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이게 뭐지? 할아범, 나만 여기 이 상한 색깔이 보여?”
“아닙니다, 주인님. 제 눈에도 보입 니다.”
크뤼거가 집사가 이야기를 주고받 는 동안, 나는 크뤼거의 손에서 향 수병을 뺏어 들어 거침없이 허공에 뿌렸다.
팔을 크게 휘저으며 분사하자, 아
무것도 없던 허공이 순식간에 보라 색으로 물들었다.
“……응?”
“주인님, 이건……/,
그제야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크뤼 거와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
“독극물에 닿으면 색이 변하는 향 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레이디?”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나는 멍이 든 듯 보랏빛으로 변한 허공을 노려보았다.
‘다녀갔구나.’
시간대가 좀 달라지긴 했지만, 칸 은 간밤에 원작에서 저질렀던 일을 충실히 재현했던 것이다.
그 뒤로 일은 폭풍처럼 진행되었 다.
향수를 뿌리는 곳마다 공기가 보랏 빛으로 물들었다. 저택의 모든 곳에 독극물이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크뤼거는 당연히 사색이 되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정말 독이 이렇게 퍼져 있는 거라면, 다들 죽 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당황한 얼굴로 열심히 아무것 도 모르는 척을 했다.
“글쎄요. 저도 뭐가 뭔지 잘…… 일단 전문가를 불러 알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크뤼거는 곧장 전문가들을 불러들 였다. 독극물 전문 학자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이 냄새는……『
“왜 그러십니까?”
“제 추측이 맞다면, 지금 이 저택 전체에 극독이 퍼져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다들 살아 계신 겁니까?”
“예에?!”
크뤼거는 유령이라도 만난 듯 기절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독극물 학자가 저택의 공기를 채취 해 즉시 조사에 들어갔다.
결과는 후작저를 충격에 몰아넣었 다.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이 저택은 지금 극독이 담긴 기체에 푹 절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어떻게 살 아있는 겁니까?”
“그게 정말 뜻밖인 부분인데…… 놀랍게도, 중화제 역시 함께 살포돼
있었습니다.”
“중화제라니 요?”
“배합이 상당히 까다롭지만 완벽히 만들기만 하면 많은 독을 무위로 돌 릴 수 있는 중화제인데…… 이 저택 에 독향보다도 더 짙게 살포되어 있 더군요. 미리 대비하신 겁니까?”
“아뇨, 우리가 뿌린 거라곤 그저 아리엘 양이 선물하신 향수뿐인 데…… 레이디, 혹시?!”
크뤼거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돌 아보았다.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세상에, 제가 선물해 드린 향수가 중화제 역할을 했다고요?”
“짚이는 점이 있으십니까, 레이 디?”
“그게, 향수를 의뢰하신 분이 간단 한 독은 중화할 수 있는 기능도 들 어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긴 하셨거 든요. 까다롭긴 하지만 의뢰금을 워 낙 두둑이 주셔서 연구했던 건 데…… 세상에. 정말 제 향수가 효 과를 발휘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제가 맞게 조 사한 거라면…… 이분들이 목숨을
건진 건 모두 레이디 덕택입니다.”
독 전문가가 믿기 힘든 눈으로 나 를 바라보았다.
“레이디의 향수가 아니었다면 이 저택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 다.”
“맙소사……『
크뤼거가 휘청거렸다.
소란에 함께 나와 있던 크뤼거 후 작 부인도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정말 누 군가 저택 사람들을 독살하려 시도 한 거라면, 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요?”
후작 부인의 의문에, 잠시 저택을 싸늘한 침묵이 뒤덮었다.
곧 수도 치안대가 후작저로 총출동 했다.
수많은 마도구들이 침입자의 흔적 을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좀처럼 실마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초조함을 삼켰다.
이 자리에서 칸이 범인이라는 사실
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했다.
어딘가 그놈들이 남긴 흔적이 있을 것이다. 온 저택에 독향을 살포하면 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나는 치안대와 따로 움직이면서 저 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 다.
“레이디!”
세드릭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일층으로 내려가다가,
마침 올라오던 세드릭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전하! 괜찮으세요?”
“레이디.”
나는 대답 대신 그대로 세드릭의 가슴팍에 끌어안겼다.
난데없이 끌어안긴 나는 그의 품속 에서 눈만 깜빡거렸다.
“전하?”
“무사하신 겁니까? 독향이라니, 대 체……-”
세드릭의 팔이 내 머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팔에선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세드릭을 안심시켰다.
“전 괜찮아요. 이거 놓고 잘 확인 해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제야 나를 놓아준 세드릭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나는 씩 웃 어 보였다.
“멀쩡하죠?”
“하아.”
세드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 릅니다.”
“하하.”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세드릭에겐 아무것도 언질 주지 못 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그가 나 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걱정하는 게 아직 어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까 다짜고짜 끌어안긴 순간부터 쿵쿵대기 시작했던 심장이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신 김에 도와주실래요? 누가 후 작님의 저택에 이런 짓을 해놓은 건 지 추리하고 있거든요.”
원작에서 칸은 분명 단서를 남겼었 다. 아예 대놓고 자기들 이름을 대 문짝만하게 써놓았었지.
