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십오 분 뒤.
나는 괜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뒤뜰 밖으로 나왔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나와 세드 릭에게로 꽂혔다. 괜히 입술이 화끈 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붓진 않았겠지?’
저 멀리서 리나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얼른 입술에서 손을 떼고 아무 렇지 않은 척을 했다.
“저는 이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세드 릭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로 향하기 전, 세드릭이 창문 너머로 내 가게 안 어딘가를 가리켰 다.
“저 향수군요. 레이디가 제게 선물
해주셨던 것이.”
엥? 갑자기 웬 소리지?
나는 세드릭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 았다.〈자양강장제〉가 진열된 매대 가 보였다. 한참 옛날 언젠가 세드 릭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세드릭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향이 무척 좋더군요.”
“그러셨군요…… 감사해요.”
뜬금없이 몇 달 전 선물에 대한
얘긴 왜 하는 거지?
내 바보 같은 의문은 세드릭이 돌 아가자마자 해소되었다.
“아리엘 님, 저 이거 다섯 병 주세 요!”
“저는 열 병이요!”
손님들이〈자양강장제〉를 수십 병 씩 품에 안고 계산대로 달려왔다.
‘……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 시 세드릭 에반스는 고단수였다.
천문학자들이 월식을 예견한 밤이 되었다.
해도 지지 않은 오후부터 길거리에 사람들이 뜸해졌다. 나는 오랜만에 한산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리나에 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을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
리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도 동의를 표했다.
“월식이 일어나는 밤은 불길하다는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이런 날 은 범죄자들이 돌아다니기 딱 좋은 날이어서 말입니다.”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밖은 쳐다 보지도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저희도 오늘은 교대 없이 넷 모두 아리엘 님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기사들을 바라보았 다.
“잠도 안 주무시고요? 다락방을 내 드릴 테니 쪽잠이라도 주무세요.”
“아닙니다, 아리엘 님. 저흰 일주일 은 안 자도 끄떡없습니다.”
멜른이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저었다.
으음. 고맙긴 하지만, 오늘 정말 호위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후작 저인데.
‘뭐, 하긴. 그쪽은 검과 방패로 지 킬 수 있는 곳이 아니지.’
나는 굳은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 다.
밤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하지만 벌써 긴장으로 손끝 이 저릿했다.
‘향수가 효과를 봐야 할 텐데.’
아니, 효과는 있을 것이다.
얼마나 연구하고 또 연구한 작품인 데.
칸이 움직이지 않으면 몰라도 향수 가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 리는 없었 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이 불길한 밤이 지나 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날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 한 줄기 내리지 않는 밤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들여다 보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든 모양이다.
쥐고 있던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방 안으로 어슴푸레한 아침 햇살이 들고 있었다.
‘아침이다.’
나는 벌떡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향했다.
가게 문 앞엔 오늘치 신문이 놓여 있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나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1면에는 이런 헤드라인이 적혀 있 었다.
[케세나 서커스단, 드디어 수도에 상륙!]
‘……휴.’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간밤에 대서특필될만한 범죄는 일
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걸지 도 몰라.’
직접 보는 것보다 확실한 건 없다.
나는 대충 머리를 빗고 세수해서 사람 꼴만 갖춘 뒤, 간단한 외출용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새 일어난 리나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아가씨! 아침부터 외출하시게요? 준비를 도와달라 부르지도 않으시고!”
“됐어. 공들여 꾸밀 것도 없는걸.”
“어디 다녀오시게요?”
“으응. 크뤼거 후작저.”
“크뤼거 후작님께요?”
리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 다.
“같이 갈래, 리나?”
“네! 갈래요!”
“호위는 저희 둘이 맡겠습니다, 아 리엘 님.”
에라스와 멜른이 따라붙었다.
아침부터 친분도 거의 없는 대귀족 의 집에 간다니, 의아해하면서도 모 두 따라붙었다.
우리를 태운 마차는 순조롭게 크뤼 거 저택을 향해 달렸다.
후작저는 수도의 외곽에 위치했다. 대대로 외교 업무를 역임해 수도 출 입이 잦은 크뤼거 후작가의 전통 때 문인 듯했다.
꽤 달린 끝에 우리가 탄 마차는 커다란 철문을 맞닥뜨렸다.
마부가 말을 멈춰 세웠다. 나는 긴 장한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원을 밝혀주십시오.”
후작저의 사병이 앞으로 나서 마차 를 검문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살아있어.’
대문을 지키는 사병 하나까지 몰살 당했다던 원작 속 서술과는 달랐다.
나는 가늘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검문을 통과한 마차는 후작저를 향 해 달렸다.
후작저는 오래된 역사를 증명하듯 무척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차가 멈춰 서자, 후작저의 집사 로 보이는 남자가 저택 밖으로 우리 를 맞이하러 나왔다.
