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21화 (121/153)

〈122화〉

# # 호

평탄한 하늘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것도 우리 앞을 가로막지 않았 다. 간혹 날아가던 새떼만 깜짝 놀 라 저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비행선은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하 늘을 요요히 유영했다.

마법사들이 몇 번 지팡이를 휘두르

며 워프 마법을 시전했다. 그럴 때 마다 목적지와의 거리가 성큼성큼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넓은 평 원과 간혹 작거나 큰 도시가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만 하루를 꼬박 비행선 위 에서 보냈다.

다음 날 해가 저물 무렵, 드디어 보이는 풍경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 했다.

나무가 썩어 있어요.”

한참 동안 지나쳐왔던 숲이 어느새 끝나 있었다. 숲이 끊긴 부분부터 나무들이 까맣게 썩어 있는 게 보였 다. 땅이 통째로 독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거의 다 도착했군요.”

나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며 세드 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선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졌다. 기사들은 투구를 고쳐 맸고, 마법사들은 계획을 점검했다.

비행선이 나아갈수록 땅이 쩍쩍 갈 라져 나갔다. 황폐하기 그지없는 광 경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 요?”

범죄자들의 도시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쁜 놈들 소굴처럼 생겼을 줄이야.

“살아가기는 하더군요. 사람 껍데 기만 뒤집어쓴 것들도 사람이라고 칠 수 있다면.”

세드릭이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윽고 도시 형체를 띤 실루엣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 수로.’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원작에서 지하 수로는 인간말종 쓰 레기들이 집합한 범죄자들의 소굴로 서술되었다. 그 이상으로 자세히 묘 사되진 않았다.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도시 입구 부터 시체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은

광기에 젖은 채 서로를 죽이고 있을 까?

잠시 뒤, 내 예측은 보기 좋게 빗 나갔다.

“전하? 저게 우리 목적지인가요?”

나는 당황스레 저 앞을 내려다보았 다.

도시는 거대하고 둥근 돔으로 뒤덮 여 있었다.

이래서야 비행선을 착지시킬 수 없 었다. 습격 계획의 첫 번째는 도시 안으로 곧장 착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곤혹스레 세드릭을 돌아보았 다.

‘어떻게 착지하지?’

아래를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한 손 을 들어 올렸다.

“폭격해라.”

그 말이 방아쇠가 된 듯, 내 뒤에 서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나는 넋 놓고 눈을 깜빡 였다.

‘세상에.’

선두 앞 허공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의 절반을 뒤덮는 마법진의 모 습은 숨이 막히도록 장엄했다.

곧 마법진이 붉게 달아올랐다. 순 식간에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법사들이 동시에 시동어를 읊었 다. 다음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불길하게 빛나는 마법진 밑으로 커 다란 운석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수십, 수백 개의 불타는 암석이 돔 을 강타했다.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결국 몇 초 지나지 않아, 쩌저적 하 는 굉음과 함께 돔이 갈라지기 시작 했다.

저 밑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갈라지고 무너진 돔 사이로, 드디어 도시의 진짜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착지해.”

세드릭이 명령했다.

그 말에 비행선이 만 하루 만에 하강을 시작했다.

하늘에서 마법사들이 활약했다면, 지상의 공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자들을 기사 들이 빈틈없이 제압했다. 갑작스레 예상치도 못한 습격을 당한 탓인지, 의외로 범죄자들은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나는 세드릭 곁을 따라 도시를 걸 으며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민들의 눈은 하나같이 흐리멍덩 했다. 무언가에 취한 건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시에는 교수대가 몇 개나 있었 다. 이 도시의 몇 없는 오락거리인 듯했다.

‘칸의 본거지는 어디에 있지?’

수도를 떠난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세드릭이 움직였다는 소식 을 듣고 대피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나는 기사들에게 제압당해 줄줄이 수갑을 차고 있는 범죄자들을 훑어 보았다.

‘이렇게 손쉬울 리는 없는데.’

물론 그놈들이 예상치 못했을 타이 밍에 허를 찌른 건 맞지만, 그래도 명색이 소설 속 최종 보스인 놈들이 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것 같진 않 았다. 세드릭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딘가에 진짜 본거지로 향하는 입구가 있을 겁니다.”

탐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기 사 한 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소굴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 았습니다!”

겉보기엔 허름한 판잣집 안으로 들

어서자, 바닥에 커다란 문이 설치되 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전하께서 손수 내려가실 필요가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노려보며 마 법사 하나가 말했다.

“이곳에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전하? 문을 열고 화염 구를 쏘아 보내면 지하는 불지옥이 될 겁니다.”

매력적인 의견이라 생각했는지 주

위의 병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하에 있는 사람들을 통째로 구 워버리겠다는 거야?’

굉장히 극단적인 해결책에 나는 입 을 딱 벌렸다.

물론 잔인함과는 별개로 효과적인 방법처럼 들리긴 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범죄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 다.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 을 때였다.

“아니.”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칸의 본거지가 맞다면. 지 하에 있는 건 길드원들만이 아닐 것 이다.”

역시 세드릭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십 년 전 같은 신세였 을 테니,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아래에는 무고한 민간인들도 실 험체라는 명목으로 감금당해 있으리 라는 걸.

