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17화 (117/153)

〈118화〉

# 호 호

“그래. 그 여자의 가게에 하이넨 크뤼거가 방문했다고?”

“예, 마스터.”

“대화 내용은?”

“그게, 그것이…… 가게를 둘러싼 결계가 너무 강력해 침투할 수 없었 습니다.”

부복한 남자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개 향수 가게를 위해서라기엔 지 나칠 정도로 과한 보호였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손수 설치한 보 호 결계는 무려 다섯 겹이었고, 사 각지대마저 에반스 기사단의 엘리트 기사들이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었 다.

“이상하단 말이야.”

붉은 머리의 청년이 턱을 쓰다듬었 다.

“세드릭 에반스가 그렇게까지 그 여자를 싸고도는 이유가 뭘까. 갈수 록 더 궁금해진단 말이지.”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 릅니다.”

“그 여자가 마계의 냄새를 인공적 으로 재현해낼 수 있다는, 그 소문 말이지.”

한때, 아리엘 윈스턴이 세드릭이 좋아하는 ‘향기’를 만들어낼 수 있 다고 떠벌리고 다닌 적이 있었다.

다들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아

리엘의 수작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칸의 길드 마스터인 그는 ‘그 향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여자를 이렇 게까지 물고 빠는 것도 이해가 되 지.”

붉은 머리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 다.

“그런 재능이라면, 나도 탐이 날 정도니까.”

붉은 머리 남자는, 얼마 전 망원경 너머로 보았던 금발의 여자를 떠올 려 보았다. 깨끗한 청록색 눈과 생 기로 빛나던 두 뺨이 기억에 남았 다.

“갖고 싶다. 가질 수 있을까?”

“송구하오나,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결계도 결계지만, 호위들 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닥쳐. 방법은 찾다 보면 어떻게든 생기는 거 몰라?”

붉은 머리 남자가 눈빛을 바꾸어 제 심복을 노려보았다.

“괜히 산통 깨지 마, 진. 짜증 날 뻔했잖아.”

남자의 말에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괴수가 호응하듯 낮게 으르렁 거렸다.

진이라 불린 남자는 꿀꺽 침을 삼 켰다.

예, 죄송합니다. 마스터.”

단단한 방패에도 틈은 있는 법이었 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요새라 하더라 도 허를 찌르면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향기 같은.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겠 지?”

“물론입니다, 마스터.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때를 기다리 는 일뿐입니다.”

“그래.”

붉은 머리 남자가 괴수를 쓰다듬으 며 설핏 미소 지었다.

“하이넨 크뤼거가 갑자기 왜 그 여 자를 찾아간 건지 궁금하긴 하지 만…… 뭐, 죽기 전엔 다들 안 하던 짓을 한다고들 하니까. 그런 거 아 니겠어?”

“맞는 말씀이십니다, 마스터.”

“제 장례식에 피울 향이라도 의뢰 하러 갔나 보지. 아하하.”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 다.

“마스터. 5황자가 방문했습니다.”

“또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 다.

“여기가 제 놈 안방인 줄 아는 거 아냐?”

“의뢰 마감 일자가 얼마 남지 않았 다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진짜 귀찮은 놈이네. 확 여기서 먹어버리라고 할까?”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괴수의 턱을 긁었다. 괴수가 그르릉, 섬뜩한 소리 를 냈다.

“그래도 상대는 황족입니다, 마스 터.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황제도 이제 거의 갖다버 리다시피 한 놈인데, 뭐.”

남자가 낄낄거렸다.

5황자, 아제키안 벨레르가 길드 문 을 두드렸을 땐 꽤 놀랐었다.

심지어 의뢰 목표로 세드릭을 지목

했을 땐 더더욱.

그 눈빛에 절절히 어린 증오와 살 기를 보고 살짝 마음에 들뻔하기도 했었다.

‘계약 선물로 준 불법 시가 몇 대 에 흐물흐물 녹아버릴 줄은 몰랐지 만.’

꼴에 황족이라고 곱게 자랐던 건 지, 아제키안은 허무하리만치 빠르 게 구제 불능의 중독자가 되어 버렸 다.

