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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27화 (127/153)

〈128화〉

남자가 기사들을 떨치고 일어났다.

당황한 기사들이 다시 남자를 짓누 르려 했으나, 장성한 기사 다섯이서 도 남자 하나를 제압할 수 없었다.

남자의 손과 발이 괴수의 것처럼 거대하게 부풀었다. 곧 그가 땅을 박차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안 돼스

“막아!”

[오, 세파드 녀석 각오 좀 했나 본 데?]

남자는 달려드는 기사들을 장작개 비처럼 떨궈냈다. 도저히 인간의 힘 이라곤 볼 수 없었다.

단 일 초 만에 내 코앞까지 도착 한 남자가 거대한 발톱으로 나를 후 려 쳤다.

펑!

또 한 번 아티팩트가 주홍빛을 폭 발시 켰다.

그러나 이번엔 아티팩트가 완전히

힘을 흡수하지 못한 듯했다. 뒤로 튕기듯 밀려난 나는 따끔거리는 고 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가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 다.

아무래도 내상을 약간 입은 모양이 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버틸만했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지기는 했지 만, 저 발톱에 그대로 맞았으면 갈 기갈기 찢겼을 테니 그보단 훨씬 나 았다.

“아리엘 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경악한 얼굴 로 나를 부축했다.

손을 들어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 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내 옆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마수화된 신체는 다시 인간의 것으 로 돌아가 있었지만, 마치 불에 탄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남자는 미동 조차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쯧 혀를 찼다.

[이런. 아깝다. 쓸만한 놈이었는데. 으음, 그래도 목적은 달성한 것 같 지?]

그때 너무나 귀에 익은 외침이 들 렸다.

“아리엘!”

절박한 비명에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세드릭이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 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 드

괜찮다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좀 따끔하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 니라고.

하지만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졌다.

나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곧 모든 힘을 잃고 바닥으로 허물어졌 다.

의식이 깊은 물 속으로 잠겨 들었 다.

나는 더 이상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형체가 잡힌 생각조 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혹, 저 멀리서 아득한 소 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 다.

아리엘, 아리엘……오

애절한 목소리에 답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제발 정신 차려요, 아리엘.

듣는 내가 눈물이 날 만큼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머지않아 거짓말 처럼 뚝 끊겼다.

대신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뭔가를 꿰뚫는 소리.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절망적인 외침.

나는 정신을 차려 보려 애썼다.

어느새 의식은 조금 돌아왔으나,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지독

한 가위에 눌린 기분이었다.

‘깨어나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본 세드릭의 얼굴이 떠 올랐다.

세드릭이 그렇게 절망하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서 깨어나야 했다. 깨어나서, 나 는 괜찮다고 말해줘야 했다.

세드릭이 아직도 그 슬픈 표정을 하고 내 곁에서 마음 아파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조급함이 심장을 두들 겼다.

의식이 조금씩, 조금씩 수면 위로 헤엄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 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후각이었다.

쇠 비린내가 났다.

마치 피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은 것처럼 지독한, 피비린내였다.

치유 마법사 에키르는 간절히 주문 을 외웠다.

“제발, 제발

치유의 마법이 발하는 황금빛이 쓰 러진 소녀를 휘감았다.

에키르는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 다.

회랑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거대한 마수에게서 흘러 나온 피였다.

마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털로 뒤덮여 있던 발도, 등에서부 터 솟아있던 꼬리도 난자당해 있었

다.

마수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온 회랑 을 메울 것만 같았다.

‘끔찍해……/

에키르는 핏빛으로 가득 찬 광경에 서 애써 시선을 떨어뜨렸다.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어딜 보아도 핏자국이 즐비했다. 아비규환이라는 단어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전하!”

“제, 제발…… 이제 그만두십시 오!”

겁에 질린 외침이 들렸다.

피에 흠뻑 젖은 장검이 마수의 시 체를 푹 꿰뚫었다.

꿰뚫고, 꿰뚫고, 또 꿰뚫었다.

