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근데 정말 이대로 레티아나랑 헤 어져도 되는 거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첫만남이라 기엔 지나치게 담백했다. 통성명을 하기는커녕……으
‘눈 한 번 안 마주쳤던 것 같지 않
아?,
어쩌면 어두워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 지나치게 불빛이 약하기는 했 지.
‘아무튼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레티아나와 드디어 만나게 된 건 나름대로 반가웠으나, 당장은 더 급 한 일이 있었다.
아직 마지막 층에 누군가 남아 있
는 것 같습니다, 전하.”
마법사가 숨죽여 세드릭에게 보고 했다.
“사람인지, 짐승인지는 모르겠습니 다.”
‘설마 또 키메라가 있는 건가.’
나는 불안한 눈으로 흘긋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또 한 번 위 험에 처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도 뭔가가 더 남아 있을 것 같긴 해.’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순조로웠지만, 마지막 고 비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예 감.
‘내 기우라면 좋겠는데.’
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원작을 읽은 나도 모른다. 작가는 칸과의 결전 부분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
었다.
‘새삼 원망스럽네.’
그때 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 다들 진짜로 여기까지 내려 왔네.]
길드 마스터의 목소리였다.
또 텔레파시를 건 건가? 나는 홱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목소리를 들은 게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모두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쥐새끼 같은 놈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지하에 생매장해버리고 싶지 만…… 지금 그렇게 강력한 마법사 가 수중에 없어서 아쉽다.]
목소리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 맛을 다셨다.
세드릭이 말없이 검자루에 손을 올 렸다. 마법사들이 혼란스레 중얼거 렸다.
“증폭 마법으로 목소리를 키운 건 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 어지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근데 너희 말이야, 혹시 마물이랑 합성한 키메라 본 적 있어?]
“네놈이 통로에 풀어 놓았던 키메 라 말인가! 생명을 갖고 놀다니…… 잔악한 놈!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가!”
마법사 한 명이 분기탱천해서 외쳤 다. 목소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법사가 신을 운운하니까 이거 또 재밌네. 너희는 불경하게도 신의 뜻을 이리저리 수식으로 풀어헤치는 게 일이잖아. 뭐, 아무튼, 아까 그건 키메라라기엔 부족해. 임팩트가 없 다고 할까.]
“무슨 헛소리냐!”
[그냥 짐승들을 이리저리 기워 붙 인 쓰레기에 불과하지. 마수의 피는 아주 조금밖에 안 들어갔다구. 그러 니까 진짜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괴물’이라기엔 좀 부족하다는 거야.]
“저, 저 천벌 받을……!”
[왜 화만 내? 마법사들은 전부 지 식욕이 강한 족속들 아니었던가? 궁 금하지 않아? 그 옛날 대륙에서 사 라졌다는 마물과 순수한 인간을 섞 어 놓으면 어떻게 될지』
나는 부서져라 주먹을 쥐었다.
목소리는 역겨우리만치 뻔뻔했다. 당장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마법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 다.
“궤변만 늘어놓는구나!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저런. 마법사 주제에 상상력이 부 족하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지금 부터 구경하게 해 줄게.]
“무슨……-”
마법사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 다.
콰광!
굉음이 일었다. 세드릭이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싸 안았다.
“ 0 (가|”
“벽이 뚫렸다!”
병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간신히 눈을 뜬 나는, 세드릭의 팔 너머로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여태까지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벽 이 폭발해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뒤로, 차마 형언하기 힘 든 생김새의 무언가가 달려들고 있 었다.
“물러나라, 다들!”
그렇게 외친 세드릭이 이를 악물곤 검을 빼들었다. 세드릭의 왼팔이 나
를 에른 쪽으로 밀쳐냈다.
“저, 전하!”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아니. 피하기엔 늦었다.
네발로 기는 마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쇄도해 왔다. 단 한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세드릭의 코앞까지 달려든 마수가 발톱을 휘둘렀다.
윽!”
세드릭이 재빨리 검을 들어 발톱을 막아냈으나, 마수의 힘이 너무 강력 했다.
일 미터 정도 뒤로 밀려난 세드릭 이 막다른 벽에 등을 부딪쳤다.
“세드릭!”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갔 다.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에른이 억지로 나를 들어 옮겼다. 앞을 향해 뻗은 내 팔이 의미 없이 허공만 긁었다.
마수가 두터운 두 개의 앞발로 세 드릭의 검을 짓눌렀다. 힘을 받아치 는 세드릭의 팔에 선명히 핏줄이 돋 았다.
빈틈 하나 없는 대치상태에 장내가 공포에 잠겼다.
“움직, 이지…… 마라.”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기사들 에게 세드릭이 이를 악물곤 외쳤다.
“전하! 하지만
카
키에에엑!
그때 세드릭이 마수의 몸뚱이를 발 로 걷어찼다. 집채만 한 몸집이 뒤 로 밀려나며 바닥에 짙은 고랑을 냈 다.
