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13화 (113/153)

〈114화〉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테라스 난간 밖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감각들이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내 어깨를 감싼 따스한 체온. 등 너머로 닿아오는 심장박동. 떨리는 세드릭의 숨소리와…… 숨 막히도록 짙은 체향.

나는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 다.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서투른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도망친다는 건, 내가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였으니 까.

‘안 돼.’

그럴 순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존

재한 적 없는 척 무시해야 했다. 여 태껏 무의식적으로 그래왔던 것처 럼.

나는 내 삶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이다.

하지만 세드릭을 사랑하는 순간, 그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엑스트라로 전락할 것이었다.

그의 옆에 설 주인공은 따로 있으 니까.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온 자신이 한심스러워 서.

그래도 아직은 수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샴페인을 마신 게 잘한 일 같았다. 술기운에 일어났던 일일 뿐 이라고 덮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모르는 척을 하자. 그게 맞다. 그 외엔 어떤 해 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드릭이 내 어깨를 더 세게 끌어 안았다.

“도망치는 거 맞잖습니까.”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세드릭이 한 번 더 속삭였다.

“……거짓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나치게 세게 깨문 것일까, 입속 에서 살짝 피 맛이 났다.

나는 나를 안은 세드릭의 팔을 밀

어내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니까, 놔 주세요. 전 하.”

“그러면?”

세드릭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이대로 저에게서 멀 어지실 겁니까?”

그렇다고 해야 했다.

많이 늦어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멀 어지는 게 맞았다.

설령 세드릭이 내게 마음 한 조각 을 주었다고 해도, 결국 머지않아 때가 되면 그 마음은 원래 주인에게 로 돌아갈 테니까.

주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애초부터 탐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니 지 금이라도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세드릭을 돌 아보았다.

‘말하자. 나와 당신 사이에서 뭔가

가 오간 것 같다면 전부 착각이라 고.’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 야 한다.

하지만 세드릭을 돌아본 순간, 내 결심은 한심하리만치 순식간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아.”

나는 멍청히 더듬거렸다.

마주친 세드릭의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훑었다. 내 얼굴에서 필사적으

로 거짓말의 기색을 찾아내려는 시 선이었다.

세드릭의 시선이 내 얼굴 한 부근 에서 멎었다.

“아리엘. 피가

나는 그제야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아까 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 러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입술로 손등을 가져갔 다.

“괜찮아요. 이건 그냥

그러나 세드릭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가락이 내 턱선을 더듬어 올라갔다. 피를 닦아주며 세드릭이 말했다.

“……그렇게 싫은 겁니까?”

깨질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세드릭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연약한

얼굴.

“이렇게, 필사적일 정도로…… 싫 으신 겁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

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

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세 드릭이 슬픈 표정을 짓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입술이 멋대로 달싹거렸다.

아니, 아니에요.”

갑자기 이 모든 상황에 환멸이 났 다.

‘내가 세드릭을 싫어하냐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세드릭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주인공, 엑스트라.

고작 그런 활자 속 세계의 관념들 때문에.

‘이곳은…… 현실.’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은 잉크와 종이로 만들어진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는 주인공도, 엑 스트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싫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은 게 아니에요. 제가 전하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게 아 니라……-”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 지.

나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결론 을 낼 수 없었다.

만약 내가 내 욕심껏 행동한다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 거지?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 다.

세드릭의 엄지가 깨물린 내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리엘.”

낮고 간절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만약 정말 싫으시다면…… 밀어내 십 시오.”

세드릭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위

에서 속살거렸다.

“하지만, 싫은 게 아니라면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가까워지는 세드릭은 꿈결처럼 아름 다웠다.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녹아내릴 듯한 타인의 온기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의 체향만큼이나 달 콤한 숨결이었다.

자정을 울리는 종소리가 뎅, 뎅 밤

하늘에 울려퍼졌다.

동시에 아름다운 불꽃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어느 축제 날 보았던 것처럼, 몹시 도 아름다운 불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감상하지 못하 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 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쏘 # 쏘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 다.

누군가 고무망치로 내 머리를 쾅쾅 두들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 그만해

나는 끄응 신음하며 도리질을 쳤 다.

하지만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미칠 지경이 었다.

도대체 누가 남의 머리를 이렇게 두들기는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번 쩍 눈을 떴다.

‘……아.’

내 방 천장이 보였다.

그제야 쿡쿡 쑤시는 두통과 함께 몇 가지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스무고개를 하듯 기억을 돌이 켜 보았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어제 술을 마셔서.

왜 마셨지?

황녀 전하의 생신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생신 연회엔 누구랑 같 이 갔었지?

‘세드릭 에반스.’

불현듯 떠오른 이름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 이름을 되새긴 순간 심장이 빠 르게 박동했다.