“저, 전하!”

“부디

!”

기사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세드릭은 아무런 소리도 듣

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드릭의 검이 이미 절명한 마수의 사체를 몇 번이고 난도질했다.

에키르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수의 피로 물 든 세드릭은 마치 악귀 같았다.

아무도 섣불리 세드릭에게 다가가 지 못했다.

에른만이 피 흘리는 복부를 붙잡고 세드릭에게로 힘겹게 걸어갔다.

“전하…… 이미 죽었습니다.”

검이 또 한 번 사체를 꿰뚫었다.

피와 살점이 튀었다.

“전하……!”

에른이 떨리는 손으로 세드릭의 어 깨를 잡았다.

세드릭의 고개가 에른 쪽으로 돌아 갔다.

시선을 마주친 에른이 숨을 집어삼 켰다.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 두려운 것을 본 듯 확장되어 있었다.

세드릭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에키르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늘 강인해 보이던 에른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세드릭이 한 발자국을 에른에게로 걸어갔다. 에른은 마치 못에 박히기 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에반스 전하?”

에른이 한 번 더 세드릭을 불렀다. 그러나 세드릭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모두 아무 소

리도 내지 못했다.

세드릭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거칠었다. 에키르는 흠칫 몸을 굳혔 다. 저 숨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기보 다는, 마치……오

‘마수…… 같아……/

아까 전 절명했던 마수가 어째서인 지 세드릭 위로 겹쳐 보였다.

에키르는 겁에 질린 시선을 다시 아리엘에게로 떨어뜨렸다.

전하께서 이상해지신 것은 이 영애 가 쓰러진 뒤부터였다.

아무리 불러도 아리엘이 눈을 뜨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 세드릭은 이름 부르기를 멈췄다.

무심코 세드릭을 쳐다보았던 에키 르는 붉게 달아오른 적안을 마주하 고 돌처럼 몸을 굳혔다.

크아아아!

그때 기사들이 간신히 막고 있던 마수가 달라붙은 기사들을 뿌리치고 세드릭에게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체가 세드릭과 아리엘을 덮치기 직전. 드디어 세드릭이 내팽 개쳤던 검을 집어 들었다.

끔찍하리만치 잔혹한 학살은 그 순

간부터 시작되었다.

세드릭은 그전까지 호각으로 다투 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 간에 마수를 밀어붙였다.

집채만 한 마수는 인간 하나에게 밀려 어쩔 줄을 몰랐다.

마수가 비인간적인 힘으로 세드릭 을 가격하면, 그보다 더 비인간적인 힘이 마수를 짓눌렀다.

에키르는 그렇게 끔찍하고 두렵던 마수가 처음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 을 보았다.

한 번 기운 승기는 되돌아오지 못 했다.

계속해서 밀리던 마수는 머지않아 목줄기를 꿰뚫려 즉사했다.

그러나 세드릭의 검은 마수가 절명 한 이후로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은 마치 증오밖에 모르는 존재 같았다.

‘전하께서 변하신 건, 아무리 생각 해도 아리엘 님이 의식을 잃은 뒤부 터야……/

그러니 아리엘을 깨어나게 하면 세 드릭이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에키르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

로 계속해서 치유의 주문을 읊었다.

아리엘은 분명 외상은 없었다. 내 상 역시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그 러니 마력을 쏟아부으면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에키르가 그렇게 빌며 간절히 주문 을 욀 때.

세드릭이 갑자기 무너지듯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반스 전하!”

에른이 놀라 세드릭을 부축하려 했 다.

“저, 전하!”

기사들 역시 경악에 차 외쳤다.

고개를 든 에키르는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피바다에 무릎 꿇은 세드릭이 제 심장께를 부여잡고 있었다.

“헉.”

세드릭이 거질게 숨을 토했다.

마치 굉장히 괴로운 고통을 견뎌내

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사들이 그제야 달려가 황급히 치유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는 듯했다.

‘저, 전하께 무슨 일이……?

