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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24화 (124/153)

〈125 화〉

기사들이 황급히 철창 앞으로 다가 갔다. 마법사들이 철창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이 사람들, 살아 있습니다!”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기사들이 열심히 쓰러진 사람들을 흔들었지만,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

다. 아무래도 수면제 같은 것에 취 해 강제로 잠든 것 같았다.

“이렇게 앙상하다니……/’

“최소 몇 달간은 햇빛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갇힌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처 참했다. 앙상한 몸, 갈라진 입술. 모 두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수준이었 다.

“지하로 불을 질렀으면 정말 큰일 이 날 뻔했군요.”

마법사 하나가 죄책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이런 영양 상태라면 비행선을 타 도 수도까지 버틸 수 없을지도 모릅 니다.”

“마법사들은 치유를 시작해라.”

세드릭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일제 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치유 마법이 발하는 황금빛이 번쩍 였다.

나는 철창 사이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철창 안엔 내 예상보다도 많은 사 람들이 잡혀 있어서, 한 명 한 명 살펴보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남자는 넘기고, 머리 색이 짙 은 사람도 넘기고. 신중히 철창을 살피던 나는 어느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멈춰 선 철창 안에는, 하늘색 머리

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잠들 어 있었다.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푸석거릴 텐 데도 그 머리카락은 최상급 실타래 처럼 아름다웠다.

‘……찾았다.’

더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대 륙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빛 머 리칼을 가진 소녀는, 아마 한 명밖 엔 없을 테니까.

나는 철창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아 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 티아나.”

울림 좋은 이름이 입속을 굴러다녔 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입에 담아 본, 여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레티아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 지로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러나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으로 보아 목숨은 확 실히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레이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 다. 세드릭이 나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세드릭의 눈이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스쳤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 리를 냈다.

“아, 아뇨.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둘러보고 있었어요.”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며 철창에 몸 을 기댔다.

나는 긴장한 채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세드릭의 등과 레티아나 사이 에는 단 일 미터의 간격도 되지 않 았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가둬놨을 줄 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그렇죠. 저희가 조금이라 도 늦게 도착했으면,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든 사람들은 버티지 못했을지 도 몰라요.”

아니, 이미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 간 사람들 역시 많겠지.

착잡한 기분에 입맛이 썼다. 아까 전 내게 말을 걸었던 길드 마스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겠어.’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세드릭을 불렀다.

“전하, 잠시 이곳을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른, 레이디를 부탁하지.”

나를 에른에게 맡기고 세드릭이 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조그맣게 숨을 돌리곤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레티아나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 었다. 그러고 보니 철창 바닥이 얼 음장처럼 차가웠다.

“아가씨. 걱정되어서 그러십니까?”

내 눈빛을 읽었는지 에른이 넌지시 물었다.

“마법사에게 이곳부터 열어달라고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에른 경.”

곧 근처에 있던 마법사가 철창 문 을 열어주었다.

나는 긴장을 누르고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나는 조심스레 레티아나의 손을 들 어 올렸다. 손끝이 파랗게 얼어 있 었다.

“에른 경, 제가 망토 벗는 것 좀 도와주세요. 덮어줘야겠어요. ”

“입고 계십시오. 제가 망토를 벗겠 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에른이 망토를 벗 어 소녀 위로 둘러주었다. 나는 고 맙다고 속삭이곤, 천천히 레티아나 의 손을 주물렀다.

“차가워.”

얼마나 추웠으면. 나는 입술을 깨 물고 계속해서 레티아나의 손가락을 마사지했다. 기분 탓일까, 점점 혈색 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아는 소녀입니까, 아가씨?”

의아했는지 에른이 세드릭과 같은 질문을 또 한 번 던졌다. 나는 고개 를 내저었다.

“아뇨. 초면이에요.”

처음 보는 소녀인 건 맞았다. 하지 만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소녀를 내려 다보았다.

원작 속에서 레티아나는 이런 모습 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밝 고 건강한 캐릭터였으니까.

여주인공에게 비참한 과거가 있다 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원작이 시작되기 몇 년 전에 일어났던 과거에 불과했다.

활자 속에 서술된 등장인물의 비극

적인 과거를 상상하는 것과,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차원 이 달랐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레티아나의 거뭇한 눈 밑, 앙상한 쇄골을 바라보자 마음이 바늘에 찔 린 듯 아팠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레티아나의 손을 주물렀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티아나의 속눈썹이 한 차례 파르 르 떨렸다.

“정신이 들어요?”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 다.

그러자 레티아나가 속눈썹을 또 한 차례 나비의 날갯짓처럼 떨었다.

