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20화 (120/153)

〈121 화〉

“그렇게 하시오.”

황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부로 칸 토벌의 전권을 세 드릭 에반스, 경에게 위임하겠소.”

황제가 홀을 들어 세드릭의 양어깨 위를 가볍게 짚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짧게 묵례한 세드릭이 몸을 일으켰 다.

“함께 가지, 에반스 경.”

황태자의 말에 세드릭이 고개를 저 었다.

“험한 꼴을 보실 겁니다. 태자 전 하께서는 옥체 보전하시지요.”

“하지만

황태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 꼬리를 흐렸다.

“대신 레이디 아리엘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물론이지. 아리엘 양은 이 황궁에 서 가장 안전한 존재가 될 거요.”

“감사합니다. 믿고 떠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상 밖의 전개에 나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전하. 설마 절 두고 가시려는 건 가요?”

그러자 세드릭이 당연한 말을 한다 는 듯 대답했다.

“네. 그야 물론입니다.”

“안 돼요, 전하. 저도 데려가셔야 해요.”

“레이디……,”

내 고집이 뜻밖이었는지 세드릭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칸의 크뤼거 후작저 독살 계획을 저지한 결정적인 공은 레이디께 있 습니다. 그걸 저들이 알게 된다면 레이디께 보복할지 모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장이 반대 였더라도 나 역시 세드릭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고 떠났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었다.

“에반스 경의 말이 맞소, 아리엘

양. 황궁이 아리엘 양의 신변을 빈 틈없이 보호할 거요.”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하지만 저 는 세드릭 님의 곁을 지키고 싶어 요.”

그러자 테이블 안에 둘러앉은 사람 들의 눈이 순식간에 감격에 젖었다. 내 말이 꽤나 낭만적으로 들린 모양 이었다. 세드릭 역시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세드릭을 설 득할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았다.

‘어떡하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굳이 따라가겠다는 건 철없는 소리

같긴 해.’

나는 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마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이런 내 가 칸을 토벌하는 자리에 가서 뭘 하겠는가.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하지만 민폐를 감수하고서라도 난 세드릭을 따라가고 싶었다. 이유는 이랬다.

첫 번째, 나는 칸의 본거지인 지하 수로의 지리를 대강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또 칸의 길

드 마스터가 키우는 마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 원작에서 서술 된 부분에 한해서만큼은 잘 알고 있 었다. 이 지식은 전력에 꽤 많은 보 탬이 될 게 분명했다.

두 번째. 내 짐작이 맞다면, 세드 릭은 그곳에서 어떤 인물 하나를 만 나게 될 것이다.

하늘색 머리와 금색 눈빛이 어여 쁜, 가냘프고 선한 여인 한 명을.

그리고 운명적인 서사를 시작하게 되겠지.

‘그 모습만큼은 이 두 눈으로 똑똑 히 확인하고 싶거든.’

진짜 운명이란 건, 저런 거구나.

세상이 맺어준 진짜 짝은 저 두 사람이구나.

그런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 면, 내 마음도 수월히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모두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때문에 나는 고집스러운 눈으로 세 드릭을 쳐다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 다.

‘생각해온 핑계가 하나 있긴 한 데……?

진짜 써먹을 생각을 하니 차마 입 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드릭이 정말 날 떼어놓고 가려 한다면, 그 방법이라도 쓰는 수밖에.

세드릭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기만 했다. 점점 초조함이 심해졌다.

‘안 되겠다.’

그 방법이라도 쓰는 수밖에.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외쳤다.

“매일 삼십 분씩 꼭 만나러 온다고 약속하셨잖……/

“알겠습니다, 레이디. 함께 가시죠.”

세드릭과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 다.

‘응? 방금 허락한 거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 역시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나저나 지금 같이 가자고 하신 것 맞죠? 제가 제대로 들은 건가요?”

세드릭이 미심쩍은 표정을 하면서 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레이디. 함께 가시는 게 좋겠 습니다.”

“에반스 경……!”

