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비스킷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해치 운 레티아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후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는 건 꼴사 나운 일이야.
뒤를 돌아본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분이랑 대화 중이었어요. 많이 배가 고프셨나 봐요.”
“그렇군요.”
세드릭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 덕였다.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지하를 나 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환자들도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겠 죠.”
“……다행이네요.”
세드릭이 내 곁으로 더 바짝 다가 왔다.
잠시 후,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 다.
“많이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아뇨? 딱히 그렇지 않은데 요.”
정곡을 찔린 나는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세드릭은 내가 긴장한 이유 를 사실과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곧 그자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목소리엔 묘한 확신이 어려 있 었다.
“본거지에 다다르면, 그자의 흔적 이 남은 물건들을 찾을 수 있겠죠. 함께 온 추적 마법사들이라면 그걸 로 그자의 발자국을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겁 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은 나와 묘하 게 거리가 가까웠다.
아니, 대놓고 가까웠다.
세드릭이 내 머리칼 끝부분을 조심 스레 쥐었다. 그가 머리칼 위로 고 개를 묻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왤까요. 레이디의 체향만 맡으면 안정이 되는 게.”
세드릭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건 참 고맙고 낭만적인 말이긴 했으나, 지금은 때와 장소가 좋지 못했다.
“사,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요.”
“비행선에선 그런 걸 신경 쓰셨습 니까?”
세드릭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
“뭐가 어떻게 다른 겁니까?”
나는 흘긋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 사와 마법사들이 의도적으로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게 보였다.
나는 슬쩍 레티아나 쪽도 쳐다보았 다. 레티아나는 다행히 손바닥에 묻 은 부스러기를 핥아먹느라 이쪽엔 관심이 없었다.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아무튼 달라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을 밀어 냈다. 세드릭이 마지못해 밀려났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다 시 출발해 볼까요.”
“ 지금요?”
“예. 환자들 응급처치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사들이 열심히 일을 했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있었다.
“테오!”
갑자기 레티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반대편 철창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레티아나 누님.”
소년이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 오려 했다. 레티아나가 화들짝 놀라 남자아이 곁으로 달려갔다.
‘테오, 라고?’
나는 둥그레진 눈으로 소년을 바라 보았다.
청년에 가깝게 장성한 소년이 달려 온 레티아나를 맞았다.
다갈색 머리에 예쁜 청안. 테오라 는 이름, ‘레티아나 누님’이라는 호 칭.
나는 확신했다. 저 소년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었다.
‘테오 유브르.’
간단히 말하자면, 서브 남자주인공 이었지.
“어디를 그렇게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시는 겁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나는 해후 증인 레티아나와 테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냥…… 신기해서요.”
원작 속에서 테오는 레티아나에 대 한 집착이 상당했다. 이런 환경에서 둘이 함께 살아남은 거라면 그 집착 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사르 부족은 처음 보십니까?”
세드릭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테오는 사막 부족 중 하나인 메사르의 전사였다는 설정이 있었다. 저 매력적으로 그을린 다갈 색 피부와, 이마에 새겨진 문신이 그 증거 였다.
“네, 처음 봐요. 메사르 부족은 메 사르 사막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오기로 유명하잖아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여전히 테 오와 레티아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 은 채였다.
세상에. 레티아나 쳐다보는 저 눈 빛 좀 봐…… 잡아먹겠네, 잡아먹겠 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을 어린 녀 석에게서 벌써부터 집착의 새싹이 보였다.
감탄 어린 눈으로 테오를 구경하는 데 세드릭이 말했다.
“사막이 궁금하시다면 다음에 데려 가 드리겠습니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세드릭을 돌아 보았다.
테오와 레티아나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나지만, 저 말의 뜻은 알 것 같았다. 그만 쳐다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머쓱해져서 세드릭을 돌아보 았다.
“아니에요. 딱히 사막이 궁금하진 않아요. 그나저나 이제 움직여야 하 지 않나요?”
“전하, 이다음이 마지막 층인 듯합 니다!”
때마침 마법사 하나가 말했다.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돌 아보았다.
“가시죠, 레이디.”
환자들은 함께 내려가지 않고, 마 법사들이 임시로 만들어준 모포에 몸을 말고 있었다.
환자들을 뒤로 한 채 떠나려는데, 레티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시만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티아나의 눈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요정 같은 금안이 애처롭게 반짝였 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 을 알 수 있을까요?”
그래.
관계의 시작은 통성명부터지.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그는 멀뚱히 입을 다문 채 서 있기만 했 다.
못 들었나? 나는 세드릭의 옆구리 를 살짝 찔렀다.
“전하 성함이 궁금하대요.”
“예? 제 이름을요?”
세드릭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 보았다. 레티아나 역시 황급히 외쳤 다.
“아, 아뇨! 은인님 성함을 여쭌 거
예요!”
“은인님? ……저요?”
