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저, 전하? 갑자기 표정이 안 좋으 십니다만…… 아닉시아 향을 대령할 까요?”
리키온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말 했다.
세드릭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 저 었다.
“됐다.”
요즘은 아닉시아 향을 흡입하지 않 아도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인공적으로 재현한 향기와는 비교 도 되지 않을 진짜 ‘해독제’가 근처 에 있기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리키온. 아젠드릭에선 아직 연락이 없나?”
“아, 넵! 방금 답신이 왔습니다!”
리키온은 방금까지 매만지고 있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세드릭의 표정이 하도 심각해 말 붙일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젠드릭의 전언에 따르면, ‘의식’ 은 한 달 안으로 준비를 끝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달이라.”
세드릭은 그 단어를 조용히 되뇌었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하필이면 아리 엘에게 다짐했던 기간과 꼭 일치하 다니.
‘우연일까. 아니면
세드릭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 신을 내려다보았다.
계획을 가다듬으면 가다듬을수록 불쾌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 왔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계획이었기 에 더더욱 이상했다.
순서대로 실행만 한다면 칸을 제거 하는 것은 물론, 평생 아리엘을 괴 롭혀왔을 고통으로부터 그녀를 구해 낼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불 안한 거지?
그는 조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이 피어오르 는 것은 어째서일까.
“더 철저히 검토해야겠군.”
낮게 중얼거린 세드릭이 리키온을 돌아보았다.
“지하 수로의 지도를 가져와.”
“예, 전하.”
리키온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 # 고
“으아아아.”
나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옆에서 차에 꿀을 타던 리나가 소 스라치게 놀라 되물었다.
“아가씨, 또 왜 그러세요!”
“리나, 나……”
나는 리나의 소매를 잡고 훌쩍였다.
“집중이 하나도 안 돼. 자꾸 머리 가 어지럽고……;
무엇보다 심장이 자꾸만 트램펄린 을 탄 듯 쿵쿵 뛰어댔다.
머릿속으로 어젯밤의 기억이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포개지던 그때의 감촉이 떠 오를 때마다, 나는 흐물흐물 책상 위로 미끄러져야만 했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드릭.”
바보 세
나는 그의 이름을 리나 몰래 조용 히 입에 담았다.
앞에 욕을 붙였더니 좀 부를 만한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는 잘만 부르던 이름인데, 어째서인지 그의 앞에서 대놓고 부 르려고 하면 부끄러운 나머지 마음 대로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가능할까……-”
자꾸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나를 리나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 다.
“아가씨…… 그렇게 힘드시면 제게 털어놓으세요. 나누면 좀 기분이 나 아지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런가……,”
나는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응접실 안엔 나와 리나밖에 없었다.
나는 리나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하 고 속삭였다.
“리나, 있잖아.”
“네. 아가씨.”
“혹시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키스해본 적 있어?”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원래 다 나 처럼, 아니! 사,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정신이 쏙 빠지는 일인 건지 궁금해서 말야……!”
나는 창피함도 잊고 횡설수설했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보면 신체의 한 부분끼리 접촉한 것뿐인 데……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을 일 인가 싶어서.
다른 연인들이나 부부들도 이렇게 영혼이 반쯤 가출한 채로 살아가는 걸까?
‘너무 벅차다고……/
나는 또 폭 한숨을 내쉬었다.
세드릭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를 보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엉망진 창이 었다.
“……아리엘 아가씨.”
“ 응‘?”
“혹시 그날 있었던 일은…… 그게 전부인 건가요?”
“ 으응 2”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리 나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나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에반스 전 하께 안겨서 오셨던 날, 키스 이상 의 진도는 나가지 않으셨는지 해서 요.”
나는 입을 벌리고 리나를 쳐다보았 다.
그리고 몇 초 뒤, 내 얼굴이 곧 펑러 질 듯이 벌게졌다.
“키, 키스 이상의 진도라니…… 리
나,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입맞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 찬데, 그 이상이라니…… 과부하가 걸린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던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으셨군요. 아가씨의 그 반응만 봐도 알겠어요.”
“아니, 키스를 했다니까?”
“그렇군요. 그러셨군요. 하아…… 전 또 뭐라고.”
갑자기 어제 아침, 세드릭이 돌아
간 이후가 떠올랐다.