‘애초에 절반은 이름값을 올리기 위해 저지른 일이니까, 어딘가 분명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겨 놨을 텐데.’
고민하며 나는 일층을 내려다보았 다.
아직 계단을 다 내려오지 않은 참 이라, 일층이 한눈에 잘 보였다. 일 층은 분주히 대피하는 사용인들과 수색 중인 치안대로 혼잡했다.
‘응‘?’
다시 세드릭을 돌아보려던 순간, 내 시선이 어딘가에 멎었다.
“……전하.”
나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곳을 가 리켰다. 세드릭의 고개가 뒤로 돌아 갔다.
“저건.”
세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일층 천장 위에, 칸의 이름이 선명 한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황궁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커다란 원형 식탁에 고위 대신들이 심각한 얼굴로 둘러앉았다.
급히 소집된 회의지만 핵심 인물은 모두 모여 있었다. 황제와 황후, 황 태자, 국무대신 제럴드 후작, 법무대 신 요센 백작, 에반스 공작, 그리고 나. 아리엘 윈스턴. 크뤼거는 저택
일로 바빠 참여하지 못했다.
아직 작위조차 없는, 백작 영애에 불과한 내가 이 쟁쟁한 자리에 참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하나였 다.
“그대가 이번 일에서 엄청난 공을 올렸다 들었소.”
황후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저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한 일 이라고는 향수를 잘못 전달한 것밖
에 없는걸요.”
“그 잘못 전달한 향수가 후작가 모 두의 목숨을 구했다 들었소.”
황태자가 부드러운 말씨로 이야기 했다. 처음 마주하는 황태자는 삼십 대 초반의 남성으로, 무척 온유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민망한 듯 뺨을 감쌌다.
“저도 놀랐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게 그렇게 엄청난 중화제였을 줄이 야……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 부끄럽습니다.”
운이 좋았기는. 며칠 밤낮으로 그 중화제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나를 경이로 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마치 시험 전날까지 밤새 공부해놓 고 아닌 척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 는 민망함을 이기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영애의 발명품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소. 이 일이 마무리되면 황궁에 도 꼭 납품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이번엔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제는 황후와 거의 남매처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아하면 서 기품 있는 인상을 지녔지만, 이 마에 새겨진 주름에선 엄격한 위엄 역시 드러났다.
나는 황제의 말에 잠시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눌렀다.
황제가 직접 내 향수를 납품받고 싶다고 말한 거다.
……물론 용도가 좀 다르긴 하지 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일단 제쳐 두자.
“물론입니다, 폐하. 기쁘게 받아들 이겠습니다.”
나는 수줍게 말하며 살짝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고 개를 돌리자마자 곧장 눈이 마주쳤 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에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세드릭, 해냈어요.
당신이 투자한 조향사가 드디어 황 실 납품에 성공했습니다!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데 제럴드 후작이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칸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결국 사실이었군요.”
“그래. 설마 크뤼거 후작가를 몰살 시킬 계획을 세웠을 줄이야. 발 빠 르게 대처하지 않았던 대가를 너무 크게 치를 뻔했어.”
황제가 이마를 짚었다.
“만약 저들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요센 백작이 고개를 내젓자, 제럴 드 후작이 맞장구쳤다.
“크뤼거 후작이라는 큰 별 하나를 잃을 뻔했지요. 뿐만입니까? 온 제 국이 그자들의 귀환 소식으로 시끄 러워졌을 겁니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을 테고, 그자들은 단번에 이름 값을 얻었겠죠.”
그래. 성공했다면 칸은 순식간에 다시 뒷세계의 황제로 군림했을 거 다.
그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이 다음으로 마수를 뻗치는 건 세드릭이었을 테고.
“아리엘 영애의 덕택으로 계획이 저지된 게 천만다행입니다. 주신께 서 저희를 굽어살피신 것이 틀림없 습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역이용해야 합 니다.”
“감히 그 간악한 자들이 다시 제국 에 발을 붙이다니. 이번에야말로 뿌 리 끝까지 숙청해야만 합니다!”
“……그래. 짐도 인정하는 바이오.”
황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천천히 한 곳을 향했다. 세드릭이 있는 방향이 었다.
세드릭은 마치 밀랍인형 같은 무표 정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이.
괜찮은 걸까.’
나 역시 걱정을 감추며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칸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 다 세드릭은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 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황제와 황후가 세드릭을 바라보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 세 드릭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세 드릭이 쳐다본 것은 나였다.
마주친 세드릭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에반스 공작은 이 일을 어찌 처리 하면 좋겠소? 이미 그들이 제도 위 에 다시 싹을 틔웠소. 바로 처리하
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잠시 시간을 두고 정비한 뒤 나서는 것이 좋겠소?”
침묵 끝에 황후가 물었다.
세드릭이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떼 곤 황제와 황후를 번갈아 바라보았 다.
“정비할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이 미 준비는 끝났으니까요.”
“그렇다면……『
대답 대신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거침없이 황제와 황후 앞으로 걸어 간 세드릭은, 그들 앞에 한쪽 무릎 을 꿇었다.
“윤허만 내려주십시오.”
세드릭이 고개를 들어 황제 부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병력을 이끌고 짓밟으 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