서서히, 소녀의 눈꺼풀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눈부 신 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티아나가 멍한 얼굴로 천천히 주 위를 둘러보다가, 곧 나를 발견했다.

‘……와아.’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레티아나보다도 멍한 표정을 지었 다.

‘ 예쁘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반짝반짝 빛나 는 금안은 아차했다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너무 어려!’

하긴, 지금은 원작 스토리가 시작 되기 몇 년 전인 시점이었다. 아마 레티아나는 갓 스무 살이 되었을 것 이다.

레티아나가 넋 놓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구, 세…… 콜록, 콜록!”

“ 괜찮아요?”

나는 황급히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레티아나가 떨리는 손 으로 손수건을 받아갔다.

“가, 감사합니…… 콜록!”

“에른 경, 물! 물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얼른 에른에게서 물을 받아 레티아나에게 건넸다. 레티아나가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엇, 천천히 마셔야 할 텐데

“콜록, 콜록!”

“그것 봐요, 사레들렸잖아요!”

나는 화들짝 놀라 레티아나의 등을 두드렸다. 다행히 머지않아 레티아 나가 잦아든 듯 입가를 훔쳤다.

“흐으, 감사합니다……,”

“뭘요. 물 더 줄까요?”

“이제 괜찮아요.”

레티아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 다. 아까 사레에 들렸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대가 많이 상 한 것 같았다.

예쁜 금안이 멍하니 나와 에른을 돌아보았다.

“두 분께서는, 새로 잡혀 오신 건 가요……?”

레티아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곤, 레티아

나 앞에서 비켜섰다.

“우린 여러분을 구하러 온 거예요. 보이죠? 저기 계신 기사님들과 마법 사님들.”

“아……/,

레티아나의 금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서히 커졌다.

“저흴 구하러 오셨다고요? 하, 하 지만 이곳은 탈출해봤자 주변에 나 쁜 놈들만 가득하다고…… 그래서 도망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했는

데……-”

“누가 그랬어요?”

“이곳의 주인이라는 사람이요.”

나는 분노에 찬 한숨을 뱉었다.

“이 주변엔 범죄자들밖에 없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부 저기 있는 기사님들이 잡아들이고 오는 길이랍 니다.”

“네? 정…… 말인가요?”

“네에. 저 기사님들이 엄청 강한 분들이거든요. 수도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이래요. 뿐만인가요, 저기 로

브 쓴 마법사님들 역시 마탑 소속 엘 리 트들이 거 든요.”

“구하러 온 거 맞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너무 놀란 것 같은데 진정 하시고요.”

하마터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것 같 았다. 내가 걱정스레 말하자, 레티아 나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가요?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 라고, 여기 잡혀온 이상 끝이라고

모두들 말했었는데

나는 대답 대신 레티아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우선은 이 아이를 안 심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많이 혼란스럽죠. 일단은 아무 생 각도 하지 말아요. 곧 전부 괜찮아 질 테니까, 내 말만 믿어요.”

나는 에른을 돌아보곤 속삭였다.

“혹시 간단히 먹을 게 있을까요?”

“전투식량이라면 가지고 있습니

다.”

“조금만 나눠주실 수 있나요?”

에른이 빠르게 내게 식량을 나눠주 었다. 꽤 먹음직스럽게 생긴 비스킷 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먹어요.”

“가, 감사합니다!”

레티아나가 황급히 감사 인사를 하 곤, 비스킷을 품속에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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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세요?”

레티아나가 굉장히 부끄러운 얼굴 로 대답했다.

“아, 그게…… 아까 물을 많이 먹 어서, 지금은 배가 그렇게까지 고프 지 않거든요. 아껴 놨다가 이따가 꺼내 먹으려고……,”

“아뇨, 비스킷이라면 얼마든지 줄 게요. 지금 먹어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제야 레티아나가 다시 비스킷을 꺼내 들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금 안이 순식간에 커졌다.

“엄청 맛있어요……!”

레티아나가 허겁지겁 비스킷을 깨 물어 먹기 시작했다.

“세상에. 또 목 막히겠다. 천천히 먹어요! 여기 물도 마시고요!”

나는 얼른 레티아나의 손에 물통을 쥐여주었다. 레티아나는 비스킷과

물을 번갈아가며 잘도 먹었다. 어찌 나 잘 먹는지 흐뭇한 기분이 들 정 도였다.

한참 레티아나가 먹는 모습을 구경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 을 걸었다.

“레이디. 아직 여기 계셨습니까?”

세드릭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덜컥 숨을 멈췄다. 세드릭의 발소리가 이리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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