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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14화 (114/153)

〈115 화〉

얼굴도 가리고 있으라고 할까? 심 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리나가 뛰어들었다.

“에반스 공작 전하!”

내 앞을 가로막은 리나가 비장히 외쳤다.

“아가씨에게서 물러나 주세요!”

세상에.

나는 감격한 눈으로 리나의 등을 바라보았다. 날 지키고 선 등에서 비장한 결연함이 느껴졌다.

‘세드릭을 그렇게 어려워하던 리나 가……!’

리나의 우정과 충심에 때아닌 감격 에 젖어 있는데, 세드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레이디. 물러나겠습니 다. 그러니 부디 진정하세요.”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난 세드릭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레이디. 어젯밤 일은……『

“잠깐! 잠깐! 그만!”

나는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하면, 어젯밤 일은 필름 이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와인 뒤 에 마셨던 샴페인 한 잔이 결정타를

날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억만큼은 선명히 떠올랐다.

내 어깨를 애틋하게 감싸던 세드릭 의 손길. 폐부를 가득 채웠던 타인 의 체향. 밤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던 폭죽 소리……오

그리고, 포개졌던 입술이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러웠는지도.

“아가씨!”

리나가 황급히 나를 불렀다.

“세상에,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 지셨어요! 괜찮으신 건가요?!”

“괘, 괜찮아. 괜찮아!”

나는 얼른 얼굴을 가렸다.

세드릭 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지다 니…… 너무 창피해서 접싯물에 코 를 박고 싶었다.

얼굴을 가린 채 나는 더듬더듬 말 했다.

“전하. 저, 저는 아직 받아들일 준 비가 안 됐어요.”

“레이디……/,

“어, 어젯밤 일들이 시…… 실수라 고는 하지 않겠지만…… 모르겠어 요. 아직은 너무 혼란스러워요.”

나는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 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걸 모르 는 일이라 부정하면서까지 세드릭을 상처주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나 역시 어제 일을 부정 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세드 릭을 똑바로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키, 키스…… 키스를 했잖아!’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건 단순한 입맞춤 따위가 아니었 다. 귀여운 ‘베이비 키스’였으면 이 렇게까지 화끈거리지도 않았을 거 다.

‘으아아아!’

잠시 어젯밤 기억을 돌이킨 나는

다시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세드릭을 마 주 보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드릭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물론 혼란스러우시겠지요. 제 잘 못입니다. 제가, 충동을 참지 못했습

니다.”

고해하듯 세드릭이 말했다.

리나와 기사들이 혼란스러운 눈으 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눈엔 오직 눈앞의 세드

릭만 보였다.

“그러니, 제가.”

세드릭이 결연한 얼굴로 나를 내려 다보았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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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게 해 주십시오. ……부디.”

정중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

내 얼굴은 또 펑 소리를 내며 터

져 버 렸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말 했다.

“……이젠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거예요?”

“레이디께서도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나는 손 틈새로 세드릭을 쳐다보았 다.

세드릭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더없 이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드릭이라고 불러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다시 눈을 가려버렸다.

고작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저렇게 애절한 목소리를 낸단 말인 가.

“나, 나중. 나중에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 했다. 그리곤 다시 손가락 틈으로 세드릭을 훔쳐보았다.

세드릭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미소짓고 있었다.

내 바보 같은 목소리가 마치 대단 한 고백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나중에……/

세드릭이 기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중에라도 불러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늘의 세드릭은 나만큼이나 이상

했다.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한낱 백작가 영애가 말을 놓겠다는 말에 저리 환하게 웃다니.

‘으…… 제발 진정 좀 하자.’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멋대로 뛰 는 심장이 빨리 가라앉기를 바라며.

세드릭에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 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크게 용기를 내곤, 얼굴을 가

리고 있던 손을 확 내려버렸다.

“이제야 봐주시네요.”

시선이 마주치자 세드릭이 또 미소 를 지었다. 희미하고 애처로운 미소 였다.

‘저런 표정은 정말로 반칙이잖아.’

순간 또 눈을 가려버릴 뻔했으나, 나는 꿋꿋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한심하게 허둥댈 수는 없었으니까.

으, 음.

나는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내 부름에 세드릭이 고개를 숙였 다. 마치 여왕에게 서임을 받는 기 사와 같은 모습으로.

“네, 레이디.”

“저를 책임지시겠다고 하셨나요?”

“예. 허락해주신다면, 부디.”

“그 말이 어떤 무게를 지닌 말인 지, 아시는 건가요?”