황태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 쳤다. 황태자를 돌아본 세드릭이 고 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지킬 수 있습니 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황태자의 물음에, 세드릭은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엔 억눌린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레이디 역시, 그자들에게 갚고 싶

은 빚이 있을 테니.”

“ 빚?”

황태자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데려가 줄 분위기이니 가만 히 있자.’

“ 대신.”

세드릭이 덧붙였다. 나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역시 거저는 없는 모 양이 었다.

“제가 드릴 목걸이를 꼭 걸어 주셔 야 합니다.”

목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나는 눈 을 끔뻑였다.

나 대신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거렸 다.

“에반스 가문의 아티팩트를 말하는 것이로군. 그것과 함께라면 과연 아 리엘 양만큼은 안전하겠어.”

목걸이, 아티팩트?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 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알겠소. 경과 아리엘 양의 뜻이 그러하다면.”

황후 곁에서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 며 덧붙였다.

“황실에서도 이 토벌에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겠소. 무엇을 원하시 오, 공작?”

“마탑의 마법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원합니다.”

세드릭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헉. 나는 조그맣게 숨을 삼켰다.

마탑의 마법사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된다는 건, 대륙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군대를 얻는다는 말과 같았다. 세드릭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어마 어마하지 않다면 허락하기 힘든 일

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놀랍게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허하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세드릭.”

황제가 세드릭을 이름으로 불렀다. 격식 없는 그 목소리에서는 오래된 애정과 염려가 흘렀다.

“몸조심하시오.”

“물론입니다.”

산뜻하게 대답한 세드릭이 나를 돌 아보았다.

“그럼 가시죠, 레이디.”

공작저 앞으로 에반스 기사단과 마 탑의 마법사들이 집합했다.

숲과 비견될 정도로 넓은 공작저의 정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머릿수가

많았다.

나는 그 장관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 병력이라면 당장 어디 소도시 정도는 쉽게 정복하겠다고.

세드릭은 부관들과 함께 지도를 짚 고 있었다. 체스 말처럼 생긴 기물 들이 지도 위 여기저기에 올랐다.

기물들은 대부분 한 지점 위에 집 중적으로 서 있었다. 칸이 새 둥지 를 튼 범죄자들의 도시, 지하 수로 였다.

‘이렇게 지도로 보니 과연 멀기는 하네.’

마차로 달리면 꼬박 보름은 달려야 할 것 같았다.

“워프로 이동하나요?”

잠시 회의가 휴식 상태로 접어들었 을 때, 나는 세드릭에게 내내 궁금 하던 것을 물었다.

두 도시 사이엔 워프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지하 수로가 범죄자들의 도 시로 전락하기 이전 만들어진 워프 였다.

워프란 건 한 번 뚫어 놓으면 쉽

사리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지 금도 마음만 먹으면 작동시킬 수 있 다고 들은 것 같다.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워프로 이동하기에는 우리 머릿수가 너무 많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적들에게 사로잡힐 확률도 있 고요.”

“그러면 말을 타고 가나요?”

최소 보름간의 강행군은 힘들긴 하 겠지만, 절대 그런 티는 내지 말아 야지.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세드릭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는 하늘을 날 겁니다.”

하늘?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그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그날 저녁 전 병력이 이동을 시작했다.

어두운 밤, 마법사와 기사들의 행 렬이 열 맞춰 행진하는 모습은 무척 장엄했다.

수도 외벽으로 이동하자, 이미 그 곳엔 수십 개의 비행선이 도착해 있 었다.

“……세상에.”

비행선을 본 순간, 내 입에서 스르 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태껏 비행선은 먼 하늘에서나 가 끔 구경한 것이 전부였다. 멀리서 봤을 땐 열기구같이 생긴 게 참 귀 엽다고 생각했었는데……오

웬걸. 수십 개가 모여 있는 걸 보 니 전혀 귀엽지 않았다.

“저희는 이걸 탈 겁니다.”

세드릭이 나를 개중 하나의 비행선 으로 안내했다. 나는 긴장을 삼키며 생전 처음으로 비행선 안에 발을 들 였다.

우리 말고도 비행선엔 에른을 비롯 한 내 호위기사들, 그리고 마법사 네댓 명이 탔다.

