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세드릭은 내가 내민 엄지손톱만한 물건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이게 뭡니까?”
“용해액이 든 캡슐이에요.”
“용해액, 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들은 듯 세드 릭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압축한 거라, 겉으론 조 그맣지만 깨서 뿌리면 양이 제법 될 거예요.”
몸 이곳저곳이 누덕누덕 기워진 키 메라라면, 접합부에 용해액이 들어 갔을 때 치명적일 것이다. 평범한 생물보다도 훨씬 더.
이 지하에 정확히 어떤 함정이나 괴물이 숨어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른 다.
하지만 여긴 다름 아닌 칸의 본거
지였다. 키메라 한둘 정도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용해액 캡슐은 그래서 챙긴 물건이 었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하신 겁니 까?”
내가 쥐여주는 대로 캡슐을 쥔 세 드릭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언제긴요? 어젯밤에 전하 한창 바
쁘실 때, 저도 이것저것 준비했죠.”
사실은 보름 전부터 마탑에 주문 제작을 넣었던 물건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검사도 마법사도 아닌, 전장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조향사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구태여 여기까지 쫓아왔 다는 건, 예사 준비를 하고 온 게 아니란 소리였다.
“ 전하.”
나는 용해액 캡슐을 쥔 세드릭의 손을 꼭 감쌌다.
“묵사발을 내 버리세요.”
세드릭은 이 와중에도 내 말이 우 스웠는지 픽 웃었다.
“알겠습니다. 안전한 곳에서 관전 하고 계십시오.”
기사들이 나를 호위하기 위해 내 앞으로 늘어섰다. 나는 기사들의 갑 옷 사이로 세드릭을 바라보며 꾹 입 술을 씹었다.
키이이잉!
그때 문 너머의 생물체가 괴성을
토했다.
귓전을 찢는 비명 소리에 몸이 빳 빳이 굳었다. 내 앞에서 호위 중인 기사들조차 괴이쩍은 소리에 바짝 긴장한 것 같았다.
세드릭은 더 지체하지 않고 성큼성 큼 움직여 문고리에 손을 댔다.
곧 끼이익, 녹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캬아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문 너머의 괴수가 세드릭에게로 달려들었다.
통로를 꽉 메울 만큼 몸집이 집채 만 한 괴수였다. 괴수가 세드릭을
짓누르려는 듯 두 앞발을 들었다.
세드릭은 검신을 뽑아 내리찍는 앞 발을 막았다.
키이잉!
검날과 발톱이 부딪히며 소름 끼치 는 소리가 났다.
캬오오오!
괴수가 울부짖으며 온몸의 비늘을 세웠다.
순간 눈을 찌르는 빛이 시야를 덮 쳤다. 나는 물론이고, 기사들마저 눈 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괴수는 온몸이 수정처럼 영롱한 비 늘로 덮여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빛깔이었다.
“저건 아르키오스……
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저 괴수의 비늘은 분명 아르키오스 의 것이었다. 향수병으로까지 만들 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괴수는, 축제 날 행진할 때 보았던 아르키오스와 달리 발이 총 여덟 개였다. 아르키오스에겐 없던 꼬리 역시 뱀처럼 길었다.
“키…… 키메라다.”
기사 한 명이 공포에 질려 속삭이 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맹수를 섞은 건지, 괴수에게선 본체였을 만한 원 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내 예상이 맞다면, 저 거대한 몸체엔 마물의 신체 조각 역시 섞여 있을 것이다.
일격을 가로막힌 괴수가 화가 난 듯 앞발 하나를 쾅쾅 내리찍었다. 세드릭은 뽑다 만 검신으로 공격을 버텨 냈다.
쿵, 쿵. 괴수가 앞발을 내리찍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났다.
주먹 쥔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아 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너 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자괴감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호위 중인 기 사들 역시 답답한 듯 어깨를 들썩였 다.
통로가 너무 좁은 탓에 기사들은 섣불리 전투에 끼어들지 못했다. 활 시위에 화살을 메긴 기사들이 있기 는 했으나, 세드릭과 괴수가 워낙 뒤엉켜 있는 탓에 정작 시위를 당기 진 못했다.
입을 쩍 벌린 괴수가 포효했다.
캬아아아아!
온몸의 소름이 쭈뼛 솟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였다. 멀리 떨 어져 있는 기사들마저 뻣뻣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세드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가 괴수의 쩍 벌어진 입 사이로 검신을 꽂아넣었다. 공격이 닿는 족족 튕겨 내던 비늘과 달리 이번에는 검이 푹 잘 들어갔다.
키에에엑!
괴수가 피를 뿜으며 울부짖었다. 새빨간 선혈이 후두둑, 세드릭의 얼 굴 위로 쏟아졌다.
세드릭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품에 손을 넣어 용해액 캡슐을 꺼냈다. 괴수의 벌어진 피부 사이로 던져넣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뒤편에서 채찍처럼 꼬 리가 날아들었다.
쿠구구!
철퇴처럼 가시 박힌 채찍이 땅을 갈아대며 쇄도했다.
세드릭은 간발의 차로 훌쩍 뛰어 꼬리를 피했다. 일 초 전 그가 서 있던 땅 위로 움푹 구덩이가 생겼 다.
제발
하
나는 작게 숨을 헐떡였다. 괴수가 공격하고 세드릭이 피할 때마다 피 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여덟 개의 발과 채찍 같은 꼬리가 쉴 새 없이 세드릭을 공격했다. 그 러나 그중 단 하나의 공격도 세드릭 을 해치진 못했다. 괴수는 점점 약 이 오르는 듯 크게 콧김을 내뿜었 다.
그르르르륵!
괴수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그 러자 처음으로 세드릭이 뒤를 돌아 보았다.
