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뭐, 뭘 어떻게 노력하신다는 건가요.”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글쎄요. 가능한 모든 수는 다 써 볼 생각입니다.”
손등에서 살짝 입술을 뗀 세드릭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수라니…… 세드릭이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데……!’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
지금은 내게 무척 중요한 시기였으 니까.
나는 최근 세드릭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황후를 만나고, 밤새 향을 연구하고, 크뤼거 후작을 만난 것도 다 그 계획의 일
환이 었다.
이제야 그 기나긴 노력의 결실을 보나 싶었는데, 갑자기 연애라니……오
이렇게나 중요한 순간에 다른 것까 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안 돼요.”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 당신을 위한 거니까 이해 좀 해 줘요. 무척 중요한 순간이니까!
“지금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
어요.”
단호한 내 말에 세드릭은 의외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호점 계획 때문이시겠지요.”
……아닌데.
“한창 사업을 확장하셔야 할 때이 니, 물론 이해합니다.”
아니. 사업이 아니라 너 때문인데요.
2호점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앞에
서 너무 많이 떠들어서인지, 세드릭 은 내가 사업 확장으로 바쁘다고 생 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답답함을 억눌렀다. 어찌 됐 든 세드릭을 납득시키기만 하면 되 니까.
세드릭에 대한 감정은, 일단 그를 구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세드릭이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 했다.
“저를 위해 삼십 분만 시간을 내주 십 시오.”
“……네?”
“물론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벌렸다.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인 그가, 매일 삼십 분씩 내게 할 애하겠다니.
곧이곧대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룻밤 만에 사람이 너무 바뀌었 잖아……? 내가 알던 세드릭 맞아?’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무척 낯설 게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세드릭 에반스 가, 하루에 삼십 분 만이라도 제게 할애해달라고 부탁하는 캐릭터였 던가?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세드릭이 갑작스럽게 요절하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 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눈도 못 마주치겠어……/
나는 열 오르는 심장을 간신히 진 정시키며 한숨 지었다.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저 의지가, 얼마나 갈까?’
세드릭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 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세드 릭은 내가 허락하는 순간부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 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았던 시 간축을 떠올려 보았다. 갑자기 차분 한 기분이 들었다.
칸이 원작보다 빨리 움직이고 있었 다. 그건 곧 원작의 다른 굵직한 사 건들도 예정보다 빠르게 일어난다는 얘기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세드릭과 여 자주인공의 만남 또한 머지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표정 없이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과연 저 각오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까?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운명의 상대’라는 게 얼마나 무시 무시한 건지, 숱하게 로맨스 소설을 읽어온 나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순간, 세드 릭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었 다. 나와의 일들은 모두 옛 과거로 치부되 겠지.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오
‘좀 열 받을 것 같은데.’
나는 어느새 싸늘해진 눈으로 천천 히 세드릭을 훑었다.
갑작스러운 내 표정 변화에 세드릭 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던 나는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세드릭의 눈이 커졌다.
“만약 찾아오신다면, 문은 열어드 릴게요.”
내가 듣기에도 지나치게 차가운 목 소리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놀란 듯 얼어 붙었던 세드릭은 잠시 뒤 환한 웃음 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리엘.”
……음, 저 호칭에도 이제 익숙해 져야겠지……?
나는 어느새 거리낌 없이 내 이름 을 입에 담는 세드릭을 바라보며 가 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세드릭은 가만히 창밖을 노려보았 다.
‘자신 있는가?’
그렇게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아리엘에게는 호기롭게 한 달만 시 간을 달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쉽 사리 한 달 뒤를 상상할 수 없었다.
한 달 뒤면, 과연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어줄까?
전하라는 딱딱한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줄까?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 었으니까.
‘한심하군……?
눈을 내리깔며 세드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저를 위해 삼십 분만 시간을 내주 십시오. ’
어떻게든 아리엘을 붙잡아야 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여지라도 남겨야 희망을 꿈꿀 수 있 었으니까.
그는 아리엘이 어젯밤의 일을 ‘실 수’로 여기는 것만큼은 끔찍하게 싫 었다.
‘한 달.’
세드릭은 그 단어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해 내기에 불가능한 시간도 아니었다.
그는 한 달 안에 다른 왕국으로 넘어갔던 광산 채굴권을 얻어낸 적 도 있었고, 야수로 드글거리던 평원 을 홀로 깨끗이 정리한 적도 있었 다.
한 달은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었 다.
‘하지만.’
세드릭은 속으로 조용히 셈을 해 보았다.
하루에 삼십 분씩 한 달이면, 고작 구백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터무니없이 짧 은 시간 같기도 했다.
‘……한심해 죽겠군.’
세드릭은 자꾸 약한 소리를 하는 자신에게 혀를 찼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리엘이 한 달 이라는 시간을 제게 허락했다는 것 이었다.
그 안에 자신은 그녀의 마음을 얻 어내야만 했다.
툭. 세드릭은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리키온은 그런 주인을 바라보며 뒤 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저렇게 고뇌하시다니. 굉장히 심 각한 일인 게 틀림없어.’
