내 목에 고개를 묻고 갈급히 호흡 하던 세드릭이 나를 더 깊이 끌어안 았다.
‘수, 숨 막혀. 게다가 다들 보고 있 잖아!’
이대로라면 세드릭은 정신을 차리 긴커녕 이 피범벅 된 바닥으로 나를 눕힐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강경책을 쓰기로 했다.
젖먹던 힘까지 내서 세드릭을 떨어 뜨린 나는, 그의 두 뺨을 쥐고 외쳤 다.
“세드릭 에반스!”
내 귀가 다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었다.
그제야 세드릭의 눈에, 아주 조금 씩 초점이 돌아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드릭 의 어깨를 탈탈 흔들었다.
“정신 차려야 해요!”
시간이 지나서 상태가 더 악화되 면, 세드릭은 영영 이성을 차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세드릭 이 어지러운지 이마를 찌푸렸다.
나는 다시 세드릭의 뺨을 붙잡곤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저 아 리엘이잖아요, 아리엘 윈스턴! 제 이름이 뭐라고요?”
세드릭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 았다. 얼른 그가 다시 낮고 부드러 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싶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내 이름을 입에 담는 대신, 다시 괴롭게 숨을 토했 다.
“세드릭
카
아직 광증이 덜 가신 게 분명했다.
나는 더듬더듬 내 품속을 뒤졌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마탑제 특효 진정제가 있었다. 원작에서 세드릭 이 고통이 심할 때면 한 번씩 섭취 하던 알약이었다.
‘이걸 먹으면 고통은 조금 가실 거 야.’
“세드릭, 잠깐 입 벌려 봐요. 이걸 먹어야 해요.”
그러나 세드릭은 대답 대신 다시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내가 진정제 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 되겠다. 나는 입술을 한 번 깨 물곤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전하는 제가 책임지고 보살필게 요. 여러분들은 칸의 마스터를 추적 해주세요! 아직 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해요!”
분명 방금 전 목소리는, 날 마중 나오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헛소리
를 했었다.
게다가 이곳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는 듯했다. 여러 정황상 여 기서 멀리 달아나지는 않은 게 틀림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리엘 님!”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조를 나눠 사방 으로 흩어졌다.
나는 아직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 을 쳐다보고 있는 에른을 안심시켰 다.
“에른 경께서도 걱정하지 말고 추 적에 전념해 주세요. 전하는 제가 간호할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반드시 성과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에른이 뒤 돌아 성큼성큼 멀어졌다.
드디어 단둘만 남자 나는 세드릭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입에선 고통에 찬 헐 떡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드릭이 응급 약이라도 찾듯 다시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나는 얼른 그를 밀어냈다.
“잠시만요!”
세드릭의 눈에 옅은 원망이 배었 다. 계속 밀어내는 내가 야속하다는 것처럼.
나는 미리 꺼내 놓았던 진정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윽…… 써.’
이렇게 지독한 맛이라니.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세드 릭의 입술 위로 입술을 겹쳤다.
놀란 듯 세드릭의 어깨가 흠칫 굳 었다.
나를 끌어당기려는 손짓도 잠시 멈 칫했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입술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나는 조심조심 머금고 있던 알약을 전했 다.
세드릭의 입술은 녹아내릴 듯 뜨거 웠다. 비록 간호를 위한 행위이긴 하지만 얼굴에 따끈하게 열이 올랐 다.
‘괜히 의식하지 말자. 이건 흑심 없는 간호니까!’
나는 가까스로 나 자신을 다독이며 세드릭이 알약을 삼키게 했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꿀꺽 움직였 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강력한 진정제니까, 곧 괜찮아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떨어뜨린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 읏?”
입술이 순식간에 다시 포개졌다.
깜짝 놀란 나는 세드릭의 어깨를 밀어 보았으나, 아까와는 달리 이번 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드릭은 반동처럼 나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말캉한 것이 내 입속 깊숙이 파고 들었다.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감촉에 숨이 막혔다.
“자, 잠깐……!”
정말로 호흡이 곤란했다. 나는 세 드릭의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도 세드릭은 미 동조차 없었다. 손쉽게 밀치는 대로 밀려났던 아까와는 다른 사람 같았 다.
입술 안으로 침입해온 것이 마음껏 속을 헤집고 탐했다. 나는 속절없이 휘말려 간신히 얕은 신음만 뱉었다.
이런 키스는 맹세코 난생처음이었 다.
항상 정중하고 다정했던 이전의 입 맞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리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바 닥을 짚고 있던 무릎이 허물어졌다.
세드릭의 손이 단단히 나를 받쳐들 었다. 세드릭과 내 몸이 빈틈 하나 없이 맞물렸다.
이럴 때가 아닌데.
세드릭은 몰라도 나만큼은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하는데.
온몸으로 파고드는 열기에 자꾸만 정신이 흐릿해졌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이 소중한
것을 쥐듯 내 뺨을 감싸 안았다. 마 수의 피가 묻은 손일 테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살짝 눈을 떴다.
아무래도 내가, 세드릭에게 단단히 빠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핏방울 맺힌 속눈썹이 꺼려지기보 다는 애처롭게 느껴졌다.
피비린내로 가득할 공기는 세드릭 의 체향으로 향긋하기만 했다.
장소만 아니라면 모른 척 모든 걸 맡기고 싶을 정도로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
다.
이곳은 무도회장의 테라스도, 침실 도 아니었다. 적의 본거지였다.
황홀한 키스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 란 소리였다.
‘이건 아냐!’
각오를 다지고 세드릭의 어깨를 꾹 쥐었을 때였다.
입술과 입술이 살며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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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귓전에 내려앉는 내 이름에 나는 몸을 흠칫 굳혔다.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어? ……방금 제 이름 불렀죠? 세드릭. 정신 차린 거예요?”
나는 세드릭의 어깨를 붙잡고 필사 적으로 물었다.
붉은 눈동자는 분명히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초점 없이 흐릿하던 아까와는 달랐다.
‘돌아왔어.’
진정제가 즉효약이었던 게 분명했 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는 세드릭을 덥석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아픈 곳은 없어요? 다친 곳은?”
세드릭은 대답 대신 천천히 내 목 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세드
릭의 등을 토닥거렸다. 몹시 어색한 몸짓으로.
“괜…… 찮아요. 이제 괜찮아. 약효 가 돌았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예요. 아, 그렇지. 저도 무사하고요.”
내 주절주절 이어지는 위로를 세드 릭은 가만히 들었다. 여전히 호흡은 다소 불규칙했다.
잠시 뒤, 마침내 세드릭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리엘.”
“네. 여기 있어요.”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귓전에 내려 앉았다-
무서 웠습니다.”
세드릭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린 속살을 그대로 내비치는 듯한 속삭 임이 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걱정했죠. 죄송해요. 제가 조심성 없이 당했어요.”
“다시는……-”
세드릭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 습니다. 끔찍한……-”
아프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끝이 갈 라져 있었다. 역시 아직 몸이 완전 히 회복되진 않은 것 같았다.
“잠시만요. 치유 마법사를 불러올 게요!”
구급약품도 챙겨 오기는 했으나 치 유 마법사가 훨씬 더 유용할 것이 다.
등을 돌리려는 나를 세드릭이 붙잡 았다.
“가지 마세요.”
“네? 치유 마법사가 아마 아직 근 처에 있을 텐데……『
“떠나지 말아요. 아리엘.”
세드릭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다시는.”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 눈에는 집요하리만치 맹목적인 빛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