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테라스 난간 밖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감각들이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내 어깨를 감싼 따스한 체온. 등 너머로 닿아오는 심장박동. 떨리는 세드릭의 숨소리와…… 숨 막히도록 짙은 체향.
나는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 다.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서투른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도망친다는 건, 내가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였으니 까.
‘안 돼.’
그럴 순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존
재한 적 없는 척 무시해야 했다. 여 태껏 무의식적으로 그래왔던 것처 럼.
나는 내 삶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이다.
하지만 세드릭을 사랑하는 순간, 그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엑스트라로 전락할 것이었다.
그의 옆에 설 주인공은 따로 있으 니까.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온 자신이 한심스러워 서.
그래도 아직은 수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샴페인을 마신 게 잘한 일 같았다. 술기운에 일어났던 일일 뿐 이라고 덮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모르는 척을 하자. 그게 맞다. 그 외엔 어떤 해 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드릭이 내 어깨를 더 세게 끌어 안았다.
“도망치는 거 맞잖습니까.”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세드릭이 한 번 더 속삭였다.
“……거짓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나치게 세게 깨문 것일까, 입속 에서 살짝 피 맛이 났다.
나는 나를 안은 세드릭의 팔을 밀
어내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니까, 놔 주세요. 전 하.”
“그러면?”
세드릭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이대로 저에게서 멀 어지실 겁니까?”
그렇다고 해야 했다.
많이 늦어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멀 어지는 게 맞았다.
설령 세드릭이 내게 마음 한 조각 을 주었다고 해도, 결국 머지않아 때가 되면 그 마음은 원래 주인에게 로 돌아갈 테니까.
주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애초부터 탐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니 지 금이라도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세드릭을 돌 아보았다.
‘말하자. 나와 당신 사이에서 뭔가
가 오간 것 같다면 전부 착각이라 고.’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 야 한다.
하지만 세드릭을 돌아본 순간, 내 결심은 한심하리만치 순식간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아.”
나는 멍청히 더듬거렸다.
마주친 세드릭의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훑었다. 내 얼굴에서 필사적으
로 거짓말의 기색을 찾아내려는 시 선이었다.
세드릭의 시선이 내 얼굴 한 부근 에서 멎었다.
“아리엘. 피가
나는 그제야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아까 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 러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입술로 손등을 가져갔 다.
“괜찮아요. 이건 그냥
애
그러나 세드릭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가락이 내 턱선을 더듬어 올라갔다. 피를 닦아주며 세드릭이 말했다.
“……그렇게 싫은 겁니까?”
깨질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세드릭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연약한
얼굴.
“이렇게, 필사적일 정도로…… 싫 으신 겁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
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
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세 드릭이 슬픈 표정을 짓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입술이 멋대로 달싹거렸다.
아니, 아니에요.”
갑자기 이 모든 상황에 환멸이 났 다.
‘내가 세드릭을 싫어하냐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세드릭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주인공, 엑스트라.
고작 그런 활자 속 세계의 관념들 때문에.
‘이곳은…… 현실.’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은 잉크와 종이로 만들어진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는 주인공도, 엑 스트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싫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은 게 아니에요. 제가 전하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게 아 니라……-”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 지.
나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결론 을 낼 수 없었다.
만약 내가 내 욕심껏 행동한다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 거지?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 다.
세드릭의 엄지가 깨물린 내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리엘.”
낮고 간절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만약 정말 싫으시다면…… 밀어내 십 시오.”
세드릭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위
에서 속살거렸다.
“하지만, 싫은 게 아니라면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가까워지는 세드릭은 꿈결처럼 아름 다웠다.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녹아내릴 듯한 타인의 온기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의 체향만큼이나 달 콤한 숨결이었다.
자정을 울리는 종소리가 뎅, 뎅 밤
하늘에 울려퍼졌다.
동시에 아름다운 불꽃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어느 축제 날 보았던 것처럼, 몹시 도 아름다운 불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감상하지 못하 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 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쏘 # 쏘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 다.
누군가 고무망치로 내 머리를 쾅쾅 두들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 그만해
나는 끄응 신음하며 도리질을 쳤 다.
하지만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미칠 지경이 었다.
도대체 누가 남의 머리를 이렇게 두들기는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번 쩍 눈을 떴다.
‘……아.’
내 방 천장이 보였다.
그제야 쿡쿡 쑤시는 두통과 함께 몇 가지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스무고개를 하듯 기억을 돌이 켜 보았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어제 술을 마셔서.
왜 마셨지?
황녀 전하의 생신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생신 연회엔 누구랑 같 이 갔었지?
‘세드릭 에반스.’
불현듯 떠오른 이름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 이름을 되새긴 순간 심장이 빠 르게 박동했다.