세드릭이 나를 비행선의 선두로 데 리고 갔다. 나는 살짝 비현실적인 감정을 느끼며 난간을 꽉 잡았다.

‘정말 떠나는구나.’

솔직히 긴장되기는 했다. 원작 속 최종 보스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당 연히 그랬다.

‘떨지 말자, 아리엘.’

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세드릭은 자신이 나를 지키는 역할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내 입장에선 그 반대였다.

세드릭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 다. 그리고 칸은 그걸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아는 놈들이었다.

‘괜찮아. 나 역시 그놈들을 역이용 할 수 있어.’

원작의 지식을 안다는 건 엄청난 무기였다. 나는 이 무기로 세드릭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지킬 작정 이었다.

“긴장되십니까?”

내내 말이 없는 걸 뭐라고 해석했 는지 세드릭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 전하께서는요?”

“글쎄요. 긴장이라기보다는

그 순간 비행선의 연료가 붉게 빛 을 발했다. 동시에 바닥이 우우웅, 진동하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음 속에서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이제야 진작 해치웠어야 하는 일을 마무리하러 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 목소리엔 낮은 희열이 배어 있 었다.

기체가 떠오르면서 내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세드릭이 내 어깨를 잡 아 주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훅 떠올랐다. 나 는 땅이 멀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건 아니 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지대의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양감이 심장 에 차올랐다.

곧 땅이 훌쩍 멀어지고, 수도가 장 난감 성처럼 작게 보였다. 수도 외 벽 밑으로는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 줄기가, 그 양 옆으로는 드넓은 평 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와중에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나치게 아름 다웠다.

수도는 제 생각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었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드릭은 철없다 탓하는 대신, 내 양옆 난간 위로 손을 짚었다.

단단한 두 팔과 가슴이 내 몸을 지탱해 주었다. 비행선이 아무리 휘 청여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디.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오른손으로 품속에서 무 언가를 꺼냈다.

한가운데에 태양처럼 강렬한 주홍 빛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조금 전, 말씀드렸던 목걸이입니다. 이걸 꼭, 어딜 가든 착용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미칠 듯이 값비싸 보이는 목걸이였다.

“이렇게 귀한 걸 제가 걸어도 될까요?”

잃어버리는 거 아냐?

“물론입니다. 안 걸어 주신다면 출 발도 안 할 겁니다.”

“……알겠어요. 걸게요.”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세드릭이 손수 내 목에 그 비싸 보이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목걸이가 목에 닿는 순간, 묘하게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레이 디.”

목걸이 밖으로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세드릭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끝내고 무사히 수도로 돌아가면.”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낮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거렸다. 심장이 스위치를 누른 듯 세게 박동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입 맞추기 전에 먼저 해야 했던 말인데. 순서가 아무래도 엉망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지킬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하릴없이 아래로 펼쳐진 풍경만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지금 세드릭이 무슨 말 을 하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진짜’를 만나는 순간 그전까지의 맹세들은 불장난으로 전락할지도 몰

랐다.

하지만, 이성은 분명 그렇게 나를 타이르고 있는데도.

지금만큼은 이성 따위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뛰어서 세드릭의 목소리 조차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리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 다. 세드릭의 손이 천천히 내 턱을 붙잡았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가까워진 타인의 숨결이 코 앞에서 나를 간지럽혔다.

나는 조그맣게 입술을 열었다.

“……이러면, 또 순서가 헝클어지 잖아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세드릭의 입매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었다.

“이번만큼은 모른척해 주실 수 없 겠습니까?”

입술과 입술이 너무 가까워서, 세 드릭이 속삭일 때마다 입가가 간지 러웠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안 된다면요?”

“그렇다면 참아야겠지요.”

순순히 대답한 세드릭이 제 이마를 내 이마 위로 살짝 기댔다.

“정말 안 됩니까?”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까치발을 들었다.

세 번째 키스. 그리고 마지막일지 도 모르는 키스는, 열기구 안을 채 운 공기처럼 내 심장을 가득 채워 종내에는 펑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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