밀려난 괴수가 조명 아래에서 완전 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괴한 생김새.’
그렇게밖에 묘사할 말이 없었다.
밤하늘보다도 어두운 마수의 새까 만 털은, 마치 허공에 구멍이 뚫린 듯 이질적으로 보였다.
머리라는 것이 존재하긴 했으나, 이목구비가 제멋대로 위치해 있었 다. 총 네 개의 눈이 관자놀이, 이 마, 콧대와 뺨에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이 세계의 법칙에 위배되는 생물. 감줄 길 없는 위화감에 몸이 돌처럼 굳었다.
마수가 입을 쩌적 벌렸다. 날카롭 게 돋아난 수백 개의 이빨 사이로 녹색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주 문을 외웠다. 마력으로 감싸인 투사 체들이 마수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그러나 마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 다.
“저게 정말 마물이라면, 이 세계의 마법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에른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몇 개의 주문 을 더 내쏘았지만, 번번이 같은 결 과를 낳을 뿐이었다.
마수는 마법사들은 아랑곳하지 않
고 다시 세드릭에게로 기어갔다. 세 드릭이 마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크르르륵!
세드릭의 검이 마수의 앞발을 관통 했다.
마수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내질 렀다. 그러나 검에 꿰뚫린 앞발은 멈추지 않고 세드릭을 강타했다.
뒤늦게 피했으나 세드릭의 팔에 긴 혈흔이 남았다. 세드릭이 서 있는 바닥으로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세드릭!”
“여기 계십시오, 아가씨.”
에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 에 른이 그대로 마수를 베어내려 했다.
그때, 마수의 등에서 채찍 같은 것 이 돋아나 에른을 후려쳤다.
밀려난 에른이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에른 님!”
기사들이 에른을 부축하러 달려갔 다. 그러나 에른은 힘겹게 손을 들 어 기사들을 막았다.
“너희들이 맞설 상대가 아니니, 헉…… 물러나라.”
마수가 기다란 채찍을 다시 몸속으 로 집어넣으려 했다. 세드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품에서 단검을 꺼낸 세드릭이 거침 없이 그것을 날렸다. 칼날이 마수의 코에 박혀 있던 눈알을 정확히 파고 들었다.
캬아아아악!
마수가 처음으로 몸을 비틀며 괴로 워했다.
그때 목소리가 또 귓가를 파고들었 다.
[안녕, 아리엘 양. 재밌게 관전하고 있어? 하긴, 당연히 재밌겠지. 나도 보고 싶다. 괴물 둘이 붙은 광경이 라니!]
나는 부득 이를 갈았다.
“이 자식……!”
[걔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애완동 물이야. 마물과 잘 섞어 놓은 진짜 키메라지. 역시 진짜답게 제법 힘을 쓰고 있네. 잘 됐다. 그래봤자 저 괴물한텐 안 되겠지만』
목소리는 산뜻하게 마수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 로 물었다.
“무슨 꿍꿍이지?”
[있어, 그런 게. 곧 알게 될 거야. 그나저나 아리엘 양, 미안한데 잠깐 이 좀 꽉 악물래?]
오
뭐?”
그때, 내 근처에 위치해 있던 벽 한 군데가 꾸물꾸물 형체를 바꿨다.
점토를 주무르듯 이리저리 변형하 던 벽이 빠르게 사람의 틀을 갖췄 다. 벽은 순식간에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남자가 단검을 치켜들고 내게 달려 들었다.
“아리엘 님!”
기사들이 뒤늦게 내게 달려왔다.
그러나 남자가 몇 배는 더 빨랐다. 단검이 내 어깨에 곧장 박혀들었다.
아니, 박힌다고 생각했었다.
퍼
순간 눈부신 주홍빛이 폭발하듯 시 야를 메웠다.
달려들던 남자가 뭔가에 떠밀린 듯 반대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그 반동으로 나 역시 밀려나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좀 심하게 부딪쳤는지 눈앞이 어지 러웠다. 그러나 단검에 꿰뚫리는 것 보다는 천 배 나았다.
‘아티팩트
9
나는 힘없는 손으로 목걸이를 어루 만졌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주홍 빛이 다시 목걸이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갔다.
[칫. 목에 걸고 있는 그건 또 뭐 야?]
목소리가 혀를 찼다.
[하여간 멍청한 비서 놈. 일을 제 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적이 형체 변환 마법으로 숨어 있 었다!”
“아리엘 님을 모셔! 치료해드려야 한다!”
마법사들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빠르게 달려온 마법사들이 치유 주 문을 외는 게 보였다.
그런데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방금 머리를 세게 부딪치 긴 한 것 같았다.
[야, 가스파드! 일 제대로 해! 아직 네 가족들은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굳이 상기해줘야 해?!]
목소리가 이번엔 텔레파시가 아니 라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남자가 흠칫 어깨를 떨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 다.
남자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남자의 손과 발이 이상한 형태 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륵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