“아리엘 윈스턴 님?”
나는 대문에서 사병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럽게 방문 했지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들어 오시지요.”
다행히 집사는 난데없는 손님의 방 문이 익숙한 듯, 잠시 놀랐을 뿐 곧 능숙하게 나를 안내했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후작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을 바짝 굳혔다.
‘이 냄새는.’
저택 전체에 내가 선물했던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좀 더 알싸하고 기분 나쁜, 내가 선물 하지 않은 낯선 냄새 역시 함께였 다.
나는 재빨리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저택 안은 사용인들로 가득 차 있 었다. 나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깍듯 이 인사를 해 왔다.
“……하아.”
나도 모르게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 다.
모두, 살아있었다.
간밤에 꿨던 악몽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악몽 속에서 후작저엔 사람 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즐비했다. 내 가 선물한 향수병들은 내 무능을 비 웃듯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단순히 칸이 왔다 가지 않은 걸지도 몰라.’
확인을 해야 했다. 파우치 속에 들
고 온 향수병을 꺼내려 할 때였다.
“레이디 아리엘! 아침부터 어쩐 일 이십니까!”
반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이넨 크 뤼거가 휘휘 손을 흔들며 내게 다가 오고 있었다.
나는 공손히 치맛자락을 들어올리 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레이디라면 언제든 방문하셔도 되지요. 하지만 그냥 놀러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사실은 그것이……-”
나는 열심히 준비해 온 핑곗거리를 늘어놓았다.
“죄송해요, 후작님. 실은 제가 며칠 전, 향수를 잘못 드렸지 뭐예요?”
“예에?”
크뤼거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하지만 아주 잘 쓰고 있 었는걸요. 어젯밤에도 잔뜩 뿌리고 잠들었는데 아주 쾌적하게 숙면했습 니다.”
“아아, 효능은 아마 비슷할 거예요. 잘못 드린 향수에는 원래 향수에 딱 하나의 기능을 더 첨가했을 뿐이니 까요.”
“딱 하나의 기능? 그게 뭔지 여쭤 도 되겠습니까?”
역시 크뤼거는 대번에 호기심을 표 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음, 보안 기능이랄까요?”
“ 보안?”
크뤼거가 여전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어떤 분께서 의뢰를 해오셨 거든요. 좀, 뭐랄까…… 안전염려증 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항상 누가 자신을 독살할 거라는 불안 때문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이셨죠.”
“저런……;
크뤼거가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저도 며칠 전까지 시달려봐서 알 지만, 불면증 그거 진짜 독한 놈이 지요. 그래서요? 그 가엾은 손님이 어떤 향수를 의뢰한 겁니까?”
“그게 좀, 특이한 요구였는데…… 독극물 위에 뿌리면 즉시 색을 바꿔 서 알려주는 향수가 필요하다고 하 시더군요.”
“오! 은 식기처럼 말입니까? 그런 게 향수로도 가능합니까?”
“글쎄요. 저도 그분이 왜 굳이 조 향사인 절 찾아오신 건진 모르겠지
만
아
나는 그 부분은 대충 얼버무렸다. 열심히 준비해 간 이 시나리오엔 잘 들여다보면 몇 가지 구멍이 있긴 했 다.
“기왕 주신 의뢰이니 저도 성심껏 연구했죠. 그 결과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긴 했어요.”
“그게 그제 밤 레이디가 제게 잘못 주신 향수인 겁니까?”
“네, 그렇죠. 아. 하지만 아직 미완 성품이긴 해요. 그 향수만 뿌려선
독극물을 판별할 수 없거든요.”
“그러면……?”
“이 기체를 추가로 분사해야만 해 요.”
나는 가지고 온 향수병을 품에서 꺼냈다. 향수병이라기보다는 거의 분무기에 가까울 정도로 커다란 병 이었다. 안에는 색깔 없는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오오!”
하이넨이 신기한 얼굴을 했다.
“정말 그 향수와 이걸 같이 뿌리면 독극물의 색이 변합니까?”
“네, 흥미 있으세요?”
“그럼요. 저도 독살 위협을 받지 않는 건 아니라서요.”
“한 병 드릴 수도 있어요.”
“정말입니까, 레이디!”
하이넨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가 건넨 향수병을 받아 갔다.
“레이디께선 정말 자애로우시군요.
이렇게 주시는 대로 넙죽넙죽 다 받 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기서도 향기가 나나요?”
“글쎄요. 맡아 보시겠어요?”
“궁금하군요!”
그렇게 말한 크뤼거가 거침없이 향 수병을 돌려 열었다.
크뤼거의 손가락이 향수병 위를 누 르자, 시원한 소리와 함께 액체가 분사되 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음?”
크뤼거가 고개를 갸웃했다.
향수를 분사한 부분을 중심으로, 희미하게 보라색 구름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