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누구야, 너.”
나는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머릿 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마. 약하게 걸 린 마법이라, 당사자인 네가 너무 싫어하면 풀린단 말이야.]
“누구냐고 물었어.”
[뭐야. 몰라보다니 이거 섭섭한데.]
목소리가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했 다. 언제 나를 만난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누구긴. 나 잡으려고 여기까지 쳐 들어온 거 아니야?]
칸의 길드 마스터?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순간에도 목소리가 계속해서 조 잘거 렸다.
[놀랐어. 단 이틀 만에 이런 병력 을 이끌고 쳐들어올 줄이야. 계획대 로라면 크뤼거 가문이 몰살당하고, 황실이랑 에반스 공작가는 바보들 마냥 허둥지둥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처럼 전열을 갖추고 습격해오다니.]
[혹시 진짜 기다렸던 건 아니지?]
“헛소리 말고 앞으로 나와. 부하들 만 방패로 삼고 숨어 있다니. 비겁 한 자식!”
[걔넨 그러려고 키운 애들인데, 뭐. 원래 나처럼 중요한 사람들은 곱게 숨어 있는 법이야. 거기 있는 잘나
신 공작님처럼 앞장서서 모범 보이 는 게 위선적인 거라고.]
궤변도 이 정도면 지나쳤다.
나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 지 못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 으나, 나를 에워싸고 호위 중인 기 사들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었다.
“어디 숨어 있는 거지?”
[찾으면 어떻게 할 건데?]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무슨 죗값? 난 그냥 살면서 궁금 한 게 생기면 참지 않았을 뿐이야.
거기 괴물 공작을 실험해서 우리가 얻어냈던 데이터들이 얼마나 값진 줄 알아?]
“닥쳐.”
나는 속삭이던 것도 잊고 소리를 높였다. 호위하던 기사들이 흠칫 놀 라 나를 돌아보았다.
“짐승만도 못한 자식…… 데이터? 데이터라고?”
그까짓 것을 위해 세드릭이 이십 년간 겪어 왔을 고통을 생각하자 눈
앞이 깜깜해졌다.
“네 몸으로도 직접 얻어보지 그랬 어? 그 잘난 데이터. 쓰레기 같은 자식……!”
[와, 화내는 거 봐. 진짜 무섭다. 사람 몸으로 실험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정의감 때 문에?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공작 님을 건드려서 화가 난 건가?]
목소리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놈은 분명 정상인은 아니었다. 감 정을 느끼는 뇌의 기관 어딘가가 결 여된 게 틀림없었다.
[아, 그렇지. 이러려고 말 건 게 아 닌데. 아리엘 윈스턴 양, 그만 화내 고 들어봐. 나랑 같이 달아나자.]
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뭐라고?”
[네가 데려온 불청객들이 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잖아. 이제 여긴 버리고 새집을 찾을 건데, 아리엘
양도 데려가면 좋을 것 같거든.]
가볍게 지껄이던 목소리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낮아졌다.
[하이넨 크뤼거, 제 식구들과 사이 좋게 뒈졌어야 할 놈이 살아있다더 군. 내 계획은 분명 완벽했는데 말 이야.]
[그게 틀어지는 바람에 그 뒤의 계 획들도 줄줄이 엉망이 됐어. 내 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
목소리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등 골로 소름이 내달렸다.
[간신히 수도에 심어놓은 정보원과 접선했더니…… 독향이 아예 효과가 없었다더군. 이상한 일이지.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날을 고대하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 했었는데.]
나는 애써 입을 열어 비웃듯 말했 다.
“글쎄, 크뤼거 후작님이라면 나도
어제 만났어. 아주 쌩쌩하시던걸?
네 실력이 굉장히 형편없었나 봐.”
[아리엘 양. 역시 네 짓이지?]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네가 내 독향을 무력화한 거야.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낸 거지? 말 좀 해봐. 화내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대단하잖아. 스물이나 겨우 넘 은 계집애의 업적치곤 지나치게 대 단해.]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 다. 높낮이조차 바뀌지 않고 연달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네 실력은 인정해 줄게. 그러니까 지금 나랑 같이 도망가자. 아리엘 양. 응‘?]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미친놈.”
[왜? 나랑 같이 가면 잘 대우해줄 게. 네가 만드는 향수, 뭘 만들든 네가 상상도 못 할 금액으로 사줄 수 있어. 내 의뢰를 받아서 만들어 주면 평생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걸.]
“꺼져.”
나는 짜증스레 씹어 뱉었다.
[구체적인 금액이 필요해? 고용계 약서에 명시해줄까?]
“너 따위랑 사이좋게 마주 앉아서 고용계약서 쓸 일은 죽었다 깨어나 도 없으니까 꿈 깨. 그리고.”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신 내 머리에 말 걸지 마. 뇌를
꺼내서 세척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 더럽거든.”
그렇게 말한 나는 꽉 이를 악물었 다.
이 미친놈이 아까 말하기를, 분명 텔레파시는 내 거부감이 강하면 금 방 풀리는 마법이라고 했다. 나는 바깥으로부터 뇌를 차단하는 상상을 했다.
목소리가 당황한 듯 일그러졌다.