동시에 기묘하리만큼 둥둥 뜨는 기

분이 들었다. 침대 시트가 아니라 구름을 베고 누운 것 같았다.

‘뭐지?’

나는 심장 부근을 누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리는 거 지?

어젯밤의 기억 몇 장면이 또 새록 새록 떠올라 머리를 강타했다.

이베르 게임. 사역마들. 무도회와 샴페인. 그리고……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고 계세요!”

아래층으로부터 들려오는 건 리나 의 목소리였다.

‘누가 왔나?’

가게는 오늘까지 휴업이었다. 그렇 다면 고객이 아닌 손님이 찾아왔다 는 건데……오

나는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거울 속에는 그 럭저럭 봐 줄 만한 아가씨가 서 있

었다.

‘숙취에 끙끙 앓았는데 이 정도면 준수하지.’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나는, 실내 용 가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아래층에선 생각보다 많은 인기척 이 들렸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이 앞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레이디께서 깨어나신다면…… 이걸 대신 전해줘.”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었다.

‘이 목소리는……/

나는 덜컥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화드득 계단을 올라갔다.

‘세드릭이 왜 여기에?!’

심장이 또 쿵쿵 뛰어댔다.

나는 다시 한번, 슬립 위에 실내용 가운만 걸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가운이지, 평상복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친한 사람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가운만 걸치고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습으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립과 가운만 걸치고 세드릭 앞에 나선단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 랐다.

‘으으,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 야…… 일어나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허겁지겁 가운을 여미는데, 아래층 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리나의 목소리였다.

굉장히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여 태껏 리나에게선 들어본 적 없는 목 소리였다.

“아리엘 아가씨께서는 최소한 저녁

까지는 주무실 것 같습니다. 기다리 시지 않는 편이 나으시리라 생각합 니다, 공작 전하.”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저 목소리, 리나 맞아?

내가 아는 리나는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리나의 목소리는 타고 난 톤부터가 상냥하고 따뜻해서 손 님들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아래층에서 들리는 건 돌처럼 딱딱하고 매서운 목소리였 다.

뒤이어 세드릭의 목소리도 들렸다.

“……상관없어. 내일까지라도 기다 리겠다.”

“정말 내일까지 기다리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하. 아가씨께서는 어젯 밤 자정이 넘은 뒤에야 술에 만취해 서 몸도 가누지 못하시며 돌아오셨 으니까요.”

95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말입 니다.”

리나의 마지막 목소리엔 거의 음절 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도대체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고 있는 거지?

나는 황급히 손빗으로 머리를 빗으 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를 들은 건지 아래층의 대화 소리가 뚝 멈췄다.

"아가씨?”

리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게 달려왔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좀 더 휴식을 취하시지 않고요.”

리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이 리저리 살폈다.

역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리나였 다. 상냥하고 따뜻한.

“으응,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 아.”

내 말에 리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훈 장님 같았다.

“맞습니다. 손님이 계시지요.”

‘리, 리나 맞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나의 눈 치를 살폈다.

그때 리나 뒤에서 길다란 인영이 걸어 나왔다.

“……레이디.”

나는 덜컥 숨을 멈췄다.

세드릭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내

게로 걸어왔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마저 그림같이 완벽해 보였다. 분명 어제 나랑 술 은 똑같이 마셨을 텐데, 세드릭은 숙취란 걸 모르는 종족인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아침부터 찾아뵈어 서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 서.”

그 심각한 목소리에, 드디어 어젯 밤의 기억들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심야 무도회에서 함께 줌을 췄던 기억.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달싹이던 세드릭의 입술과, 곧장 테라스로 달 아나버렸던 나.

그리고, 그리고……오

“자, 잠깐!”

나는 세드릭을 향해 손바닥을 확 펼쳐 보였다.

“거기 잠깐 그대로 계세요!”

순식간에 얼굴이 불을 붙인 듯 화

끈거 렸다.

“거, 거기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마시고요!”

내 목소리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아리엘 님! 무슨 일이십니까!”

몰려온 기사들은 나와 세드릭의 대 치 상태를 보고 멍하니 눈을 끔뻑였 다.

세드릭이 놀란 듯, 당황한 듯, 슬

픈 듯 다채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레이디……?”

“잠시만요. 일단 가만히 계셔 보세 요!”

더 가까워지면 심장이 폭발해버릴 거다.

나는 후욱후욱 숨을 내쉬며 손바닥 을 더 크게 펼쳤다.

“한 발자국 더 물러서시고요.”

세드릭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0서리엘……?”

“잠깐! 제 이름도 부르지 마세요!”

설레게 하는 것들은 일단 모두 금 지. 전면 금지다!

세드릭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입을 다물면서도,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심장이 또 지끈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