나를 가리키며 묻자, 레티아나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인이라니? 내가? 나는 당황해선 고개를 저었다.
“은인이라니, 당치 않아요. 전 여기 서 한 게 없는걸요.”
“하신 게 없다니. 그게 더 당치 않 으신 말씀입니다.”
세드릭이 끼어들어 반박했다. 레티
아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해액 캡슐을 건네주신 게 레이 디 아니십니까? 함정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도 그렇고요.”
“절 깨워주시고 물과 비스킷도 주 셨잖아요……! 저, 체온이 너무 낮 았어서, 그때 깨워주시지 않았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누가 원작 남주인공, 여주인공 아 니랄까 봐 합이 참 잘 맞았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쓰다듬으 며 입을 열었다. 은인이라는 말엔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이름 정 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이름은 아리엘 윈스턴이에요.”
“아리엘 윈스턴 님……,”
아리엘 윈스턴, 아리엘 윈스턴.
레티아나가 외우려는 듯 내 이름을 여러 번 속살거렸다.
몇 초 뒤 레티아나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기억할게요, 아리엘 님!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를?
나는 다시 한번 세드릭과 레티아나 를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정말 레티아나가 세드릭이 아닌 내 게 하고 있는 말이 맞는 건가?
얼떨떨했지만, 일단 레티아나는 확 실히 내 이름을 부르긴 했다.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그럼요. 만날 수 있겠죠.”
수도는 넓으니까……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쯤 만날 날이 올지도 모
르겠다.
‘음, 아니면 좀 더 복잡한 상황에 서 만나게 될지도……/
지금 나와 세드릭은 좀 미묘한 관 계에 있으니까.
그걸 알게 된 레티아나가 연적과 담판을 짓기 위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지저분한 상황을 만들고 싶 진 않아.’
난 구태여 억지를 써 가며 운명을 비틀 생각은 없었다. 그래 봤자 비 참해지는 건 나뿐일 테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레티아 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부디 무사하시길…… 도움 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고 얼른 건강해지기나 해요.”
“그, 그리고…… 제 이름은 레티아 나예요.”
레티아나가 수줍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래, 잘 알지.’
“그렇군요. 레티아나 양이라고 부 르면 될까요?”
“그래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꼭, 보답하러 찾아뵐게요, 무사하세요!”
나는 웃으며 레티아나에게 손을 흔 들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우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도 돕겠습니다.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 테오?’
다갈색 피부를 한 잘생긴 청년이
간절한 눈으로 나와 세드릭을 번갈
아가며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몸으로 뭘 돕겠다는 거지. 걸리적거릴 뿐이다.”
“기력은 조금 쇠했지만 걸리적거리 진 않을 겁니다. 검을 잡을 정도로
는 회복했습니다.”
“테오……!”
“누님, 괜찮습니다.”
레티아나에게 속삭인 테오가 다시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원수를 갚 고 싶습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 였다.
이런 취급을 당했으니, 테오 역시 당연히 복수하고 싶을 터였다.
게다가 메사르 부족은 아무리 다치 더라도 전투에서만큼은 최상급의 실 력을 발휘한다고 들었다.
테오는 묵묵히 세드릭의 대답을 기 다렸다. 자존심 강해 보이는 청년의 눈빛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그 간절함에 마음이 쓰인 나는 살 짝 세드릭에게 속삭였다.
“저분도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전 하.”
“어째서 입니까?”
“글쎄요. 척 봐도 강해 보이시는데, 전투에 도움이 되면 됐지 걸림돌이
될 것 같진 않지 않나요? 메사르 부족의 강함은 전하께서도 아시잖아 요.”
그러자 세드릭이 어째서인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으나 나는 그 희미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 다.
‘뭐지? 방금 말실수라도 했나?’
방금 했던 말을 돌이켜 보았지만 딱히 특별한 소릴 한 기억은 없었
다.
“……알겠습니다. 레이디의 뜻이 그렇다면.”
다행히 세드릭은 선선히 고개를 끄 덕였다.
테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퍼졌 다.
그제야 테오가 제 나이대의 소년으 로 보였다. 저게 원래 모습인 거겠 지.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져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테오 씨.”
나는 테오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테오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 였다.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게 감사 인사를 할 것까진 없는데.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대충 마주 인사를 했다.
병사들에게 합류한 테오는, 기사
한 명이 빌려준 단검을 들었다. 무 기를 들자 완연한 전사 태가 났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이젠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 었다.
나와 세드릭은 병사들을 이끌고 철 창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세드릭이 진지 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레이디.”
“ 네?”
“뜬금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메사르 부족장보다 제가 더 강합
니다.”
그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에반스 공작이 메사르 부족장과 일 대일로 겨뤄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 던 일화는 유명했으니까.
“그러시군요.”
“세 번 붙어서 세 번 모두 이긴 전 적이 있습니다.”
“네, 정말 대단하세요.”
난데없는 이야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세드릭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