그게 벌써 소문이 나, 안 그래도

아제키안을 탐탁잖게 여기고 있던 황제는 이제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한다는 제보를 들었다.

“정중히 내쫓아. 의뢰 결과는 곧 신문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 지 말라고 하고.”

“예, 마스터.”

머지않아 칸이 돌아왔음을 전 제국 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드릭 에반스는 어떤 얼굴 을 할까?

이십 년 전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몸서리칠까?

아니면 복수심을 불태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멀쩡한 척 살아가고 있지만 세드릭 에반스 는 사람 껍질만 뒤집어쓴 반인반마 의 괴물일 뿐이다. 조만간 전 제국 도 그 사실을 알게 될 터다.

그 뒤엔, 고립된 에반스 공작을 낼 름 주워서 다시 실험체 신세로 만들 면 재밌을 것 같았다.

아. 겸사겸사 그 여자를 데려가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둘이 한 방에 가둬 놓고, 세드릭

에반스를 강제로 폭주시키면 어떻게 될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겠다!’

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생각만 해도 벌써 신이 났다.

호 쏘 쏘

다음 날 아침, 인정하고 싶지 않지 만 나는 일어나자마자 세드릭의 얼 굴을 떠올렸다.

‘정말 찾아올까?’

매일매일 삼십 분간 나를 보러 오 겠다던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아른 거렸다.

만약 약속이 지켜진다면 그는 오늘 부터 나를 찾아와야 했다.

가게 문을 열고, 열심히 손님들을 응대하면서도 나는 종종 시계를 바 라보았다.

‘벌써 오진 않겠지?’

아침 열 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고.

‘점심은 다른 데서 먹나?’

정오에는 그런 의문을 가졌고.

‘……오늘은 안 오나?’

오후 네 시에는 그런 아쉬움을 품 었다.

뒤늦게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속 으로 아뿔싸를 외쳤다.

‘당했다.’

세드릭은 매일매일 나를 삼십 분 동안 찾아오겠다고만 했지만, 그렇 게 예고함으로써 하루 종일 나를 신 경 쓰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엄청난 고단수야……-’

계산하고 한 거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곤 애써 세드 릭 생각을 지워냈다.

‘일, 일에 집중하는 거야.’

평소보다 더 열심히 손님 응대에 최선을 다하던 중.

“어, 어라. 저거……,”

“에반스 공작가 마차 아니야?”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드디어 고단수께서 행차하신 것 이 다.

‘에반스 공작가’라는 말을 듣자마 자 나는 삐딱한 시선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은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꺄악!”

“어머나! 진짜야!”

나는 고개를 빼 유리창 너머로 가 게 밖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멀리 서 세드릭 에반스가 사람들의 시선 을 한몸에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가게가 문을 닫지 않은 시간 이었다. 북적이던 손님들은 세드릭 의 등장에 난리가 났다.

“나 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야.”

“미치겠다 녀.”

초상화가 걸어 다

음…… 원래 이렇게 연예인 같은 취급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황궁이나 연회장이 아 닌 곳에서 세드릭을 만나는 건 오랜 만이 었다.

연회에서는 체면 때문인지 주변 사 람들이 그에게 점잖게 인사를 건네 는 모습만 봤었는데, 이곳은 공개적 인 자리라서 그런지 다들 흥분을 감 추지 못했다.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여기도 봐 주세요!”

직원들이 기껏 잡아 놓은 질서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옆에 있던 직원에게 손님 응 대를 맡기고 황급히 세드릭을 맞이 하러 나갔다.

나를 발견한 세드릭의 얼굴에 반가 움이 번졌다.

“레이디, 좋은 오후입……/

“이리로 오세요, 전하!”

나는 얼른 세드릭을 데리고 뒤뜰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한숨 소 리가 들렸다.

인적 없는 뒤뜰 구석까지 세드릭을 끌고 온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삐딱 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영업방해예요, 이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지 금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들렀습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니.

예상치 못한 돌직구에 몸이 휘청거 렸다.