물러나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나를 데리 고 통로 저편으로 물러났다. 몇 초 뒤, 부글부글 목울대를 울리던 괴수 가 카악 무언가를 뱉어냈다.
“헉!”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괴수가 뱉은 보라색 점액질이 세드 릭의 몸을 덮쳤다. 세드릭 주변을 둘러싼 푸른 빛 결계가 요동쳤다.
“저, 전하께서 독에 당하셨다!”
“결계 마법조차 녹이는 맹독이 다……! 당장 전하를 모셔와야 해!”
기사들 사이에서 절망적인 목소리 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독’이라는 단어에 내 마음 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괜찮아요. 전하께선 괜찮으실 테 니 방해하지 말아요.”
나는 세드릭에게 달려가려는 마법 사를 붙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독은 세드릭을 해 칠 수 없었다. 만약 칸의 길드 마스 터가 이 괴수를 세드릭 때문에 만들 어낸 거라면, 쓸데없는 기능을 합성 한 것이다.
왜냐면, 세드릭에겐 어떤 독도 듣 지 않으니까. 그의 혈관 안에 흐르 는 마수의 피보다 강력한 독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전하께서 괜찮으실까 요?”
마법사가 동요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봐요. 멀쩡하시잖아요.”
마법사와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시 세드릭을 향했다.
그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검에 묻은 점액질을 털어냈다. 상당한 명검인지 검 역시 부식되지 않았다.
키에?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자, 괴수가
당황한 듯 비늘을 차르르 떨었다.
세드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품에 손을 넣은 세드릭이 다시 한 번 용해액 캡슐을 꺼냈다.
괴수를 향해 정확히 던져진 캡슐 은, 압축 마법이 해제되며 어마어마 한 양의 용해액을 뿜었다.
난데없이 진녹색 액체에 얻어맞은 괴수가 눈을 끔뻑였다.
잠시 뒤, 괴수가 온몸을 비틀며 포 효하기 시작했다.
키이, 키이이이이……I
‘효과가 있나?!’
나는 불끈 주먹을 쥔 채 울부짖는 괴수를 바라보았다. 저 용해액을 의 뢰한다고 마탑에 바친 돈이 얼만데, 당연히 효과가 있어야 했다.
곧 괴수의 몸에서 비늘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허억, 비늘이!”
“용해액을 뿌리신 건가!”
“오오오, 적재적소에 완벽한 아이 템을 사용하셨군!”
어느새 관전자 모드로 접어든 기사
와 마법사들이 연신 감탄을 토했다.
나는 차오르는 뿌듯함을 일단 꾹 밀어넣었다.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 었다.
괴수가 움직일 때마다 비늘이 서너 개씩 툭툭 떨어져나갔다. 고통스러 운 신음을 뱉으며 괴수가 이리저리 몸부림쳤다.
세드릭은 괴수를 향해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검날이 단번에 괴수의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끄륵, 끄르르륵……오
단번에 두개골을 꿰뚫린 괴수가 게
거품을 물었다. 검날이 점점 더 깊 이 파고들며, 쇠와 쇠가 긁히는 듯 한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륵, 그륵, 크르르르……소
곧 괴수가 실 끊긴 인형처럼 허물 어 졌다.
세드릭은 절명한 괴수로부터 도로 검을 뽑아냈다.
내내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 처음 으로 착잡한 빛이 스쳤다.
온갖 생물체로 덕지덕지 기워진 사 체를 보자, 나 역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짧게나마 묵 념하고 있을 때였다.
“전하! 해내셨군요!”
“괜찮으십니까! 전하!”
기사들이 우르르 세드릭 근처로 몰 려들었다. 세드릭을 둘러싸고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은 흡사 팬클럽 같 았다.
그러나 세드릭은 성가시다는 듯 손 을 휘휘 저었다. 그의 눈이 누군가 를 찾아 움직이다가 내게 멎었다.
무사하십니까?”
기사들이 얼른 나와 세드릭 사이에 길을 터 주었다. 나는 쏟아지는 시 선들 속을 약간 멋쩍게 걸었다.
“저야 아무렇지도 않죠. 전하께서 야말로…… 엇. 잠깐. 다치셨잖아 요!”
세드릭 앞으로 다가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손목 위로 네 줄 손톱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다쳤다기엔 민망한 수준입니다.”
세드릭이 드러났던 손목을 다시 소 매 속으로 숨겼다. 그러나 나는 단 호히 말했다.
“이동하기 전에 치료받으세요.”
“긁힌 걸 가지고요?”
“네! 당연하죠. 받으셔야 해요.”
내 말에 치유 마법사들이 얼른 다 가와 주문을 시전했다. 세드릭은 체 념했는지 마법사들의 손에 제 손목 을 내주었다.
세드릭은 손목 외엔 정말 모든 곳 이 멀쩡해 보였다. 마법사들은 납득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괴수와 싸우셨는데 상처가 하나밖에 없으실 리 없습니다.”
“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저희 전 하께서라면 능히 가능합니다.”
마법사들과 발끈한 기사들 사이에 서 가벼운 신경전이 오갔다.
세드릭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곤 괴수의 사체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괴수가 뭘 지키고 있었던 건지 궁금한 건 나밖에 없나?”
그제야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세 드릭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의 발광체가 사체 너머로 날아가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다.
곧 드러난 광경에, 기사와 마법사 들이 충격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이, 이건……『
“이게 대체……?”
나는 굳은 얼굴로 꾹 주먹 쥐었다.
‘드디어 찾았어.’
넓고 어두운 공간 양옆으로 철창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안에는 철창 하나 당 한 명씩,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사지를 묶인 그들은 축 늘어진 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억지로 잠에 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