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화〉
세드릭은 몇 번이나 술을 많이 마 시지 말라고 내게 언질을 주었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퍼마셨다가 취 해버린 걸 알면 잔소릴 하겠지.
‘그러니까 멀쩡한 척, 멀쩡한 척.’
나는 주문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시각은, 자정 무렵. 연회장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못해 뜨겁게 달 아오를 시간대였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건배 소 리가 들렸다. 취한 건 나뿐만이 아 니었다.
커튼 뒤에선 농밀하게 밀어를 나누 는 남녀가 보였다. 손을 잡고서 테 라스로 몰래 나가는 연인들도 한둘 이 아니었다.
‘음. 다들 뜨겁군, 뜨거워.’
헤헤. 좋을 때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레이디.”
그때,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정색했다.
설마 봤나?
옆을 돌아보자, 바로 옆에서 어떤 백작과 사업 관련 이야기를 나누던 세드릭이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우십니까? 열이 좀 있으신데. 바깥 공기를 쐬고 올까요?”
“에반스 전하. 말씀 중에 송구하오 나 무척 다급한 사안인지라……/’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지, 백 작.”
백작의 말을 차갑게 끊은 세드릭 이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백작은 풀죽은 얼굴로 세드릭에게 인사하곤 자리를 비켰다.
“실내 공기가 답답하진 않으십니 까?”
내 얼굴을 살피는 세드릭의 눈빛 에, 나는 얼른 멀쩡한 척 진지한 표 정을 지었다.
‘술 냄새는 안 나겠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 는데, 몇 시간 전 세드릭이 내게 했 던 말이 떠올랐다.
할 말이 있다고 오늘은 늦게까지 같 이 있어 달라 했었지.
“전혀요. 그나저나 전하. 제게 할 말 이 있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드릭이 몸 을 굳혔다.
“……네. 그랬지요.”
“무슨 이야기기에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시는 건지 궁금하네요. 이제 말 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내 물음에 세드릭이 시계를 바라보 았다.
그를 따라 흘긋 시계를 보니 열한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십 분만 더
세드릭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십 분만 더’ 인데요?”
세드릭이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더 니, 곧 녹을 듯한 미소를 걸쳤다.
“비밀입니다. 아직은.”
흥. 그놈의 비밀.
평소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 을 것이다.
세드릭이 ‘비밀’이라면서 내 복장 을 뒤집어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 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살짝 술에 취한 상 태였다. 평소처럼 넘어가고 싶지 않 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세드릭을 취조했 다.
“뭐예요, 전하. 순순히 털어놓으시 죠. 뭐가 ‘이십 분만 더’ 인가요?”
“레이디, 그게……,”
“지금은 제가 알면 안 되고, 이십 분 뒤엔 알아도 되는 이유가 뭔데 요? 궁금해요. 알려주시면 안 되나 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세드릭 앞으 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훌쩍 가까워진 세드릭이 곤혹스레 얼굴을 굳혔다.
‘어라. 가까이 다가가니까 당황하네.’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적으로 장 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네? 세드릭 에반스 공작 전하. 지 금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지진이 일어난 듯 세드릭의 눈동자 가 쉼 없이 떨렸다.
“그, 그게.”
심지어는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속으로 폭소를 삼켰다. 세드 릭 에반스가 얼굴 굳히고 말을 더듬
다니……오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 었다.
나는 장난스레 눈을 깜빡이며 재차 물었다.
“네에? 전하. 정말 궁금해서 그래 요.”
조금 더 높이 까치발을 들자, 세드 릭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무슨, 피부가.’
블러칠 한 것처럼 완벽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만져보고 싶어.’
손가락이 세드릭의 뺨과 서서히 가 까워 졌다.
그의 귓불 부근이 또 물감이 번진 듯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무척 귀 엽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세드릭이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미간을 좁히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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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혹시 취하셨습니까?”
윽. 들켰다.
나는 얼른 까치발을 풀고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이세요?”
“얼굴에 열이 오르신 이유가 혹 시……-”
“어머, 설마 제가 고작 와인 몇 잔 과 샴페인 한 잔 마시고 취했으려고 요.”
나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취해 놓고 안 취한 척하는 건 자 신 있었다. 영업맨의 필수 스킬. 살 롱과 무도회를 돌며 향수를 영업하 면서 익힌 능력이었다.
세드릭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조금 취하신 것 같은 데.”
의심 가득한 눈길이 내 얼굴을 훑 었다.
나는 얼른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전 지금 완벽히 이성적입니다만. 얼토당토않은 오해 접어 주시죠, 전하.”