안돼, 정신 차리자!

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오늘처럼 내내 시계만 쳐다보며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론 시간을 정하고 찾아오라고 말해야 했다.

“전하. 어제는 경황이 없어 말씀드 리는 걸 잊었는데, 앞으로는 시간을 정해서……;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을 쳐다본 순 간, 나는 말을 잊었다.

‘뭐, 뭐지.’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어딘가 모르게 세드릭의 얼굴 이 평소와 달랐다.

왜지?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오늘 따라 더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곧 나는 차이점을 깨달을 수 있었 다.

‘누구야. 누가 파란색 입는 법을

알려줬어?’

평소 짙은 색을 즐겨 입던 세드릭 은 오늘따라 푸른 원색의 정복을 차 려 입고 있었다.

새파란 빛깔이 그의 까만 머리카락 과 대비되어 황홀한 조화를 일으켰 다.

‘원색이 왜 이렇게 잘 받냐고!’

옷의 색깔만 달라졌을 뿐인데, 마 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렸다.

“오, 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정말입니까? 자주 입어야겠군요.”

세드릭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 을 피했다.

새삼 나와 세드릭이 인적 없는 곳 에 단둘이 서 있다는 사실이 실감 되었다.

“오늘은 정말 얼굴만 뵙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애석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오후 여덟 시 경에 찾 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라면 레 이 디 께서도 괜찮으시 겠지 요?”

“……괜, 흠, 네. 괜찮아요.”

괜스레 단둘이란 사실을 의식한 나 머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헛 기침을 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바로 떠나실 건가요?”

“네, 한 가지만 여쭌 뒤에.”

“……뭔가요?”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글쎄요. 가게 문을 일찍 닫지 않을까 싶네요. 월식이 일어나는 밤 이니 손님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요.”

“그러시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월식 일엔 유독 범죄 가 자주 일어나죠. 기사들에게도 내 일은 특별히 경호에 주의를 기울이 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전하께 서도 몸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리엘.”

예고 없이 불린 이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피처럼 붉은 적안이 내 얼굴을 천

천히 훑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을 테니 당분간은 참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낮아진 목소리로 세드릭이 속삭였다.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 도,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기대 혹은 두려움이 섞인 눈 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여기서, 입 맞추고 싶습니다,

아리엘.”

“허락만 해주신다면.”

허를 찔린 나는 고개를 젓지도 끄 덕이지도 못했다.

세드릭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조심 스레 내 턱을 쥐었다.

“가만히 계시는 건 무슨 의미입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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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나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 도 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귓가로 심장 뛰는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아무 말도 안 하시면, 저 좋을 대 로 해석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드릭이 훌쩍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밀기 위해 내밀었던 손이 어정쩡히 그의 어깨 위에 얹혔다.

세드릭은 마치 유예시간을 주듯 천

천히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체 향에 머리가 와인을 들이부은 듯 어 지러워졌다.

그리고 곧, 나비가 내려앉듯 가볍 게,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흠칫 굳으며 세드릭의 옷깃을 붙잡았다.

서서히 벌어진 세드릭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그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가볍게 맞닿았던 입술은 곧 조금씩 더 깊게 겹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세드릭

의 옷깃을 붙잡았다.

세드릭에게서 배어져 나오던 침엽 수 향이, 순식간에 농밀한 사향으로 변해 온몸을 짓눌렀다.

세드릭은 조금씩 각도를 바꿔 가며 내 입술을 베어 물었다. 언제나 정 갈하던 그의 호흡이 조금씩 더 엉망 으로 흐트러졌다.

“……큰일이네요.”

한참 뒤 겨우 입술을 떼어낸 세드 릭이 속삭였다.

“삼십 분은커녕, 평생이라도 이러

고 있고 싶습니다.”

세드릭이 내 이마 위로 제 이마를 맞댔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 다. 이제야 감미롭고도 벅찼던 입맞 춤이 끝난 건가 싶었던 순간, 다시 그의 입술이 덮쳐들었다.

나는 또 한 번 속절없이 눈을 감 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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