기사들은 새빨개진 얼굴로 자기들 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복창했 고, 리나는 지나칠 정도로 내 건강 상태를 체크했었지.
숙취를 걱정해서인 줄 알았는데, 설마 다른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민망한 나머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리나가 진지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아가씨, 만약 에반스 전하께서 인 사불성인 아가씨께 손을 대었다 면…… 전 지금이라도 횃불을 들고
공작저로 쳐들어갔을 거예요.”
“ 으응?”
“하지만, 아무리 봐도 쌍방이 맞는 것 같아서…… 방화 계획은 접어두 기로 했답니다. 하지만 아가씨, 기억 해 주세요.”
“으으응?”
“저 리나 아스웰, 아가씨를 울리는 사람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횃불과 기름통을 들고 달려갈 것이라는 걸 요.”
“ 리나……!”
내용은 다소 무시무시했지만, 나는 감격하고 말았다.
그래, 날 위해 방화도 불사하겠다 는 사람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리나. 나도 리나한테 나쁜 짓 하 는 놈이 있으면 꼭 횃불을 들게! 기 름통도!”
나는 리나를 와락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나를 생각해주는 그녀의 마 음씨가 너무도 고마웠다.
이제 세드릭 생각은 그만 하고, 생 산적인 일을 하는 거야. 생산적인 일.
“아가씨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그
러니까 진정하시고, 꿀차 드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응, 고마워!”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었을 때 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헉.’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세 드릭이 벌써 찾아온 걸까?
“제가 나가볼게요.”
리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곧 문 너 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안녕, 아가씨. 레이디 아리 엘을 만나러 왔는데, 제대로 찾아온 건지 모르겠네.”
앗.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넨 크뤼거의 목소리였다.
영업시간도 아닌데 가게를 찾아오
다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내가 준 향, 제대로 맡았구나.’
성공의 예감이 나를 덮쳤다.
나는 오랜만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 를 얼굴에 걸쳤다.
‘좋아. 순조로워, 순조로워.’
나는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 를 발견한 크뤼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레이디 아리엘! 좋은 저녁입니다.”
“네, 정말 좋은 저녁이네요, 후작님. 누추한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신가요?”
“누추하다니 요. 이 렇 게 우아하고 멋진 가게를 두고 어찌 그런 말씀 을. 가게가 듣겠습니다, 하하.”
크뤼거가 매력적으로 웃어젖혔다. 모르긴 몰라도 사교계에서 영애들깨 나 울렸을 법한 외모였다.
내가 용건을 묻기도 전에 크뤼거가 먼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어, 레이디. 실은 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후작님.”
“어제 선물해 주셨던 향수를 사용 해 보았습니다.”
“어머, 그러셨군요.”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효과는 있으셨나요?”
“웬걸요! 어젯밤만큼 잠을 푹 자본 건 근 몇 년간 처음이었습니다!”
크뤼거가 신이 난 듯 눈을 반짝였다.
“대체 향수에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레이디의 향수 가게가 매일 같이 손님들로 붐빈다는 소문은 익 히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 습니다. 알았더라면 저도 진작 줄을 섰을 텐데요!”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후작 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저도 기뻐요.”
생긋 웃은 내가 말했다.
“하지만 후작님께선 줄을 설 필요 가 없으시죠. 에반스 공작님의 친한
친우분이 시 잖아요?”
나는 며칠 전 댔던 핑계를 또 한 번 더 내뱉었다.
내가 여태까지의 원칙을 깨고 하이 넨 크뤼거를 특별 대접하는 이유.
그건 모두 세드릭 에반스 덕분이었다.
‘진짜 이건…… 눈물 겨운 의리다.’
나는 스스로의 노력을 새삼 추켜세 웠다.
세드릭도 이 사실을 좀 알아야 할 텐데.
나는 크뤼거를 향해 활짝 웃어 보 였다.
“그러니 후작님께는 향수를 무료로 제공해 드릴게요.”
“네에? 정말입니까?”
크뤼거가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친구 잘 둬서 덕 본다는 게 이런 이야기였군요! 하지만 레이 디, 저는 괜찮습니다. 값은 치러야 하니까요.”
크뤼거의 수행원이 주섬주섬 지갑 을 꺼냈다.