나는 최대한 차갑고 진지한 목소리 를 냈다.

어젯밤 일을 없던 일인 양 지워낼 수 없었다.

그러니 나와 세드릭의 관계는, 어 떤 형태로든 변해야만 했다.

끊어내거나, 혹은 나아가거나.

세드릭이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 았다. 점성을 가진 듯 진득한 시선 이었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아주, 잘 알 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시선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애써 아닌 척 더 욱 더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물론…… 그, 그런 일이 일 어났으니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드 신 것도 당연해요.”

‘그런 일’이라는 대목에서 내 얼굴 이 또 시뻘겋게 타올랐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첫키스를 했어.’

어린 시절, 나는 첫키스에 대해 수 없이 상상했었다. 다들 한 번쯤 그 랬듯이.

대부분 내 상상은 달빛 아래에서 눈이 마주치고, 수줍게 쪽- 입을 맞 춘 뒤, 화드득 떨어지는 수준에서 멈추었었다.

‘설마하니 한밤중의 궁전 테라스에 서,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눈 돌아가 게 잘생긴 남자와 그런, 그런……?

그런 식의 키스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또 어젯밤을 떠올리고 만 나는 질 끈 눈을 감았다.

‘상상이랑 너무 달랐어……-’

고작해야 키스 주제에.

전연령가 매체에서도 당당히 나오 는 스킨십 주제에, 그렇게 정숙하지

못한 행위라니……!

어느새 내 얼굴은 누가 불을 붙인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채 또 애써 차갑게 목소리를 가다듬 었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 어가야 할 문제가 있어요.”

“무엇입니까? 레이디.”

세드릭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야 고백하는 거지만, 전 어젯

밤 술에 취해 있었어요.”

세드릭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착잡해 졌다. 죄책감과 자기 혐오가 그의 얼굴에 어둡게 그늘을 드리웠다.

나는 민망함에 애써 고개를 돌리곤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취해 계셨죠.”

“전……!”

세드릭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 는 얼른 고개를 저어 그를 막았다.

“끝까지 들어 주세요. 제 말은, 전 하께서 어젯밤 일시적인 충동 때문 에 저를 붙잡으신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자 세드릭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저는, 저는…… 그렇게 파 렴치한 놈이 아닙니다.”

무너질 듯 착잡한 얼굴로 세드릭이 이어 말했다.

“저를 그런 자로 보셨다면, 그 또 한 제 잘못이니……/’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가 전하를 그런 사람으로 여긴 다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가 능성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는 거 죠.”

“이젯밤 일이…… 실수였을지도 모 른다는, 가능성 말입니까?”

세드릭이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상심한 세드릭의 얼굴을 보고 있자 니,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마음 같아 서는 ‘죄송해요, 실언했어요. 그냥 전하가 원하시는 대로 다 합시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물론, 이해합니다. 레이디.”

세드릭이 힘겹게 말했다.

“레이디께는 어젯밤의 일이 실수였 을지도 모르지요. 저에게는, 결코 그 렇지 않았습니다만……-”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세드릭 이 결심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디께 제 뜻을 강요할 수 없다 는 것, 잘 압니다. 책임지겠다는 건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중요한 것 은…… 레이디의 의사겠지요.”

내가 말하려던 건 이런 이야기는 아니 었다.

그냥 시간을 좀 가져 보자는 이야 기였다.

시간을 갖고, 스스로의 감정에 대

해 곰곰이 생각해보자고.

진짜 주인공이 나타난 순간, 엑스 트라로 전락하는 비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비참한 미래를 각오하고서라도 나는 세드릭의 현재 를 갖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몰랐다.

어떤 순간들은 설령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더없이 황홀할지 모르니까.

어떤 선택이 옳을지 고민해보기 위 해 잠시 시간을 가져 보자는 이야기 였는데……오

세드릭의 이야기는 어째 갈수록 이 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디. 제게 시간을 주십

시오.”

어라. 이건 내가 말하려던 것과 똑 같은 이야기다.

드디어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 가나 싶었더니, 세드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 어젯밤 일을 실수였다 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그러니……,”

이상하다.

내가 꺼내려던 이야기완 다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나 를 진득이 바라보던 세드릭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게 시간을 딱, 한 달만 주십시 오.”

“어, 어떤…… 시간을요?”

“그야 물론.”

세드릭이 조심스레 내 손등을 제 손바닥 위로 얹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디의 감정이 제게 기울 수 있

도록, 노력할 시간을요.”

손등으로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 얼굴이 또 한 번 화르륵 타올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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