“흐음……:
세드릭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때마침 하프의 선율이 바뀌 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 분위기도 뒤바뀌었다.
“이리 오시죠, 레이디 하렐.”
“어머, 기꺼이요.”
화려히 꾸민 남녀가 서로의 허리를 붙잡았다.
심야 무도회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이때다 싶어 세드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전하.”
“무도회 때마다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다면서요?”
세드릭이 살짝 눈을 감곤 웃었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그의 손끝이 내 손을 가볍게 감았 다.
그 감촉이 지나치게 기분 좋았다.
황홀한 하프와 비올라의 선율이 공
기 중에 녹아들었다.
빙그르르 턴을 돌 때마다, 샹들리 에 불빛이 세드릭의 얼굴 위로 반 짝였다.
우아한 불빛을 등진 세드릭은 넋 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긴 건 정말 반칙인 데……:’
내 희미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세 드릭이 목소리 낮춰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
아무것도요.”
나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세 드릭의 어깨에 살짝 이마를 기댔다.
맞닿은 어깨가 움찔 굳는 게 느껴 졌다.
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기분 좋아요.”
아름다운 음악과 허리를 감싼 체온.
그리고 무엇보다 폐부를 가득 채 울 듯 강렬한 세드릭의 체취.
이 체향은 중독적이었다. 나는 가 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침엽수 향 같으면서도 자극 적인 사향이 섞인…… 인공적이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향기였다.
“좋겠다. 평생 향수값 굳어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미 없는 소 릴 늘어놓았다.
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세드릭 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는 게 보 였다. 덕분에 나를 리드하는 그의 몸짓은 부드럽지 못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그새 실력이 녹스신 것 같네요.
전하.”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그저 나를 가 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순간 음악이 멎은 듯 사위가 고요 해졌다.
나는 못 박힌 듯 세드릭의 적안에 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라진 선율 대신 심장 소리가 귓
가에서 쿵쾅거렸다.
문득 나는 취기가 순식간에 가시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눈앞의 광경이 슬로우 모션 으로 재생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레이 디.”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입술을 깨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엘.”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오 자, 나는 빳빳이 몸을 굳혔다.
악단의 연주 소리는 더 이상 귓가 에 들려오지 않았다. 세드릭의 목소 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가득 채웠다.
한숨 섞인, 애타고 억눌린 목소리 가.
“자정까지는 참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말해야겠습니다.”
뭘?
무엇을?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 게 뛰었다.
왠지 다음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그가 무슨 말 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세드릭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눈은 내가 그렇듯 내게 못 박혀 움 직일 줄을 몰랐다.
심장이 이젠 브레이크 잃어버린 열 차처럼 마구잡이로 뛰어댔다.
마침내 세드릭이 다시금 입을 열었 다.
“제가
캐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았다. 다음 말을 기다 리는 몇 초가 지나치게 길었다.
마치 몇 분, 몇 시간이 흐른 듯 했 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떤 깨달음이 내 머리를 강타했 다.
‘ 아.’
내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세드릭의 말 한마디에 동요하고 있는 이유.
그가 부르는 내 이름 하나에 이렇 게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
‘사랑에 빠지는 향…… 그따위 것 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나는, 세드릭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드릭 에반스를……오
‘미쳤어.’
말도 안 돼.
나는 황급히 세드릭의 어깨를 밀 었다.
세드릭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 을 당한 것처럼 허무히 밀려났다.
“죄송, 죄송해요. 실례할게요.”
나는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도 알 지 못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리엘?”
세드릭이 멍하니 내 이름을 불렀 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게 뭐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쉴 새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서로를 끌 어안고 춤추던 사람들이 당황한 얼 굴로 지나갈 공간을 내주었다.
‘이게, 뭐야.’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만 가득했 다.
나는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며 연회장 문을 열었다. 테라스 너머의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여태껏 무시하려 애썼던 진실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들 었다.
세드릭에게 두근거릴 때마다 애써 호감의 묘약 탓을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 날들의 내가 참을 수 없이 애
처롭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기만하려 애썼던 수많 은 노력들. 전부 쓸모없는 짓이었 다.
왜냐하면, 나는 세드릭을 좋아하 고 있었으니까.
그때, 벌컥.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 다.
돌아볼 틈도 없이 누군가 내 어깨 를 끌어안았다.
“아리엘.”
숨 차오른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도망치지 마십시오.”
나는 뻣뻣이 굳어 옴짝달싹도 못 했다.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내 어깨를 더욱 단단히 옭아매었다.
“제발……,”
간절하고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