“아, 제 부인께서 레이디의 굉장한 팬이라는 것 말씀드렸습니까? 부인 께서도 오래간만에 푹 잤다며 몹시 기뻐하시더군요.”
크뤼거가 싱글벙글 웃으며 금화 더 미를 내밀었다.
“어제 주신 향수, 다섯 병 더 부탁 합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잠시만 기다
리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금화를 챙기고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내 손엔 미리 준비해 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주문하신 향수예요.”
“예, 감사합…… 어라, 왜 이렇게 묵직합니까?”
의아한 눈으로 쇼핑백 안을 들여다 보던 크뤼거의 눈이 커졌다.
“레, 레이디. 왜 이렇게나 많은 양 을?”
“효과가 좋았다고 하시니 기뻐서 요. 어제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아예 방향제처럼 온 건물 안에 뿌리 시면 더 효과가 탁월할 거예요.”
“예에? 그건 낭비가 아닐지……『
“제가 이렇게나 많은 양의 향수를 드렸는데 벌써부터 걱정하실 필요가 있나요?”
나는 싱긋 웃었다. 저 쇼핑백 안엔 무려 스무 개의 향수병이 들어가 있 었다.
“모자라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더 드릴 테니. 아, 그리고 주의하셔 야 할 점이 있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곤 괜히 전 문적인 용어를 뒤섞었다.
“그 향수는 효과가 좋은 만큼 조금 특별하거든요.”
“특별하다고요?”
순식간에 말려든 크뤼거가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네. 향수의 효능을 제대로 보시려 면, 적어도 일주일간은 매일매일 사 용하셔야 해요. 중간에 끊기면…… 다신 효과를 보기 어려우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다시 불면증이 생길지 도 몰라요.”
“헉.”
크뤼거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음산히 덧붙였다.
“피곤한데 잠이 안 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 진 않으시죠?”
“절대. 절대로요, 레이디!”
크뤼거가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이마를 훔쳤다.
나는 내가 듣기에도 좀 약장수 같 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향수만 꾸준 히 사용하신다면,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레이디.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주 시는 이유가 뭡니까?”
다시 스무 병의 향수병을 들여다본 크뤼거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었 다.
나는 환한 미소를 걸쳤다.
“말씀드렸잖아요? 후작님께선 에반 스 공작 전하의 가장 친한 친우분이 시니까요.”
“레이디……!”
크뤼거가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레이디께선 정말 세드릭 그 친구 를 아끼시는군요!”
“으음, 네에, 뭐.”
나는 어정쩡히 말꼬리를 늘이며 뺨 을 긁적 였다.
민망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내가 세드릭을 아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계획이 있다곤 해도, 비싼 향수를 스무 병이나 공짜로 준 걸 보면, 내가 세드릭을 아끼고 있긴 한가 봐.’
크뤼거는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걸 치며 퇴장했다.
나는 멀어지는 크뤼거의 마차를 보 며 생각에 잠겼다.
이틀 뒤, 벨레르의 밤하늘에 월식 이 일어난다.
달빛이 자취를 감추는 밤. 유난히 어둡고 불길한 그 밤에, 벨레르의 사람들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절대 외출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범죄자가 활개 치기 가장 좋은 환 경이었다.
그리고 그 밤에 하이넨 크뤼거는
살해당한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물론, 사용인 한 명까지 남김없이 절명해버린 유 례없는 몰살 사건.
‘저택 대문에는 붉은 글씨로 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했지.’
그 사건을 발판으로, 칸은 범죄계 의 황제로써 화려한 재데뷔를 선언 한다.
그리고 뒷골목 범죄자와 돈 많은 졸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칸이 다음으로 설정한 타겟은……오
이십 년 전, 완성하기 전 빼앗겨 버린 그들의 역작. 세드릭 에반스였 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 지만.’
나는 흐릿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먹구름에 반쯤 가리운 달이 음 산한 빛을 내뿜었다.
이미 원작 속 시간의 흐름과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은 많은 부분이 달라 져 있었다.
칸이 정말 이틀 뒤, 월식 날 밤에
칸이 움직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원작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 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제 남은 건 결과를 지켜보는 일뿐.
나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크뤼 거의 마차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그럴 수 있겠죠? 후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