의견을 제시했던 마법사가 이해한 듯 고개를 숙였다.

곧 기사들이 나서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을 열었다.

끼익, 음산한 소리를 내며 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기사들 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마법사들이 재빠르게 마력 발광체 를 불러왔다. 반딧불이처럼 생긴 발 광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지하를 밝혔다.

문 너머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 고 끝없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나는 세드릭이 준 아티팩트를 꼭 쥔 채 고개를 저었다.

“ 전혀요.”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가장 안 전한 곳은 세드릭의 곁이었다. 그보

다 강한 사람은 아마 이 기분 나쁜 도시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희미하게 웃은 세드릭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함께 내려가시죠.”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발광체가 밝히지 못한 깊은 곳의 어둠은, 마치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 집어삼킬 듯 음산해 보였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좋아. 가보자.’

두려움과 흥분이 번갈아가며 심장 을 충동질했다.

나는 세드릭이 내민 손을 맞잡고 지하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내가 비튼 시나리오의 끝을 볼 시 간이었다.

“지나치게 고요하군

한 기사의 숨죽인 속삭임이 들렸 다.

사위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지 하를 울리는 건 오직 병사들의 발걸 음 소리뿐이었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까.’

그럴 가능성도 높았다. 어쩌면 우 리가 지하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려 함정을 파놓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정도, 상대가 웬만한 수 준이어야 통하는 거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마도 로는 제일이라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엘리트 기사단의 기사들이 끝도 없 이 줄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원작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원작에서도 세드릭이 이곳에서 칸 과 결전을 치르긴 했었다. 묘사가 친절하게 된 부분은 아니라 자세히 는 알지 못하지만.

그때 세드릭은 꽤 고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대비도 하 지 못하고 유인당했기 때문이었다. 병력으로 무장하고 먼저 습격하는 지금과는 달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드디어 계 단이 끝이 났다.

발광체가 부지런히 앞으로 날아갔 다. 이번에는 평지로 된 통로가 보 였다.

“잠시만요.”

나는 세드릭을 멈춰 세우고는, 굴

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 통로 안으 로 던져넣었다.

그러자 철컹,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창 수십 개가 솟아올 랐다.

“헉.”

뒤에서 병사들이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지하 소굴은 이렇듯 원시적인 함정이 가득 들어찬 곳이었다.

다들 물러나라.

병사들을 제지한 세드릭이 놀란 눈 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하마터면 병 사들이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이런 구식 함정은 요즘 잘 쓰이지도 않는 것인데…… 대체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나는 세드릭을 향해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소설을 보면 이런 함정이 많이 나

오더라고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면 좋잖아요.”

세드릭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지 만 다행히 대충 납득해 주었다.

“레이디 덕택에 위험요소를 줄였습 니다.”

세드릭이 기사들에게 손짓하자, 기 사들이 먼저 달려가 함정을 해체하 기 시작했다.

우리는 깨끗해진 회랑을 걷기 시작 했다.

발광체가 양옆으로 널리 퍼져 날기 시작했다. 발소리의 메아리만 들어 도 이 회랑이 꽤 넓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발광체 한 마리가 어딘가를 빙글빙 글 돌며 집요하게 비췄다.

무심코 그리로 고개를 돌린 나는 헉, 숨을 집어삼켰다.

‘저게…… 뭐야?’

철창 속에,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가 널 브러져 있었다.

말의 머리에 달팽이처럼 미끌거리 는 몸통, 물갈퀴가 달린 발.

‘ 키메라……/

그것은 처참히 합성 당하고 버려진 키메라였다.

나는 올라오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눈가엔 나도 모르게 그렁그 렁 눈물이 맺혔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가 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단검이 수십 개 날 아왔다.

“윽!”

“으억!”

단검에 찔린 기사들이 신음을 토했 다.

내게도 단검 몇 개가 날아왔다. 그 러자 목에 걸려 있던 아티팩트가 빛 을 발했다.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눈부신 주홍 빛 결계가 펼쳐졌다.

키잉

결계에 맞은 단검이 힘없이 나동그 라졌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아티팩트를 내 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더 엄청난 물건이잖아?!’

“레이디.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세드릭이 결계에 감싸인 나를 번쩍 안아 기둥 뒤로 옮겨 놓았다.

“잠시면 됩니다.”

나를 안심시키듯 속삭인 세드릭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세드릭의 눈은 더 이상 나를 담고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세드릭은 전 장 한가운데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이상한 목소리 가 두드렸다.

[안녕, 아리엘 윈스턴 양.]

나는 머리를 짚고 신음했다.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뇌 속 으로 곧장 꽂혀 들었다.

몹시 기묘하고 괴상한 기분이었다.

문득 언젠가 샤를로트가 텔레파시 마법에 당할 때 얼마나 소름이 끼치 는지 투덜댔던 것이 떠올랐다.

‘ 텔레파시……?’

[지금 텔레파시인가, 생각하고 있 지? 맞아. 그거야.]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 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기사들과 자객의 싸움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또 목소리 가 울렸다.

[이렇게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 그 렇지?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무리 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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