에키르는 겁에 질려 울먹였다.

저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데도, 안 쓰러운 게 아니라 두려운 기분이 들 었다.

본능적인 감이 외치는 공포였다.

그때 힘없는 손길이 에키르의 팔을 스쳤다.

에키르는 깜짝 놀라 아래를 바라보 았다.

그토록 바랐던 청록색 눈동자가 에 키르를 향하고 있었다.

“저, 정신이 드십니까, 아리엘 님?”

에키르는 황급히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아요.”

뭔가를 떠올려내려는 듯 아리엘이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곧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세드릭. 세드릭은요?”

“저, 전하께서는 저쪽에……/

아리엘이 에키르가 가리킨 방향으 로 고개를 돌렸다.

청록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커졌다.

“세드릭?”

아리엘이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

다. 에키르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 다.

“가시면 안 됩니다!”

왜 자신이 아리엘을 가로막는 건지 에키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에키르는 지금의 세드릭이 위 험하다는 것만큼은 알 것 같았다. 여태껏 신처럼 든든한 아군이었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마수보다도 두 려웠다.

“이거 놔요.”

“아리엘 님……,”

“놓으라니까!”

아리엘이 단호히 에키르를 내쳤다.

예상하지 못한 힘에 에키르는 허무 하게 밀려났다.

아리엘은 다시금 붙잡을 틈도 없이 세드릭에게로 달려갔다.

방금 막 깨어난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기사와 마법사들 이 그녀를 만류하려 했으나 소용없 었다.

“세드릭!”

순식간에 세드릭에게 도달한 아리 엘이 덥석 그의 양어깨를 쥐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헉- 숨을 삼켰다.

“세드릭, 정신 차려요.”

경악 속에서 아리엘이 간절히 세드 릭을 불렀다.

세드릭의 고개가 조금 위를 향했 다. 새빨간 눈에는 초점이 희미했다.

세드릭이 낮게 목울대를 울렸다. 짐승의 것처럼 섬칫한 소리. 에키르 는 포식자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딱

딱히 몸을 굳혔다.

그러나 아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품 속을 뒤졌다.

“세드릭. 여기 아낙시아 향을 가져 왔어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제발 조금만 진정해요.”

아리엘이 황급히 향수병을 열려 했 다. 그러나 너무 성급한 탓인지 손 길이 자꾸만 빗나갔다.

아리엘이 입술을 깨물며 향수병과 씨름할 때였다.

거친 손길이 아리엘의 뒤통수를 감 싸안았다.

‘잡아먹힌다.’

에키르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세드릭이 아리엘을 그대로 집 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잠시 뒤, 에키르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세드릭은 아리엘의 목덜미에 이를 박는 대신 고개를 묻었다.

“……세드릭?”

아리엘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은 대답 없이 고개를 더 깊 숙이 묻었다. 다른 손이 아리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리엘이 놓친 향수병이 바닥에 나 뒹굴었다.

아리엘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 ……괜찮은 거예요?”

세드릭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 역시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키르를 포함한 회랑 안의 모두는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세드 릭이 아까와는 다르다는 것을.

“저기, 향수병을 떨어뜨렸는데…… 음, 주워야 하니까 잠깐만 놔 줄래 요? 저기요, 전하? 제 말 들리세 요‘?”

세드릭은 대답 대신 아리엘을 더 꽉 끌어안았다. 아리엘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으윽, 전하, 잠시만저거 주워야 한

다니까요?”

잠시 뒤, 포기한 아리엘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세드릭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그…… 그래요. 괜찮아요. 제가 이 런 비상시를 대비해서 이런저런 준 비를 다 해 왔거든요? 그러니까 걱 정하지 말고, 일단 좀 놓아 보세요, 네? 전하.”

에키르는 멍하니 둘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폭발하기 전의 폭탄처럼 위태로웠 던 세드릭이 눈에 띄게 진정되어가 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이렇게 피비 린내 나는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운명의 한 쌍이라는 건 정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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