[잠깐. 연결을 끊으려는 거야? 진 짜 이대로 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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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나랑 손잡을 기회는 지금 밖에 없어. 내 조건도 자세히 안 들 어 봤잖아? 너 이러다 후회할 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머지않아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머릿속이 안개가 갠 것처럼 맑아졌 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말을 걸어, 감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쥐 떼가 한바탕 기어 다니고 간 기분이었다. 나는 역겨움을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나를 둘러싼 기사들은 달려드는 자 객들을 빈틈없이 쳐내고 있었다. 분 명 전장 한복판인데, 내가 서 있는 이곳만큼은 더없이 안전하게 느껴졌 다.
상황을 살펴보자, 그새 기사단은 자객들을 완벽히 제압한 듯했다. 머 릿수는 비등비등했으나 우리 쪽 기 사들의 실력이 압도적이었던 것이 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느덧 다가온 세드릭이 제 망토를 벗어 내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켜주신 분들 덕분에 아무 렇지도 않아요. 전하는요?”
대답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세드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집 하나 없었으니까.
“다행입니다. 저도 무사하…… 잠 깐. 레이디. 정말 괜찮으십니까? 진 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세드릭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내 이 마를 훑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식은땀을 비 오 듯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텔 레파시 마법의 후유증인 듯했다.
“……사실, 칸의 길드 마스터가 방 금 제게 말을 걸었어요. 텔레파시 마법을 걸어서.”
“ 예?”
세드릭이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굳 혔다. 나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자가…… 감히 레이디께 접촉했다는 겁니까?”
세드릭의 입에서 바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짧고 간결하게 그놈이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일단은 그냥 이야기를 들은 것뿐 이에요. 좀 이상한 이야기긴 했어요. ……저보고 같이 달아나자더군요.”
세드릭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 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세 드릭의 분노가 향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닐 텐데도 오한이 들었다.
세드릭이 천천히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내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빙 설처럼 가라앉은 표정과는 달리 상 냥한 손길이었다.
세드릭이 속삭였다.
“감히 레이디의 머리를 어지럽힌 죗값은, 제가 반드시 그자에게 묻겠 습니다.”
그 말에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떨 림이 가라앉았다.
이상할 만큼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세드릭이라면 분명 이 약속을 지킬 것 같다는.
그 사이 기사들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객들은 아까 범죄자들처럼 줄줄 이 수갑을 찬 채 몸부림쳤다. 자결 을 하려는 것도 같았으나 기사들이 빠르고 능숙하게 재갈을 물려 그조 차도 실패한 듯했다.
나는 수갑에 묶여 발버둥 치는 자
객들을 향해 혀를 찼다.
저래 봬도 칸에 소속돼 있을 정도 면 실력 하난 확실한 사람들일 텐 데. 상대를 잘못 만난 거다.
“전하. 계속 지하로 내려가시겠습 니까?”
마법사 하나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 다.
세드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그새 도열해 있는 기사들 을 돌아보았다.
“계속해서 내려간다. 그놈들은 계 속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명치라도 때려서 기절시키도록.”
서늘한 목소리에 자객들이 눈에 띄 게 얌전해졌다. 지금은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 다.
조금 더 내려가자 또 커다란 철문 이 나왔다.
마법사들이 문에 달라붙어 감지 마 법을 시전했다. 문 너머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기묘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 었다.
그르르륵……,
온몸에 바짝 소름이 돋았다.
나는 움츠러든 목소리로 세드릭에 게 속삭였다.
“전하, 방금…… 들으셨어요?”
크르륵, 그으으으
입을 다물기도 전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음험하게 귓전을 긁는 울음소리.
그건 분명, 살아있는 생물이 내는 소리가 맞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 만 내가 들어본 어떤 맹수의 울음소 리보다도 섬뜩했다.
“다들 물러나라.”
세드릭이 마법사들을 물렸다.
감지 마법을 시전하던 마법사들 역 시 소리를 들었는지, 세드릭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물러났다.
문에서 몇 발자국 물러난 마법사들 이 세드릭에게 빠르게 당부했다.
“예사 맹수의 울음소리가 아닙니 다, 전하.”
“전열을 갖추시지요. 어쩌면 위층 에서 보았던 키메라일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세드릭은 마법사들과 함께 물러나는 대신, 성큼성큼 앞으로 걸 음을 옮겼다.
“레이디를 모시고 물러나 있도록. 마법사들은 내게 결계 마법을 둘 러.”
마법사들이 더 이상 군말 없이 세 드릭을 향해 주문을 시전했다.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붙잡았 다. 몸에 결계 마법을 두른다는 건, 저 안으로 세드릭이 직접 뛰어들겠 다는 이야기였다.
“전하. 저분들 말이 맞아요. 저건 키메라일지도 몰라요. 앞장서지 마 세요……!”
다급한 마음에 뱉은 앞장서지 말라 는 말은, 곧 기사들을 방패로 사용 하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자객들을 방패로 떠밀었던 길드 마 스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내 머릿속은 그저 이 순간 세드릭을 저 섬뜩한 울음소리 앞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 로 가득했다.
세드릭이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 였다.
“저도 못 당한다면 기사들 중 누구 도 못 당해낼 겁니다.”
“그리고, 걱정 마십시오. 전 웬만해 선 안 당합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말 하는 세드릭에게, 차마 부하 뒤에 숨으라는 말을 또 할 순 없었다.
대신 나는 메고 온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전하. 이걸 가져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