그러나 세드릭은 깊이 한숨만 내쉴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보좌 관으로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리키온은 착잡한 기분이 들 었다.
리키온이 애꿎은 서류만 만지작거
리고 있을 때, 세드릭이 드디어 입 을 열었다.
“리키온.”
“옙!”
리키온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허심탄회하 게 대답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예, 물론입니다, 전하!”
리키온이 잔뜩 기합 들어간 목소리 로 외쳤다. 세드릭이 미간을 좁히곤 물었다.
“내 장점이 뭐지?”
“……예?”
“내 장점이 뭐냐고 물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군. 리키온이 눈 을 끔뻑였다.
대답이 없자 세드릭이 답답한 듯 리키온을 돌아보았다.
“ 없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당연히 전 하의 장점은 무궁무진하지요!”
리키온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너무 많아서 잠시 생각 중이었습 니다. 예! 어, 어디 보자. 뭐니 뭐니 해도 사업 수완은 이 제국에서 제일 이시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탄자리와의 연계 사업을 꼭 전 하께 맡겨야겠다고 긴히 부탁하셨
“그런 것 말고.”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시, 시장 예측 능력도 대단히 뛰 어나시죠! 텅스텐 가격이 정말로 그 렇게 급락할 줄 누가 예상했겠습니 까? 전하니까 가능하셨던 일이었지 요!”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세드릭이 제 이마를 쓸어올렸다. 리키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러면요?”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을 만한 장 점 말이다.”
“……예?”
“보통 영애들은…… 남자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지?”
“아, 그, 그런 질문이셨군요……,”
연애 고민이었단 말인가!
리키온은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렸 다.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세 드릭이 고개 돌려 리키온을 물끄러 미 쳐다보았다. 리키온은 저도 모르 게 더듬거렸다.
“어, 얼굴이요?”
“뭐?”
“전하의 장점이라고 하면 얼굴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요?”
“ 얼굴
세드릭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 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가?”
“물론이죠!”
리키온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 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드릭이 그런 소릴 하니 어이가 없고 황당할 지경이었다.
“내면이 어쨌느니 저쨌느니 해도, 이성 관계에선 일단 얼굴이 반 이상 먹고 들어갑니다. ……설마, 정말 몰 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니시 죠? 그냥 절 놀리시는 거죠?”
세드릭은 리키온의 말을 귀담아듣 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아리엘은 가끔씩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때가 있긴 했 다.
특히 자신이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냥 측은지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던 걸까?
아니, 아니다.
아리엘의 마음을 얻는 열쇠가 그렇 게 하찮은 것일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드릭은 입 을 열었다.
“재단사에게 연락을 넣어라. 당장 이쪽으로 오라고 해.”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일단 시도해볼 수 있는 건 전부 시도해봐야 했다.
세드릭은 다시 깊이 고민에 잠긴 눈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어둑해진 창 위로, 어젯밤 의 광경이 성에처럼 어른거렸다.
‘하지만, 싫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아리엘에게 속삭이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스스로가 얼마나 바보처럼 긴장 하고 숨죽였는지도.
잠시 뒤, 아리엘이 살며시 눈을 감 던 모습도.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 던 감각도.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 는데.’
세드릭은 쓰게 웃었다.
그에게도 계획이란 것이 존재했었 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화려함과 우아함의 극치를 달린다. 그만큼 연 회에서는 성사되는 커플이 많은 편 이었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자정 종이 울리는 순간 황실 마법사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장엄하고 로맨틱 해서, 그 광경을 본 이들은 누구나 벅찬 표정을 지었었다.
세드릭은 그 불꽃놀이를 배경 삼 아, 아리엘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에게 무척 중요한 시점이었다. 오랜 세월 짊어지고 있 는 고통으로부터, 칸의 위협으로부 터 그녀를 지켜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걸 잘 알고 있으면 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마 음에만 담아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 다.
‘다짜고짜 키스부터 할 생각은, 맹 세코 아니었지만.’
세드릭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을 되돌
려준다고 해도 거절할만큼 달고 황 홀했다.
아리엘의 입술 위로 제 것을 포갰 던 순간과 그녀의 입술이 기꺼이 침 입을 허락하며 벌어지던 순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꿀도 그보다 감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벽하다 못해 벅차오르는 순간이 었다.
잠시 뒤, 아리엘이 그의 품에서 기 절하기 전까지는.
‘아리엘!’
세드릭은 제 품에서 허물어진 아리 엘을 황망히 내려다보았었다. 살면 서 그렇게 놀란 적이 또 있었을까.
실험 후유증이 재발한 걸까, 터질 듯한 심장을 억누르며 재 보았던 아 리엘의 맥박은…… 놀랍도록 평온했 었다.
‘고, 공작 전하. 영애께서는…… 그 저 잠드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호출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러스 터도 그렇게 진단했다.
‘아무래도 만취하신 모양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키스를 했다.
그 순간 세드릭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강렬한 자기 혐 오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