동시에 기묘하리만큼 둥둥 뜨는 기
분이 들었다. 침대 시트가 아니라 구름을 베고 누운 것 같았다.
‘뭐지?’
나는 심장 부근을 누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리는 거 지?
어젯밤의 기억 몇 장면이 또 새록 새록 떠올라 머리를 강타했다.
이베르 게임. 사역마들. 무도회와 샴페인. 그리고……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고 계세요!”
아래층으로부터 들려오는 건 리나 의 목소리였다.
‘누가 왔나?’
가게는 오늘까지 휴업이었다. 그렇 다면 고객이 아닌 손님이 찾아왔다 는 건데……오
나는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거울 속에는 그 럭저럭 봐 줄 만한 아가씨가 서 있
었다.
‘숙취에 끙끙 앓았는데 이 정도면 준수하지.’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나는, 실내 용 가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아래층에선 생각보다 많은 인기척 이 들렸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이 앞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레이디께서 깨어나신다면…… 이걸 대신 전해줘.”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었다.
‘이 목소리는……/
나는 덜컥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화드득 계단을 올라갔다.
‘세드릭이 왜 여기에?!’
심장이 또 쿵쿵 뛰어댔다.
나는 다시 한번, 슬립 위에 실내용 가운만 걸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가운이지, 평상복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친한 사람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가운만 걸치고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습으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립과 가운만 걸치고 세드릭 앞에 나선단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 랐다.
‘으으,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 야…… 일어나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허겁지겁 가운을 여미는데, 아래층 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리나의 목소리였다.
굉장히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여 태껏 리나에게선 들어본 적 없는 목 소리였다.
“아리엘 아가씨께서는 최소한 저녁
까지는 주무실 것 같습니다. 기다리 시지 않는 편이 나으시리라 생각합 니다, 공작 전하.”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저 목소리, 리나 맞아?
내가 아는 리나는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리나의 목소리는 타고 난 톤부터가 상냥하고 따뜻해서 손 님들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아래층에서 들리는 건 돌처럼 딱딱하고 매서운 목소리였 다.
뒤이어 세드릭의 목소리도 들렸다.
“……상관없어. 내일까지라도 기다 리겠다.”
“정말 내일까지 기다리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하. 아가씨께서는 어젯 밤 자정이 넘은 뒤에야 술에 만취해 서 몸도 가누지 못하시며 돌아오셨 으니까요.”
우 95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말입 니다.”
리나의 마지막 목소리엔 거의 음절 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도대체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고 있는 거지?
나는 황급히 손빗으로 머리를 빗으 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를 들은 건지 아래층의 대화 소리가 뚝 멈췄다.
"아가씨?”
리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게 달려왔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좀 더 휴식을 취하시지 않고요.”
리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이 리저리 살폈다.
역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리나였 다. 상냥하고 따뜻한.
“으응,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 아.”
내 말에 리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훈 장님 같았다.
“맞습니다. 손님이 계시지요.”
‘리, 리나 맞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나의 눈 치를 살폈다.
그때 리나 뒤에서 길다란 인영이 걸어 나왔다.
“……레이디.”
나는 덜컥 숨을 멈췄다.
세드릭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내
게로 걸어왔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마저 그림같이 완벽해 보였다. 분명 어제 나랑 술 은 똑같이 마셨을 텐데, 세드릭은 숙취란 걸 모르는 종족인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아침부터 찾아뵈어 서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 서.”
그 심각한 목소리에, 드디어 어젯 밤의 기억들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심야 무도회에서 함께 줌을 췄던 기억.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달싹이던 세드릭의 입술과, 곧장 테라스로 달 아나버렸던 나.
그리고, 그리고……오
“자, 잠깐!”
나는 세드릭을 향해 손바닥을 확 펼쳐 보였다.
“거기 잠깐 그대로 계세요!”
순식간에 얼굴이 불을 붙인 듯 화
끈거 렸다.
“거, 거기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마시고요!”
내 목소리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아리엘 님! 무슨 일이십니까!”
몰려온 기사들은 나와 세드릭의 대 치 상태를 보고 멍하니 눈을 끔뻑였 다.
세드릭이 놀란 듯, 당황한 듯, 슬
픈 듯 다채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레이디……?”
“잠시만요. 일단 가만히 계셔 보세 요!”
더 가까워지면 심장이 폭발해버릴 거다.
나는 후욱후욱 숨을 내쉬며 손바닥 을 더 크게 펼쳤다.
“한 발자국 더 물러서시고요.”
세드릭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0서리엘……?”
“잠깐! 제 이름도 부르지 마세요!”
설레게 하는 것들은 일단 모두 금 지. 전면 금지다!
세드릭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입을 다물면서도,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심장이 또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